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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평점 :
지금이 옛날이었다면 외관상 보이는 단독주택이 으리으리해 보였겠지만 세월이 흘러 무너지지 않으면 다행히 돼버린 단독주택에 서주는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여든이 넘은 할머니의 온갖 욕을 받으면서도 집안일은 물론 세를 받아 생활을 꾸려가는 할머니의 세입자들 관리도 도맡는 서주는 할머니의 개망나니 아들 효섭보다 훨씬 든든한 존재이다.
빈방들을 세를 놔서 살림을 꾸려가고 있지만 오래된 집이 그렇듯 인테리어는 물론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대폭적인 금액을 제시해도 좀처럼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던 어느 날 서주는 낯선 이가 양푼에 쓰레기라고 봐도 무방할 음식을 꾸역꾸역 먹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서주를 향해 음식을 남기면 지옥에서 남긴 음식을 다 먹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찰진 말들을 듣는 서주는 뒤늦게 할머니가 남아도는 빈방들을 지옥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언젠가 들었던 온갖 지옥썰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서주, 거짓말쟁이의 혀 위에서 농사짓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차가운 눈을 삼켜내는 지옥에서 차가움에 목이 매여 나오는 눈물이 다시 눈이 되어 끝날 것 같지 않은 모습을 보기도 하고 불구덩이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등에 칼과 낫이 꽂혀 도미노처럼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은 덤이라고 할까.
배려라고는 없어 보이는 찰진 할머니의 걸쭉한 말들 속에서도 밤에는 아르바이트하고 낮에는 공부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서주에게 어느 날부터 할머니의 작은 아들 효섭이 그녀를 찾는듯한 목격자의 증언을 듣게 되고 절대 할머니가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상냥함을 발하는 누군가가 집안에 있다는 설정도 이 소설이 어디로 튈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한다.
'리러하'라는 이름 때문에 중국이나 대만 작가의 소설인가 했더랬다. 얼핏 본 책 소개에서 K-스토리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어떻게 한국인이 아닌 작가가 수상되었을까 궁금증을 안고 지나쳤다가 지옥과 계약했다는 참신한 소재와 영화 <신과 함께> 속에서 등장하던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오버랩되어 너무 생생하게 다가오는 까닭에 이 작가의 정체가 궁금해 작가 소개를 들췄다가 예명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리러하'라는, 늑골, 폐, 심장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을 예명으로 정했다는 소개에서 소설만큼이나 독특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생생하게 펼쳐지는 지옥 앞에서 글자 그대로 보아도 섬뜩하고 기괴하며 인상 찌푸려지는 더러움에 곤역스러움이 마구 밀려오면서도 그 와중에 서주에게 잘해주는 악마의 존재와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할머니의 작은 아들의 등장,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꿋꿋한 서주의 모습은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이 소설을 더욱 흥미롭게 더듬어가게 한다. 할머니의 찰진 말들도 한몫하지만 빈방에서 펼쳐지는 지옥도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머릿속에 영상이 그려질 정도라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