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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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나는 2021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이란 타이틀에 혹하지 않았다. 아마 전쟁과 관련된 소설이 아니라면 타이틀 때문에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상흔을 담은 소설이란 이야기에 혹했지만 그렇다고 큰 기대치를 둔 것은 아니었다. 만나본 적 없는 작가였고 일단 전쟁에 대한 소설은 우리나라 작가들 또한 엄청난 내공으로 압도하고도 남으니 굳이 외국 작가의 전쟁 소설에 혹할 리가 없었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읽어내려간 소설은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는 느낌과는 또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읽게 되어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근거려 하는 나를 발견하곤 읽던 책장을 덮어 마음을 다스려야 했을 정도로 문장은 부드럽지만 그 어떤 문장보다 강하고도 강력한 느낌을 던져줬던 것 같다.

강인한 근육을 가졌으며 그 어떤 청년보다 아름다움을 발산하던 '알파 니아이'는 어머니를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자신을 보듬어준 친구 '마뎀바 디옵'이 전장에 나가기를 원했기에 친구를 따라 함께 전장에 따라나선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알지만 다른 이들처럼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노인인 아버지나 이복형제들이지만 사이가 좋았던 형들, 친 어머니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아내인 여러 명의 어머니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은 니아이를 마뎀바로 향하게 하였고 그렇게 친구이자 형제처럼 자란 두 사람은 전쟁터에서도 늘 함께했다. 하지만 건장한 자신의 신체가, 친구보다 더 아름답던 자신의 얼굴이, 두려움을 모르던 자신의 용맹이 결국은 친구인 마뎀바를 맨 앞으로 이끌었고 그랬기에 죽은척하던 적군에게 배가 갈리며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니아이의 비로소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분노를 느끼며 복수를 시작한다. 집요하고 치밀한 움직임으로 상대방의 팔을 잘라 진지로 가지고 돌아오는 횟수가 많아지는 니아이의 행동에 동료들은 세 번까지는 영웅처럼 대해주었지만 그 이상이 되면서 전에 보지 못한 그의 광기를 보기 시작한다.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내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고통 속에서 적군이 죽어가기를, 그리고 그의 팔을 전리품처럼 잘라 썩지 않게 보관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누군가를 위할 명분 따위는 그저 입에 발린 말처럼 피부에 전혀 와닿지 않는다.

가족들과 밭일을 하고 사냥을 하며 우정을 같이 한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구애에도 오랫동안 마음을 내어주지 않던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젊음, 사라져버린 어머니를 향한 안타까움, 아버지에 대한 연민 등 다양하며 복잡하고 때론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있는 날들도 있지만 그것이 자신이며 인생이라 깨닫는 지극히 독립적인 개인이 전쟁을 만났을 때 어떻게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내내 서글픔과 분노, 안타까움을 넘어선 아픔을 느낄 수 있다. 평범했던 한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을 잃고 망가져가는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결국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변해가는 모습을 끔찍한데도 문장으로는 덤덤하게 써 내려가는 모습에서 실로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들의 전쟁사를 다 알지 못한다 해도 그 어떤 전쟁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엔 모든 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자신이 전쟁광이 아니라면 말이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상실감과 슬픔에 참 괜찮은 소설을 읽었구나 싶다. 그리고 소설을 원서의 느낌 그대로 전달해 준 번역 또한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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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아프기 시작하면 이 책 - 통증 없는 무릎 사용.유지.보수 완전 매뉴얼
김유수 지음 / 길벗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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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에 퇴행성 관절염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 몇 년 전에 이미 무릎에 물이 차서 구부리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경험했지만 한동안 고생한 후에 통증이 사라져 괜찮아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무릎이 부었던 것이 전초 증상이었고 제대로 치유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퇴행성 관절염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몇 년 만 더 일찍 알게 되었더라면 지금 당장 아프지 않아 다행이란 위험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읽는 내내 아쉬운 마음이 더 컸던 것은 아직 인공 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무릎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기에 더 나이가 들면 인공관절을 해야 할지도 모를 불안에 일찍이 노출되어 있었던 탓과 아팠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걷기 힘들 정도로 무릎이 아파 정형외과에 방문했을 당시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지는 않았지만 운동광일 정도로 과도한 운동을 하지도 않았기에 의구심이 들었는데 워낙에 다른 사람보다 관절연골 상태가 좋지 않은, 말하자면 선천적으로 염증이 잘 생길 수밖에 없는 관절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진단이었는데 그로 이해 한동안 주기적인 도수 치료를 받았지만 늘 예약이 꽉 찰 정도로 인기 있는 도수치료를 주기적으로 예약한다는 것과 금액, 갑자기 생긴 일정으로 예약을 변경해야 할 때의 번거로움 등이 결합되어 끈기 있게 이어나가지 못했고 이후엔 전보다 통증이 심하지 않아 나름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았다고만 생각했었다.

