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마카롱 에디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심영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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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게 싫다."

유명한 소설 도입부에 적은 작가의 목소리입니다. 어떤 작품인지 예상하고 계신가요?

 문장이 담긴 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입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 모자 그림. 
하나뿐인 장미. 
길든 여우.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기다림의 설렘과 떨림. 
정말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이고, 비록 작가가 어린이였던 어른에게 바치기는 했지만 어린이들도 쉽게 읽을  있다는  생각하면 새삼 깊은 사유와 감성에 놀라게 됩니다. 

 인생책이라고 정말 좋다고 얘기하고 다녔으면서, 서너 번은 읽었으면서, 앞서 적은 문장이 마음에 와 닿은 순간이 없었다는 사실. 

이번에야 마치 처음 읽은 것처럼 발견하고서는 '생텍쥐페리가 이런 말도 했네.'하며 조금은 놀라고 말았던 일.

  아닐 수도 있지만 조금은 충격적이라고 느꼈던 건, "잘 읽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뭐, 어떤 작품을 읽고 무얼 느껴야 하고, 어떤  발견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해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소망이랄까, 욕심이랄까, 아쉬움 같은  있어요.

좋은 작품이기에  풍부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싶다는 원초적인 바람들요.


 워낙 좋은 작품이니 찬사를 보태봐야 신화에 덧칠하는 셈밖에 되지 않을 테고, 그래서 이번에는 처음   같은 문장  개를 적기로 합니다.


첫 번째는 "나는 사람들이  책을 건성으로 읽는  싫다."입니다.

진지하게 말하는데 건성으로 듣는다면 속상하고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죠. 

솔직함이 두드러지는 문장이라, 새삼 생텍쥐페리의 순수함을 다시 떠올리게 되네요.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낄  있지만, 읽은 느낌이나 생각을 전해준다면  기분 좋은 그런 인지상정의 아주 기본적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지함.

 입이 하나고 눈과 귀가 둘인 이유는 적게 말하고 귀 기울이며, 두루 살피라는 의미라고 하죠.

읽는 즐거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은 진지하게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넌 모든 걸 혼동해…… 모든  뒤섞어버린다고!"입니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상태에서 수리는 진전이 없는데 어린 왕자가 장미꽃 얘기를 하자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얘기를 가볍게 넘겨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화가 나서 외치죠. "꼭 어른들처럼 말하네!"라고요.


어른들이 말할 때 모든 걸 혼동하고 뒤섞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는 물음에 답이 마땅치 않을 때, 핑계나 변명이 궁색할 때 얼버무리듯 모호하게 말하곤 하죠. 

아이들은 그렇게 돌려서 말하거나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거나 애매하게 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료하죠. 

 대표적인 어른들의 말은 정치가의 말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체이탈 화법'으로 대표되는 결국 무슨 말인지 아무 말도 아닌 복잡하고 무의미한 말들을 자주 쓰죠. 

뜨끔해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분들이 특히.


세 번째는 "나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없었다.  자신이 아주 서툴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어린 왕자에게 가닿을  있는지, 어디에서 그에게 다가갈  있는지   없었다. 눈물의 나라는 그렇게나 신비로운 곳이다."입니다.

 양이 장미꽃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장미꽃 한 송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태도가 일으킨 분노로 어린 왕자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나'는 비행기 수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어린 왕자를 다독이고 달래죠. 

 특히 마음이 끌린 부분은 '눈물의 나라'의 신비입니다.  

 '눈물의 나라'는 뭘까요. 

눈물이 시작되는 곳? 아니면 눈물이 만나 섞이는 곳? 그것도 아니면 눈물의 근원이 되는 감정 혹은 위로?

결과적으로 보면 생텍쥐페리는 눈물의 나라에 닿은 모양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린 왕자를 위로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위로하는  성공했으니까요. 

 친구가 됐죠. 기적처럼. 

솔직히 진정한 친구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진정한 친구끼리는 눈물에 국경이 나뉘어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겠습니다. 슬픔의 근원, 아픔을 달래는 방법은 머리로 알아낼 수 없는 거겠죠. 마음을 담지 않고는 마음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것. 

