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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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시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물어보곤 했다. 하지만 그 답은 언제나 중심에 닿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다 흐려지고 옅어져 흐지부지 뭉그러지기를 계속했을 뿐 분명한 답이 되어 나오는 일이 없었다. 시에 대해 혹은 문학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일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이 책이 특별한 의미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책은 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시의 힘'이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에 참고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힘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답을 기대하며 읽지는 말기를 먼저 부탁하고 싶다. 시니 문학이니 하는 것의 보편적인 정의는 언제까지고 '나의 정의'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도 보편적일 수 없다. 평범한, 흔히 '보통'이라는 수식어 뒤에 이어지는 개인조차 보편적이기보다 특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마음에 남는 것이 '특수'하기를 기대하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책이다.


 처음으로 시를 읽은 것이 언제인지 그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학교에서 배운 시가 처음으로 읽어 본 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십 중 팔구는 그 생각이 맞을 거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 시와의 만남을 시작한 결과는 대단히 안타깝다. 애초에 정답이 없이 마음 가는대로 읽어도 좋았을 시에서 '정답'을 찾아가며 읽고는 했던 거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혹 그렇게 느끼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하고 말게 된 거다. 결론적으로 시는 '난해한 것' 혹은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데에 우리나라의 국어 교육이 끼친 부작용이 적지 않다. 

 <시의 힘>을 읽으며 가장 절절하게 느낀 것은 아마도 저자의 의도와는 다를 것 같은 '교육'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그 다음이 '마음'이다. 먼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재일 교포 2세인 저자가 저자의 부모님이 전쟁 당시 일본에 본의 아니게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교육받지 않았기에' '국가를 대상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 것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배워야 한다'말은 '배우는 것이 좋다'는 전제에 뿌리를 둔 주장이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배우는 것 역시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배우고 그 가운데서 선택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정규 교육에서는 이 선택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거다. 한국만의 독특한 경향일 지 모르지만 '암기'와 '주입식' 교육의 폐해는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고, 이제는 영영 고쳐질 것 같지 않다. 결국 시 역시 '외워야 할 것' 혹은  '정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되어 독자와의 거리는 자꾸만 멀어지기를 계속하는 거다. 시를 배움으로써 배우지 않은 것보다 못하게 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을 생각해보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뿐 아니라 그 외에 우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 배우고 있는 많은 것들을 어떻게 보고,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의 필요성이 더 분명해지는 거다. 


 이 책의 제목은 <시의 힘>이지만 '시'는 문학, 혹은 지식, 정보와 같은 커다란 가지 가운데 하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의미를 품고 무엇을 남기는지를 살펴가면서 자신의 경험들(재일 조선인으로서의 고단함, 가치의 혼란, 디아스포라 의식,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이후 일본의 대응 등)을 접목시켜, 시인의 표상과 표현을 독자가 해석하는 것처럼 사회의 현상과 흐름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다.


 디아스포라, 즉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 흩어져야했던 이들이 겪는 가치의 혼란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알기 힘들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같은 처지에 놓여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너무 멀고 막연한 이야기라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반대로 아직까지 식민지와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직접적이고 생생했기에 직시하기 어려운 막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시의 힘은 멀리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끌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를 두게 해서 대상을 객관화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런 움직임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건 혹은 상태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는 거다. 

 "이미 지나간 일을 굳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가?"하고 묻는 이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감추거나 잊어버리거나 피하지 않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픽션화해왔던 젊은이가 시의 힘으로 처음 생명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것은 시를 읽는 독자가 과거 혹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것이 스크린 속 영화나 책 속의 이야기와 같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도 하다는 실감을 하기를 바라는 거다.


 난해하다는 시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이 책을 간단하고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아직까지는 나 스스로의 이해부터 너무나 부족하다. 하지만 두 가지만은 기억하고 싶다.

 하나는 시는 멀고 가까운 일들 혹은 사람들을 마치 나 자신이 체험하는 것처럼 실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계를 짓는 일은 무척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기에 무엇에서든 '하나'의 결론만을 얻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것은 '남의 일', '과거의 사건'이기에 지금의 나와 무관하다는 것은 사실 진실이 아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그 일이 완전히 이해되어 그 이해가 공유되고 공감하게 되지 않는 한 거듭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거듭 일어날 때는 처음 일어날 때보다 더 크고 나쁜 형태로 들이닥치기 쉽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시인은 그 역사의 증인이자 표현자로써 단순하지만 명료한 메시지를 남긴다. 그 메시지는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작용하는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진정한 힘은 생명에 있는 것 아닐까? 저마다의 마음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드러나 해석되고 기억될 때 그 시가 품고 있던 생명이 후대로 전해지고 퍼져가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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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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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쪽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간단히 말하면 '시의 힘'이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런데 이 '움직임'에는 어떤 '계산'도 들어있지 않다.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는 확신 아래서도 그것을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도록 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시의 작용'이라는 거다. 

