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 복잡한 세상, 나를 지키는 자유의 심리학
마이클 해리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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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야 할 필요도없고,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을 회복해야만 한다. 고독은 자발적인 홀로있음이며,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는 흩어지고 지워진 나의 조각들을 되찾아야 한다. 내가 아닌 그 무엇으로도 나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른가?

이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외로움이 불러 일으키는 비참함이었다.  

고독은 찬란할 수 있지만 외로움은 비참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이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감옥에 붙은 낭만적 이름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고, 연락 없이도 지인들의 근황을 알게 되며, 계정 하나만 만들면 낯모르는 무수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세상.

 이토록 다양한 연결 속을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풍요 속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왜 자꾸 외로워지기만 하는 걸까.

 함께 있지 않기에 외로운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다. 그때는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연결되기만 하면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기만 하면 외로움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거라고 말이다.

 

 심심함은 게으르고 나태한 쓸모없음의 증거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쉼 없는 근면과 부지런함이 미덕으로 칭송받던 시대는 저물었다.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놓았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다. 사람은 혼자일 수 없기에 외로움을 느낀다.

심심함, 게으름, 나태함을 철저하게 박살냈듯 관계, 성공,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고독을 외면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사람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타인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사르트르처럼 '타인은 지옥이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타인의 존재가 고통을 주는 건 나 자신보다 타인이 존재 우위에 있을 때다. 주체성, 독립성을 잃고 휘둘린다면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나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수용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나의 존재를 긍정해줄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해도 외로움이 나를 집어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에서는 얕은 존재 의식, 깊이도 무게도 없는 사교 행위로써의 관심을 '소셜 그루밍'이라고 칭한다. 잠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쓰다듬 말이다. 지속될 거라는 확신보다 언제든 그칠 수 있다는 불안이 더 큰, 목이 말라 바닷물을 들이켜듯 점점 더 관계의 갈증을 키우는 노력이 SNS와 커뮤니티의 모습으로 확장되고 장려된다. 넓고 얕은 관계에 휩쓸려 나도, 우리도 잃어간다. 마침내 우리는 조금 더 외로워진다.


 어떻게 지독한 외로움을 끝내고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소로처럼 오두막을 짓고 홀로 지낼 수도 없는, 정보와 연결의 홍수 속에서 무엇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있을까.


 이 시대에 연결을 거부한다는 건 덜하게는 괴짜로, 심하게는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기를 자처하는 게 된다. 다들 읽는 책을 읽어야 하고, 다들 본 영화를 봐야 하며, 다들 아는 건 나도 알고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시달림이 차츰 나를 갉아 들어온다.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잠시라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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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 안녕 - 190만 팔로워가 사랑한 시바견 마루의 하루
오노 신지로 지음, 하진수 옮김 / 경향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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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스타그램에 욱일승천기를 당당히 그려 올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책이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니 씁쓸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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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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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일요일 오후였다. 

1시 32분. 

날씨는 조금 흐림. 

특별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시간. 

1시 33분이 되기도 전에 잊어버릴 의미 없는 한때였다.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이쪽 편에 두 명, 건너편에 네 명. 일곱 명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27초 후에는 초록불이 켜질 테고, 이쪽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저쪽 사람들은 왼쪽으로 엇갈리듯 도로를 건널 거였다. 

 20초, 5초 후에는 보행 신호의 초록 불이 점멸 신호로 바뀔 테고, 다시 15초 후에는 이쪽 신호에 불이 들어올 거였다. 건너편에 묘한 생물  마리가 어슬렁 거리는  발견한  그때였다. 

 비둘기.

어떤 이에게는 혐오의 대상으로, 어떤 이에게는 공포로, 어떤 이에게는 놀잇감으로, 어떤 이에게는 먹이.. 흠흠, 흔한 도시의 비둘기  마리였다.

 산만하게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도는 비둘기들. 흔히 보이는 비둘기인데 묘하게 시선이 갔다. 

'먹이라도 찾은 건가?'

