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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열려라 참깨'에서 지문인식까지 문을 여는 방법은 참 여러 가지다. 온갖 의미와 상징을 갖는 문부터 독특하게 기능하는 문도 다양하다. 그러나 문이라는 것은 물리적이고 실체적인 다양성보다 우리들, 인간의 마음 속에서 더 다양해지며 더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을 처음 만든 사람의 생각은 단순했을 거다. 드나들 수 있으면서 실내의 온기를 덜 빼앗기도록 외부와 차단할 수 있는 것 정도로 말이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소통과 동시에 단절이 가능한 매개 정도가 되겠는데 일단은 책 이야기를 먼저 하자.
현암사의 소세키 전집의 띠지에 적힌 문구는 표지에 적힌 하이쿠를 풀어 놓은 것이다. 이 책을 받고, 띠지에 적힌 문장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소세키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됐다. 늘 품고 있으면서, 늘 마주하는 그런 희망과 허망. 아마도 <문>은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스케와 오요네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던 소스케는 지나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활달했지만 오요네와의 사건 뒤로 그 성향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아버지가 죽고, 숙부에게 속아 생활에 여유가 없어지면서 그 변화는 고정되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산시로>와 <그 후>가 이어지는 이야기인 것처럼 <문>과 <마음> 역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벌써 몇 번이나 <마음>을 읽었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다시 <마음>을 읽을 날이 기다려졌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소스케는 평범한 공무원으로 오요네와 조용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동안 동생 고로쿠를 맡아 키웠던 숙모가 돌연 '사정이 생겨 더는 동생을 맡고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은 가볍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은 고요함에 가까운 조용함과 과거에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기에 더는 타오를 것이 없다는 듯한 잔잔함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 요동은 좀처럼 격렬해지지도 또 다른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소스케의 삶을 크게 흔들게 되는 것은 대학 친구였던 야스이의 소식을 들으면서다. 오요네와의 사건이 있고 나서는 만난 적이 없었지만 소스케는 자신이 야스이에게 몹쓸짓을 했다고 느낀다. 그런 죄책감과 혼란 속에서 괴로워하던 소스케는 아는 이의 소개로 참선을 하는 암자를 찾기도 하지만 결국 크게 깨닫는 것도 없이 조금은 수척해져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은 여전히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앞으로도 조용하고 고요하게 너무 일찍 늙어버린 삶을 오래 보낼 것이다.
그런 날이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문이 나를 향해 열려있으면서 반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 그래서 무얼 하더라도 괜찮고, 잘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흥분과 들뜸 속에서 마치 날아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희망에 부푸는 그런 날 말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기도 한다는 건 반대로 닫히기도 한다는 거다. 그런 날은 거절과 모욕, 좌절과 절망으로 추락하는 기분과 함께 좌절 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허망함으로 모든 숨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 소스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거다. 오요네와 만남 이후의 모든 순간이 선택의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을 거다.
우리들 역시 매 순간 삶의 문 앞에 서게 된다. 어떤 문을 열고, 어떤 문을 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 역시 스스로가 정해야 한다. 문 너머 저쪽이 이쪽보다 더 낫다거나 혹은 다름 없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문은 하나의 경계로 전혀 다른 세계와 이어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때 그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다'며 후회하는 일이 더 잦을 지 모른다.
엉뚱한 말이지만 문이란 단순히 밀거나 당긴다고 열리는 게 아니다. 어떤 문은 "열려라 참깨"를 외쳐야 열리고, 어떤 문은 그 문에 맞는 열쇠가 필요하며, 등록된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이 있는가하면, 회전문처럼 적절한 기회와 선택을 통해 통과할 수 있는 문도 있다.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문이 있고, 저마다 열리는 방식이 있으며, 그 문 너머의 풍경도 제각각이기에 어디에도 똑같은 인생이 없는 것일 거다.
소세키를 좋아한다는 것과 소스케와 오요네의 무채색에 가까운 삶을 통해 느껴지는 고요함만으로도 이 이야기 즐겁게 읽는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의외의 곳이란 소스케가 요양차 다녀온 절이다. 그 절의 큰 스님이 '숙제'로 내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참 오묘하다.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은 무엇인가?"
주에서는 이렇게 풀어준다.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 즉 자기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런 상대적인 세계를 넘어선 절대적이고 무차별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이라는 뜻이다.