연골은 한번 나빠지면 재생이 불가능해 가지고 있는 것을 되도록 잘 써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도 나온다. 일단 붓고 통증이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치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졌다가 조금만 괜찮아져도 전처럼 몸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생각해 다시금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일이 많고 그렇게 가속화가 붙어 망가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안 좋아지는 것이 무릎이라 나이가 먹어 생기는 질병이란 생각 대신 젊은 사람들에게도 흔히 일어나는 질병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무릎 아프기 시작하면 이 책>은 무릎의 구조부터 그림을 통해 각 명칭과 하는 일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배가 아픈데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몰라 여기저기 진찰해야 하는 것과 달리 무릎은 통증이 나타난 위치만 잘 짚어도 어디가 문제여서 통증이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무릎 앞쪽과 뒤쪽이 아팠던 내 경우를 들어 확인해 보니 정형외과에서 진단받았을 때와 같은 소견이라 이 부분을 어떻게 관리해 주면 좋을지, 어떤 자세가 좋지 않은지 등등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어 도움이 됐다. 그리고 도수치료할 때 실제로 무릎에 도움이 되는 근력 키우기 동작이 그림으로 쉽게 설명되어 있어 지금 당장 병원을 찾지는 않았지만 통증이 있거나 나와 같이 병력이 있어 무릎 염려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릎 예방책을 통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무릎이 아팠던 것이 한두해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기에 관련된 책을 보긴 했었지만 이 책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책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의사 선생님이 앞에서 조곤조곤 설명해 주시는 것처럼 읽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수술을 권하는 병원도 많아 무릎이 아파 병원에 방문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많기에 병원 진료 전에 미리 읽은 후 진료를 받는다면 당황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안을 미리 생각해 둘 수 있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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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목욕탕
마쓰오 유미 지음, 이수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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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의 리오는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3년 전 아버지까지 여의면서 가장이 되었다.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사회 초년생이 된 시점에서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여섯 살 어린 동생 사오를 부양하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최근 회사가 기업난을 겪으며 언제고 해고될지 모를 위기에 처해있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을 리오는 다가온 어머니 기일을 맞아 성묘에 나섰다가 '기도 법률 사무소' 조수인 구라이시를 만나게 되고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이 남긴 유산에 관한 문제란 명목하에 기도 법률 사무소를 찾게 된다.

리오가 모르는 어머니의 가족들, 어릴 적 리오의 할머니가 몸이 아파 집을 자주 비우게 되자 리오의 할아버지는 리오의 어머니를 애가 없던 이웃집에 맡기게 되었고 그새 정이 들어버린 부부는 리오의 어머니를 양녀로 달라는 부탁을 하여 그렇게 리오의 어머니는 이웃집 부부의 양녀로 입적하게 되지만 혹여나 아이를 뺏길까 두려워진 부부는 야반도주를 하며 종적을 감춰버린다. 그렇게 헤어진 리오의 어머니와 삼촌, 워낙 리오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 벌어진 일이라 리오의 어머니는 가족의 존재에 대해 몰랐지만 그동안에도 삼촌은 리오의 어머니를 수소문하며 찾아 나서게 되지만 찾았을 때는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삼촌마저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가족이 없던 삼촌이 운영하던 행운 목욕탕을 리오와 사오가 도맡게 된다.

직장의 경영난, 동생과 살던 집 주인이 바뀌며 집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될 이유 등 여러 가지가 겹치며 리오와 사오는 삼촌이 경영하던 행운 목욕탕에 보금자리를 틀게 되고 삼촌의 유언대로 목욕탕을 관리하는 외국인 남매 글렌과 엘렌을 그대로 고용하고 다니던 회사는 그만두는 대신 외주 형태로 번역 일을 가져와 오전에 일을 하고 오후에는 목욕탕을 관리하는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그렇게 행운 목욕탕 카운트에 앉아 동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고민을 들어주는 등 어느새 동네 분들과 조금씩 안면을 트게 된 리오, 직원인 글렌, 엘렌과는 좀처럼 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리오와 사오 자매는 그곳에서의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간다. 그러던 중 목욕탕을 찾던 단골분이 영업이 끝나고 시계를 찾으러 다시 목욕탕을 들렀다가 삼촌의 목소리가 욕탕에서 들렸다는 말을 하며 잔잔하게 흘러가던 소설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를 보인다.