기억해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번째는 "그가 가로등을 켜는  마치 별이나  하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과 같아. 가로등을 끄면 꽃이나 별이 잠드는 거고. 아주 아름다운 일이야.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는 일이고."입니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나요?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는 말이  동의하기 쉬운 가요?

비슷하지만  생각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발견하셨는지도 모르겠네요.

근본이 어디에 있는 하는 문제입니다. 근본은 다른 말로는 의미 혹은 가치라고 적을 수도 있겠죠.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생각에서는 '쓸모'가 목적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서 생겨난 결과입니다.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에서는 '쓸모'가 목적이고 아름다움이 결과죠. 

간단히 말하면 후자의 생각은 쓸모가 있는 것만 아름답다는 겁니다. 

 어린 왕자에 따르면 어른들의 생각이죠.

'장미꽃  송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장미꽃은 얼마든지 있으니까.'라는 식입니다.

아름다움은 하나의 '가치'입니다. 가치는 '부여하는 것'이죠. 

같은 것, 흔한 것이라도 내게 의미가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물건이라도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줬다면 아름다울  있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죠. 

쓸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중한 존재가 전해준 것이기에 아름다울  있다는 거죠.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의 예를 생각해보면 이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사람은 가난해서 금반지도 겨우 선물합니다. 다른 사람은 부자라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죠. 절대적인 가치로 따진다면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가  겁니다. 쓸모가  크니까요. 어떤 쓸모인가? 단순하게는 금전으로 환산할  있다는 쓸모의 차이부터 무척 큽니다. 비교하기 어렵죠. 

 하지만 금반지를 선물한 사람의 사랑이 더 작은 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동등하면 동등했지 어느 쪽이 작다고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더 좋은 일'을 갖기를 원합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좋은 일은 편하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이죠. 하지만 보람 있고, 의미 있으며, 가치가 있는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즐겁게 계속할  있는 일을   있다는   행복입니다. 누군가 시켜서 마지못해 해야 한다면 괴로움이  크겠죠. 단지 돈만을 위해 일한다면 자신이 쓸모 있는 일을 한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는 일'

평생을 이런 일들만 하며 보내고 싶은 바람입니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돌아갑니다. 소행성 B612호로요. 

장미꽃과 다투고 자기 별을 떠난 어린 왕자는 일곱 개의 별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성장하죠. 

  

 아이는 성장하면 바빠집니다.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너무 많아서  틈도 없죠. 그렇게 성장해서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장해야  이유가 늘어나죠. 

  

 우리는 너무 많은  잊고 살아갑니다. 

소중한  보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정말 중요한  뭔지 알지 못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눈물 흘려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번은 그런 경험을 했을 테니, 모르는  아니라 잊어버린 셈입니다. 

사랑은 책으로 배우지 말라고 하죠. 

그렇더라도 사랑을 책으로 깨우지 못할  없을 겁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읽어서는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생텍쥐페리가 서운해합니다. 


이렇게 말했다니까요.

"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게 싫다."


글자를 세심히 살펴 읽으라는 말이 아닐 테죠.

 안에 담은 마음을 들여다봐달라는 부탁 아닐까요.

간단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는. 

그런 의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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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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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선택을 하는 날입니다. 

 누구나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있을 테죠. 하지만 내가 선택한 후보가 반드시 당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내가 선택한 후보가 내가 기대한 결과를 보여줄 거라는 확신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선택이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든, 명분을 따른 것이든, 다른 사람을 좇은 것이든 선택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 셈이기에 나름의 권리를 갖습니다. 

 이런 분들도 계시죠. 

"나는 선택하지 않는  선택했다."라고 하시는 분들.

솔직히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이야기죠.

"난 포기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후보가 없으므로, 누구에게 표를 던지든 의미가 없기에 행사하지 않겠다.'거나 '누가 되든 결국 도진개진인  아니냐,  선택에 의미가 없는  아니냐'라고 그럴듯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역시 허튼소리인  마찬가집니다. 