 사실 나부터도 시를 가까이 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처지다. 그것이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든, 자유든, 투쟁이든, 어떤 문제 의식 속에서 써내려간 것이든 '시'는 뭔가 '난해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을 뇌리에 박고 살고 있는 탓이다. 그러면서도 시를 흉내내기도 하고 있으니 나라는 인간도 참으로 이해불능인 존재인 거다. 

 그럼에도 흉내에 불과하지만 내가 그 흉내를 계속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마음에 어떤 '불꽃'과도 같은 것이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일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것 역시 진실이다. 모두에게 그렇기를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저자인 '서경식'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독자'가 어딘가에는 있어 순간의 공감이라도 일기를 바라는 마음인 거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시의 힘'을 바르게 알아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저자는 나를 '시'에 순간이나마 머물게 했고,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끼게 했다. 

  186쪽

 부모님이 일본 군국주의에 대해 소극적 반항, 이른바 불복종을 실행할 수 있던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이 갖는 부정적 측면, 다시 말해 인민을 '국민'으로 편성하고 국가를 위해 동원한다는 기능에 부모님은 연관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 덕분에 자신의 판단에 따라 불복종을 실행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를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의 힘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교육'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을 수 있겠다. 하지만 교육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의 작용을 지배한다. '무의식'은 순수하게 '어떤 외부의 작용도 없는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교육되고 학습된 외부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위에 발췌한 부분은 저자의 부모님이 배우지 않았기에 적어도 물리적으로 자신들이 속해 있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분리가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교육의 부재'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담겨 있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이 책은 단순히 '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그 언어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와 국가가 지향하는 바에 관해서까지 두루 살피고 있는 거다. 왜 언어와 교육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저자는 스스로는 '조선인'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일본어를 모어로 삼고 있으며, 거의 모든 순간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정체성 문제에 오랜 시간 곱씹어 왔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시의 힘이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다면 그 마음은 무엇으로 되었을까? 어떤 언어로,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를 생각해야만 하는 거다. 우리는 아는 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알고 있는 언어가 하나라면 그 언어를 통해서만 '사실'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다. 교육이 중요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배운'대로만 생각할 수 있다. 그 배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배웠든, 거부하는 것을 통해 배웠든 하는 문제는 그 뒤의 일이다. 

 위에 발췌한 내용은 '정말 교육이 필요한가?'와 '교육받지 않은 것은 언제나 나쁜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배우지 않는 것이 배운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196쪽

 글자를 모르는 이들과 접할 때는 눈높이를 맞추어(즉 눈높이를 낮추어서) 보라는 둥 하지만, S 목사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S 목사가 사용하는 어렵고 관념적인 어휘에 어머니가 소박한 의문을 직설적으로 던짐으로써 어머니뿐 아니라 S 목사 쪽에서도 배운 것이 많았을 테니까 말이다. 


 '가벼운 시'가 유행이다. 가볍지만 묵직함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아니다, 묵직함을 던지지 않아도 괜찮다. 가볍더라도 널리 읽힐 수 있는 '재미있는 시'가 유행한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지 모른다. 이런 경향을 두고 '시대에 맞춘' 혹은 '경향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라고 하는 평가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런 평가가 옳은 걸까? 지금 세대에게 너무 난해한 표현, 단어, 문장은 이해되지 못할 뿐 아니라 거부감만 줄 수 있어 점점 더 거리를 멀어지게 할 뿐이기에 모든 시인이 '쉽게 쓴 시'를 선보여야만 하는 걸까?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똑부러지지 않아도, 단순하지 않고 모호하더라도 그 모호함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시의 힘'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호함 속에서 두드러지는 단호함, 혹은 분명함이 아닐까?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쉬워질 필요는 없다. 어떤 것들은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어도 좋고,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거다.

