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7월 22일 

 오늘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입니다. 부제가 폭력으로 다스려지는 세계입니다. 아마도 근대이후 세상은 도덕적 선을 이상으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익/소유등)과 폭력성하에 사회와 국가를 설계하고 정치하는 세계가 형성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선한 존재인지 악함을 타고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가 이상적이라면 근대이후는 아주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베버는 독일사람이고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반시대의 사람입니다. 독일의 역사가 그 당시에 통일과 급속한 발전. 그리고 2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파시즘으로 흘러가죠. 아마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격정적인 근.현대사를 갖는 국가일 겁니다. 

베버가 말하는 정치는 '정치적 조직체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한정해서 사용합니다. 제도적 장치일 뿐입니다. 정치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어떤 내용을 갖고 잇는 것이 아닙니다. 마키아벨리에서 시작된 정치의 탈가치화, 탈도덕화가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의 가치와 윤리성을 주장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또한, 국가 개념도 정서적인 것, 도덕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법적 권리와 물리력이 어떤 범위에서 행사되고 있는지를 집중했습니다. 베버에 있어서 정치와 국가는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입니다. 그리고 국가가 물리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봅니다. 베버의 사상은 그만의 독창적 주장은 아니고요. 그 원천은 홉스의 사상이 있다고 합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보았고 그것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서 공권력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뭐랄까? 베버는 정치가 물리력(폭력)과 떨어질 수 없는 한 배를 타고 있음을 직시하였습니다. 그 근저에 도덕/선/가치와 같은 고상한 이상들이 있지 않아 한편으로는 불편하지만(정의. 봉사, 선과 같은 고상한 이상이 존재하지 않으니깐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과 그 작동원리를 현실적으로 직시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베버가 폭력적인 국가.정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물리력이라는 그 현실을 직시하고 물리력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아직 소양이 많이 부족하다보니 '이건 아닌데'라는 반대/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렇구나'하면서 따라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웬지 정치라하면 보다 근사하고 고상한 이상(선,도덕,봉사 등)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베버는 그렇지 않네요. 요즘의 우리사회를 보면 정치란 행복/선을 추구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수단일뿐이라는 것을 알겠는데요. 그런데 그래도 뭔가 아쉽습니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정치가 폭력적인 자연상태를 보다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뿐이라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긴하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보다 근사한 이상(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챕터를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옮겨 놓습니다. 베버의 말입니다.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희망의 좌절조차 견디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아직 가능한 것마저도 달성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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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7월 21일 

오늘은 몽테스키외입니다. 이런 류의 책의 장점은 많이 듣지는 못한다고 해도 한번쯤은 들어본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내용은 몰라도 이름은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사람입니다. 그리스,이태리,영국을 거쳐서 프랑스입니다. 서양유럽의 철학 발전의 순서인 것 같습니다. 18세기에 드디어 프랑스에서도 절대군주시대를 뛰어넘어 계몽주의의 시대로 진입합니다. 

몽테스키외의 연구대상은 '사회를 규율하는 질서이자 궁극적인 규범으로서의 법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그는 '법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세가지로 보았는데 그것은 자연법, 국민의 정신, 정체의 원리입니다. 

1) 자연법은 인간의 생물적 본능과 사회적 본성을 탐구하는 것으로 로크의 자연법과는 다릅니다. 로크는 사람이 사회를 만들기 이전부터 재산(소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설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사람은 누구나 사회를 이루고 살고자 하는 욕망, 즉 상호결합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의 생물적 본능과 사회적 본성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2) 국민의 정신은 말그대로 정신이고요. 3) 정체(政體)의 원리는  각 정체를 움직이는 사람의 정념(passion)으로 몽테스키외는 각각의 정체를 이루는 핵심적인 것이 제도적인 장치가 아니라 정념이라고 보았습니다.(정체는 공화정체, 군주 정체, 전제 정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화정체에는 덕성이, 군주정체에서는 명예가, 전제정체에서는 공포가 필요합니다)  

몽테스키외는 법과 풍토의 관계, 국민의 정신 같은 것을 연구하고 제도적 장치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풍토와 민족을 고려하지 않고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기는 보편적인 이성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정체의 원리에서 그 핵심을 인간의 정념으로 본 것을 보면 몽테스키외는 보편적 이상주의가 아닌 인류학적 상대주의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이 점에서 저자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소개하면서 부제를 '이성주의에 대한 희미한 저항'이라고 달았는지 약간은 알 듯합니다.)