 후보는 개인인 동시에 집단이죠. '나와 일치하는 후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맹목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습니다. 이해 가능 여부를 떠나서 이유와 명분이 있기에 그들은 당당할  있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도 가질  없습니다.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소중한 권리,  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경제학 카페>라는 책에 감상문을 쓰면서 시작하며 '선택'을 이야기한  오늘이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어서만은 아닙니다. 유시민 작가도 말하고 있지만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대통령 선거 역시 경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번의 선택이 적게는 5년, 길게는 수십 년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학이 정치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고, 관련이 크기에 <경제학 카페>에서도 여러 차례 정치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부분을 공유합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빈부격차와 불황을 비롯한 온갖 경제적인 악을 제거할 것처럼 큰소리치는 정치가를 믿지 말라. 무식한 돌팔이가 아니면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 틀림없으니까.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중


 우리는  선거 때마다 '저를 뽑아주시면'으로 시작해 '무엇 무엇하겠습니다'하는 약속을 무수히 받았습니다. 

믿지 못하면서도 찍고, 믿고 싶어서 찍고, 믿을  없어서 찍지 않는 일의 반복이었죠. 

 '저는   있습니다'는 믿기 어려운 말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경제의 문제, 외교의 문제, 정치의 문제라는  나만 잘한다거나, 내가 잘하고 싶어서 잘할  있는  아니라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행보와 태도, 의지를 보고 결정하려고 하게 됩니다.   나은 결과를 기대하면서요.


 때로 우리는 마법사의 출현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많은 순간에 그런 마법적인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능의 마법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을  없을 만큼 좋은, 바라 마지않는 공약은 언제나 공허한 약속으로 끝이 난다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오래된 질문입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죠. 

 물음에 대한 답은 '이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전에는 '희망'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나도 부자가   있다'는 희망에서라고요. 기이한  그런 희망이 거듭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서도 마치 이제는 '포기'할  없어서,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잘못된 선택이라는  알면서도 계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못인  알면서도, 의심하면서도 계속할  있는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없습니다. 

 어떤 이득일까요?

'나만 이런 좌절, 실패, 분노,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이기심, 타인의 실패를, 좌절을, 분노를, 가난을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위안. 그런 뒤틀리고 비틀린 이득.


 지나친 생각일  있다는  압니다. 

사실은 나아지고 싶다, 나아질  있을 거다,  나아짐을  후보가 이루어줄 거다라는 기대에서 선택하고 있을 겁니다. 믿을  없지만, 여러 차례 배신당했지만 그럼에도 이젠 미운 정이 들어서라도 계속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있습니다. 혹은 해소되지 않은 연고주의, 지역주의, 사상과 이념의 문제를 용납할  없는지도요.


 중요한 건,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의 상당 부분이 '이기심'이라는 겁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므로 자기의 부를 희생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한 바, 생명에 치명적이어도 로비를 통해 판매 허가를 받고, 노동자가 위험에 노출될 걸 알면서도 외면하며, 실제로는 거의 같은 비용이 들더라도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 하청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을 운용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저마다가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시장입니다.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그런 곳입니다. 개인, 기업의 이기심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기에 예측도 조정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세계화, 국제화라는 불확정 요소가 더해지면 통제는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독재라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사람의 명령에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라면 마법처럼 문제를 해결할  있을 겁니다. 정확히는 아주 잠시 동안은 그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 문제들을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독재라는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법은 없습니다. 마법사도 없죠. 

변화를 만드는  마법이 아니라, 변화된 선택입니다.


 시장에서는 선택받은 상품, 기업만이 살아남습니다. 기업은 선택받을 수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개발하며 생산합니다. 외부의 개입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라면 결과적으로 최선의 상품과 기업만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비자는 선택에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선거에서 유권자가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왕이듯,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왕이다. 만약 그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정치가 엉망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중


 유해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소비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기업이 있습니다. 소비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당연히 해당 기업의 상품을 불매함으로써 업계에서 추방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소비자에게는 그렇게   있는 힘이 있죠. 하지만 기업도 살아남아야 하기에 방법을 찾습니다. 상품 가격을 낮추고,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광고를 내보내며, 소비자를 유혹하는 이벤트도 기획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수천 명의 소비자, 잠재적으로는 수만 명의 소비자를 위험에 빠뜨린 기업은 무사히 위기를 극복합니다. 