  224쪽

 프랑클과 레비 사이에 있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가혹한 현실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임상적' 차원과 그 현실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병리학적' 차원 사이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차원은 원래 서로 배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지만, 자주 혼동되고 때로 동일한 평면 위에서 부딪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고자 무익한 노력을 하느니, 주어진 운명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가 중요하다'라는, 말하자면 사고 정지의 메시지로 왜곡되어 '감동적'으로 소비된다. 이와 같은 수용은 일어난 사건 그 자체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클과 레비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전하고자 하는 방식과 태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프랑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읽어봤기에 빅터 프랑클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프랑클의 시점은 '위대해 보이기'는 하지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인간의 의지 혹은 초월적 존재의 뜻에 가까운 것으로 수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면 프리모 레비는 빅터 프랑클처럼 '고난의 극복'보다 그러한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고민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하는 문제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돌아보면 '시'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어떤 것은 '저항시'가 되고 어떤 것은 '참여시'가 되며, 어떤 것은 탐미주의적이 되고, 어떤 것은 목가적이 되며 또 어떤 것은 서정적이 된다고 한다. 어떤 시가 가장 '좋다' 혹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다만 앞에 적었던 프랭클과 레비의 '견해 차'를 생각해보면 각각의 시가 갖는 '힘'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시들은 나름의 가치와 힘을 갖는다. 하지만 그 시가 그 자체로 품고 있는 힘보다는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이 더 커다란 힘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시의 힘'은 읽는 이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다.

  230쪽

 피해의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피해의 진실에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려 노력하고, 피해의 진원지에 가까운 이들일수록 용기를 내어 가혹한 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증언자(표현자)는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증언(표상)에 도전해야만 하고, 독자는 스스로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더 없이 어려운 일이지만, 참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다.


 흔히 문제에 맞닥드린 사람들의 부족한 인식, 혹은 어지러운 반응에 훈수를 두듯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느냐?"는 식의 물음을 던지고는 한다. 하지만 장기를 두더라도 당장 장기를 두는 당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훈수를 두는 이에게는 잘 보이는 법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실과 현장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의 표현대로 '진원지'에 가까운 이들이 정보 부족과 사태 파악의 혼선에 시달리기 쉽다. 오히려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게 되는 거다. 반대로 멀리 있는 사람들은 현장을 '잘 알 수 있지'만 그 현장이 어떨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등장 인물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평하듯이 '남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거다. 저자는 이러한 양쪽의 측면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은 '용기를 내어 진실을 직시'해야 하고, 멀리 있는 이들은 '피해의 진실에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거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참극의 재발을 막기 위'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인은 언제나 최전선의 '증언자(표현자)'의 역할을 맡아왔다. 이 책 속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시인들이 모두 그런 증언자들이다.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시를 '배우는 것'을 통해 다른 무엇이 아닌 '왜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는 거다. 이것 역시 '시의 힘'이다. 

 270쪽

 "눈물 날 것 같아. 이거 내 얘기예요……."

 모든 것을 픽션화해왔던 젊은이가 시의 힘으로 처음 '생명'을 실감하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만의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시는 대단히 압축적이고 함축된 표현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시가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러한 압축 혹은 함축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 너무나 선택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는 것 역시 하나의 커다란 원인일 거다. 하지만 종종 그런 벽을 넘어서 순식간에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당황하게 되기도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나 기쁨, 감동을 느끼게 하는 힘을 시는 품고 있는 거다. 저자는 이런 힘을 두고 '생명을 실감하는 순간'이라고 적었다. 물론 저자의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렇기를 바란다. 결국 시는 마음을 통해 마음으로 전해져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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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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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갖는 의미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은 '경제학'을 아는 것으로 경제학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는 거다. 경제학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의 다른 의미는 경제와 내가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책으로 경제학을 '공부'해야 하느냐? 그건 그렇지 않다.

 읽다보면 기억나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잊어버리게 될 것이고, 또 어떤 내용들은 처음 읽을 때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외워야할 것'은 하나도 없다.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책의 목적은 처음부터 '학습'이 아니라 '교양'에 가깝다. 그렇기에 끙끙거리며 이해하기 복잡한 내용들까지 짚어보느라 씨름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물론 학습하는데 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서문에 적은 것처럼 「특정 경제 상황과 특정 도덕적 가치 및 정치적 목표하에서는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가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경제학을 배우는 일_본문 15쪽」에 초점을 두고 읽어보는 게 좋겠다. 



 저자 스스로 적어둔 이 책을 읽는 법이다. 이 읽는 법에서 눈에 띄는 건 '에필로그' 혹은 '맺는말'을 여러 번 언급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맺는 말에 무엇을 적었기에 읽어보라고 하는 걸까?

