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페이지가 되는 책을 읽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갑자기 철학에 관심이 가면서 이리 저리 책을 기웃거리다 발견한 책이다. 철학에 관한 책이라는 주제의 무거움보다도 책의 두께에 짓눌려 살까 말까를 고민하다. 알기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는 덧글에 자신감을 갖고 구입하여 읽기시작했다. 

동서양의 철학을 시대순이 아니라 소주제에 맞춰 두 철학자의 논리를 비교해 나간 글의 구성은 방대한 양의 책을 읽어 나가는데 그나마 도움이 된다. 10페이지이하로 정리된 소주제에 이해되든 안되든 한 챕터씩 끝나는 안도감을 준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 이 책을 어찌할까. 책의 두께는 웬만한 책 3권분량인데.... 

철학사의 전반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면 더 쉽게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철학자의 논리를 이해할려만 이해에 한계가 생긴다. 사람들은 이 책의 구성방식이 철학의 이해가 깊지 않아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추천했는데. 이 난감함은. 그래도, 뚜벅뚜벅 한페이지씩, 앞으로 전진. 이해하지 못해도 일단 잡은 책은 어떻게하든 마지막장까지 다 읽어내는 나으 키특한 장기를 발휘해서. 뚜벅뚜벅 한발씩. 

웬지 다 읽고나서는 책의 내용은 기억 안나고 내가 이 두꺼운 책을 다 앍었다는 기특함만 남을 것 같은 예감. 처음에는 동서양의 철학에 대한 가벼운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는데. 웬지 불안하다. 지금까지 읽은 200페이지의 내용도 기억이 안난다. 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0년 7월 26일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논어>이다. 공자. 유학.  

처음 이 책의 순서를 보았을 때 <논어>가 맨 마지막이어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의도을 약간은 알 수 있을 듯 하다. 저자는 유학은 사유의 최종 근거를 역사에 두었다고 인간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소개한다. 유학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뭔가 구식인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데 유학에 대해 그리고 그 이외의 동양고전을 접해보면 그것이 현대에 반영하기 힘든 옛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공자는 참다운 정치는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했고, 공자의 사상은 이상을 세우는 이론전 논의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베스트 셀러가 된 <정의란 무엇인가>의 주제를 동양고전 측면에서 풀어내어도 재미 있는 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치는 '의(義)'를 기준으로 삼고 그 의가 드러난 형태이며 의를 행하는 방식이 '예(禮)'하고 한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의(올바름,정의)'는 학교/책에 있고 현실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보면 우리가 유학을 비롯한 동양고전을 그저 예전에 조상들이 탁상공론하던 학문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현대에 서양철학과 비교하며 재해석해보고 현대세계로 이끌어 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낯선 데리다/들뢰즈를 끌어다 놓고 형이상학적 평을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을 현대사회를 해석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데리다와 들뢰즈를 들먹이며 얘기하는 사람은 굉장히 고상해 보이며 박식해 보이는데 논어/맹자/순자/이황/이이.... 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꼭 한복을 입고, 예의범절을 운운하는 것으로만 상상되는 이 모순은 무엇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0년 7월 23일 

폴라니는 1886년에 태어나 1964년에 죽었다. 격변의 현대사를 지켜본 사람이다. 근대에 일어난 사상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시켰고 그리고 이전 역사에서 겪어보지 못한 두번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보았고 이에 따라 기존 사상의 문제를 짚었다. 

'기계에 의해 생산이 산업사회에서 일어나게 되면 현실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적. 자연적 내용물이 상품의 형상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는 실로 엄청난 변화이다.' - 폴라니. 거대한 전환 

폴라니는 데카르트적 자아(철저한 개인주의)를 무너뜨리고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 했다. 그래, 사람은 고귀한 영혼을 지녔고, 사유하는 존재인데 이젠 사람에 대해 통찰할 시기도 된거다. 

폴라니는 묻는다. 자기조정 시장의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삶을 시장에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답을 찾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사람이 없는 자유주의는 2000년대를 또 들어치고 있는데..... 

