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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5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특정 경제 상황과 특정 도덕적 가치 및 정치적 목표하에서는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가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경제학을 배우는 일이다. |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를 서문에서 밝히는 것이라고 읽었다. 경제는 정치만큼이나 따분하고 어려운데다 복잡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복잡성은 정치에 무관심해진 것처럼 경제에도 수동적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정말 경제는 복잡하고 어렵기때문에 보통 사람인 우리들은 어떤 의견도 견해도 제시할 수 없는 걸까?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저자가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학은 '정치 경제학'이라는 처음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척 정치적이다. 하지만 경제 이야기는 결코 남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우리의 삶이라는 피부에 닿은 옷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걸칠 것인지, 무엇을 걸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내게 왔고, 또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능숙히 아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경제학자들 역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경제학에 무지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기본'만 알아두면 어디가서든 한두 마디 견해는 제시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32쪽 애초에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지 않으면 소비도 있을 수 없다. 농장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재화, 사무실과 가게 등에서 생산되는 서비스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생산production의 영역인데, 이를 다루는 경제학 분야는 교환과 소비를 강조하는 신고전주의 경제학파가 1960년대부터 주류를 이루면서 도외시되어 왔다. |
저명한 연구, 수준 높은 학문이라는 경제학. 그 가운데서 1960년 이후 현재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파는 '생산'을 도외시한다고 한다. 무지해서 그런지 어떻게 그런 가정 위에 이론들을 세우고 그 이론들이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이 강조한다는 '교환', '소비'에 있어 교환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이 무엇인가? 신고전주의 경제학파는 이것을 '서비스'와 '재화'라고 한단다. 자세히 알 것은 없고 단순히 생각하면 재화란 무엇인가? 생산되어 일정한 가치를 획득한 산물들이 아닌가? 무식해서 죄송하지만 이런 전제로 작동하는 학파가 주류라는 것부터 이해하기 어렵다.
34쪽 우리가 바라는 것은 특정 경제학 이론이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 현상을 최대한 잘 설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스운 이야기는 경제학자들 스스로 경제학을 '과학'이라고 칭한다는 것이었다. '이러저러하여 경제학은 과학이다'는 식의 말을 읽기는 했는데 이게 말인지 잉크인지 못 알아먹었다. 아무튼 간단히 말하면 경제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경제학의 일부인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거라면 경제학, 몰라도 아쉬울 게 없겠다. 하지만 저자의 그 다음 말이 마음을 돌려놓는다. 우리가 경제학에 바라는 것은 현상황, 혹은 앞으로의 상황을 최대한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만의 수치, 용어를 섞어 써가며 우리를 따돌리는 것 말고 말이다.
40쪽 애덤 스미스는 시장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파는 사람들 사이에 경쟁competition이 벌어지면 이윤을 쫓는 생산자들이 가능한 한 가장 낮은 비용으로 물건을 생산할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는다고 믿었다. |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믿었다'는 거다. 애덤 스미스가 정녕 그렇게 확고히 믿었다면, 분명 천국에 갔을 거다. 그리고 거기서도 경제학을 연구하겠지. 보이지 않는 신의 의지가 자신의 천국을 지배한다고 믿으면서 오래오래 행복했을 거다. 인간의 이기심을 간단히 무시해버린 이런 가정이 경제학의 뿌리라면 이참에 경제학자들의 말을 아주 완전히, 싸그리 불신해버리기를 시작할까 싶다. 도대체 어느 천국에서 살다 오셨길래 이리도 순진하게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시는지. 분명 경쟁이 긍정적으로 작동한다면 애덤 스미스의 믿음은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도 더 나아졌을 거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예외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이 예외는 많건 적건 아주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이 예외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닐까.