이건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할 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부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쉽게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이 문장을 봤을 때 다시 떠올리게 됐다.
252쪽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 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
누구도 부모에게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태어나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 역시 마찬가지다. 그 부모도 그 부모의 부모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다. 부탁이 없으니 원망도 없다. 원망이 없으니 원한도 없다. 부탁도 원망도 원한도 없다면 거기에 희망을 끼워넣을 필요도 없으며, 희망이 없는 동안에는 절망하거나 허망하지 않아도 좋다.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문을 열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세계가 변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이고 무차별적인 세계에서는 하나의 선택이 무엇도 결정하지 않게 된다. 결국 그 세계에는 무엇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 특유의 혼돈이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혼돈을 다른 말로 적으면 자유가 될 것이다.
인간 본래의 심성은 자유였을 거다. 물론 이 자유란 누구를 해롭게 해도 되고, 자기만 좋을대로 행동한다는 '멋대로'의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자유로워도 되는 자유, 자유를 위한 자유다. 인간이 꿈꾸는 온갖 자유 너머에는 그런 배경이 있을 것만 같다. 결국 누구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저절로 열리지도 않는다. 열고 싶으면 열고 들어가고, 열고 싶지 않으면 지나가면 되는 것 뿐이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소스케는 과거의 친구 야스이와의 만남의 문을 열지 않고 지나친다. 그러면서 언제든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을 생각하지는 않지만 같은 상황이 거듭된다 해도 역시 그때도 열지 않고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 소스케가 변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소스케는 어떤 문 앞에 서건 그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거듭해서 결정을 유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처음부터 이미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정하고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는 거다.
마치 지금 일어나서 준비하지 않으면 지각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10분만 10분만 하면서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과 같다.(다르지만)
지금까지 적은 건 사실 길기만 하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앞으로 적을 것도 크게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냥 이런 생각들을 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260쪽 그의 머리를 스쳐 가려던 비구름은 간신히 머리에 닿지 않고 지나간 듯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불안이 앞으로도 몇 번이고 여러 가지 수준으로 되풀이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것을 되풀이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다. 그것을 피해 다니는 것은 소스케의 일이다. |
여기서 이야기는 끝이 난 셈이다. 뒤에 에필로그처럼 몇 페이지가 이어지지만 그 마지막 말도 이런 식이다.
264쪽 "정말 다행이에요. 드디어 봄이 돼서"하며 눈썹을 환하게 폈다. 소스케는 툇마루로 나가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면서, "응, 하지만 또 금방 겨울이 오겠지"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 |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 당신이 열려고 하는 그 문 너머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걸까?
멕베스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라. 아무리 사나운 날이라도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있었고, 무엇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알고는 있었다. 소스케의 반응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알기에 미래도 어느 정도는 알수 있다. 봄이 왔다고 겨울이 오지 않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겨울을 봄부터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저 매일매일 손톱이 자라고, 그 손톱을 자르는 일을 거듭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문을 닫고, 문을 지나치고 문을 바라보며 지내면 되는 거다.
여담이지만 모든 소설은 나를 들여다보는 문이 된다. 기분이 내키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그 문 속의 인물들처럼 살다가 지겨워지면 되돌아와 문을 닫아버리면 된다. 소설만큼 편리한 문을 본 적이 없다. 내게 모든 것을 열어주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막고 있는 기묘한 문이 바로 소설인 셈이다.
앞으로도 이 문은 자꾸만 열어볼 거고, 자꾸만 닫아버릴 거다. 가깝든 멀든 다시 열기도 할테고 영원히 다시 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문은 다르다. 지금까지도 열지 않았고, 앞으로도 열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지나쳐 갈 생각이다.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길은 이어져 있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온갖 문을 통과하는걸 즐긴다. 그 모험에 성공한다고 해도 나약한 자신이 강해지지는 않을 거란 걸 안다. 나 스스로 나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허망하지 않으면서 희망에 차 있지도 않다. 표지의 하이쿠에 대한 답은 이 정도로만 해둬야겠다.
불안 때문에 모험을 떠난다면 모험때문에 불안해 하게 될 게 뻔하다. 허망함으로 희망을 구한다면 희망함으로 허망해질 것 또한 뻔하다.
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문 앞에 서있는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