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소‘는 알튀세르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을뿐더러,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시대의 문제를 디루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검은 소‘, 특히 그 핵심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테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우리의 삶 전체에 걸쳐 있는 불평등과 지배, 착취와 배제의 문제가 자본주의적 모순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필연성은 불가능성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필연성, 곧 아포리아적인 필연성이다. 이러한 불기능성의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길-없음 a-poros이며, 독자들 각자 스스로 통과해나가야 할 시험이다. - P51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철학이 아니고 단순한 철학의 역사도 아닌 철학하는 철학사라고 밝히고 있다. 서양철학에 한정하여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철학사를 꼼꼼히 인물 혹은 사조별로 짚어가며 각각의 한계와 영향을 비판, 분석한다.인류의 진보는 멀리서 보면 곧바른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좌충우돌하고 때로는 뒷걸음질하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서양철학사도 마찬가지이다. 각 철학 사조의 탄생과 소멸, 시대 상황에 따른 수동 혹은 능동적인 변신, 가진 것을 다 태워먹고 앙숙인 옆집에서 빌려와 재건하는 과정이 르네상스 이전의 서양철학사이다.철학사를 읽는 이유는 시대상에 따른 철학의 변화를 토대로 앞으로의 철학에 대해 가늠하고자 함이며, ‘철학하기‘라는 것을 각 철학자들이 어떻게 체화했는지를 보며 자신 또한 삶에 반영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직도 피타고라스 학파가 콩을 먹는 것을 왜 금기시했는지 알 수 없지만)저자는 서문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철학하기란 우리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좀더 생동감 있게 체험하려는 희망 속에서 우리의 사고 기관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다. 그게 단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위한 것일지라도.‘
마르크스의 이론은 진리이기 때문에 전능하다.공산주의자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레닌 - P7
이런 모든 변화는 교회의 자기 이해에 심대한 타격을 준 동시에 새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물론 이것들은 더 광범한 변혁의 징후에 지나지 않았다. 하늘과 인간의 새로운 물리학은 거대한 사회적 변혁의 일부였던 것이다. 로저 베이컨도, 오컴의 월리엄이나 장 뷔리당도 자신들의 자연 철학이 시대의 사회 정치적 요구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독한 빈곤과 탐욕스러운 부, 전쟁, 역병으로 피폐해진 시대에서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 비판은 교회 수뇌부에게는 당연히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었고, 그에 관한 논쟁조차 칼과 쇠사슬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런 시대에는 천국을 약속하는 사람만이 제격이었다. 지상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으로 바꾸려는 사람은 지극히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플라톤은 마치 하늘과 땅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처럼 보인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즉 모든 물질을 가공해서 형태화한 우주의 조물주도 필론에 이르러서는 토라의 천지 창조신과 비슷한 전지전능한 세계 창조자가 된다. 그리고 플라톤이 정신과 물질을 두 개의 근본 원칙으로 삼았다면 필론은 피타고라스의 전통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세 개로 나눈다.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직각 삼각형이 모든 지식의 출발점이었던 것처럼 필론도 삼위성(三位性)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아주 중대한 사고 모델이다. 이 사고 모델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으로 가는 작은 발걸음이 이제 막 놓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