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결혼생활을 위한 부부수업
게리 채프먼 지음, 김태곤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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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고 어느 정도의 연령에 이르면 남자든 여자든 결혼을 생각하는 것 같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이젠 과거의 기억처럼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어쩌든, 사람들은 결혼을 한다. 서로 사랑해서. 그런데 그 결혼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기혼자들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문제에 부딪친 부부. 그리고 지금 연애할 때처럼 결혼이 낭만적인 사람에게도 이 책은 권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에 '아 이거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내는 부부생활의 포인트는 없다. 그러나, 잔잔하게 계속 나에게 밀려온다. '아! 내가 이걸 못하고 있구나' 

이 책은 기독교 사고를 근간으로 한 책이다. 부부생활에 필요한 요소의 근거를 성경의 말씀에서 찾아 설명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다소 동감이 떨어 질 수 있겠으나, 그런 기독교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내용을 읽어 보아도 많은 부분이 동감할 수 있다. 40년간의 결혼생활에 대한 상담을 통해 다져진 경험이 읽는 이에게 부담없고 편안하게 하고 맞장구를 불러 온다. 

저자는  9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결혼생활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지에서 부터 시작해서 경제적인 부분으로 맺는데 이 책의 순서에 맞춰 나의 결혼생활을 되짚어 보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변화시켜 나가면 지금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눈여겨 볼 파트는 역할분담과 의사결정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고(사회생활을 제외한 가정생활에서 아내는 식사준비/청소/양육에 힘쓰고 무거운 짐들어주기/마트에 같이 가주기/집수리 등과 같은 일에 남편이 도와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역할을 다시 나누라고 조언한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하기를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들을 서로 의논하여 확실하게 정하여 분담하라고 조언한다.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나 나름 해석했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합의해서 의사결정을 하나 합의가 되지 않으면 남자가 최종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 남자는 머리라고. 성경이 구시대의 관습과 사고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데, 이걸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한동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남존여비'를 반영하는 얘기는 아니고, 뭘까? 남편과 아내가 아무리 의논해도 합의에 이루지 못할 때 그 때, 남자가 더 많은 책임을 지라는 뜻으로 난 해석했다. 남편이 아내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지고 혹, 잘못된 의사결정인 경우 남편이 책임을 더 많이 지라고. 아내에게 책임을 지게 하지 말고 잘못의 책임을 남편이 지고 아내를 더 보호하고 사랑하라고.  

난 아내를 사랑했고 그 때의 감정으로는 정말 싸울 일 없고, 화낼 일 없고, 낭만적인 신혼생활이 계속될 줄 알았는데 역시, 현실은 그게 아니다. 이제 결혼 앞둔 사람에게 얘기한다. 결혼은 꼭 필요한 거 아니야. 꼭 결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애. 그냥 그건 선택이야. 어느새, 내가 결혼 전에 들었던 선배, 상사들의 이야기를 나도 하고 있다. 그땐 그랬다. 지들은 결혼 다해보고 나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새싹에게 기죽이는 얘기한다고. 

그럼, 지금 내가 결혼생활을 후회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아내를 만나게 되어 감사하고, 나와 결혼해줘서 고맙고, 사랑스러운 딸을 갖게 해줘서 고맙고. 내가 세상을 보다 밝은 것으로 보게 해준 사람이어서 고맙다. 사랑스럽다. 그런데도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난 결혼생활은 불만과 다툼이 있고, 행복하다고 사랑한다고 서로를 보며 활짝 웃기도 한다.  

이 책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책은 결혼에 문제가 있는 부부에게만 필요할까 아니면 결혼생활에 문제가 크게 없고 다들 이렇게 살겠지 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할까. 권하고 싶다. 지금 문제가 있는 부부나 문제없는 부부나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의 서두에 소개한 문장이다. '부부의 행복,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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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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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표지를 보고서는 선뜻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다. 공자, 장자, 맹자, 순자 등 제자백가의 내용들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다. 웬지 책표지도 동양고전을 저술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 전에 읽은 신영복의 <강의>를 읽은 적이 있어서 또다시 동양 고전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물론, <강의>는 무척 재미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그런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래그를 아래로 쭉 내려보니 목차에는 내가 고전하면 익히 생각하던 것들이 아니라 생각 못했던 저자와 책명이 나타났다. '맞아. 서양의 고전도 고전이지'하는 '띵'하는 머리울림속에 유심히 책을 살펴보았고 그리고, 읽었다. 