 정치도 닮아있습니다. 

나라를 혼란과 분열에 빠뜨린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위기에 책임이 있는 정당이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유권자라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런 정치인들과 정당을 퇴출시켜야 합니다. 선거에서 뽑아주지 않음으로써 유권자의 분노와 뜻, 힘을 보여줘야 하죠. 하지만 정당도, 정치인도 살아남아야 하기에 방법을 찾습니다. 우선 책임이 가장  사람들을 분리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새로워졌다고 말합니다. 다음으로는 오래된 논란, 논쟁을 끄집어내서 반대를 위한 반대, 반감을 되살립니다. 우리 밖에는 그들을 막을  없다고 호도합니다. 의외로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납득합니다. 스스로는 대견하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경건한 마음도 먹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부패와 부정이  만연하는  지켜보며 힘든 삶을  힘겹게 견뎌냅니다.


경제학은 '선택'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정치는 선택을 받는  최대의 문제죠.

둘은 무척 닮아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정경 유착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일 테죠.(웃음)


 경제학은 최대의 만족, 최대의 효용을 이끌어내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연구를 하더라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최선이라는  단지 방향을 제시하고,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뿐이죠. 

 

 앞에서도 적었지만 선택의 핵심은 '이기심'입니다.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는  소비자의 기본적인 심리죠. 적어도 해가 되는 선택을 의도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이득이 되지 않아도 이기심은 작동할  있습니다.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에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선택은 하는 쪽도, 받는 쪽도 최대의 효용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최대의 효용의 기준과 요소는 저마다 다르더라도 말이죠.


 소비의 문제에서 소비자는 어느 상품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해당 상품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면 단지 그뿐으로 자기 삶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정치의 문제는 다릅니다. 


더 나은 나라, 더 좋은 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듭 투표를 했지만, 거듭 실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는 나아지지 않을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결국 '선량한 유권자', '선의의 유권자'는 점점 투표의 의지를 잃습니다. 


그럴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어 질  있고, 희망도 기대도 없을  있습니다.

하지만  순간에도 다른 유권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져 권력을 안겨줍니다. 

결국 절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던 후보가 당신의 삶을 좌우할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자유라면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시달릴 의무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항의 명분도 분노의 이유도 없습니다. 선택을 포기한 사람은 권리는 잃고, 의무만을 지게 된다는 겁니다.


경제학에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결국 정치로 귀결된 이유는 경제학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치와 닮아있고, 떼어놓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권을 올바르게 행사하고, 행사된 주권이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더디더라도 우리 사회는 나아질  있습니다. 


 오후 1시를 넘어서고 있으니 이제 6시간 남짓의 시간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직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투표소로 향하시기를 권합니다.

나의 미래, 우리 아이의 미래, 우리 가족의 미래,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을 정하는 일을 포기하지 마세요.


 투표는 승리자를 정하는  쓰일 수도 있지만, 국민과 시민의 뜻을 전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를 다른 곳에서 찾지 마세요.

모든 마법은 당신의 손에서 시작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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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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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 절망하는가?

완벽하다 믿었던, 완전하다 여겼던 완성의 순간을 눈앞에 뒀을 때. 

단 한 줄, 한 단어.

너무나 하찮은 실수.

 순간에 인간은 완전한 절망 속으로 침몰한다.


종종 인간은 유혹받고 이끌린다.

터무니 없는 기대.

완전 범죄의 가능성에.


 완전 범죄에 성공한 경우는 알지 못하지만 '거의 성공한 경우'는 제법  알고 있다.

나보코프의 <절망>이 그러하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그러하다.

비록  '성공'이 망상이나 환상  이야기라 해도, 그들은 '완전 범죄'를 '거의' 손에 넣었다.

그들은 실패한다.

