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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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시 속의 문장이다. 동시에 밀란 쿤데라의 <불멸> 속에서 인용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불멸'이라는 제목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문장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 호기심을 갖고 이 글을 읽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문장을 적어두기로 한다. 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다섯 번 이상을 읽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작가의 장치를 말이다.


 520쪽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고,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했다.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 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작가는 왜 '물망초'를 자꾸만 언급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알겠지만 물망초의 꽃말이 "'Forget me not' 나를 잊지 마세요." 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도 아니고, 한 송이, 그것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자취로서 간직하고 싶어 했다는 표현에서 불멸에 대한 염원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거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런 의미의 말을 한다.

"행간을 건너뛰어 읽으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정말 서둘러 행간을 건너뛰며 읽었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줄 때 엉뚱한 결말을 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잘 짜인 이야기인 동시에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라는 거다.


 이 복잡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략 그 이유들을 나열해보면 하나는 '불멸'이라는 불분명한 주제를 제목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이야기 속에 무수한 '상징'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셋은 어디부터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모호하다는 거다. 넷은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기 어렵기에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인지 알기 어렵다는 거다(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다섯은, 아마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적고 싶지 않다. 뭐가 뭔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이 소설은 기묘하다. 읽기 어려운 문장은 거의 없다. 술술 잘 읽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 순간 방심하면 어떻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는지 이전 페이지를 돌아봐야만 하게 된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과 육신을 오가며 삶과 죽음을 생중계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이게 쉬운 소설인지, 어려운 소설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책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 상당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농담>이나 <웃음과 망각의 책>은 확실히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될 거라는 거다. 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말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하고는 비슷비슷할 것 같지만 말이다). 아아, <무의미의 축제>도 더하자.


 밀란 쿤데라는 무척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본래 그의 문장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짤막한 문장 속에 다양한 의미가 담긴 상징을 새겨 넣는 재주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애매한 처지로 몰고 가면서도 동시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긴장을 유지하는 감각이 무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날카로운 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진한 여운이 한참이나 지속되는 걸 느낄 수 있는 까닭이 그런 숨겨진 날카로움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가 한 수영장에서 지인인 아베나리우스를 기다리는 동안 한 나이 든 여성을 본다. 그 여성은 젊은 강사에게 수영을 배우는 중이었는데 물 속에서 내뱉는 숨소리가 마치 증기기관차 같아 소설가의 눈길을 끈다(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 아무튼 눈길을 끈다). 그 여성은 강습이 끝나고 강사와 헤어지며 하나의 몸짓을 한다. 그 몸짓을 보는 순간 소설가는 상상 속에 한 여자를 만들어 낸다. 필멸하는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멸성을 가진 몸짓을 통해 소설가가 만들어 낸 여자의 이야기인 거다. 그 여자의 유년부터 죽음까지가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라면 줄거리가 되겠다. 그런데 소설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 여자의 주변에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들은 전혀 무관해 보이면서 관계가 있으며, 무의미한 인물 혹은 사건처럼 보이는 것들 역시 돌고 돌아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이야기는 '불멸'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불멸성을 획득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사람이 괴테와 헤밍웨이다. 하지만 왜일까? 소설가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인물들의 불멸성은 신성하거나 숭고한 것이라기보다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그려진다. 기억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가 아닌 '이미지화'된 기억들뿐이다. 헤밍웨이보다 한참 오래전에 죽어 불멸의 반열에 오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죽는 법'을 깨우치고자 한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소설 속에서 색다른 성격과 이력을 부여받아 살아났던 인물이기에 실제와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오래전에 죽은 그는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부활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헤밍웨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지 않은 말까지도 작가의 상상에 의해 늘어놓아야 했고, 고백해야 했으며, 움직여야 했다. 그들의 불멸성이 우스운 것이 되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것이 절대적이지도, 자율적이지도, 그들의 의지가 개입할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줄거리라고, 간략하게 적겠다고 했음에도 아직 이야기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뭐, 이야기가 궁금하면 스스로 읽어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밖에는.