 에필로그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전문 경제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주요 경제학 이론에 관한 약간의 지식과 어떤 문제의 배후에 깔린 정치적, 윤리적 가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으면 경제 문제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어떨 때는 그들의 판단이 전문 경제학자들의 판단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비전문가의 판단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고, 특정 좁은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는 전문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다._본문 441쪽 

 결국, 경제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거다. 그들이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는 아주 기본적인 것인데다 그들이 '종종' 틀리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는 말도 거침 없이 풀어 놓는다. 서문과 맺는말을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경제학이 결코 일부 사람들의 영역이 아니라 경제 생활을 하는 모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볼 수도 있고, 나름의 판단을 해볼 수도 있는 거다. 


 개개인은 경제학에서 여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다. 경제학이 개개인의 가치판단과 성향, 욕구 등을 '무시'한 가정들 속에서 '과학'을 내세우며 그 완전무결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거기에 동조하거나 동의하거나 혹은 외면할 필요가 없다. 경제는 이미 생활이자 삶의 일부로 우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다르게 말하면 이 책의 목적은 경제학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더라도 우리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내전이 우리 경제를 위협할 수 있게 되는지, 그 위협이 실제인지, 실제라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나름의 판단을 내려볼 수 있도록 하나의 시각을 갖게 해준다는 거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사실 방대하다. 경제학의 의미에서 시작해 자본주의의 역사를 훑어, 다양한 경제학파들을 소개하고 비교한 후 경제학 속으로 들어와서는 생산과 금융, 불평등과 빈곤, 일과 실업, 경제학 속의 정부의 의미와 역할, 세계화까지 두루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내용이 이 한 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책의 목적이 경제학을 설명하고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중심을 이어 하나의 시각으로 끝맺으려는 시도가 가장 중요하기에 온갖 용어와 복잡한 이론들에 대한 설명이 없이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던 거다. 덕분에 생긴 이점이 하나 더 있는데, '딱딱하지 않다'는 거다. 본문 곳곳에서 저자의 유머 감각이 엿보이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된다. '비아냥거리지 않으면서 비판하기'랄까? 


 경제학이 단순히 돈을 벌고 쓰는 문제처럼 보였다. 그 규모와 방법만 변할 뿐 결국 뻔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경제학의 본래 이름은 '정치 경제학'이다. 경제학과 정치가 언뜻 보기에는 물과 기름 같지만 사실은 칵테일처럼 균일하게 섞여 전혀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나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가 하면 몇 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의미와 과정과 결과를 이제서야 알게 됐을 정도다. 경제학이 정치와 같건 다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가깝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제는 누구나 경제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 자신의 의견이나 견해가 경제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지라도 나름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제학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휴가철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휴가를 보내든 우리 모두는 경제의 '주체'다. 결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닌 거다. 그렇기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우리 모두 경제학 하자.

 왠지 캠페인 같아지고 말았지만, 저자가 '로레알 법칙'이라고 부른다는 "난 소중하니까"의 법칙이 떠올라서 적어봤다. 

(로레알 법칙이라니, 샴푸 광고가 떠올라 살짝 웃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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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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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5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특정 경제 상황과 특정 도덕적 가치 및 정치적 목표하에서는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가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경제학을 배우는 일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를 서문에서 밝히는 것이라고 읽었다. 경제는 정치만큼이나 따분하고 어려운데다 복잡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복잡성은 정치에 무관심해진 것처럼 경제에도 수동적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정말 경제는 복잡하고 어렵기때문에 보통 사람인 우리들은 어떤 의견도 견해도 제시할 수 없는 걸까?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저자가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학은 '정치 경제학'이라는 처음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척 정치적이다. 하지만 경제 이야기는 결코 남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우리의 삶이라는 피부에 닿은 옷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걸칠 것인지, 무엇을 걸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내게 왔고, 또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능숙히 아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경제학자들 역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경제학에 무지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기본'만 알아두면 어디가서든 한두 마디 견해는 제시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32쪽

 애초에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지 않으면 소비도 있을 수 없다. 농장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재화, 사무실과 가게 등에서 생산되는 서비스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생산production의 영역인데, 이를 다루는 경제학 분야는 교환과 소비를 강조하는 신고전주의 경제학파가 1960년대부터 주류를 이루면서 도외시되어 왔다.