 보행 신호가 켜졌다. 차들이 멈췄다. 생각도 멈췄다. 기다리던 이들은 건너기 시작했다. 

'음?' 

 비둘기 한 마리의 움직임이 변했다. 

길을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렇게 보였다. 

 오른쪽에서 앞으로, 앞으로. 종종 거리는 걸음으로 건너편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럴 리가?'

길을  건너고도 비둘기에게서 시선을  수가 없었다. 

중앙선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비둘기는 길을 건넜다.   

보행 신호가 꺼졌다.

솔직히 놀랐다. 스쳐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 싶었다. 

그 설마였다. 

'신호를 받아서 길을 건너는 비둘기라니.'

  놀랐다. 

비둘기는 새다. 새는 난다. 새에게는 날개가 있다. 나는  새다.

'모처럼의 날개를 쓸모없게 만들다니.'

또 한 번 놀랐다.

 번째 놀람의 이유는 '의외성'이었다. 

 번째 놀람의 이유는 '멍청함'이었다.

지금 새삼스럽게 놀라워하게   하나  있다.

'신호를 받아서 건너는 비둘기  마리가 뭐라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넋 놓고 쳐다볼 정도로 놀랐던 걸까?'

모를 일이다.


 꾸준히 참여하는 독서 모임이   있다.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독서 모임 전부 같은 책을 읽고 모이는 형태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보통  가지 때문에 놀라게 된다.

 번째는 비슷한 부분, 표현에 공감하고 닮은 생각을 떠올린다는 거다. 

나이도, 성별도, 상황도 저마다이건만 유사성은 언제나 드러난다.

 번째는 너무나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는 거다. 같은 작품을 읽었는데 어떻게 그럴  있을까 싶을 만큼 다르다. 

  

 첫 번째와  번째는 모순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언제나' 유사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너무나'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있을  없는 일은 아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런 것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오해하고 후회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나 '알고 모름'에 있어서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오직 신만이 '옳고 그름'과 '알고 모름'에서 자유롭다. 신이 모든  알고, 절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전지전능을 말하려고 하는  아니다. 흔히 인간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나 '알고 모름'이라는 개념이 신에게는 없을 것이기에 자유롭다는 거다.


 <풀베개>는 나쓰메 소세키 장편 소설 가운데서 가장 회화적인 작품이다. 

색채, 정경의 묘사, 인물의 행동. 

날씨와 풍경, 계절까지 눈으로 보듯 그려낼  있을 만큼 감각적인 표현으로 그득하다. 

묘사만 기가 막혀서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울리게  거다. 

문장마다 섬세한 사유가 차고 넘친다.  놀라운 건, 표현 자체만 두고 봤을  어렵거나 난해한 부분이 거의 없다는 거다. 쓰는 사람도 즐기기 위해 쓰고, 읽는 이도 즐기며 읽을  있는 이야기.

그게 <풀베개>다.


 페이지를 인용한다.

이지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중략)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가까운 이웃들과 오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옮겨 갈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일 뿐이다.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욱 살기 힘들 것이다.
<풀베개> 

소세키가 이야기 속에 그려낸 100년  일본에서도 일본이 살기 힘들다고 이야기한 이들이 있었나 보다. '보통 사람들', '이웃들'이 만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나 보다. 소세키는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가까운 이들, 보통의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모르는 이들, 낯선 사람들이 만든 세상살이는 쉬울  같으냐고.

  

 <풀베개>는 어느 서양화 화공의 이야기다. 일본인 이면서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화를 그리는 화공. 

그림을 그리겠다고 화구를 챙겨 메고 산을 넘어왔으면서 실제로는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는 화공. 

붓으로 화폭에 풍경을 담기보다 펜으로 일본의 단가, 하이쿠를 읊는 화공. 

밖에서 보면 태평스럽기만 하고 전혀 화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화공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묘한 분위기와 행동을 거듭하는 나미라는 여성. 

 여성은 화공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자, 시와 그림의 주제가  '재료'다.

