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라디오
모자 지음, 민효인 그림 / 첫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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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방구석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옛 고향집을 떠올리게 한다. 

고향집에는 다락방도, 다락방 속의 라디오도, 도심의 야경도 없었지만 밤 하늘에 가득한 별빛 만큼은 부족하지 않았다.

 이제는 어쩐지 자주 찾아가기도 어려워지고 말아서 더 그리워지는 고향, 향수를 불러 오는 그런 빛깔의 책이다.


 작가의 이름이 모자라니.

모자를 좋아해서 모자라니. 

왠지 겸손할 것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왠지 복잡할 것 같은.


 이야기들은 작가의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구축되어 세상에 나온 것들이다. 

아버지와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고 느꼈는데, 모자 씨가 남자라서였을까?

아니면, 나 역시 아버지가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얼핏 복잡해질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이 책은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담백하게, "그랬지"하고 생각을 그칠 수 있는. 

마침표를 찍듯 하나 하나의 생각들에 조금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려주는 게 오히려 편했달까.


사람들은 깨달음을 구하지만 정말 커다란 깨달음은 어디선가 느닷 없이, 혹은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조금씩 적어나간 이야기 속에 담긴 무수한 깨달음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그 공감이 늘어나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 마음의 한 군데에 가서 닿을 것이고, 다음 순간 "아,"하고 느끼게 되는 것. 그런 게 깨달음 아닐까.


 사람이 사람에게, 가족에게, 회사에, 연인에게, 친구에게 기대하고 기대는 많은 것들은 어디까지 '자의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문제가 되면 객관성을 잃어버린다. 

 "왜 나에게만."

"너는 어쩌면 그렇게."

원망하고 탓하는 말이 늘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애초에 믿음을 가진 건 나였으니까."


내가 만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내는 게 옳은 것이다.


작가는 마치 자기만의 주파수로 방송을 계속하듯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누구에게 동정이나 공감을 호소하는 일도 없이 담담하게.


요즘에도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많은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라디오가 단순한 방송의 하나가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고 신해철 님은 방송에서 '마왕'으로 군림했었다. 

 새벽의, 이르다고도 늦다고도 하기 어려운 시간. 

깨어 있는 사람이 아마도 가장 적은 시간에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더란다. 

라디오란 그런 것이 아닌가 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는 동시에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그런.


<방구석 라디오> 역시 그런 방송을 닮아 있다.

나는 모자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에게 돌아와 나의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들었을 거라고, 외로운 것은 나 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라디오는 다른 사람의 사연을 전해준다. 

같은 시간에 깨어 귀기울이고 있을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말이다.


조용한 새벽, 아마도 홀로 깨어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시간에 읽으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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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물방울 2015-10-27 18:09   좋아요 1 | URL
^^ 정말요. 그 말씀대로 된다면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해질텐데요.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린다짱 님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
 
세계사 브런치 -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 국립중앙도서관 선정 "2016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 브런치 시리즈 2
정시몬 지음 / 부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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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서양의 역사 혹은 중국, 일본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더 많이 읽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죄스러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역사책들을 들춰보게 되는 까닭은 '역사' 고유의 공통성을 발견하는 기쁨이 작지 않기 때문이며 타국의 역사 혹은 우리와 무관한 세계의 흐름이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언제나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첫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단추를 전부 풀어서 다시 끼우기 시작하지 않는 한 단추와 단추 구멍은 짝을 이루지 못한다. 설사 첫단추를 잘 끼웠다고 해도 중간에 하나나 둘쯤 잘못 끼운다면 마찬가지로 짝이 맞지 않게 된다. 역사는 말그대로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다. 또한 사실인 동시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때로는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이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역사를 대할 때 정말 중요해지는 것이 균형 감각이 아닐까 한다. 