너무나 사소한,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로.


 게르만은 독일 출신의 초콜릿 사업가다.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실은 파산 직전이다. 어느날 게르만은 공원에서 잠들어 있는 부랑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부랑자가 마치 자기와 '쌍둥이'이기라도 하듯 '닮았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그의 뇌리에 사특한 계획이 수립된다. 실행할지 말지는 운명이 정할 일이다. 운명이 이끈다면 계획은 실행될 테고, 실행된다면 성공은 확실하다. 완벽한 계획, 완전한 범죄다.  <br /> <절망>은 파산 직전에 놓인 게르만이 부랑자 펠릭스를 만나며 시작된다. 계획을 실행할지, 계획은 이루어질지, 두 사람은 정말 '완벽하게 닮은' 것인지. 정신을 똑바로 붙들고 읽어야 한다.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br /> 아차, 앞에서 스포일러를 해버렸군.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5장쯤을 읽기 시작했을  문득 <맥베스>가 떠올랐다.

욕망과 유혹에 굴복해 주군을 살해하고, 결국 파멸해  비극의 주인공 맥베스.

국적도 시대도 신분도 다르지만, 게르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맥베스의 환영은 짙어졌다.


 게르만은 곤경에 처해있다. 

사업은 곤란을 넘어 파산 직전이고, 사랑하는 아내는 자기보다 가난한 예술가 나부랭이에게 끌리는  보인다. 우연히 마주친 부랑자는 자기를 너무나 닮아, 완전히 동일 인물이라고 해도 의심할 수가 없다. 

유혹의 시작이다. 

 맥베스는 충성스러운 기사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왕이 죽고나면, 어쩌면 왕위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이 나타난다. 지금 해치우지 않으면 왕위의 영광은 영원히 멀어지리라. 

유혹의 시작이다.


 게르만은 고민한다.

 것인가,  것인가.

부랑자를 속여보려고 했지만 간단히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계획은 실패다. 최악의 인간이다. 게르만은 도망친다. 그러나 운명은 놓아주지 않는다. 기어코 운명은 펠릭스를 게르만의 앞으로 다시 이끈다.

 맥베스는 고뇌한다.

 것인가,  것인가.

미련한 욕망을 떨치고 내려놓으려고도 생각해보지만 마녀들은 유혹한다. 운명은 너의 것이라고. 쐐기를 박은  아내다. '지금이에요, 해치워 버려요!' 맥베스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게르만은 후회한다.

완벽했다고, 그보다 나은 선택은 없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실패다, 이보다  처참한 실패는 있을  없다.

  줄,   단어가 게르만을 파멸시킨다.

아니다.

실제로 게르만은 파멸한지 오래다. 부랑자 펠릭스와 마주친 순간, 이미 파멸해 있었다.


 맥베스는 후회한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스스로를 저주한다. 

그러나 전쟁이다. 여자가 낳은 사내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한다. 

무적의 맥베스.

 사람,   명의 사내를 몰랐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이미 운명은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이유로 나는 <절망>을 읽으며 <맥베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실제로 등장하는  <죄와 벌>  라스꼴리니코프요, 푸쉬킨의 시인걸.

터무니 없는 오독이다. 

오독의 즐거움의 중독이다.


 열여덟, 러시아 혁명의 참화 속에 러시아를 떠나는 나보코프를 떠올린다. 

스물셋, 극우 테러리스트의 총에 아버지를 잃는 나보코프를 상상한다.

뒤틀리고 비꼬인 천재, 불신과 망상, 어쩌면 복수를 꿈꾸는 청년을 그려본다.

자신만만한 동시에 나약하며, 당당함과 비굴함을 천형처럼 품은 언어 유희의 마법사를 읽어나간다.


 무엇이 남는가?

절망이다. 

읽어도 읽어도 내가 무엇을 읽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아니다. 솔직히는 터무니 없이  읽었다는  안다. 

   읽어 넘기고는,  분,   분을 생각해보고는 오만하게 질문을 던지다니.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터무니 없다. 

그러나 읽기는 즐거웠다. 