 저명한 연구, 수준 높은 학문이라는 경제학. 그 가운데서 1960년 이후 현재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파는 '생산'을 도외시한다고 한다. 무지해서 그런지 어떻게 그런 가정 위에 이론들을 세우고 그 이론들이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이 강조한다는 '교환', '소비'에 있어 교환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이 무엇인가? 신고전주의 경제학파는 이것을 '서비스'와 '재화'라고 한단다. 자세히 알 것은 없고 단순히 생각하면 재화란 무엇인가? 생산되어 일정한 가치를 획득한 산물들이 아닌가? 무식해서 죄송하지만 이런 전제로 작동하는 학파가 주류라는 것부터 이해하기 어렵다.

 34쪽

 우리가 바라는 것은 특정 경제학 이론이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 현상을 최대한 잘 설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스운 이야기는 경제학자들 스스로 경제학을 '과학'이라고 칭한다는 것이었다. '이러저러하여 경제학은 과학이다'는 식의 말을 읽기는 했는데 이게 말인지 잉크인지 못 알아먹었다. 아무튼 간단히 말하면 경제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경제학의 일부인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거라면 경제학, 몰라도 아쉬울 게 없겠다. 하지만 저자의 그 다음 말이 마음을 돌려놓는다. 우리가 경제학에 바라는 것은 현상황, 혹은 앞으로의 상황을 최대한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만의 수치, 용어를 섞어 써가며 우리를 따돌리는 것 말고 말이다.

 40쪽

 애덤 스미스는 시장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파는 사람들 사이에 경쟁competition이 벌어지면 이윤을 쫓는 생산자들이 가능한 한 가장 낮은 비용으로 물건을 생산할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는다고 믿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믿었다'는 거다. 애덤 스미스가 정녕 그렇게 확고히 믿었다면, 분명 천국에 갔을 거다. 그리고 거기서도 경제학을 연구하겠지. 보이지 않는 신의 의지가 자신의 천국을 지배한다고 믿으면서 오래오래 행복했을 거다. 인간의 이기심을 간단히 무시해버린 이런 가정이 경제학의 뿌리라면 이참에 경제학자들의 말을 아주 완전히, 싸그리 불신해버리기를 시작할까 싶다. 도대체 어느 천국에서 살다 오셨길래 이리도 순진하게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시는지. 분명 경쟁이 긍정적으로 작동한다면 애덤 스미스의 믿음은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도 더 나아졌을 거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예외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이 예외는 많건 적건 아주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이 예외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닐까.

 56쪽

 그것이 신고전주의가 되었든 마르크스주의가 되었든 케인스주의가 되었든, 자유 시장과 사회주의를 결합해서 이룬 싱가포르의 경제적 성공을 단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례들을 접하다 보면 경제학 이론의 힘을 맹신하지 않게 되고, 하나의 이론에만 근거해서 정책을 세우는 데에도 좀 더 조심스러워지게 될 것이다.


 지지난 주였을 거다. 집으로 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묘한 소식을 전했다. 인천 공항 근처에 대규모 카지노를 조성할 자금을 모은다는 거다. 그러면서 예로들어 보인 게 라스베이거스와 마카오였다. 그 소식에 아주 간단히 "맙소사."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누가 내놓은 계획이신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카오와 라스베이거스의 어디에 인천 공항과의 접점이 있다는 건지. 수익을 낼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외국 관광객만이 입장 가능한 카지노를 열 것이라 하는데 카지노 관광을 오는 것도 아니고 사업에 들어갈 자금으로 조 단위의 투자를 선뜻 하고 나설 사람들이 어디있겠나. 라디오에서도 지적한 것이지만 결국 내국인의 입장도 허용하게끔 압력이 들어올 것이고 그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싱가포르의 경제적 성공을 단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다는 말의 좋은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에서 성공한 사업 혹은 시스템이 우리 경제에서도 반드시 성공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 독사는 순진한 독사라 물지 않는다."거나 "이 독사는 순진한 독사라 물더라도 독을 물린 사람 몸에 주입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믿는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배웠다는 분들이, 좀 더 조심스럽지 못하고 왜 그리 경거망동 하시는지.

 201쪽

 인간의 합리성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모든 사람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는(그러나 성공하면 혁신이라 부르는) '비합리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기업가의 용기에 더 큰 박수를 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다음에야 우리는 '진정한' 선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이 최선의 선택인지를 항상 알고 있는 완벽한 인간이 운명적으로 내리는 기계적인 선택이 아니라 진정한 선택 말이다.