어떻게 사람을 '재료'라고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대답은 '그럴  있다'다. 


인간,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도구로, 재료로 삼는 건 그릇된 일이다. 하지만 <풀베개>에서 화공이 거듭 강조하는 경지, '비인정(非人情)'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권장되는 자세다. 

곤란과 기쁨 심지어는 고통에서조차  걸음 떨어져 객관화시키는 일.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신의 시선으로 시간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그것이 '비인정(非人情)'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접했을 가르침이다. '곤란함, 어려움에 함몰되어 당황하기보다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해결책이 보이기 마련이다라는 식의 가르침' 말이다.

간단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들어본  없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비인정(非人情)이라는 개념을 몰라도 <풀베개>를 읽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다. 

 <풀베개>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과도 결을 달리 한다. 줄거리에 얽매이기보다 작품  문장과 표현, 묘사를 즐기기를 바라며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든  페이지가  편의 그림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면 그걸로  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몰인정한 게 아닙니다. 비인정(非人情)하게 반하는 겁니다. 소설도 비인정으로 읽기 때문에 줄거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겁니다. 이렇게 제비를 뽑는 것처럼 착 펴서 펼쳐진 곳을 멍하니 읽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풀베개> 

  

소세키 작품에서는 드문 일인데, 작가가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줄거리 같은  아무래도 좋'다.

'제비를 뽑는 것처럼  펴서 펼쳐진 곳을 멍하니 읽는' 재미를 즐겨달라. 

이렇게 해주기를 바란 게 아닐까.


그런 이야기다 보니 <풀베개>를 읽으며 느낀 감상을 구구절절이 적을 수도 없다. 

적을  없지만 이대로 끝내버리면 여기까지 읽은 이를 깜짝 놀라게 하고 말 테니,  곳을  발췌해 적기로 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한 사람 앞에 몇 평의 지면을 주고 그 지면 안에서는 눕든 일어서든 멋대로 하라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다.
<풀베개> 


앞서 태평해 보이는 화공의 이야기라고 적었던 걸 정정한다. 
인용한 '현재의 문명'은 100년도 더 된 과거의 '현재'다. 

현재의 '현재'와 다르지 않은 풍경, 과거의 '현재'보다 더 가혹할 현재를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놀라고 만다.

마치 "이것이 문명의 속성이다. 내가 소세키다."라며 무력시위라도 하는 듯하다. 

읽을 가치를 보장한다고,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재밌을 거라고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처음 <마음>을 읽은 날부터  편애하는 작가라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는 말할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 권해도 실패하지 않을 작가라고 믿는   되는 작가  하나 이기도 하다. 


소세키의 이야기  무엇이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라는 문장을 이끌어 냈는지, 읽은 의미가 있었는지 저마다의 대답을 들려줬으면 한다. 

 대답에 다시 한번 놀랄  있었으면 한다. 

함께 하면 즐거운  속에 같은 작품을 읽고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는 일이 있어서 행복하다. 


 나란 인간만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게 무엇에든 달관하기가 쉽지 않다. 

달관하기 쉽지 않은 인간이지만 묘하게도 책 이야기만은 달관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달관은 무척 달다.


 비인정(非人情)은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소설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지만 소설이기에 조금은 차분히, 조금  깊이 받아들이고 생각할  있다. 

다른  아닌 이것이야말로 달관이 아닐지.


 좋은 이야기를 나눠주는 이는 언제든 환영이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와 누구의 이야기와 만나게 될지 벌써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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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1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에서 읽었는데, 《풀베개》는 실제로 잘 안쓰는 한자나 옛말 같은 것이 팍팍 들어있는,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도리어 일본인들한테는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는 헷갈리지만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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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비록 제가 페미니즘에 얼마쯤 관심이 있고, 관련 책을 몇 권쯤 찾아 읽었으며, 차별적인 행위들에 분노를 표하고, 들리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고 해도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제목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적었는가 하면, 이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말미에 이런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이란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권력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일 뿐이며, 페미니스트는 그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중

페미니즘을 설명하고 논쟁에 지지 않을 만큼의 지식과 논리를 갖추고, 어디에서 열리는 집회나 강연에 참석하지 않아도, 성별에서 발생한 권력의 불균형을 인정하고, 그 불균형이 만들어낸 온갖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마침내는 그 불균형이 사라지기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제 이해가 아주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혹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꼭 바로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이유는 제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 주었습니다. 