56쪽 그것이 신고전주의가 되었든 마르크스주의가 되었든 케인스주의가 되었든, 자유 시장과 사회주의를 결합해서 이룬 싱가포르의 경제적 성공을 단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례들을 접하다 보면 경제학 이론의 힘을 맹신하지 않게 되고, 하나의 이론에만 근거해서 정책을 세우는 데에도 좀 더 조심스러워지게 될 것이다. |
지지난 주였을 거다. 집으로 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묘한 소식을 전했다. 인천 공항 근처에 대규모 카지노를 조성할 자금을 모은다는 거다. 그러면서 예로들어 보인 게 라스베이거스와 마카오였다. 그 소식에 아주 간단히 "맙소사."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누가 내놓은 계획이신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카오와 라스베이거스의 어디에 인천 공항과의 접점이 있다는 건지. 수익을 낼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외국 관광객만이 입장 가능한 카지노를 열 것이라 하는데 카지노 관광을 오는 것도 아니고 사업에 들어갈 자금으로 조 단위의 투자를 선뜻 하고 나설 사람들이 어디있겠나. 라디오에서도 지적한 것이지만 결국 내국인의 입장도 허용하게끔 압력이 들어올 것이고 그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싱가포르의 경제적 성공을 단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다는 말의 좋은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에서 성공한 사업 혹은 시스템이 우리 경제에서도 반드시 성공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 독사는 순진한 독사라 물지 않는다."거나 "이 독사는 순진한 독사라 물더라도 독을 물린 사람 몸에 주입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믿는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배웠다는 분들이, 좀 더 조심스럽지 못하고 왜 그리 경거망동 하시는지.
201쪽 인간의 합리성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모든 사람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는(그러나 성공하면 혁신이라 부르는) '비합리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기업가의 용기에 더 큰 박수를 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다음에야 우리는 '진정한' 선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이 최선의 선택인지를 항상 알고 있는 완벽한 인간이 운명적으로 내리는 기계적인 선택이 아니라 진정한 선택 말이다. |
진정한 선택이란 결국 위험 혹은 실패를 알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충분히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선택을 말한다고 한다. '당연히' 성공할 것만을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 기계적인 선택일 뿐이라는 거다. 경제학자들이 사람이라는 걸 안다. 경제 사업을 꾸리는 정부도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니 자기들이 늘 옳고,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혹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하더라도 얼버무리고 감추려고 하지 말고 이해를 구한다면 애써볼 수 있다. 지금하듯이 '몰랐다', '예상하지 못했다', '일시적인 현상이다'는 식으로 나오지 말라는 거다. 최소한 그렇게 얼버무리고 감추느라 시간을 낭비한 결과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고난 후에야 사죄한다며 무릎꿇지 말라는 거다. 우리도 선택 좀 해보자. 진정한 선택을!
219쪽 설령 우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해도 위치재positional goods가 존재하는 이상 소득으로는 진정한 생활 수준(혹은 행복이나 만족감)을 측정할 수 없다. 위치재는 잠재적 소비자 중 극소수만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치가 상승하는 재화를 말한다. |
이 위치재의 간단한 예가 흔히 '명품'이라고 부르는 제품들이겠다. 왜 명품을 갖고자 하느냐?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게 아니니까', 그것을 소유한다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명품을 소유한다고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열에 서넛은 명품을 들고 다녀서 명품이 시장표보다 흔해졌다. 이래서야 명품들이 표방하는 것처럼 '특별함'의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아, 그러면 더 적은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고가의 희귀한 명품을 가짐으로써 특별해져 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멀지 않은 날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과정이 반복될 것이고 그렇게 얻은 특별함은 흔함으로 희석되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 거다. 위치재라는 말이 재밌어서 몇 마디적어봤다.
227~8쪽 모피어스에게 사람들을 '구출'해서 불행하게 만들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허위의식 문제는 확실한 해결책이 없는 실로 어려운 문제이다. 물론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답한 설문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불평등하고 잔혹한 일이 자행되는 사회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억압받는 여성이나 기아에 허덕이는 가난한 소작농이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들에게 행복해하면 안 된다고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이런 문제에 쉬운 답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주관적인' 행복도 조사 결과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문제는 수십 권의 책으로도 다 풀어놓기 어려운 논란 거리다. 그러니 거기까지 가지는 말아야겠다. 다만 외부 혹은 타인이 보기에 몹시도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 '불행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허위의식에서만 오는 것일까 하는 것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허위의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학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거다. 저자의 말에 그른 것은 없다. '한 가지' 본인의 응답만이 '전부'는 아니다. 분명 '학습된 무기력' 혹은 '길들여진 고난'이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들은 거짓으로 '행복하다' 말하는 걸까? 역시 알 수가 없다.