몽테스키외를 통해 근대 정치의 기본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작가는 소개합니다. 근대 정치의 원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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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20일 

여러 책의 정수를 소개하는 이런 류의 책의 즐거움은 읽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그나마 가볍게 읽을 수 있고 그리고 한권의 책으로 여러권의 책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장점(?)입니다. 수박겉핧기.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약간은 아느체할 수 있는..... 

오늘은 존 로크의 <통치론>입니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사회를 해석하고 통치이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로크의 <통치론>은 영국의 역사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명예혁명의 시기의 정치적,사회적 환경과 맞물려 있고요 반왕당파에 해당되는 신생 부르조아계급을 대변하는 사상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로크는 인간을 합리적 인간으로 보았는데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는 계산능력을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합리성과 로크의 합리성이 차이가 보입니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정확성을 추구한다면 로크는 이익을 따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익이라는 합리성은 자본주의로 연결이 되겠네요. 이 시대에 많은 사유가 발생한 것 만큼 또한 합리성의 의미도 그 사유만큼 그 의미를 달리 하는 것 같습니다.   

로크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자유상태를 유지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통치이념. 기반이 로크가 추구한 이념이고요. 그 이념은 현대 자본주의체체, 사회/국가의 존재목적이 될 겁니다. 그리고, 로크도 이런 인간의 권리는 신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간의 계약(동의)에 의한 것임을 주장합니다. 

<통치론>을 읽을 때는 계약론과 저항권에 유념하고요. 자연법사상과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사상을 로크 사상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부르조아 사회를 옹호하는 텍스트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크는 경제적 재화(재산)으로 인간을 판단했습니다. 이것을 갖고 있어야 자유와 평등도 요구할 수 있는 주체가 됩니다. 이점을 유념하시면서 그 이후의 사유/이념의 흐름을 읽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잡담.

이 챕터에서 잠시 진화와 사회진화론이 나오는데 쾌 흥미있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진화는 경쟁이 아니라는 것(다윈은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답니다.) 적자생존과 경쟁을 결합시킨 사회진화론의 부적절성. 사회진화론이 어떻게 한 사람을, 사회를, 국가를 파괴시킬 수 있는지 윤치호라는 친일파를 통해 설명하는데 꽤 재밌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tip하나 진화론은 '더 뛰어난'종의 생존이 아니라 '우연히'환경에 적응한 종이 살아 남는다 라고 합니다. 경쟁에 의한 적자생존이 아니라 적응에 따른 생존이라는 얘기겠죠.  

그리고,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것. 다양성의 증가라는 것. 기억하세요. 그럼 오늘 우리의 사회는 선진화를 위해 눈도 막고, 귀도 막고, 입도 막고 무조건 뛰어가라고 하는데, ' 모두 한방향으로 일렬종대 앞으로 갓'인데, 그러면 우리는 진화가 아니라 진보하기 위해 다양성도 무시하고 그냥 마냥 전진 앞으로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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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19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입니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웠던 데카르트입니다. 존 로크의 '경험론'과 대비하여 대륙의 합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딱 이정도죠. 고등학교 교육특성상 자세한 내용은 안되고 간단 명료한 몇가지만 기억에 남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은 확실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학과학을 통해 세계를 다시 해석하고 또 사유의 방식도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데카르트도 철저하게 과학/수학에 집중했고 또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책에서 결론만을 읽고 무엇을 취하기보다는 데카르트가 자신의 시대를 살면서 어떤 질문을 던졌고 어떤 사색의 과정을 거쳤으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도움이 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테카르트를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를 늘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시기는 유럽에서 '30년 전쟁'으로 종교관이 부딪히고 이에 따른 격변이 발생하던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였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 상황과 견주어 이렇게 설명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데카르트는 신체와 이성을 철저하게 분리하였습니다. 이성만이 실제이고 그 외의 것은 부속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같습니다. 인간만이 이성을 지녔고 이런 인간이야말로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오로지 이성만입니다. 또한 고전을 무시했습니다. 새롭게 성장하는 과학과 수학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으며 과거의 것들은 아리소토렐레스 같은 거물 철학자도 무시하였습니다. 과거의 사유, 논증, 경험, 이념 모두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현재의 시각에서 사유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저자는 데카르트 시대를 전후해서 두 가지 세계가 뚜렷이 대립된다고 소개하네요. 하나는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전통적, 도덕적 삶의 세계'입니다.  