"누구는 페미니스트야."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거죠.


별 거 없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이번 기회에 페미니스트가 되어보기로 한 거죠.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온라인 서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에 달린 평을 읽게 된 거죠.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구매'라고 적힌 글들은 하나같이 평점이 높은데 반해 '구매'가 없이 적은 글들은 '별 하나도 아깝다'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거죠. 내용도 비슷비슷해서 평점이 높은 글들은 '꼭 읽어보라'라고 권하는 반면 평점이 낮은 글들은 내용은 물론 책 자체를 폄하하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흥미가 생기더군요. 

 '이건 꼭 읽어봐야 해'라는 생각으로 바로 주문을 했고, 그렇게 빨리 오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당일 배송으로 저녁에 받게 됐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에 붙은 부제는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입니다. 부제에 걸맞게 '대화를 하다가 말문이 막힐 때 바로 쓸 수 있는 실전용 매뉴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라고 소개하고 있죠.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시작은 '대화법'이 아니라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군가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서,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반드시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상대에 따라,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자신이 대화할 상태가 아니라면 단호히 거절할 수 있음을 전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종종 원치 않는 대화를, 내키지 않는 상대와, 원하지 않는 순간에 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쁘거나 무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거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거나,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싶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반드시 사라져야 할 상황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순간에 대화의 주도권, 선택권은 '나'에게 있음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거죠.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강하며, 심지어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논쟁을 하는 건 너무나 힘겨운 일이며 설사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거나, 납득시켰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너무 지치게 되거나 반대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 대화는 득 보다 실이 더 컸다는 겁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실전 매뉴얼답게 여성들이 흔히 마주하게 되는 차별적인 대화의 상황에서의 대처 요령을 다양한 상황에 맞게 알려줍니다. 언제든 대화를 끝낼 수 있으며, 처음부터 대화에 응하지 않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전제로요. 


 저는 남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자랐습니다.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남성 중심 사회의 분위기에서 살며 오랫동안, 마치 공기처럼 차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모른 척 외면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나 하나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거죠. 나름 배려한다는 생각이 남자니까 여자를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수준이었으니 한심했습니다. 


 페미니즘, 차별, 혐오에 관심이 생기면서 몇 권인가의 책을 읽어도 보고 얘기도 나누며 현실을 조금 더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으며 제일 크게 느낀 건 부끄러움이었는데, 저 역시 가해자라는 신분에서 자유롭지도 떳떳하지도 못함을 순간순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호감을 표현하는 거라며 잡았던 손목,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식의 스킨십, 자연스럽게 내뱉곤 하던 반말. 

 격의 없고 친밀한 사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그런 사이라고 해도 조심해야겠고) 흔히 여성들이 겪는 당황스럽고, 두렵고, 수치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배경은 성별에 따른 불평등, 요즘에 대두된 '여성 혐오'의 문제가 가장 결정적입니다. 혐오라는 표현에 이의를 달고, 불만을 제기하는 이들이 존재함에도 혐오는 실재하는 현상이지 과장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특히 남성들이 '혐오'라는 표현을 거슬려하는데 저자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당신이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혐오라는 말을 불쾌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도 맞는 말로, 지적할 곳이 없는 말이죠. 이 '혐오'라는 표현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혐오'가 만연한 증거라는 거죠. 