304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고작해야 말을 타고 달리는 게 가장 빨랐던 시대에는 교통 신호도, ABS브레이크도, 안전벨트도, 에어백도 없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규제 등을 통해 사용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강력하고 빠르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잘못되면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금융에도 적용되지 않고서는 자동차 충돌 사고, 뺑소니 사고, 심지어 고속도로 다중 추돌 사고에 해당하는 금융 사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재밌는 비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던 시대와 고속 주행이 가능한 고성능의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의 조건이 같지 않다는 것을 통해 과거에는 규제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규제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니 금융 위기니 하는 것들이 다른 은하의 어느 행성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충분히 주의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피해가 현실이 됐을 때는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전에 안전장치들, 그러니까 필요한 규제들은 없애거나 하지 말고 좀 더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다. 투자 활성화 어쩌구 하면서 이 규제 저 규제 다 해제해주고 막상 위기가 닥치면 '이럴 줄 몰랐다', '이럴 리 없다'고 말하지 말고.
349쪽 1970년대 초 당시 인구가 20만이던 스위스 제네바에는 실업자가 10명이 안 되었다. 황금기가 예외적인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 사례들은 완전 고용이 성취 가능한 목표임을 보여 준다. 즉 실업은 '불가피'한 것이 전혀 아니다. |
실업자가 존재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실업자'에 대한 규정이 생각보다 모호하다고는 해도 실업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역시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완벽한 '복지 국가'가 아니라 보통의 형태의 국가에 실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일을 한다는 거다.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부양해야하는 '실업자'들에게 소요되는 비용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세상이 '거의' 이루어졌었다는 거다. 그것도 수십 년 전에. 지금하고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자도 언급하듯이 '예외적인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증명한다는 거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허황되다고 생각한다. 그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최적행복은 가능할 지 모른다. 다만 이 '최적'의 수준을 정하는 일이 쉽지 않을 뿐이다.
361쪽 이제 경제학에서 일은 정신이 이상해서 숨기고 싶은 창피한 친척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일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균형 잡힌 경제와 성취감을 주는 사회를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
과거에는 일을 하지 않으면 창피했다면 이제는 일을 많이 하면 할 수록 창피한 일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소위 '고소득' 직종이라고 하면 오래 일하지 않아도 커다란 돈을 버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에 빗대고 있는 것 같다. 소득이 높지만 오래 일한다면 '덜 좋은' 일이 되어버리는 거다. 가장 좋은 것은 일하지 않아도 저절로 돈이 생기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우리가 일을 하는 목적이 단순히 '돈'이 된 것은 경제가 낳은 비극이다.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감, 만족감은 어디까지나 금전적인 보상이 충분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 거다. 일 자체를 즐긴다는 것은 언어도단, 말도 안 되는 말, 혹은 앞서 언급된 '허위의식'의 결과물일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일을 통해 만족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어쩌면 그런 작은 만족감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35쪽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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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바쁜 사람이라면 이 책의 서문과 맺음말만 읽어도 도움이 될 지 모른다. 경제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 속성을 갖고 있다. 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알고보면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오히려 경제학은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려' 애쓰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저자는 경제학을 대하는 가장 쉬운 물음을 던져준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 그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경제학적 이론 혹은 움직임의 목적을 알 수 있게 될 거다.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그럴 것 같다"는 정도는 될 거다. 그러니까 일단 생각하고 보자. 그래서, 누가 이득을 보는건데?
441쪽 "전문가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더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뭘 더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낯이 익은 걸 보니 어디선가 한 번은 읽어본 것 같다. 정말 그런 것 같으므로 나는 평생에 무엇에도, 어느 부분에서도 전문가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다니지 않으련다. 더 많이 배우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그렇기에 내 나이의 삼분의 일 혹은 그보다 더 나이가 적은 사람부터 운신이 힘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보고 또 배우며 살고 싶다.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정말 보통 '자기 말 만이' 옳다고 한다. 온갖 용어와 이론들, 유명한 이의 말들을 끌어다가 설명하고 설득해서 결국 설복할 때까지 닦달한다. 닦달하는 데는 정말 전문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