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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0개의 치즈
빌렘 엘스호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집을 떠나면 고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약간의 과장에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는 정도의 시간 정도가 필요할 뿐이다.
한 여름이라면 문을 여는 순간 더위가 밀어 닥칠 것이고, 한 겨울이라면 문을 열자마자 칼 바람과 마주하게 될 것이며, 비가 오는 날이라면 아무리 꼼꼼하게 우산을 써봐도 옷이나 신발의 어느 한 구석은 틀림 없이 젖게 될 것이다.
해운 조선소 직원인 프란스 라르만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반 스혼베커의 제의로 치즈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계획도 경험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한 치즈 사업이 무탈히 돌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길지 않았던 몇 주간의 치즈와의 소동을 통해 프란스 라르만스는 자기 직장의 편안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며 떠나는 것 자체를 경계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돌아올 수 있다면 떠나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왜, 받아줄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을 가진 사람들만이 떠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떠남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증명한다. 그래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떠남과 여행을 권하는 것이겠지.
여행의 전제가 바로 '돌아온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아, 그렇다고 오해는 말기를. 반 스혼베커가 프란스 라르만스에게 했던 것처럼 결코 치즈 사업을 권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프란스 라르만스는 어머니의 죽음에 난처함을 느낀다. 마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과 거의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듯이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애쓰는 듯한 모습은 서툰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색했다.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와 닮아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근본적인 바탕은 전혀 다르다고 느꼈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거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지만 <9990개의 치즈>의 라르만스는 어쨌든 자기 생각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라르만스는 보통의 직장인의 표상이다. 수십 년을 반복해온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일정한 수입에서 안정감을 얻는 동시에 반복에 지루함을 느끼고, 불만족스러운 수입에 안달한다. 그러나 적어도 라르만스는 행복한 편이다. 그에게는 '불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의 부재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업을 시작할 때도 거의 태평스러울만큼 '어떻게든 되겠지'했으며, 사업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을 때도 '어쩔 수 없으니 정리해야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라르만스의 '안정감'의 원천은 라르만스의 강하고 단단한 자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히 화목하지는 않지만 신뢰를 공유하는 '식구(부인)'와 아빠의 사업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애썼던 아이들이 있었고, 귀찮을만큼 매일 찾아오는데다 잔소리에 가까운 얘기나 나누다 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힘을 보태주는 형님의 존재가 있었기에 라르만스는 신경증에 걸리는 일 없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다. 심지어 이미 돌아가시긴 했지만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은 어머니의 존재도 라르만스에게는 의미가 있어 보였다.
<9990개의 치즈>는 마치 직장인이 꿈꾸는 일탈에 관한 소설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 수록 가족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프란스 라르만스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서문 격으로 보이는 '얀 흐레스호프에게'에서 흐레스호프는 혼자라지만)
프란스 라르만스가 '식구'라고 부르는 부인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다 못해 다중적이다. 업신여기면서도 신뢰하고 존중하며, 우월감을 느끼면서 열등감도 느낀다.
예를들면 이 부분을 보자.
56쪽 고백하자면 나는 식구를 자극해서 눈물을 쏙 빼게 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할 때가 더러 있었네. 식구의 눈물을 보면 내 마음이 한결 풀렸거든. 그러니까 식구는 내 사회적 열등감에 대한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배출구였던 셈이네. 나는 회사원으로서의 내 노예 상태를 식구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대로 느끼게 해주려고 마음먹었네. |
여기서 라르만스가 식구에 대해 취하는 태도란 '침묵'이다. 자기의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고민하게 만들고, 그 고민이 결국 곤란에 이르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순간을 기다리는 데는 어느정도 비열한 면모가 없지 않은데, 수십 년간 함께 지내온 결과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걸 라르만스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곤란해할 것을 알면서도 괴롭게 만든다는 건 너무나 더럽고 치사한 행위다. 정말 파렴치하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 순간에 식구는 라르만스의 '실수'를 발견해 낸다(이 실수가 궁금하다면 9990개의 치즈를 읽어보길). 이 발견에 대해 라르만스는 역정을 내기보다 수용한다. 그러고는 너스레를 떨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한다. 이런 태도는 흔히 '허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거의 모두에게 익숙한 모습이리라.
여기도 살펴보자.
80쪽 식구가 내 사무실에 존경심을 표하듯, 나 역시 식구의 영토인 부엌에 존경심을 품고 있다고 말일세. |
라르만스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라르만스는 결코 가족의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를 쏟아내기도 하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인 거다. 그렇기에 떠날 수도 있었고,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제 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거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보자.
155쪽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남의 말을 잘 거절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네. 스혼베커 씨가 치즈 대리점 사업을 해보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당연히 그 제의를 뿌리쳤어야 했네. 그러나 그의 선의와 치즈를 뿌리칠 용기가 없었네. 그때의 비겁함을 지금 이렇게 속죄하고 있는 셈이지. 결국 치즈의 시련은 내 스스로 불러들인 걸세. |
라르만스는 자기 성찰을 아는 사람이다. 거기에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성숙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견 흔한 직장인들의 욕망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과 타인을 자신의 처지와 태도에 대한 '구실'로 삼는다. 어떤 일이나 결과에 자신의 책임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인 것에 책임이 있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거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런 떠넘기려는 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세가 그들의 성장을 방해한다.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해도, 회사로 돌아가려고 해도 그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앙금이 되어 금세 평정을 잃어버린다. 떠날 수도 없고, 떠나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놓이는 거다.
라르만스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소한 것들에 집착한다. 그럴듯한 사무실, 책상, 타자기. 심지어 사무실을 비워두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인양 행동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런 것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를 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9990개의 치즈가 있다지만 그것을 우리가 다 먹어치울 수는 없다. 저마다 자신의 몫이 있는 것이고, 능력이 있는 거다.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라. 기다리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라.
비록 지금이 아니라도 꼭 찾아내라. 그리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라.
뭐, 치즈 이야기를 이렇게 읽는다고 해도 좋지 않은가?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