 개인 혹은 집단이라고 해도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균형이라고 적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태생적으로 한계를 품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균형 감각이 더 중요해진다. 역사가는 때로는 누구보다도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역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E. H. 카의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나라의 역사도 한 권의 책에 담기에는 그 지면이 너무나 부족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세계사를 한 권에 담는다는 것은 무수한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이들의 역사서는 그 신뢰성에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전문가가 비전문가보다 낫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세계사 브런치>의 저자 정시몬은 자칭 '간서치'다. 책을 읽는 것을 통해, 당연히 뒤에 따라올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과 기준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확립한 사람처럼 보인다.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성과물들을 내놓는 독서가들에게는 늘 감탄하게 된다. 이미 읽어본 경험이 있기에 뒤에 읽게 될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수월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저작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구성도 흥미롭다. 지금까지 읽었던 서양사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이 번역서였다. 번역서를 내면서 굳이 원전의 본문을 영어나 한자, 일본어로도 적어두는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번역을 미심쩍어하는 이들에게 확인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고, 번역된 문장의 느낌과 원서의 느낌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며,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표현을 오히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역시 고대 문명부터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를 두루 순회한다. 고대 문명의 특징은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아닌 서양에서 동양 혹은 동방이라 부르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문명이 우월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늘 날카로운 일침을 가하는 '사실'이 바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다. 

 그러다 그리스와 로마가 세계사의 주무대가 된다. 물론 그리스와 로마가 주목 받게 된 것은 현재 세계 정세의 주도권이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에 있다는 시각에서 볼 때다. 

 고대 문명과 그리스, 로마를 돌아 저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 현재 중국의 위상은 주목할 수밖에 없을만큼의 위치까지 떠올랐다. 

 중국을 돌아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프랑스와 영국, 아메리카의 혁명까지를 훑어 내려오면 거의 지금에 이르게 된다. 

 고대부터 근대까지를 돌아보며 여러 원전을 담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저자는 현대에 주목할만한 역사서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고대 문명이나 그리스, 로마의 이야기. 거기에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가볍게 읽어내려왔다. 고민도 없었고,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러다 현대의 역사서 가운데 인도의 초대 총리인 네루가 썼다는 『세계사 편력』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비로소 찾았다고 생각했다. 읽어볼만한 책을 소개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브런치'란 가벼운 식사다. 이 책에서 체계적이고 자세한 역사의 기술을 기대한다면 애초에 번짓수를 잘못 찾아온 셈이니 다른 책을 찾아 읽기를 권한다. 가볍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다는 의미다. 앞에서부터 읽어도 좋고, 뒤에서부터 읽어도 좋은 책이기도 하다.

 앞에서부터든 뒤에서부터든 상관없이 관심 있는 부분만 훑어가며 원전을 찾아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테니 취향껏 취할 일이겠다.


 무겁지 않게, 익숙한 말로 읽는 세계사 책은 분명 신선했다. 하지만 읽는 동안 어떤 것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려서 풀리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서문에서 저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고 적었다. 적어도 내게 이 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상고사》에 적은 말로 기억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처칠이 한 말이라고도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마음에 걸렸던 건 다른 게 아니라 저자가 읽었을 무수한 역사서 가운데 '조선 상고사'는 들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해도 사실 억측에 가까운 뉘앙스의 문제이기에 고작 "좋으나 싫으나 중국의 변방국으로서 삶과 문화를 일궈 온 한국을 비롯한"이라는 표현때문에 그랬다는 식의 말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언제나 중국의 '변방국의 위치'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작고 작은데다 그나마도 갈라져 있지만 하나의 도시국가가 유럽을 지배하기도 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상상할 수 없다고는 못하겠다. 

 

 역사에 크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 작다고 과거에도 작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에는 늘 의문을 품고 있다. 서양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우월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집트나 인도의 유물들이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미국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적었지만 그것은 약탈이고 도둑질이지 유산의 보호와 같은 허울 좋은 명분으로 온전히 정당화될 수도 없다. 