 진정한 선택이란 결국 위험 혹은 실패를 알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충분히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선택을 말한다고 한다. '당연히' 성공할 것만을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 기계적인 선택일 뿐이라는 거다. 경제학자들이 사람이라는 걸 안다. 경제 사업을 꾸리는 정부도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니 자기들이 늘 옳고,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혹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하더라도 얼버무리고 감추려고 하지 말고 이해를 구한다면 애써볼 수 있다. 지금하듯이 '몰랐다', '예상하지 못했다', '일시적인 현상이다'는 식으로 나오지 말라는 거다. 최소한 그렇게 얼버무리고 감추느라 시간을 낭비한 결과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고난 후에야 사죄한다며 무릎꿇지 말라는 거다. 우리도 선택 좀 해보자. 진정한 선택을!

 219쪽

 설령 우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해도 위치재positional goods가 존재하는 이상 소득으로는 진정한 생활 수준(혹은 행복이나 만족감)을 측정할 수 없다. 위치재는 잠재적 소비자 중 극소수만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치가 상승하는 재화를 말한다.


 이 위치재의 간단한 예가 흔히 '명품'이라고 부르는 제품들이겠다. 왜 명품을 갖고자 하느냐?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게 아니니까', 그것을 소유한다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명품을 소유한다고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열에 서넛은 명품을 들고 다녀서 명품이 시장표보다 흔해졌다. 이래서야 명품들이 표방하는 것처럼 '특별함'의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아, 그러면 더 적은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고가의 희귀한 명품을 가짐으로써 특별해져 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멀지 않은 날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과정이 반복될 것이고 그렇게 얻은 특별함은 흔함으로 희석되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 거다. 위치재라는 말이 재밌어서 몇 마디적어봤다.

 227~8쪽

 모피어스에게 사람들을 '구출'해서 불행하게 만들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허위의식 문제는 확실한 해결책이 없는 실로 어려운 문제이다. 물론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답한 설문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불평등하고 잔혹한 일이 자행되는 사회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억압받는 여성이나 기아에 허덕이는 가난한 소작농이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들에게 행복해하면 안 된다고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이런 문제에 쉬운 답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주관적인' 행복도 조사 결과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문제는 수십 권의 책으로도 다 풀어놓기 어려운 논란 거리다. 그러니 거기까지 가지는 말아야겠다. 다만 외부 혹은 타인이 보기에 몹시도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 '불행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허위의식에서만 오는 것일까 하는 것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허위의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학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거다. 저자의 말에 그른 것은 없다. '한 가지' 본인의 응답만이 '전부'는 아니다. 분명 '학습된 무기력' 혹은 '길들여진 고난'이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들은 거짓으로 '행복하다' 말하는 걸까? 역시 알 수가 없다.

 304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고작해야 말을 타고 달리는 게 가장 빨랐던 시대에는 교통 신호도, ABS브레이크도, 안전벨트도, 에어백도 없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규제 등을 통해 사용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강력하고 빠르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잘못되면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금융에도 적용되지 않고서는 자동차 충돌 사고, 뺑소니 사고, 심지어 고속도로 다중 추돌 사고에 해당하는 금융 사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재밌는 비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던 시대와 고속 주행이 가능한 고성능의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의 조건이 같지 않다는 것을 통해 과거에는 규제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규제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니 금융 위기니 하는 것들이 다른 은하의 어느 행성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충분히 주의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피해가 현실이 됐을 때는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전에 안전장치들, 그러니까 필요한 규제들은 없애거나 하지 말고 좀 더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다. 투자 활성화 어쩌구 하면서 이 규제 저 규제 다 해제해주고 막상 위기가 닥치면 '이럴 줄 몰랐다', '이럴 리 없다'고 말하지 말고.

 349쪽

 1970년대 초 당시 인구가 20만이던 스위스 제네바에는 실업자가 10명이 안 되었다. 황금기가 예외적인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 사례들은 완전 고용이 성취 가능한 목표임을 보여 준다. 즉 실업은 '불가피'한 것이 전혀 아니다.


 실업자가 존재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실업자'에 대한 규정이 생각보다 모호하다고는 해도 실업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역시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완벽한 '복지 국가'가 아니라 보통의 형태의 국가에 실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일을 한다는 거다.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부양해야하는 '실업자'들에게 소요되는 비용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세상이 '거의' 이루어졌었다는 거다. 그것도 수십 년 전에. 지금하고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자도 언급하듯이 '예외적인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증명한다는 거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허황되다고 생각한다. 그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최적행복은 가능할 지 모른다. 다만 이 '최적'의 수준을 정하는 일이 쉽지 않을 뿐이다.

