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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누군가의 추천이후에도 소설은 보지 않겠다던 이상스러운 고집에 지금까지 읽지 않았던 책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얽기고 얽긴 사연들이 그 방대함으로 중압감을 주기도 하고, 해방 후 혼란기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나라의 민초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관심이 가기도 한다.

 

 짧은 글에 단련된 요즘세대에 참 읽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깨알같은 표현과 묘사는 나에게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지만 더디게 넘어가는 책장에 조바심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의 표현력과 서사의 전개는 요즘 나오는 소설과는 다른 느낌을 주며, 작가의 어휘 구사, 표현력에 감탄해 마지 않을 수 없다.

 

 글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단문이든, 장문이든 그렇게 내가 표현하는 것이고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글에 대한 동의는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내가 결정한다. 작가는 화려하게 본인의 생각을 보여주며 나에게 강요할 수 있으나, 작가는 아무 힘이 없다. 그 결정권은 읽는 나에게 있다.

 

 먼 길을 가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태백산맥을 읽고, 아리랑을 읽고, 한강을 읽고.

 작가가 쓴 시간에 맞춰 시대를 쫓아가는 기쁨과 아쉬움을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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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최인훈의 <광장>,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를 소개하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를 건설하기위해 수행되는 인간공학과 사회공학의 문제점을 소개한다. 

최인훈의 <광장>에서는 남한도 북한도 정착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서 어디 한곳도 소속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유토피아에 대해 소개하고 있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한 섬의 보건원장과 섬주민(나환자)의 이야기를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오는 디스토피아를 소개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사육(인간공학)을 소개하고 조지 오웰의 <1984>을 통해서는 전체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통제와 감시를 소개한다.  

 이 작품들을 소개받으며 난 유토피아의 건설과 수단/과정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을 거라고 자문자답을 해본다.  단지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디스토피아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에 저항하며 이 사회를 지켜나가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와 희망이 혼재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누구나 행복해 할 수 있는 유토피아는 불가능하다. 단지, 그 이상을 통해 이 사회가 디스토피아로 가는 길을 막을 뿐이다.  

결과와 목적을 위해 우리는 수단과 과정을 생략하거나 경시해도 될까. 그들이 만든 유토피아를 유지하기 위해 나타나는 비인간화와 억압과 통제는 불가피한 것일까. 목적(결과)을 위해 우리는 수단과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결과를 위해 그 과정을 파괴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 그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우리에게 디스토피아를 강요하고 있지 않을까. 그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우리를 개조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를 통제하고 감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너와 나의 공존이, 소통과 타협이, 논쟁과 똘레랑스가 이 사회를 디스토피아로 가는 길을 막아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의 한 모습이 아닐까. 유토피아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는 없다해도 우리는 그들의 유토피아와 우리의 디스토피아를 막고 공존하는 공동체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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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에 나타난 전혀 다른 구원의 두길. 

그레트헨은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한 '종교적 구원의 길'을 갔고 파우스트는 무자비한 자기실현을 통해 '인간적 구원의 길'을 갔다.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선과 윤리를 떠나 어떤 것이 사람을 구원할까.  

죵교적이란 참으로 사람에게 안도와 위안을 준다. 외롭지 않게 하고 두렵지 않게 해준다. 어려움에 있을 때, 괴로움에 있을 때, 혼란에 있을 때, 그 때에 신앙인은 의지할 수 있다. 신에게 의지한다.그 분은 절대적인 존재이며 세상의 것들을 초월하여 세상을 관장하는 신이다. 구하면 얻는다고 했고 찾으면 얻을 거라하였다. 사람은 기도하고 구한다. 그리고, 거기에 위안을 받고 절대적인 믿음에 평온을 찾는다. 그리고, 믿음과 뉘우침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확신을 준다. 그래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안도와 위안을 준다. 초월적인 내 노력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을거라는 안도와 위안을 준다. 

자아실현을 통한 '인간적 구원의 길'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극기복례로 대표하는 유학 선비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파우스트는 말 그대로 무자비한 자기실현을 이루었지만, 그런 자기실현이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라고는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떠오른 모습이 선비의 모습이다.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나를 의탁할 수 있는 절대자/신 없이 자신을 다스려 나가 성인군자 경지에 오른 그런 선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선비는 도덕적인 자기수양의 모습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자기실현에는 전제가 있다. 도덕적,윤리적,정의로움과 같은 훌륭함이 깃든 그것들이.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믿음과 뉘우침에 의한 구원 아니면 (파우스트의 이기적 자기실현이 아닌) 고고함과 자기수양을 통한 자기실현을 통해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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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구입한지도 한달이 지났다. 고전을 접하면서 철학에 호기심이 생겼던 그 때 발견한 책이었고 법전과 같은 두께를 보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차에 동서양의 철학을 주제(인물)에 따라 비교하여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는 평을 보고 용기를 내어 구매했다. 그리고 한달. 

아직도 읽고 있다. 성격상 읽던 책 덮어버리지 못해 끈기 있게 읽고 있으나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서양철학은 그전에 보지도 관심도 없던 분야여서 기본 지식도 없이 읽다보니 저자의 노력(쉽게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하고 서술)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낚시에 걸린 느낌.  

그래도 동양편으로 오면서 다소 익숙한 내용이 나와 서양편에 비해 쉽게 읽고 있으나 누구의 평처럼 쉽게 이해가 가는 책이라는 말에는 당했다는 결론. 

철학사에 대해 어느정도의 지식을 갖고 이 책을 보면 괜찮을 것 같다. 시대순이라기 보다는 주제별로 대비시킨 편집이 또다른 이해와 지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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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꺼운 책을 출퇴근 버스안에서 약간씩 읽어가고 있다.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챕터를 읽으면서 '아 말로만 듣던 하이데거가 이런 얘기를 했군'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조그만 위안을 갖고 읽어 나갔다. 

마음은 무엇일까? 내가 그 대상을 향한 지향성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그 대상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걸까 아니면 대상을 인식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그 대상에 지향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에 우리의 마음에 무엇인가 작동되었기 때문일까?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객체를 지향하고 그에 따라 그 객체는 실체로서 존재가능하다는 후설의 현상학적인 관점에 수긍이 많이 된다. 그것은 아마도 동양(불교)에서 많이 언급되는 관점에 익숙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점을 읽으며 '어, 그렇지'하고 동조되는 내 생각은.... 참. 하이데거는 마음의 지향성이 어느 경우에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경우에만 발생한다고 마음의 지향성을 넘은 다른 것을 얘기한다.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적 관점을 따르기는 하나 의식적인 지향 경험 이면에 신체의 활동이 존재하고 그 영향에 의해 지향성이 발휘된다는 신체의 현상학을 주장한다. 

저자는 두사람의 주장이 서로 상이한 것으로 설명하는데 사실, 난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거부한 것인지. 내가 보기에는 하이데거도 현상학에 한가지 경우를 붙여 놓은 듯 했는데. 

어째든, 마음이 있어 객체가 실체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무엇때문에 실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난 어떤 객체에 대해 이미 인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음의 지향성이 나도 모르게 작동한 것일까 아니면 지향성 작동이전에 그 무엇이 작동하였던 것일까? 그래도 결국은 마음의 지향성이 작동해야 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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