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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6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마조히즘의 어원으로 알려진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단순히 사디·마조적 성향을 탐구한 작품으로만 읽기에는 그 의미가 지나치게 축소된다. 이 작품은 성적 취향의 표면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이라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비대칭과 그것이 사회적 규범 속에서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드러낸다. 특히 작가는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며, 본능과 규범, 욕망과 도덕 사이의 긴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어린 시절 친척 어른의 가학적인 행위에서 쾌감을 느꼈던 제베린의 이야기다. 그는 인간보다 비너스 조각상에 더 강한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다가, 어느 날 반다를 만나 인간 여성에게 욕망을 품게 된다. 제베린은 그녀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의 반다는 사랑의 영원성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그녀와 언제나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다. 점점 가학적으로 변해 가는 그녀와, 그 안에서 쾌감을 발견하는 그인데......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리하르트 폰 그라프트에빙이 성 도착증을 분류하며 명명한 마조히즘의 어원이 된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서 등장하는 BDSM 적 장치는 단순한 성적 기호라기보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작동하는 지배와 복종의 구조를 극단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에 가깝다. 오히려 이 작품을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원형으로만 묶는 해석은, 15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지나치게 단순하고 낡은 독법에 머문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제목의 의미부터 짚어야 한다. 비너스(아프로디테)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할 때, 그 피가 바다에 떨어지며 탄생한 존재다. 그녀는 폭력과 파괴, 분리의 잔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피만으로 생성된 세계 질서의 균열을 품고 있다. 다시 말해 탄생 자체가 이미 혼란의 공식이며, 신화 속에서 그녀는 닿는 것마다 균열을 내고,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욕망을 증폭시키고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심지어 신들마저 이성적 판단을 잃게 만드는 존재, 그것이 비너스이다.
따라서 비너스는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끌어온 자연의 감정성, 신성한 충동, 제도 이전의 사랑을 상징한다. 여주인공 반다가 자유롭고 충동적이며 원초적이고, 책임이나 제도와 무관하게 사랑을 순전히 감정의 주권으로 판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이를 온전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이 곧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본능의 덩어리인 그녀가 당시 문명 속 권력자들의 힘을 드러내는 상징물인 모피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명을, 본능을 여러 규정으로 극단적으로 제한한 기독교 세계와 대치시킨다. 결혼과 일부일처제, 가부장적 질서, 자아의 절제, 영원성을 부여받은 사랑, 욕망은 무조건 통제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북방 세계의 문명이다. 주인공 제베린은 이처럼 자아를 세우고 유지하도록 훈육된 문명의 산물이며, 반다는 그러한 남성의 자아를 해체하는 감정의 신성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마주하는 순간, 문명과 신성, 질서와 감정, 제도와 자유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대표적인 장면은 이러한 장치들이 극단으로 밀려나는, 제베린이 반다의 노예가 되는 과정이다. 처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사랑을 싹 틔운다. 그러나 기독교 문명사회에 속한 제베린은 결혼과 사랑의 영원성을 그녀에게 요구하고, 자유로운 사랑관을 지닌 반다는 이를 거절한다. 그녀와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노예가 되기를 결심한다. 사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자연스럽게 을이 되는 순간은 반복되기 때문이다.
파탄으로 끝나는 연애의 전형성은 제베린의 노예화에서 드러난다. 서로 사랑해 시작한 관계에서, 더 많이 사랑한 쪽의 첫 양보는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결국 제베린의 자리에 서게 된다. 반면 반다는 처음부터 가학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녀의 가학성은 제베린의 자발적 복종 속에서 점차 활성화된다. 이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형성된 권력 구조의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반다는 연애 관계에서 의도치 않게 갑의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쪽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가학성은 선택된 성향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자리이다.
이 작품이 성적 취향에 국한된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이것이 크라프트에빙이 말한 페티시 소설이었다면 권력과 복종의 관계는 무한히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무한성을 단절한다. 단 한 명과의 관계 이후 제베린은 더 이상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저자의 취향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라, 문명적 사랑과 감정적 사랑이 충돌할 때 자아가 어떻게 붕괴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결말은 자유의 화신인 비너스가 문명의 갑옷인 모피를 입은 순간 이미 결정되어 있다. 제베린이 그녀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그녀 역시 문명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더 옳았는지, 누가 더 나은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의 관점에서 보면 반다는 신성한 감정을 잃고 무감각한 문명의 세계로 떨어졌고,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제베린은 더 이상 관계를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적 삶의 결핍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반다는 자연이자 비문명으로, 제베린은 문명이자 기독교 윤리의 대표로 마주한다. 이들의 충돌이 작품 속 모든 비극과 권력 문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이를 마조히즘의 어원을 제공한 성적 취향 소설로만 규정하기에는 시야가 지나치게 좁다. 오히려 사랑의 구조와 문명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때, 저자가 던진 진정한 메시지가 드러난다. 이 소설이 끝내 묻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인간이 감정과 질서 중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