<거대한 전환>은 전년에도 출판이 되었던데, 한번 읽어 봄 직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관리스트에 찜해놔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0년 7월 23일 

제목이 <파놉티콘>이라서 어떤 책일까 했더니 교도소 설계서이다. 그런데 단순한 설계서가 아니라 그 근저에는 정말 끔직한 이론적 배경이 깔려있었다니, 공리주의라고 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해서 굉장히 좋은 내용인 줄 알았었는데 최근의 읽은 책들을 통해 그 이론 배경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하고 철저하게 그 손익을 따져 이익이 많은 것을 채택하고 이익이 없는 것은 무자비하게 버려지는 사람 냄새없는 기계적 합리주의(?)라는 사실에 급 실망했다. 고등학교때 배운바로는 참 좋아보였는데,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고민하는 공리주의였는데 완전히 잘못 알았다. 또 한번 느낀 것. 역시 사람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거. 

벤담은 사람의 고통과 쾌락을 계산해서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사람의 행동과 정서를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한다. 결국 모든 것의 이익을 따져 그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공리주의라는 것인데, 최대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개인이 무시되어 지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언급되었던 공리주의에 대한 내용과 저자가 제기한 의문이 더 쉽게 이해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행동들에 대해 너무 계산하고 통제하는 이런 사상이 주요한, 그리고 큰 사상적 한 조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의아한 느낌이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물질적인 이익으로 사람을, 사회를 해석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지. 정말 사람냄새 나지 않는 기계세상을 만들어 가는 느낌이다. 

<파놉티콘>을 통해 공리주의 철학의 기본원리, 산업혁명이후 근대인들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이유, 기계에 맞는 형태로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저자가 소개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제대로 알아야 이런 기계세상을 피해가지 않을까한는 심정. 

이 책에서 소개되는 근대사상의 합리주의, 계몽주의, 과학화가 사회를 진보시키는데 기여한 좋은 것들로만 생각했는데 진보는 아니고 오늘의 사회구조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사실만은 일게게 한다. 현대사회의 철학에 사람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자연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물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0년 7월 22일 

 오늘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입니다. 부제가 폭력으로 다스려지는 세계입니다. 아마도 근대이후 세상은 도덕적 선을 이상으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익/소유등)과 폭력성하에 사회와 국가를 설계하고 정치하는 세계가 형성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선한 존재인지 악함을 타고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가 이상적이라면 근대이후는 아주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베버는 독일사람이고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반시대의 사람입니다. 독일의 역사가 그 당시에 통일과 급속한 발전. 그리고 2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파시즘으로 흘러가죠. 아마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격정적인 근.현대사를 갖는 국가일 겁니다. 

베버가 말하는 정치는 '정치적 조직체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한정해서 사용합니다. 제도적 장치일 뿐입니다. 정치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어떤 내용을 갖고 잇는 것이 아닙니다. 마키아벨리에서 시작된 정치의 탈가치화, 탈도덕화가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의 가치와 윤리성을 주장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또한, 국가 개념도 정서적인 것, 도덕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법적 권리와 물리력이 어떤 범위에서 행사되고 있는지를 집중했습니다. 베버에 있어서 정치와 국가는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입니다. 그리고 국가가 물리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봅니다. 베버의 사상은 그만의 독창적 주장은 아니고요. 그 원천은 홉스의 사상이 있다고 합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보았고 그것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서 공권력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뭐랄까? 베버는 정치가 물리력(폭력)과 떨어질 수 없는 한 배를 타고 있음을 직시하였습니다. 그 근저에 도덕/선/가치와 같은 고상한 이상들이 있지 않아 한편으로는 불편하지만(정의. 봉사, 선과 같은 고상한 이상이 존재하지 않으니깐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과 그 작동원리를 현실적으로 직시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베버가 폭력적인 국가.정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물리력이라는 그 현실을 직시하고 물리력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아직 소양이 많이 부족하다보니 '이건 아닌데'라는 반대/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렇구나'하면서 따라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웬지 정치라하면 보다 근사하고 고상한 이상(선,도덕,봉사 등)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베버는 그렇지 않네요. 요즘의 우리사회를 보면 정치란 행복/선을 추구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수단일뿐이라는 것을 알겠는데요. 그런데 그래도 뭔가 아쉽습니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정치가 폭력적인 자연상태를 보다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뿐이라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긴하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보다 근사한 이상(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챕터를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옮겨 놓습니다. 베버의 말입니다.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희망의 좌절조차 견디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아직 가능한 것마저도 달성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