혼란스럽기까지  언어 유희와 의식의 흐름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자신과 자신의 힘과 운과 운명의 인도를 믿고, 너무나 거침 없이 파멸로 나아가는 게르만.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 확신이 우스운만큼 나를 괴롭게 한다.


 단  줄도,   단어의 실수도 있어서는  된다. 

 줄이,  단어가 모든  망쳐놓으리라.

그러나 나는 나에게 관대해져야만 한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천재는,

오직 천재만이,

  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특권을 지닌다.


'절망'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터무니 없는 감상을 거리낌 없이 마칠 수 있다.

끝.


-아아, 나는 얼마나 오만한가. 

-그런들 어떠한가.

-쓴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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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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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종교적인 의미에서 던진 질문은 아닙니다. 

육신의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다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 조금씩 때 묻어가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질문을 던진 이유는 이제부터 선함의 회복, '부활'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레프 톨스토이, 거장의 작품다운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부활>_첫 문장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공작 가문 상속자로 부족함 없이 자라온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입회한 재판에서 어린 시절 함께 자랐고, 한때 사랑했던 마슬로바와 재회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이 재회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로 마슬로바가 이 상황에 놓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마슬로바와 네흘류도프는 신분이 달랐죠. 순수했던 사랑의 감정은 한순간의 욕정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습니다. 거기에 더해 네흘류도프가 집을 떠나 있던 동안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들킨 마슬로바는 쫓겨나고 맙니다. 마슬로바는 아이를 낳지만 오래지 않아 아이는 죽고 맙니다. 이후 가정부와 매춘부 일로 삶을 이어가던 마슬로바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고, 진범들의 공모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던 겁니다. 
 네흘류도프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씻기 위해 마슬로바와 결혼하여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시베리아 형무소든 어디든 이제부터는 함께 하며 평생 속죄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겁니다. 네흘류도프가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습니다. 매력적인 여성을 굴복시키는 게 자랑처럼 여겨졌고, 젊은 혈기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서 순수함을 잃었던 겁니다. 네흘류도프는 마치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으려는 듯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속죄를 시작합니다. <부활>은 심경의 변화와 내면의 갈등, 외부 세계와의 마찰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봄이 되면 세상의 만물이 깨어납니다. 얼어붙은 땅이 녹고, 말랐던 가지에 꽃이 피고, 잎이 나죠. 

길었던 겨울을 생각하면 기적처럼 느껴지는 부활의 시절, 회복의 시기에 매년 놀라게 됩니다. 자연의 섭리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겨울처럼 차고 메마른 마음도 부활과 회복의 시간은 찾아오는 걸까요? 


 네흘류도프는 처음에는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와 태도를 거부하고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투쟁합니다. 세상은 선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에게는 악처럼 느껴지는 가치들을 받아들이지 않죠. 하지만 결국 네흘류도프는  투쟁에서  패배합니다. 패배한 이후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도, 스스로를 믿는 일도 없이 세상이 원하는 것, 세상이 믿는 것을 행하며 껍데기처럼 살아가죠.  

 마슬로바와 재회하게 되면서 껍데기로 덮여있던 네흘류도프는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외면했던 농민과 민중의 고단한 삶에 눈을 돌리게  거죠. 잃어버린 선함과 순수함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네흘류도프의 노력은 이중의 장애물에 부딪힙니다. 하나는 귀족 사회의 조롱과 비난이었고,  하나는 농민과 민중의 의심과 욕심이었습니다. 귀족 사회의 지인들은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라며,  혼자만의 노력으로 달라지는  아무것도 없다고 충고합니다. 

 농민과 민중은 네흘류도프의 저의를 의심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게 되기를, 빼앗기지 않기를 바라는 추한 욕심을 드러냅니다. 팍팍한 삶이 그들로 하여금 그악스럽게 만들었던 거죠.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의 거절과 의심과도 마주칩니다. 자신을 버린 남자,  년이나 천하고 더러운 삶을 감내하게  남자를 다시 믿기 어려웠습니다. 거기에 더해 마슬로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를 사랑했기에 곤란한 처지로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었죠.  선한 사람들입니다.


