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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남극』은 클레어 키건이 이십 대에 써 내려간, 말해지지 않은 상실과 연약한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총 열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이 책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 가족이기에 끝내 고통을 나누지 못해 연대가 약해진 채 감내해야 하는 삶, 심각한 남녀 불평등 속에서 수긍하고 살던 여성들의 반기,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 앞에서 무너지기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과연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이전, 그녀의 초기작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키건이 열어둔 행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남극』은 클레어 키건이 말해지지 않은 상실과 연약한 연대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 작품으로, 일상의 가장 낮은 온도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순간들을 담은 열다섯 편의 소설을 묶은 단편집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작품으로는 「물이 가장 깊은 곳」, 「진저 로저스의 설교」, 「폭풍」, 「노래하는 계산원」, 「화상」, 「자매」, 「불타는 야자수」, 「여권 수프」가 있으며, 남녀 간의 관계를 정밀하게 들여다본 작품으로는 「남극」, 「키 큰 풀숲의 사랑」, 「어디 한 번 타봐」, 「남자와 여자」, 「겨울 향기」,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가 있다.
클레어 키건의 데뷔작 『남극』은 가족, 연인, 이웃 사이에서 쉽게 말하지 못한 감정과 선택의 여운을 간결한 문장으로 포착한다. 극적인 사건보다 침묵과 여백에 집중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인물들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차분하지만 단단한 이야기들이 모여, 키건 특유의 절제된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 이후 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정 부분을 조명하여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남극』은 성적인 차별 속에서 투쟁하는 여성의 내면 온도, 결혼한 여성의 욕망이 얼어붙어 있는 상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실의 아픔이기에 세상 앞에서도 투명해지는 영하권의 감정 등, 생존과 욕망의 온도가 뒤틀린 지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제목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감정의 단어를 버리고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그 온도를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달한다. 단 한 작품도 등수로 매길 수 없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몇 편을 조금 더 깊게 살펴보려 한다.
가장 먼저 「진저 로저스의 설교」이다. 제목의 진저 로저스는 늘 우아하게 웃으며 남자와 똑같은 춤을 추지만 뒤로 춰야 하기에 더 불리한 조건을 말하지 않고 견딘 뮤지컬 배우이다. 사실 제목과 내용의 표면만 놓고 보면 수긍보다는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한 단계씩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주인공들의 내면이 제목에 그대로 투영된 것을 알 수 있다. 벌목꾼 짐을 집에 들여 가족처럼 지내고 엄마는 춤을 치료, 삶의 박자, 세상과 맞추는 법이라고 말하며 겉보기에 건강한 가정으로 연출된다.
그러나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이 언제나 그렇듯 이 작품의 핵심은 벌어진 사건보다 말해지지 않음이 포인트이다. 딸이 짐의 침대로 들어간 이유, 그 밤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이 왜 다음 날 자살했는지 이런 주요 사건의 이유와 과정은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독자를 사건의 현장에 무자비하게 던져놓고 작가는 입을 닫아버린 케이스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가 되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해부하는 의사가 되라는 듯이. 덕분에 독자는 선 당황, 후 감탄을 하게 된다.
결국 독자는 모든 사건이 끝난 뒤 이 가족이 추는 춤이 회복이 아니라 덮기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족처럼 지내던 짐이 죽은 뒤, 이들은 춤을 춘다.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 장면은 일반적인 독서 경험 속에서는 쉽게 수긍되지 않는다. 보통이라면 울며 무너지거나, 죄책감을 떠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건이 남긴 행간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감정을 말 대신 몸으로 흘려보내고 사건을 정리하지 않은 채 삶의 다음 박자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저 로저스와 이 가족을 연결할 수 있다. 불리한 조건과 힘든 상황을 말하지 않고 견딘 인물인 그녀처럼, 이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확한 박자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제목은 설명이 아니라 불편한 겹침에 가깝다. 가족이 겪은 충격은 깊숙이 묻힌 채, 잘 살아가는 리듬 속으로 흘러간다. 춤을 추고, 삶은 계속되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간다. 제목의 진저 로저스처럼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박자를 어기지 않은 채 견디는 쪽을 선택한 여성의 몸처럼.
다음으로 「화상」이다. 이는 실질적인 화상이라기보다 심리적 화상에 가깝다. 전 부인의 아이들에 대한 학대를 견디지 못해 이혼한 남자는 새로운 아내를 맞아, 과거 전 부인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온다. 상처가 아물기보다는 매일이 불안의 연속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세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새로운 아내는 아내대로 각자의 화상 속에서 하루를 견디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 후 돌아온 남편은 온 가족이 주방에 모여 겁에 질린 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바퀴벌레를 죽이고 있는 장면과 마주하고, 곧 그들 사이에 합류한다.
이 장면은 상당히 의아하고 기이하게 보이지만, 여기에서 바퀴벌레는 가족이 공유하고 있는 과거의 아픔을 물리적인 형상으로 대치한 존재다. 터질까 두려워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것들이 숨겨진 공간이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서 집단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아픔에 갇혀 있던 이 가족이 처음으로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같은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최초의 순간인 셈이다. 모든 분노를 쏟아낸 가족은 마침내 하나가 되고, 마치 이제야 서로의 화상을 치유할 준비가 된 듯이.
『남극』에서 클레어 키건은 말해지지 않은 상실과 연약한 연대를 열다섯 개의 경로로 보여준다. 이 단편들의 공통점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삼켜버린 순간들이며, 각 작품이 다루는 것은 사건의 전개나 결말이 아니라 기준선이 무너진 이후의 상태라는 점이다. 키건은 이를 관찰자 시점과 결핍의 구조, 인물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감정적 거리감으로 포착한다. 세계적인 작가의 출발점에 놓인 작품이지만, 여기에는 신인의 흔들림이나 과잉이 없다. 『남극』은 설명을 거부한 채, 끝내 식지 않는 감정의 온도를 독자에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