 이 책은 상당부분 대세, 혹은 기정사실이라는 측면에서 쓰여졌다고 본다. 그런 시점 혹은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론을 내놓을 생각은 없다. 분명 그것이 현재의 정세이고 사실이기에 현재의 관점에서 봤을 때 틀렸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백해야겠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불편함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리말로 쓰였기에 더 이해하기 수월해야 할 내용이 종종 더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다양한 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방대한 독서의 증거이고, 나름의 체계와 이론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 점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틴에이저 시절'과 같은 표현은 사실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인 정시몬 씨는 '곤두박질'과 '곤두박이'를 구분해서 쓸 정도의 국어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나로서는 사전을 찾아보기 전까지 두 표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시쳇말부터 외래에까지 때로는 외계어까지 등장하는 역사서가 낯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했음을 토로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외국인이 쓴 책들보다 더 외국인이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을 떠나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원전들은 한 번씩은 읽어보고 싶은 것들이다. 잘 쓴 세계사 책을 볼 때마다 우리 역사의 공백을 더 깊이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씁쓸하게 읽힌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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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0개의 치즈
빌렘 엘스호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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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면 고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약간의 과장에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는 정도의 시간 정도가 필요할 뿐이다.

한 여름이라면 문을 여는 순간 더위가 밀어 닥칠 것이고, 한 겨울이라면 문을 열자마자 칼 바람과 마주하게 될 것이며, 비가 오는 날이라면 아무리 꼼꼼하게 우산을 써봐도 옷이나 신발의 어느 한 구석은 틀림 없이 젖게 될 것이다. 


 해운 조선소 직원인 프란스 라르만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반 스혼베커의 제의로 치즈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계획도 경험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한 치즈 사업이 무탈히 돌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길지 않았던 몇 주간의 치즈와의 소동을 통해 프란스 라르만스는 자기 직장의 편안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며 떠나는 것 자체를 경계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돌아올 수 있다면 떠나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왜, 받아줄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을 가진 사람들만이 떠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떠남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증명한다. 그래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떠남과 여행을 권하는 것이겠지. 

 여행의 전제가 바로 '돌아온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아, 그렇다고 오해는 말기를. 반 스혼베커가 프란스 라르만스에게 했던 것처럼 결코 치즈 사업을 권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프란스 라르만스는 어머니의 죽음에 난처함을 느낀다. 마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과 거의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듯이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애쓰는 듯한 모습은 서툰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색했다.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와 닮아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근본적인 바탕은 전혀 다르다고 느꼈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거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지만 <9990개의 치즈>의 라르만스는 어쨌든 자기 생각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라르만스는 보통의 직장인의 표상이다. 수십 년을 반복해온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일정한 수입에서 안정감을 얻는 동시에 반복에 지루함을 느끼고, 불만족스러운 수입에 안달한다. 그러나 적어도 라르만스는 행복한 편이다. 그에게는 '불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의 부재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업을 시작할 때도 거의 태평스러울만큼 '어떻게든 되겠지'했으며, 사업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을 때도 '어쩔 수 없으니 정리해야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라르만스의 '안정감'의 원천은 라르만스의 강하고 단단한 자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히 화목하지는 않지만 신뢰를 공유하는 '식구(부인)'와 아빠의 사업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애썼던 아이들이 있었고, 귀찮을만큼 매일 찾아오는데다 잔소리에 가까운 얘기나 나누다 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힘을 보태주는 형님의 존재가 있었기에 라르만스는 신경증에 걸리는 일 없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다. 심지어 이미 돌아가시긴 했지만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은 어머니의 존재도 라르만스에게는 의미가 있어 보였다.


 <9990개의 치즈>는 마치 직장인이 꿈꾸는 일탈에 관한 소설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 수록 가족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프란스 라르만스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서문 격으로 보이는 '얀 흐레스호프에게'에서 흐레스호프는 혼자라지만)


 프란스 라르만스가 '식구'라고 부르는 부인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다 못해 다중적이다. 업신여기면서도 신뢰하고 존중하며, 우월감을 느끼면서 열등감도 느낀다. 