 제가 뭘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어차피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시작부터 '무슨 소리야?' 싶었을 테고, 그나마 맥락을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제 어지러운 말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조금 더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는 동안 많은 순간에 '성 불평등'을 경험했습니다. 쉬운 예부터 들자면 저는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일이 잦습니다. 때로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걷게 될 때도 있고 종종 가로등이 꺼진 곳을 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에, 그 많은 날들에 두려움이나 걱정에 시달린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 사이코패스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서 칼이라도 휘두르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아 아니라면 일상 속에서 공포를 느낄 일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그 모든 순간이 위험이고 공포라고 합니다. 

 책에서 거듭 언급하는 사례가 '모든 남자가 잠재적인 범죄자는 아니다'라는 논리인데, 여성에게는 그 논리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억지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체력과 근력에서 남성이 여성을 압도한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너무 많은 상황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곤란을 겪어 왔기에 남성의 논리로 여성을 안심시키고 설득하겠다는 건 여성의 경험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겁니다. 한 번도 여성으로 살아본 적 없는 남성이, 여성의 경험을 무시하고 조언하고 설득하며 가르치려고 든다는 것부터 문제라는 거죠.


 이런 상황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 1층에는 짜글이 집이 있습니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사장님은 영업을 끝내고 가게를 정리하고 계셨죠. 그냥 봐도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년 남자 셋이 가게로 향하더군요. 그러더니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줌마, 영업 끝났어요?"

사장님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상황이면 아직 영업 중인 다른 식당을 찾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싶었는데 그 남자분들의 상식은 좀 달랐던 모양입니다. 먼저 물었던 사람이 다시 말을 던집니다.

"아, 여기서 좀 먹고 가면 안 돼요?"

'돼요?'였는지 '되나?'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몇 번 더 물어보면 먹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장님은 물론 곤란해했습니다. 영업이 끝났다고 하는데 다짜고짜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으로 거듭 물어오는 아저씨가 불편했겠죠. 제가 본 건 거기까지였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가게 주인이 남자였다면, 그 중년 남자들은 영업하느냐고 물어봤을까?'

'물어봤다고 해도 안 된다고 했을 때 거듭 물어봤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 그랬을 거다. 

 

 데이트 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여성 이야기가 자꾸만 들린다. 그동안 그런 사건이 없었다기보다 공론화되지 않던 사건들이 최근에 더 자주 노출된 거라고 생각한다. 한 의원은 데이트 폭력 방지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에서는 '여성 혐오'논란에 '남성 혐오'로 맞서는 이들의 논리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두 가지,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남성 혐오'의 결과는 기분이 상할 뿐이지만 '여성 혐오'의 결과는 목숨을 잃는다는 거였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이다. 작은 기득권조차 내려놓지 않으려는 남성들, 차별과 혐오의 존재를 부정하며 부추기거나 방관하거나 자행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언어가 절실하다는 거다.


 사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기에는, 선언하기에는 부족한 '남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려는 일이 적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 혹은 핑계를 만들기도 하며, 합리화하거나 내 생각 중심의 논리로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여성의 처지에 놓여본 일이 없으면서 아는 척, 공감하는 척, 이해하는 척하기도 한다. 물론 노력하고 있다는 건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거리, 격차는 존재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사실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고작이다. 


내 손으로 평등을 완성하겠다거나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거나 혐오를 일소하겠다는 포부 같은 건 없다. 앞장서서 시위를 할 계획도 없고, 그래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나는 다만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내 손바닥만큼의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손바닥, 손에 잡히고 팔로 안을 수 있을 만큼의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역시 페미니스트다.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불평등과 차별이 만들어 낸 혜택의 수혜자로 자랐음을 안다. 반성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떠올랐는데, 이것도 참 부끄러운 이야기다.


 <82년생 김지영>의 감상에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잔뜩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고는 나름 만족하고 있었을 때였다. 어떤 분이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글 쓴 분의 여성관이 어떤 건지, 오히려 그 여성관에 사로 잡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82년생 김지영>의 감상문 제목은 '여자는 그래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다. 함정에 빠졌던 거다. 착각하고 있던 거다. 잔뜩 공정한 척, 깨어있는 척, 허영에 부풀었던 거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건 잘못이었던 거다.

