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에 나타난 전혀 다른 구원의 두길. 

그레트헨은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한 '종교적 구원의 길'을 갔고 파우스트는 무자비한 자기실현을 통해 '인간적 구원의 길'을 갔다.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선과 윤리를 떠나 어떤 것이 사람을 구원할까.  

죵교적이란 참으로 사람에게 안도와 위안을 준다. 외롭지 않게 하고 두렵지 않게 해준다. 어려움에 있을 때, 괴로움에 있을 때, 혼란에 있을 때, 그 때에 신앙인은 의지할 수 있다. 신에게 의지한다.그 분은 절대적인 존재이며 세상의 것들을 초월하여 세상을 관장하는 신이다. 구하면 얻는다고 했고 찾으면 얻을 거라하였다. 사람은 기도하고 구한다. 그리고, 거기에 위안을 받고 절대적인 믿음에 평온을 찾는다. 그리고, 믿음과 뉘우침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확신을 준다. 그래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안도와 위안을 준다. 초월적인 내 노력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을거라는 안도와 위안을 준다. 

자아실현을 통한 '인간적 구원의 길'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극기복례로 대표하는 유학 선비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파우스트는 말 그대로 무자비한 자기실현을 이루었지만, 그런 자기실현이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라고는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떠오른 모습이 선비의 모습이다.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나를 의탁할 수 있는 절대자/신 없이 자신을 다스려 나가 성인군자 경지에 오른 그런 선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선비는 도덕적인 자기수양의 모습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자기실현에는 전제가 있다. 도덕적,윤리적,정의로움과 같은 훌륭함이 깃든 그것들이.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믿음과 뉘우침에 의한 구원 아니면 (파우스트의 이기적 자기실현이 아닌) 고고함과 자기수양을 통한 자기실현을 통해서 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