 예를들면 이 부분을 보자.

 56쪽

 고백하자면 나는 식구를 자극해서 눈물을 쏙 빼게 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할 때가 더러 있었네. 식구의 눈물을 보면 내 마음이 한결 풀렸거든. 그러니까 식구는 내 사회적 열등감에 대한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배출구였던 셈이네. 나는 회사원으로서의 내 노예 상태를 식구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대로 느끼게 해주려고 마음먹었네.

 


 여기서 라르만스가 식구에 대해 취하는 태도란 '침묵'이다. 자기의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고민하게 만들고, 그 고민이 결국 곤란에 이르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순간을 기다리는 데는 어느정도 비열한 면모가 없지 않은데, 수십 년간 함께 지내온 결과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걸 라르만스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곤란해할 것을 알면서도 괴롭게 만든다는 건 너무나 더럽고 치사한 행위다. 정말 파렴치하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 순간에 식구는 라르만스의 '실수'를 발견해 낸다(이 실수가 궁금하다면 9990개의 치즈를 읽어보길). 이 발견에 대해 라르만스는 역정을 내기보다 수용한다. 그러고는 너스레를 떨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한다. 이런 태도는 흔히 '허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거의 모두에게 익숙한 모습이리라.


 여기도 살펴보자.

 80쪽

 식구가 내 사무실에 존경심을 표하듯, 나 역시 식구의 영토인 부엌에 존경심을 품고 있다고 말일세.

 


 라르만스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라르만스는 결코 가족의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를 쏟아내기도 하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인 거다. 그렇기에 떠날 수도 있었고,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제 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거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보자.

 155쪽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남의 말을 잘 거절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네. 스혼베커 씨가 치즈 대리점 사업을 해보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당연히 그 제의를 뿌리쳤어야 했네. 그러나 그의 선의와 치즈를 뿌리칠 용기가 없었네. 그때의 비겁함을 지금 이렇게 속죄하고 있는 셈이지. 결국 치즈의 시련은 내 스스로 불러들인 걸세.

 


 라르만스는 자기 성찰을 아는 사람이다. 거기에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성숙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견 흔한 직장인들의 욕망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과 타인을 자신의 처지와 태도에 대한 '구실'로 삼는다. 어떤 일이나 결과에 자신의 책임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인 것에 책임이 있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거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런 떠넘기려는 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세가 그들의 성장을 방해한다.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해도, 회사로 돌아가려고 해도 그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앙금이 되어 금세 평정을 잃어버린다. 떠날 수도 없고, 떠나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놓이는 거다.


 라르만스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소한 것들에 집착한다. 그럴듯한 사무실, 책상, 타자기. 심지어 사무실을 비워두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인양 행동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런 것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를 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9990개의 치즈가 있다지만 그것을 우리가 다 먹어치울 수는 없다. 저마다 자신의 몫이 있는 것이고, 능력이 있는 거다.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라. 기다리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라. 

비록 지금이 아니라도 꼭 찾아내라. 그리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라.

 뭐, 치즈 이야기를 이렇게 읽는다고 해도 좋지 않은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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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에게 휘둘리는가 - 내 인생 꼬이게 만드는 그 사람 대처법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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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라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확인 한 것은 내 주위에 있을지 모를 심리 조종자의 존재 유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심리 조종자의 자리에 있는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는 아닌가 하고 돌아보았다. 한참을 읽고 난 후에야 "나는 심리 조종자가 아니다"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 후에야 주변에 있을지 모를 심리 조종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심리 조종자는 작게는 인생에 불편을 끼치고 크게는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위험인물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교묘한 수법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휘두르려 든다. 마치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어린 아이처럼 주변 사람들의 삶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경우, 스스로의 잘못 가운데 가장 용납하기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고의건 고의가 아니건 그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만둔다. 이런 내게 다른 사람을 일부러 곤란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며 심지어 괴롭게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그런 사람 하나나 둘 정도는 알고 있을 만큼 마치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사람들은 무척 흔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나처럼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 믿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간단히 심리 조종자들의 수법에 넘어간다는 거다. 
 