 네흘류도프 안의 선함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순수함도 그날 함께 죽었죠. 어떻게 생각하면 네흘류도프의 변화는 회복이 아니라 변덕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권위와 특권을 내려놓고, 속죄하는 모습은 감동마저 느끼게 합니다.


 <부활>은 개인의 회복, 속죄라는 의미에 머무르는 작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와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대한 담론을 담고 있죠.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하는 많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관행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부당한 대우, 그릇된 인식에 더는 면죄부를 줘서는  됩니다. 

'다 그렇게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는 억지 논리가 망치는  현재만이 아닙니다. 미래까지도 어둡게 하죠.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너무 많은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시작하기 주저하거나 어렵게 여기는    자체가 어려워서  수도 있지만,  일을 세상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수없이 되묻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올바른 선택인가?"하고요. 

그러다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는 이러한 어러 가지 문제들을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고 모든 것이 너무나 단순한 데 놀랐다. 그 이유는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리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으나 남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활> 중

 이 깨달음은 부처나 예수 같은 성인의 깨달음과 닮아있습니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하찮게 여기고, 세상과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보통의 사람에게 이런 경지를 요구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선 생각,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고 또 삶에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저부터도 늘 두려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이것을 한다면, 혹은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나를 어떻게 볼까?"

솔직히 이겨내거나 떨쳐버리기 어려운 질문임을 고백합니다. 

얽매이지 않는 게 얽매이는 일보다 어렵다는 건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애쓰는 중입니다. 그래서 작은 변화라도 실감하는 날에는  기쁨을 얻고는 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나는 걸까요? 

죽어가기 위해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나는 거겠죠. 

나만을 위한 삶과 욕망에 충실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나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삶이 결코 행복한 삶이   없다는 걸요.


 봄이 깊어갑니다. 

산과 들, 숲과 내가 깨어납니다.

우리의 마음도 오래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죽은 듯했고, 너무 늦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변화와 회복의 시기를 앞에 두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계, 타인이 만들어 둔 가치와 체계를 무조건 적으로 따라가며, 나의 생각, 나의 바람을 버리고 살던 삶과는 그만 이별해야겠습니다. 

 지금은 봄, 계절에 부끄럽지 않게 깨어나고 자랄  있도록 조금  애써보겠습니다.

바야흐로 부활, 오늘은 부활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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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어느 왕국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습니다. 언니 이름은 엘사, 동생 이름은 안나입니다. 엘사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는데, 얼음 마법을 쓰는 거였죠. 종종 엘사는 마법을 써서 안나와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히도 안나가 엘사의 마법에 맞아서 병이 들죠. 엘사는 자책하며 안나와 거리를 둡니다. 마법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마법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얼어붙은 듯한 시간이 흐릅니다. 오랜 시간이. 그리고 운명의 날, 안나는 처음 만난 이국의 왕자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엘사는 깜짝 놀라죠. 하지만 안나는 사랑 한다며 결혼하겠다고, 운명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엘사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엘사는 얼어붙은 마음으로 도망칩니다. 길고 긴 겨울, 겨울 왕국의 시작이죠.


 앞서 적은 건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운명과 분노> 이야기를 할 것처럼 굴어놓고는 엉뚱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으니 조금은 당황하셨을까요.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이야기는 닮아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품고 있는 두려움과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운명과 분노>는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과 축복 속에서 자란 남자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환상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을 잊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죠. 

남동생의 탄생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한 여자는 남동생의 죽음과 함께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세상에 기댈 곳도, 의지할 데도 없이 내팽개쳐지죠. 

 여자는 자기 힘으로 공부를 하고, 등록금을 만들어 대학에 갑니다. 

남자는 대학에 갑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녔고, 졸업을 앞두고 처음 만난 날 결혼을 약속합니다. 

 여자의 이름은 마틸드, 남자의 이름은 로토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새긴 상처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로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죠. 감추려고 한 건 아니지만 굳이 밝히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삶의 동반자가 됩니다. 