  361쪽

 이제 경제학에서 일은 정신이 이상해서 숨기고 싶은 창피한 친척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일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균형 잡힌 경제와 성취감을 주는 사회를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일을 하지 않으면 창피했다면 이제는 일을 많이 하면 할 수록 창피한 일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소위 '고소득' 직종이라고 하면 오래 일하지 않아도 커다란 돈을 버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에 빗대고 있는 것 같다. 소득이 높지만 오래 일한다면 '덜 좋은' 일이 되어버리는 거다. 가장 좋은 것은 일하지 않아도 저절로 돈이 생기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우리가 일을 하는 목적이 단순히 '돈'이 된 것은 경제가 낳은 비극이다.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감, 만족감은 어디까지나 금전적인 보상이 충분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 거다. 일 자체를 즐긴다는 것은 언어도단, 말도 안 되는 말, 혹은 앞서 언급된 '허위의식'의 결과물일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일을 통해 만족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어쩌면 그런 작은 만족감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35쪽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정말 바쁜 사람이라면 이 책의 서문과 맺음말만 읽어도 도움이 될 지 모른다. 경제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 속성을 갖고 있다. 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알고보면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오히려 경제학은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려' 애쓰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저자는 경제학을 대하는 가장 쉬운 물음을 던져준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 그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경제학적 이론 혹은 움직임의 목적을 알 수 있게 될 거다.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그럴 것 같다"는 정도는 될 거다. 그러니까 일단 생각하고 보자. 그래서, 누가 이득을 보는건데?

 441쪽

 "전문가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더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뭘 더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낯이 익은 걸 보니 어디선가 한 번은 읽어본 것 같다. 정말 그런 것 같으므로 나는 평생에 무엇에도, 어느 부분에서도 전문가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다니지 않으련다. 더 많이 배우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그렇기에 내 나이의 삼분의 일 혹은 그보다 더 나이가 적은 사람부터 운신이 힘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보고 또 배우며 살고 싶다.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정말 보통 '자기 말 만이' 옳다고 한다. 온갖 용어와 이론들, 유명한 이의 말들을 끌어다가 설명하고 설득해서 결국 설복할 때까지 닦달한다. 닦달하는 데는 정말 전문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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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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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너무 커져버리면 그림자 속에 있는 걸 모르게 되어버린다. 그러다 그림자가 걷히게 되면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버려 또 모르게 된다. 결론은 단순하다. 스스로를 살피고 지킬 파수꾼 하나를 세워두면 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 하고 물었을 때, "너는 지금 그림자 속에 있어." 하고 말해줄 파수꾼. 

 "내가 이제 어디로 가게 되지?"하고 물었을 때, "너는 이제 강렬한 빛으로 나가게 될 거야."하고 미리 일러줄 파수꾼.

그런 파수꾼 하나 세워두고 있는지.


 <앵무새 죽이기>는 잊어도 괜찮다. <파수꾼>을 읽는 데 <앵무새 죽이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파수꾼>을 재미 없게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여기서 줄거리를 주구장창 늘어놓는다든지 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겠으니, 안심해도 좋다.


 진 루이즈는 스물 여섯이다.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지내다 휴가 차 내려와 있는 중이다. <파수꾼>은 고향에 내려온 날부터 불과 2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진 루이즈가 평생에 정의이자 올바름의 화신이라 여겼던 아버지의 이면을 목격하고 거기서 느낀 절망과 좌절, 그리고 회복까지를 그려내며 진정한 탄생, 혹은 성장에 이른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인 거다. 그 소재가 인종차별이고, 배경이 미국의 남부라는 건 사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는 별 의미 없었다. 


 솔직히 처음 120쪽까지를 읽는 건 고통스러웠다. 오랜만에 빅토르 위고의 워털루 전투 묘사를 읽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게다가 스물 여섯의 진 루이즈는 친구들에게 전해들은 프렌치 키스만 해도 임신한다는 말을 믿던 열한 살 때나 다름 없는 사춘기 소녀 같이 보였다. 그렇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본 것만으로 경멸하기 시작해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결심을 한다는 식의 행동을 사춘기의 질풍노도가 아니고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나한테 정의와 정의, 올바름과 올바름의 차이를 구별해 주지 않으셨어요? 왜요?_352쪽」

가장 대표적으로 사춘기적 특징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너무나 확고히 믿고 있는 데서 생겨난 단순한 착각이 낳은 실수다. 역시 아이다운 발상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을 속였던(그렇게 여기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서 시작된 반항이 왜 자신을 '바로잡아주지 않았느냐'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거다. 왜 아버지가 바로 잡아줬어야 했는가? 누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이들은 그것을 가르쳐줬더라도 "왜 그렇게 밖에 가르쳐주지 못했느냐?"며 따지고 들 부류다. 이미 자신의 생각이 정답(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단순히 아버지를 탓하고 비난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되묻는 건 비열하기까지 한 태도다. 