 허걱, 이제 심리 조종자에 대한 일은 남일이 아닌 나의 일일지도 모를 일이 되었다. 결국 이 책을 편 자리에서 끝까지 내리 읽을 수밖에 없었다.(나 조종당한거 아닐까?)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업무의 고충보다 인간 관계에서 오는 감정 노동으로 더 힘들어 한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기정사실이다. 연애는 물론 심지어 가족 관계에서도 거의 중노동이나 다름 없는 감정의 소모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작게는 사소한 감정 노동에 지친 사람들부터 집요하고 끈질긴 괴롭힘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리고 단순한 위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치료 혹은 해결로 가는 하나의 길을 열어줄 수 있을 지침서가 되어준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말임에도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왜?
그럴거면 좋아하지 않아서 불만을 가질 게 아니라 미움받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심리 조종자가 연인이라고 한다면 그의 생각은 이런 식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돼."
흔히 이런 상태라면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게 보통일 것 같다. 그러나 심리 조종자는 교묘하고 억지스러우며 말도 안되는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함으로써 헤어질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은 다양한 형태, 방법으로 심리를 조종하는 것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시에 그 괴롭힘과 괴로움의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자만하는 것 같지만 나 스스로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하는 편임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는 순간순간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 무의식의 깊숙한 곳까지 위협하도 뒤흔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유로 자살을 선택한 이들이 느꼈을 괴로움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크고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며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책 속의 심리조종자들,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사람들의 태도는 흔히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해 보인다. 그들은 피해자의 괴로움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한다. 그저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우선 시하고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거다. 이런 행위는 명백한 폭력이다. 모르는 것에는 대처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특히 교묘하게 벌어지는 정신적 폭력은 더더욱 알아채기 힘들고 대처하기도 어렵다. 
 저자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이런 책이 필요없는 세상에 살고 있었으면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책이 필요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심리 조종자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꿈꾼다. 물리적인 행복은 물론 심리적인 행복도 소중하다. 절대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당해왔던 이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권위와 위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사회 풍조는 이 책을 통해 심리 조종자의 존재를 확신했다고 해도 쉽사리 해결에 나설 수 없도록 만드는 방해 요소로 작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심리 조종자들은 그러한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제약들까지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장 방법이 없다고 손을 놓고 포기할 수는 없다. 정체를 알고 대처의 방법을 알았다면 갑자기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해도 막연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해서 오히려 더 불안했던 상태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출발 지점에 서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때로는 시작이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는 피해자인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사실이고 옳은 판단이다. 그러나 잘못이 없다고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구의 문제도 아닌 바로 당신의 문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리 조종자들은 피해자들의 착한 심성, 여린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사람의 선함을 악용하는 이들을 언제까지고 용인하고 용납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하나의 계기다. 우리는, 당신은 소중하다. 누구도 당신에게 상처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 조종하는 사람이 당신보다 높은 자리 혹은 강한 사람처럼 보여서 주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거듭해서 심리 조종자들의 정체는 '미숙한 어린 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들을 바로 알고, 그들의 행위와 말을 바로 볼 수만 있다면 더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 말이다. 오히려 그들의 미숙하고 어리석은 모습에 웃음이 날 것이라고 말이다. 