일단 '수상'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이라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행복 목욕탕'이란 영화가 기억에 남았기에 소설을 읽으며 영화 속 목욕탕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어떤 수상함을 선사해 줄지 몹시도 궁금해졌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라 그대로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여러 편의 소설을 썼지만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마쓰오 유미' 작가는 일반적이지 않은 엉뚱한 구도를 선보여 왠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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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 - 지하철 앤솔로지
전건우 외 지음 / 들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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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님들의 단편 소설이라 흥미가, 그에 더해 지하철 앤솔로지라 더욱 기대되었던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는 여섯 명의 작가의 일곱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추리나 스릴러, 괴담이나 좀비 장르에서 두각을 보이시는 작가님들이기에 당연히 이번 앤솔로지도 그런 이야기일 거란 예상을 했지만 처음 등장하는 전건우 작가님의 <호소풍생>은 괴담이 아닌 영화 '품행제로'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라 의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얽히고설킨 지하철 노선도만큼 다양한 지하철 이야기, 공항철도를 시작으로 2호선, 6호선, 4호선, 5호선, 1호선, 3호선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그 속에서는 조금 황당하게 여겨져 혹시 전철 안에서 겪은 한낮의 꿈이 아닐까 싶은 이야기부터 작가님 이름을 보자마자 혹시나 했던 좀비의 출몰 이야기, 작가지만 이렇다 할 소설을 내놓지 못한 여주인공과 고시생인 남자 주인공의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운 전철 로맨스, 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여자를 사랑해 수난을 겪게 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 납량특집으로 폐쇄된 지하철을 탄 VJ 남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흘러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는 이야기,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주인공이 되돌아가 인생 역전을 하고 싶었던 순간으로 죽을 때마다 되돌아가는 이야기, 시골을 떠나 서울에 보금자리를 틀었지만 이렇다 할 직장은커녕 사기를 맞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서울 생활을 비관하며 아들과 자살하려던 아버지를 기억에 두고 살아난 남주인공의 이야기.

뻔한 이야기가 등장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같은 주제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는 뻔한 이야기를 한두 편쯤은 만나게 되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며 읽게 되는 것이 사실인데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는 뻔하지 않게 흘러가는 구도여서 더 흥미진진하게 읽혔던 것 같다.

평소 지하철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젊은 시절에도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직장보다는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을 선호했고 아무래도 땅밑으로 지나가는 게 께름직해 지하철 타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는 편인데 앉을 자리 없이 서서 가야 하는 불편함과 눈 둘 데 없는 난감함에 핸드폰만 마냥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 자리가 날라치면 밀치고 앉는 이의 무례함, 정치 이야기로 목소리 높이는 어르신들, 물건 파는 상인들, 판매행위를 금지하는 역장의 방송, 덩치 큰 이로 인해 침범된 자리... 나에게는 버스보다 지하철을 타며 겪은 불쾌감이나 난감함이 더 컸기에 지하철에 관한 기억이 좋지 않은데 그 속에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음에 즐거운 시간이었고 다음에 지하철을 타게 되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시도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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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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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옛날이었다면 외관상 보이는 단독주택이 으리으리해 보였겠지만 세월이 흘러 무너지지 않으면 다행히 돼버린 단독주택에 서주는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여든이 넘은 할머니의 온갖 욕을 받으면서도 집안일은 물론 세를 받아 생활을 꾸려가는 할머니의 세입자들 관리도 도맡는 서주는 할머니의 개망나니 아들 효섭보다 훨씬 든든한 존재이다.

빈방들을 세를 놔서 살림을 꾸려가고 있지만 오래된 집이 그렇듯 인테리어는 물론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대폭적인 금액을 제시해도 좀처럼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던 어느 날 서주는 낯선 이가 양푼에 쓰레기라고 봐도 무방할 음식을 꾸역꾸역 먹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서주를 향해 음식을 남기면 지옥에서 남긴 음식을 다 먹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찰진 말들을 듣는 서주는 뒤늦게 할머니가 남아도는 빈방들을 지옥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언젠가 들었던 온갖 지옥썰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서주, 거짓말쟁이의 혀 위에서 농사짓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차가운 눈을 삼켜내는 지옥에서 차가움에 목이 매여 나오는 눈물이 다시 눈이 되어 끝날 것 같지 않은 모습을 보기도 하고 불구덩이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등에 칼과 낫이 꽂혀 도미노처럼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은 덤이라고 할까.

배려라고는 없어 보이는 찰진 할머니의 걸쭉한 말들 속에서도 밤에는 아르바이트하고 낮에는 공부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서주에게 어느 날부터 할머니의 작은 아들 효섭이 그녀를 찾는듯한 목격자의 증언을 듣게 되고 절대 할머니가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상냥함을 발하는 누군가가 집안에 있다는 설정도 이 소설이 어디로 튈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한다.

'리러하'라는 이름 때문에 중국이나 대만 작가의 소설인가 했더랬다. 얼핏 본 책 소개에서 K-스토리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어떻게 한국인이 아닌 작가가 수상되었을까 궁금증을 안고 지나쳤다가 지옥과 계약했다는 참신한 소재와 영화 <신과 함께> 속에서 등장하던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오버랩되어 너무 생생하게 다가오는 까닭에 이 작가의 정체가 궁금해 작가 소개를 들췄다가 예명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리러하'라는, 늑골, 폐, 심장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을 예명으로 정했다는 소개에서 소설만큼이나 독특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생생하게 펼쳐지는 지옥 앞에서 글자 그대로 보아도 섬뜩하고 기괴하며 인상 찌푸려지는 더러움에 곤역스러움이 마구 밀려오면서도 그 와중에 서주에게 잘해주는 악마의 존재와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할머니의 작은 아들의 등장,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꿋꿋한 서주의 모습은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이 소설을 더욱 흥미롭게 더듬어가게 한다. 할머니의 찰진 말들도 한몫하지만 빈방에서 펼쳐지는 지옥도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머릿속에 영상이 그려질 정도라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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