과학과 더불어 철학에서도 새로운 사유방식이 생성되었습니다. 확실성의 세계입니다. 데카르트 부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떠한 철학도,사상도 세상과 단절되어 태동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세상과 일정부분 단절된 상황에서 이성의 힘으로 고찰해 나갑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고찰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도 결국은 그 시대의 큰 흐름 수학,의학,천문학등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합리론에 도달합니다. 세상과 단절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흐름과 세속적인 것들과 함께 이성도 육체도, 문학도 철학도 과학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지식인도, 우리의 희망도, 우리의 주장도 세상으로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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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7. 16  

오늘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입니다. 워낙 유명인이라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작/주장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사람이죠. 

마키아벨리를 통해서 이제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신아래, 봉건시대의 체계를 무시하고 새로운 체계를 주장했으니 그리고 그 이후 세상의 체계가 바뀌기 시작했으니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신의 영역하의 질서체계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대전환기입니다. 이 전환기에 <군주론>은 작성되었고 그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후의 소개된 고전을 통해 우리는 마키아벨리 이후에 형성된, 고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지금은 어떤 모습은 띠고 있는지, 그것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소개함니다. 

<군주론>은 헌정사와 2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핵심어를 중심으로 구분한다면 신생군주국, 자국군, 설득력을 기준으로 크게 3개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무력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가고 주장하고요. 무력(물리력)과 설득력의 경계가 모호하며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군주의 "역량"이라고 말합니다.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제도적인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적인 설득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하는데,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특정한 역사적 국면(장소와 시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만이 군주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역량입니다. 결국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법이 <군주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고대 세계의 플라톤은 통치자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는데, 근대 세계의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기개를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군주는 "새로운 군주"라고 하는데 "새로운 군주"는 모든것을 자기 혼자 힘으로 쟁취하는 군주라고 합니다.아마도 기존에 물려받는 , 선택되어 모든 권력과 부를 갖는 통치자, 회장님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군주를 몰락시키는 것은 미움과 경멸인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 군주는 물리력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기서 물리력(무력)은 폭력이 아닙니다. 전 물리력(무력)을 강인함, 실력, 의지 등으로 해석하고요. 설득력은 소통, 이해(하기, 되기),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하면 무지막지한 통치술을 주장한 사람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꼭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통치술을 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용어의 의미가 500여년의 간극으로 우리의 이해와 다소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어째든 이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질서가 바뀌어야 함을 얘기합니다. 그것에 의미가 있겠네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져 주고요.

ps. 

새로운 질서체계를 얘기하지도 만들지도 못하면서 그놈의 일방통행과 폭력(가혹행위는 있으나 고문은 없고, 방패질과 군화발은 있으나 총/칼은 없고, 무지막지한 고소,소송은 있으나 법과 정의의 승리는 없는)은 난무하네요. 우린 지난 10년간 맛보지 못한 신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구시대는 지나가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역사는 돌고 돕니다. 아! 지겨운 신시대. 언제 또다른 새로운 시대가 오려나. 

누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오른쪽에 있어서 그사람 왼편에 서 있으면 다 좌빨이 된다고... 어디까지 달려가 서 있어야 우빨이 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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