밑줄 긋기

  57쪽

 - 이기적인 사람, 무능한 사람, 못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버림받거나 거절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이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애정과 지원을 잃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금세 참을 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 조종자와의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애정'을 잃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애정이 아니라 집착이고 미련이다. 가짜 애정을 지키기 위해 삶을, 소중한 인생의 전부가 위협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94~95쪽

 심리 조종자와의 관계를 모두 끊고, 간접적으로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를 남기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멀리 이사를 가야만 안전과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는 법, 조종에 넘어가지 않는 법, 심리 조종자를 상대하고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면 분노가 솟구칠 때에도 그 관계의 마지막 폭죽이 터지는 모습을 보듯 재미있게 구경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이사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상실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으로 보이는,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선택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될 것이다 

 104쪽

 이 약탈자의 지배와 싸우는 최선의 방법은 더 이상 그를 대단하게 보지 않고 만만하게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를 대단하고 사악한 존재처럼 묘사하지 말자. 그의 행동을 완전히 꿰뚫어보고 나면, 무섭지도 않고 호락호락 넘어가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때부턴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우스워 보일 뿐이다.

 


 종이 호랑이의 정체를 알아채고 난 후에는 어린 아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결국 심리 조종자들은 그럴듯하게 보이는 종이호랑이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다. 그저 미숙한, 그렇고 그런 존재라는 거다. 불쌍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존재.

 170쪽

 세상에는 자기가 괴롭힘을 당하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헛되이 애쓰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은 괴롭힘의 이유가 사소하고 유치한 핑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짐작조차 못한다. 그토록 커다란 미움이 가당키나 한가? 당신이 뭘 어쨌다고 그렇게까지 괴롭힌단 말인가? 이런 물음들은 이성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그들을 이해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다. 애초에 이성적인 기준이나 이유가 없는데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건 그야말로 쓸 데 없는 곳에 기력을 낭비하는 일이 된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자.

 183쪽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기적인 사람, 무능한 사람, 부도덕한 사람,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려웠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폐를 끼치거나, 남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상처를 줄까 봐 망설여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갈등, 결별,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흔하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이러한 두려움을 어리석다 말할 수 있겠지만, 잠깐이라도 이런 감정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본다는 것,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본다는 것은 말로 하기는 쉽지만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여러 차례 마주하게 된다. 그런 두려움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은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심리 조종자들은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그것마저도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비겁하고 비열한 일이다. 혼자서 극복할 수 없다면 도움을 청해도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199쪽 

 당신이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심리 조종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면 여기 희소식을 전한다. 당신은 이미 해방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정신적 지배에 대한 치료는 다음 과정을 거쳐 피해자에게 그러한 인간관계이 주요 요인들을 가르쳐 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다. 

 220쪽

 나는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 '의심, 두려움, 죄의식'이라는 지옥의 악순환을 쉴 새 없이 깨뜨리고자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다시 말해, 나의 생각을 명확히 하고 기본적인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나 자신을 보호하며 나의 미래를 스스로 책임질 것을 약속한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마지막 한 걸음은 홀로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259쪽

 당신은 이제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당신 자신의 가담과 동조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당신은 너무 친절했고, 너무 자신만만했고, 너무 자기주장을 할 줄 몰랐고, 너무 좋게만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니 이제 확실하게 결심해라. 앞으로 친절에도 한계를 두고, 다시는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며, 헛된 약속에 매이지 않겠다고.

- 중략 - 

 나에 대한 존중은 남에게 부탁해서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이다.

 


 앞서 했던 말을 거듭해야겠다. 

마지막 한 걸음은 스스로의 몫이다. 잘 알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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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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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참깨'에서 지문인식까지 문을 여는 방법은 참 여러 가지다. 온갖 의미와 상징을 갖는 문부터 독특하게 기능하는 문도 다양하다. 그러나 문이라는 것은 물리적이고 실체적인 다양성보다 우리들, 인간의 마음 속에서 더 다양해지며 더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을 처음 만든 사람의 생각은 단순했을 거다. 드나들 수 있으면서 실내의 온기를 덜 빼앗기도록 외부와 차단할 수 있는 것 정도로 말이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소통과 동시에 단절이 가능한 매개 정도가 되겠는데 일단은 책 이야기를 먼저 하자.