이런 류의 책들이 장점은 내가 한 사상을 다 흝어 보거나, 또는 책 한권을 다 독파하지 않아도 저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여러권의 책, 여러 사상을 간략하게라도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책 역시,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큰 흐름을 저자의 소개에 따라 따라 갈 수 있어 인문학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 누구에게나 읽기 부담없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강유원 선생의 강의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서 대화체같은 느낌을 주어 지루하지 않다. 

이 책은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속에서 그 시대(사상)을 대표하거나 이끌었던 고전을 저자의 예리한 안목과 입담으로 찬찬히 흝어 내려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서사시를 통해서는 고대인들에게 진정으로 명예로운 길은 무엇인지. 어떤 근거/판단으로 인간의 삶을 평가했는지를 설명하였고, 소포클레스의 <안티코네>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간의 충돌을 잘 보여줬다. 이제 이 시대에서는 인간은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신에 의탁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 태동하고 그리고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이 충돌하는 시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제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는 인간이 사회를 통치하는 이상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내용이 잘 나타났다. 이제 사회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철학에서 통치되고 운영되는 시대로 발전하였고 정치는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상에 대해 보여준다. 고대에서는 인간사회에 대한 이상이었다면 중세의 단테에게는 신의 품안에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상이 존재한다. 중세는 기독교의 세계이다. 인간도 그 안에서만 존재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참으로 읽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은 편견. 그 시대, 마키아벨리와 그의 조국과 시대에 던져진 고민을 타파하고자 하는 그런 배경속에 나타난 사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 서구 근대의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근대 개인주의가 어떠한 철학적 바탕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주체적이지 못한 암흑기를 지난 주체성을 회복한 시기이고 그것을 두들인 '합리주의'를 생각하면 다소 오해가 될 듯 싶다. 합리주의라는 것이 그리 반가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이책을 통해 알았다. 이후, 발전해가는 서양사상을 읽어가면서, 너무 인간미 없어지기 시작한다. 로크의 <통치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으면서 서양 근대사상이 인간은 없고 물질로서의 인간만이 남게 되는지를 그리고, 근대 서양사상의 절정과 그 문제들을 물살을 타듯 흝어 내려 간다. 현대를 이루고 있는 사상적 배경이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읽어 내었고 그것을 체계화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타타지 말았어야 할 본성이 강조되면서 발전시켜왔다는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좀 더 고상한 인간의 본성을 근간으로 하였다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벤담의 <파놉티콘>은 정말 절망이다. 이런,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 욕심.소유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한데 라는 생각이...  그래도, 공리주의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그리고, 그 대표적 사상가라하면 웬지 좀 더 고상한 사상위에 공리주의가 전개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몹쓸 것들이 있나'하는 생각. 욱하는 성질이 활활 타오른다. 이런 탐욕과 소유가 제국주의와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결국 서양세계를 형성한 근대의 사상이 역사를 만들어냈다. 파괴와 약탈의 역사와 고통의 역사를.   그래도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통해서는 근대 서양사상과 역사에 대한 반성이 나타난다. 자기조정 시장의 파탄과 물건으로 변해버린 인간을 되짚는다. 반성과 전환이 나타났고 그래야 하는 시점에 냉전주의로 흘러간 역사는 제대로 된 고민없이 또 다시 흘러갔다. 

강유원선생은 이 책의 마지막을 공자의 <논어>로 마무리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 그저 추측해 본다. 어쩌면 돌아가자고 인간을 놓고 인간을 고민하는 그런 사유로, 인간을 물건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상한 이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의도는 아닐까. 공자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았고, 역사에 귀결한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두려워할 수 있다고, 독선과 독재에 빠지지 않고 옳음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한가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착각. 유학하면 아 고리타분한 수구 보수이념, 예의범절이라는 단순한 이 착각은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버려 두셔야 한다.) 

이 책은 서양의 사상을 고대에서 근대까지 흝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철학/사상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날 그 세계로 잡아당긴다. 그런 책이었다. 

p.s 

유학은 사고/행동의 기준을 역사에 근거한다고 했고 그래서, 지금 신의 이름으로 이 순간을 무시하고 독단에 빠지지 않고 등등을 얘기하는데 그럼 지금은 날 이해 못해도 '역사가/ 후대가 이해하고 평가해 줄 거라고' 마냥 밀어붙이는 태도도 문제가 될 텐데. 이를 어쩌나, 그럼, 신도 믿고 역사/후대가 평가해 줄거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치면 더욱 큰일이다. 아! 그래서 그러는구나. 정말 큰일이다.  하는 이런 쓸테없는 생각이 문득 스쳐갔다. 쓸데 없는 생각이...(정말, 쓸데 없는 생각이기를 간절히 빈다.)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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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7월 26일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논어>이다. 공자. 유학.  