 아아, 작품 속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진짜 감상을 적어보련다.


 솔직히는 이 책을 받던 날 밤을 새서라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첫날 밤은 앞쪽 50페이지를 읽는 게 고작이었다. 밤이 늦기도 했거니와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렇게 둘째 날도 지나갔다. 그리고 셋째 날이 되어서야 다 읽고 감상을 적고 있는 거다. 

 처음에 "이 책이 정말 작가가 만족해서 내놓은 '완성본'인가?" 하는 의문이 자꾸만 떠올랐다. 몇 가지 단서를 적자면 하나는 처음에는 '그녀는'이라는 말을 자주 쓰다가 나중에는 '진 루이즈'라고 쓰고 있는 점이다. 왜 인칭을 달리 했을까 싶어졌다. 오히려 '그녀는'이라 칭하던 부분에 진 루이즈 자신의 회상이나 경험이 더 많았기에 더더욱 낯설었다. 또 하나는 매끄럽지 않은 연결이다. 의도된 표현에 의한 것인지 장면의 전환이 분명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책 속 이야기가 며칠에 걸쳐 일어난 것 같건만 끝나고 보니 하루, 혹은 이틀이 지났을 뿐인 거였다. 나중에 한 번 더 읽게 되면 이 부분을 좀 더 눈 여겨 볼 생각이다. 또 하나는 이 작품이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여졌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왜 편집자가 다른 '시선'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기를 주문했는지 알 것 같다고 느꼈다는 거다. 이 이야기는 몸은 스물여섯인지 몰라도 자아는 10대 초반 혹은 중반 정도인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점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완성의 인상을 더 강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작가의 저력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가던 300쪽 부근 부터다. 진 루이즈나 그녀의 아버지보다 삼촌의 활약이 눈부셨다. 단순히 박식하다거나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확실한 파수꾼을 세워놓고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까지를 지켜내고 있는 존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진 루이즈의 삼촌인 걸로 한다. 


 이야기 속에서 진 루이즈는 인종차별행위는 물론, 발언, 암시에 이르기까지 반대하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심한 오이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 오이 냄새만 맡아도 알러지를 일으키는 것처럼 뉘앙스 하나에도 반감을 느끼는 거다. 그리고 그 반감을 숨기지 않고 표출한다는 것도 진 루이즈의 성격을 드러낸다. 하지만 진정으로 무엇을 지켜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다른 한 쪽에 서서 소리지르고 항의하고 화를 내고 외면하고 돌아서는 일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행동한다면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처럼 또다른 차별을 저지르는 백인이 되는 것 뿐이지 전혀 다를 게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다. 


 무력함을 느꼈다. 

무슨 느닷 없는 무력함인가 하면, 조직 안에 있어도 밖에 있어도 그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도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함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하는 게 옳다. 그것이 정의고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의나 올바름은 다른 누가 정해준 것도 강요한 것도 아니기에 스스로 바꾸거나 움직일 수도 있다. 저 편에 있는 것이 힘들고 지친다면 이 편으로 올 수도 있는 거다. 다만 그 행위를 용납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정의를 개조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파수꾼은 외부로부터 내부를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내부를 살펴 스스로를 다스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렇기에 이 파수꾼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번역기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파수꾼이 그 일들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파수꾼은 내 안의 양심이기도 하다. 누구의 의지의 지배도, 명령도, 가르침에도 속해있지 않은 독립된 고유의 영역으로서의 '섬'과 같이 존재하는 유일한 것인 거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는 말을 어느 덕이 높은 승려가 말했다는 걸 기억한다. 종교의 신이 명한다고, 존경하는 스승이 가르친다고, 사랑하는 부모의 뜻이라고 자신의 뜻과 의지를 통해 만들어갈 양심의 잣대를 그들에게 둘 필요는 없다. 오히려 부처든, 보살이든, 부모든 '권위'로써 우리의 자아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존재들을 없이 할 때 비로소 분명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있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결국 이렇게 어수선해질 줄 알았다. <앵무새 죽이기>나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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