 현암사의 소세키 전집의 띠지에 적힌 문구는 표지에 적힌 하이쿠를 풀어 놓은 것이다. 이 책을 받고, 띠지에 적힌 문장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소세키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됐다. 늘 품고 있으면서, 늘 마주하는 그런 희망과 허망. 아마도 <문>은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스케와 오요네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던 소스케는 지나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활달했지만 오요네와의 사건 뒤로 그 성향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아버지가 죽고, 숙부에게 속아 생활에 여유가 없어지면서 그 변화는 고정되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산시로>와 <그 후>가 이어지는 이야기인 것처럼 <문>과 <마음> 역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벌써 몇 번이나 <마음>을 읽었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다시 <마음>을 읽을 날이 기다려졌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소스케는 평범한 공무원으로 오요네와 조용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동안 동생 고로쿠를 맡아 키웠던 숙모가 돌연 '사정이 생겨 더는 동생을 맡고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은 가볍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은 고요함에 가까운 조용함과 과거에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기에 더는 타오를 것이 없다는 듯한 잔잔함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 요동은 좀처럼 격렬해지지도 또 다른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소스케의 삶을 크게 흔들게 되는 것은 대학 친구였던 야스이의 소식을 들으면서다. 오요네와의 사건이 있고 나서는 만난 적이 없었지만 소스케는 자신이 야스이에게 몹쓸짓을 했다고 느낀다. 그런 죄책감과 혼란 속에서 괴로워하던 소스케는 아는 이의 소개로 참선을 하는 암자를 찾기도 하지만 결국 크게 깨닫는 것도 없이 조금은 수척해져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은 여전히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앞으로도 조용하고 고요하게 너무 일찍 늙어버린 삶을 오래 보낼 것이다.

  그런 날이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문이 나를 향해 열려있으면서 반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 그래서 무얼 하더라도 괜찮고, 잘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흥분과 들뜸 속에서 마치 날아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희망에 부푸는 그런 날 말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기도 한다는 건 반대로 닫히기도 한다는 거다. 그런 날은 거절과 모욕, 좌절과 절망으로 추락하는 기분과 함께 좌절 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허망함으로 모든 숨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 소스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거다. 오요네와 만남 이후의 모든 순간이 선택의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을 거다. 


 우리들 역시 매 순간 삶의 문 앞에 서게 된다. 어떤 문을 열고, 어떤 문을 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 역시 스스로가 정해야 한다. 문 너머 저쪽이 이쪽보다 더 낫다거나 혹은 다름 없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문은 하나의 경계로 전혀 다른 세계와 이어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때 그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다'며 후회하는 일이 더 잦을 지 모른다.

 엉뚱한 말이지만 문이란 단순히 밀거나 당긴다고 열리는 게 아니다. 어떤 문은 "열려라 참깨"를 외쳐야 열리고, 어떤 문은 그 문에 맞는 열쇠가 필요하며, 등록된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이 있는가하면, 회전문처럼 적절한 기회와 선택을 통해 통과할 수 있는 문도 있다.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문이 있고, 저마다 열리는 방식이 있으며, 그 문 너머의 풍경도 제각각이기에 어디에도 똑같은 인생이 없는 것일 거다.

 

 소세키를 좋아한다는 것과 소스케와 오요네의 무채색에 가까운 삶을 통해 느껴지는 고요함만으로도 이 이야기 즐겁게 읽는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의외의 곳이란 소스케가 요양차 다녀온 절이다. 그 절의 큰 스님이 '숙제'로 내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참 오묘하다.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은 무엇인가?"

주에서는 이렇게 풀어준다.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 즉 자기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런 상대적인 세계를 넘어선 절대적이고 무차별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이라는 뜻이다.

이건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할 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부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쉽게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이 문장을 봤을 때 다시 떠올리게 됐다.