처음 이 책의 순서를 보았을 때 <논어>가 맨 마지막이어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의도을 약간은 알 수 있을 듯 하다. 저자는 유학은 사유의 최종 근거를 역사에 두었다고 인간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소개한다. 유학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뭔가 구식인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데 유학에 대해 그리고 그 이외의 동양고전을 접해보면 그것이 현대에 반영하기 힘든 옛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공자는 참다운 정치는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했고, 공자의 사상은 이상을 세우는 이론전 논의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베스트 셀러가 된 <정의란 무엇인가>의 주제를 동양고전 측면에서 풀어내어도 재미 있는 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치는 '의(義)'를 기준으로 삼고 그 의가 드러난 형태이며 의를 행하는 방식이 '예(禮)'하고 한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의(올바름,정의)'는 학교/책에 있고 현실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보면 우리가 유학을 비롯한 동양고전을 그저 예전에 조상들이 탁상공론하던 학문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현대에 서양철학과 비교하며 재해석해보고 현대세계로 이끌어 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낯선 데리다/들뢰즈를 끌어다 놓고 형이상학적 평을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을 현대사회를 해석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데리다와 들뢰즈를 들먹이며 얘기하는 사람은 굉장히 고상해 보이며 박식해 보이는데 논어/맹자/순자/이황/이이.... 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꼭 한복을 입고, 예의범절을 운운하는 것으로만 상상되는 이 모순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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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7월 23일 

폴라니는 1886년에 태어나 1964년에 죽었다. 격변의 현대사를 지켜본 사람이다. 근대에 일어난 사상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시켰고 그리고 이전 역사에서 겪어보지 못한 두번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보았고 이에 따라 기존 사상의 문제를 짚었다. 

'기계에 의해 생산이 산업사회에서 일어나게 되면 현실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적. 자연적 내용물이 상품의 형상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는 실로 엄청난 변화이다.' - 폴라니. 거대한 전환 

폴라니는 데카르트적 자아(철저한 개인주의)를 무너뜨리고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 했다. 그래, 사람은 고귀한 영혼을 지녔고, 사유하는 존재인데 이젠 사람에 대해 통찰할 시기도 된거다. 

폴라니는 묻는다. 자기조정 시장의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삶을 시장에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답을 찾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사람이 없는 자유주의는 2000년대를 또 들어치고 있는데..... 

<거대한 전환>은 전년에도 출판이 되었던데, 한번 읽어 봄 직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관리스트에 찜해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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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7월 23일 

제목이 <파놉티콘>이라서 어떤 책일까 했더니 교도소 설계서이다. 그런데 단순한 설계서가 아니라 그 근저에는 정말 끔직한 이론적 배경이 깔려있었다니, 공리주의라고 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해서 굉장히 좋은 내용인 줄 알았었는데 최근의 읽은 책들을 통해 그 이론 배경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하고 철저하게 그 손익을 따져 이익이 많은 것을 채택하고 이익이 없는 것은 무자비하게 버려지는 사람 냄새없는 기계적 합리주의(?)라는 사실에 급 실망했다. 고등학교때 배운바로는 참 좋아보였는데,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고민하는 공리주의였는데 완전히 잘못 알았다. 또 한번 느낀 것. 역시 사람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거. 

벤담은 사람의 고통과 쾌락을 계산해서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사람의 행동과 정서를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한다. 결국 모든 것의 이익을 따져 그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공리주의라는 것인데, 최대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개인이 무시되어 지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언급되었던 공리주의에 대한 내용과 저자가 제기한 의문이 더 쉽게 이해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행동들에 대해 너무 계산하고 통제하는 이런 사상이 주요한, 그리고 큰 사상적 한 조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의아한 느낌이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물질적인 이익으로 사람을, 사회를 해석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지. 정말 사람냄새 나지 않는 기계세상을 만들어 가는 느낌이다. 

<파놉티콘>을 통해 공리주의 철학의 기본원리, 산업혁명이후 근대인들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이유, 기계에 맞는 형태로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저자가 소개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제대로 알아야 이런 기계세상을 피해가지 않을까한는 심정. 

이 책에서 소개되는 근대사상의 합리주의, 계몽주의, 과학화가 사회를 진보시키는데 기여한 좋은 것들로만 생각했는데 진보는 아니고 오늘의 사회구조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사실만은 일게게 한다. 현대사회의 철학에 사람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자연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물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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