 당시에는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부인했다. 내가 쓴 글을 곡해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과연 곡해한 건 누구였는가.

 

 결론은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 해도 얼마간 반성해야 할 만큼의 여지는 있었다는 거였다. 분명 감상을 쓰던 순간의 나는 어떤 '여성관'을 갖고 글을 썼으며, 그 '여성관'이 결코 완전히 평등하다고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때 감상을 쓰는 이유를 그때의 생각, 깨달음, 의지, 해석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고 말하곤 했는데 만약 그 생각이 잘못이었다면, 그래서 그 생각으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래도 나는 자유라고 말하며 '나의 자유'를 행사해도 되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내 생각을 쓰는 자유에 회의를 느꼈다. 참, 새삼스럽게 두껍지도 않은 책 한 권을 읽으며 많은 걸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앞으로 조금 더 말과 행동, 글에 주의를 기울일 거고, 잘못이나 실수가 있다면 정정할 것이며, 조금 더 읽고, 듣고, 배우고, 이야기 나눔으로써 부족함을 채워나갈 거다. 이게 이 책을 덮으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할 말은 많은데 논리에서 자꾸 말문이 막혀서 답답한 이들이 읽고 연습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속 시원히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딱 내 손바닥만큼, 아직 나는 내 손바닥만한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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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2019-08-25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본인이 쓰신 글 맞나요? 안녕하세요. 눈치보여서 댓글 달기가 무서웠는데.. 역시 알라딘이라 그런가.. 타 온라인과는 다르게 책을 가까이두는 지성인이 많아 그런지 글들을 보면 신사숙녀가 많네요. 댓글을 달아도 안심됩니다.. 사실 이런 내용을 입안으로 꾹꾹 눌러담고 산지 십여년이 된 것 같네요. 입밖으로 꺼낸지가 언젠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실제로 현실에선 여자가 성폭행을 당해도 여자를 욕합니다. 제가 실제로 여러일을 겪고 살면서 버팀으로 버티고 있는 산증인입니다.동정? 실제론 그런거 없습니다. 더한일을 겪으면 겪었죠. 세상, 생각보다 미화된 일이 많고. 생각보다 아픕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런 사상을 가진 남성분이 있다니 놀라울따름입니다. 현실에선 페미니스트란 말도 못꺼내요. 안좋게봐요. 눈치만 보고 제 몸 사리게 되는데.. 감동받고 용기도 얻고 갑니다. 멋지십니다.

대장물방울 2019-09-18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감동까지,,
한참 멀고 멀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감사합니다.

2020-06-11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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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만 봐도 별3개 이하를 준 사람들은 ‘구매‘ 확인이 안 되는 사람들인 반면, 실제 구매한 것으로 표시되는 ‘읽은 것‘이라고 추측되는 이들의 별점이 높은 걸 보며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극명한 문제는 들여다볼만 하다. 예상별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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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센터로 2020-07-11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도서관에서 봤을 수 도 있다고 생각하며 나같은 경우에도 도서관에서 이상한 책 있으면 알라딘이나 교보문고앱에다가 쳐서 댓 올릴때있음... 그리고 다른생각 가졌다고 틀린생각이라고 받아드리면서 그걸 강요하는건 좀...

대장물방울 2020-07-16 01:24   좋아요 0 | URL
논지를 벗어난 댓글입니다. 댓글을 쓸 생각이면 자기 관점에서 판단하지 말고 댓글 관점에서 해석하시길 권할게요. 굳이 짚어드리면, 제 글 어디에도 누군가 ‘틀렸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부터 억지스럽고 덧붙이면 ‘들여다볼만 하다’는 평이 강요라고 느끼는 것도 지나친 비약.

몸냥 2024-09-18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 가치가 있어야 사죠. 뭐하러 돈주고 삽니까. 그냥 서점에서 살펴봐도 판단이 끝나는 것을

몸냥 2024-09-1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상 페미니즘에 비판적인 서적은 비구매자들이 악평을 매우 많이 달던데 그런 건 절대 언급하지않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