 

 252쪽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 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누구도 부모에게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태어나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 역시 마찬가지다. 그 부모도 그 부모의 부모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다. 부탁이 없으니 원망도 없다. 원망이 없으니 원한도 없다. 부탁도 원망도 원한도 없다면 거기에 희망을 끼워넣을 필요도 없으며, 희망이 없는 동안에는 절망하거나 허망하지 않아도 좋다.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문을 열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세계가 변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이고 무차별적인 세계에서는 하나의 선택이 무엇도 결정하지 않게 된다. 결국 그 세계에는 무엇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 특유의 혼돈이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혼돈을 다른 말로 적으면 자유가 될 것이다. 

 인간 본래의 심성은 자유였을 거다. 물론 이 자유란 누구를 해롭게 해도 되고, 자기만 좋을대로 행동한다는 '멋대로'의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자유로워도 되는 자유, 자유를 위한 자유다. 인간이 꿈꾸는 온갖 자유 너머에는 그런 배경이 있을 것만 같다. 결국 누구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저절로 열리지도 않는다. 열고 싶으면 열고 들어가고, 열고 싶지 않으면 지나가면 되는 것 뿐이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소스케는 과거의 친구 야스이와의 만남의 문을 열지 않고 지나친다. 그러면서 언제든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을 생각하지는 않지만 같은 상황이 거듭된다 해도 역시 그때도 열지 않고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 소스케가 변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소스케는 어떤 문 앞에 서건 그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거듭해서 결정을 유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처음부터 이미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정하고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는 거다. 

 마치 지금 일어나서 준비하지 않으면 지각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10분만 10분만 하면서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과 같다.(다르지만)


지금까지 적은 건 사실 길기만 하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앞으로 적을 것도 크게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냥 이런 생각들을 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260쪽

 그의 머리를 스쳐 가려던 비구름은 간신히 머리에 닿지 않고 지나간 듯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불안이 앞으로도 몇 번이고 여러 가지 수준으로 되풀이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것을 되풀이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다. 그것을 피해 다니는 것은 소스케의 일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끝이 난 셈이다. 뒤에 에필로그처럼 몇 페이지가 이어지지만 그 마지막 말도 이런 식이다.


 264쪽 

 "정말 다행이에요. 드디어 봄이 돼서"하며 눈썹을 환하게 폈다. 소스케는 툇마루로 나가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면서,

 "응, 하지만 또 금방 겨울이 오겠지"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 당신이 열려고 하는 그 문 너머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걸까?

멕베스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라. 아무리 사나운 날이라도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있었고, 무엇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알고는 있었다. 소스케의 반응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알기에 미래도 어느 정도는 알수 있다. 봄이 왔다고 겨울이 오지 않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겨울을 봄부터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저 매일매일 손톱이 자라고, 그 손톱을 자르는 일을 거듭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문을 닫고, 문을 지나치고 문을 바라보며 지내면 되는 거다.


 여담이지만 모든 소설은 나를 들여다보는 문이 된다. 기분이 내키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그 문 속의 인물들처럼 살다가 지겨워지면 되돌아와 문을 닫아버리면 된다. 소설만큼 편리한 문을 본 적이 없다. 내게 모든 것을 열어주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막고 있는 기묘한 문이 바로 소설인 셈이다. 

 앞으로도 이 문은 자꾸만 열어볼 거고, 자꾸만 닫아버릴 거다. 가깝든 멀든 다시 열기도 할테고 영원히 다시 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문은 다르다. 지금까지도 열지 않았고, 앞으로도 열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지나쳐 갈 생각이다.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길은 이어져 있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온갖 문을 통과하는걸 즐긴다. 그 모험에 성공한다고 해도 나약한 자신이 강해지지는 않을 거란 걸 안다. 나 스스로 나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허망하지 않으면서 희망에 차 있지도 않다. 표지의 하이쿠에 대한 답은 이 정도로만 해둬야겠다. 


 불안 때문에 모험을 떠난다면 모험때문에 불안해 하게 될 게 뻔하다. 허망함으로 희망을 구한다면 희망함으로 허망해질 것 또한 뻔하다. 

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문 앞에 서있는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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