 트라우마를 품고 사랑을 시작한 거죠.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마법 능력을 숨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엘사에게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상처 입힌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야기할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슬픔을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 통제되지 않는 마법 때문이었죠. 엘사는 통제되지 않는 마법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마법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사람으로, 착한 아이로 남아야 하니까요.


 <운명과 분노> 속 마틸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한계까지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누구에게 다가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혹독할 만큼 엄격하게 행동하죠. 그런 마틸드에게 유일하게 예외가 된 사람이 로토입니다. 빛이 나는 남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남자죠. 엘사가 마법을 감춘 것처럼 마틸드는 과거와 속마음을 감춥니다. 로토가 떠날까 봐 두려웠거든요. 

 이제 마틸드에게는 로토뿐입니다. 로타가 마틸드의 전부죠. 마틸드는 로토의 엄마조차 자신에게서 로토를 빼앗아갈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운명이 훼방하지만 않는다면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적인 존재, 천생연분으로서 말이죠.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운명은 언제나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들의 발목 붙잡기를 즐기니까요.


'트라우마'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신에 남아 영구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일컫는 말입니다. 극적인,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죠. 

 <겨울 왕국> 엘사가 마법으로 안나를 상처 입힌 기억이 트라우마입니다. 오래오래 마음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고 끊임없이 상처를 키우게 만들죠. 

 <운명과 분노>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로토에게 트라우마가 됩니다. 마틸드에게는 어린 시절 전부가 트라우마죠. 


 로토의 분노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거듭되는 불행과 불운 앞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로토의 곁에 있는 마틸드는 분노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항상 분노하죠. 로토 몫의 분노까지 자기 것으로 삼은 것처럼요. 언제나 불안에 떨며,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자기 내면으로 숨어드는 마틸드는 언제까지나 다섯 살 어린아이로 남습니다.


 <겨울 왕국>에서 엘사의 두려움, 분노를 치유하는 건 사랑입니다. 언제나 지키고 싶었던 존재의 헌신, 희생이 기적을 일으키죠. 그리고는 동화처럼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운명과 분노>는 동화가 아니죠. 소설이기에 현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지만 더 엄격하고 혹독한 이야기입니다. 운명은 마틸드를 절망의 바닥에 떨어뜨릴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죠.


 저는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죠. 치유되거나 치유되지 않은 채, 해소되거나 해소되지 않은 채, 행복을 되찾거나 여전히 불행한 채 그렇게들 살아가는 거죠. 이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고, 언제나 행복한 웃음을 웃지 않는다고 병들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에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사람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괴테가 말했듯이요. 

트라우마라고 말해버리면 그 앞에서 손 쓸 수 없이 무력해질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성장, 방황, 애쓰는 과정이라고 고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 지기도 하죠.


 트라우마는 사람을 솔직할 수 없게 만듭니다. 겁내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하죠.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순간에도 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에는 원망과 분노만이 앙금으로 남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트라우마의 폐해입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영원한 고통이라는 저주. 더더욱 트라우마를 인정할 수가 없죠. 


내면의 아이를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나'를 신뢰하는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겨울 왕국> 속 엘사의 사랑스러운 동생 안나와 같은 존재 가요. 하지만 그런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운명과 분노>에서 마틸드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로토는 그런 마틸드를 더 아끼고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뭐라든 두 사람은 '운명의 연인'이었으니까요.


분노한다는 건 출구가 불확실하거나 없는 동굴로 자기를 이끌고 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며, 입을 막게 만들죠. 철저하게 고립되려고 하면서, 세계로부터 오는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모순이 분노에는 담겨 있습니다.


 기이한 건 <운명과 분노>가 해피엔딩인지, 새드 앤딩인지, 열린 결말인지 모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명백하건만 모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왜인지.


  운명에 분노하든지, 운명 앞에 무력하기만 한 스스로에 분노하든지, 그런 운명으로 몰아간 세상과 사람들에 분노하든지, 그 분노는 언젠가 나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그러니 분노를 경계하시길. 불태우기 위해서는 불살라질 각오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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