 소설 속에서 괴테나 헤밍웨이가 획득한 '불멸'은 하나의 '벌'이다. 그들이 책을 썼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책을 썼다고 해서 불멸을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기의 모든 작품을 지상에서 지워버리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들은 한 세대는커녕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잊히고 만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무엇은 불멸하고, 무엇은 필멸하며, 누구는 기억되고, 누구는 잊히는 걸까? 기억된다고 해도, 불멸한다고 해도 정말 기억되고 불멸하는 것은 그 본래의 존재일까 아니면 다른 기억될만한 어떤 것일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시에서부터 음악에까지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 속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하고도 우스웠던 것은 인간이 거의 공통적으로 불멸을 바라지만, 그 불멸이란 '죽음'이라는 필멸의 과정을 지난 후에야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살아있으면서 '불멸'을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불멸에 죽음이라는 과정이 개입하는 필연적인 이유다. 또 하나 우스웠던 것은 앞에서도 적었던 것처럼 '책을 쓴 죄로' 불멸을 선고받았다고 이야기하는 '불멸자'들 입장에서의 진술이다. 그들은 불멸을 바랐거나, 불멸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임에도 조금은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 후에도 자신의 평판이나 기억되는 이미지를 염려하는 죽은 자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왠지 웃음이 나지 않는가?

  

 한때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무엇이든 좋으니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도 하고, 서툰 솜씨로 적은 글을 나눠주기도 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거의, 전혀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다는 결론에 닿았을 뿐이다. 

 이 작품은 불멸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그럼에도 불멸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다. '어떤 것'은 글이나 책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으며, 사람들 속에 남을 기억일 수도 있다. 그저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오래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웠던 거다. 

 또 하나는 어차피 기억되는 것, 불멸하게 되는 것이 단편적인 '이미지'와 실제의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편집되고 왜곡된 '기억'이라면 차라리 잊히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죽음과 함께 죽은 자에게 어울리는 망각 속으로 가라앉고자 하는 욕망이 새삼 깨어나는 것을 느꼈던 거다. 

 나는 기억되고 싶은 것인가? 혹은 잊히고 싶은 것인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게 되는 거다. 


 무엇보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불멸 이전에 이 삶 속에서의 모습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온 마음을 차지한 채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었다는 거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나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기억만 남겨달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나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는 '거울'과 '카메라'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것 같다. 그리고 거울은 자아도취를 의미하는 것 같다. 불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시선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섭하고, 비난하고, 옹호하고, 칭송하며, 실망하고, 사랑하고, 미워할 것이다. 이 모든 감정의 도가니 속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멸이 아닐까?

 그러나 상상 속의 인물인 '아녜스'조차 물망초 한 송이만큼이라도 기억되고자 소망한다. 실제 존재했던, 살아왔던 이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불멸하기를,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소망을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꾸고 희망한다. 그것이 필멸하는 존재,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대한 해석은 모호하다. 여성의 잉태, 여성성, 몸짓, 아름다움. 이러한 것들이 더 항구적인 가치를 지니기에 결국 남성들 역시 여성적이 되어갈 것이라는 예언인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하고, 과학이 예언하는 것처럼 먼 미래에는 오로지 여성만이 남을 것이며 남성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 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호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남성보다는 여성 쪽이 더 '불멸'하는 가치를 더 많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는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감이다. 여성은 약자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에 존중받아야 하고 또 사랑받아야 하는 거다. 


 사랑조차 불멸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감정이란 불멸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큼 불멸에 가까이 있다고 믿어지는 것도 없다. 거짓도, 미움도, 질투와 증오조차도 사랑과 닮아 있으니, 오히려 불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는 넘치도록 사랑하는 이가 아니겠는가.

 일단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물망초 한 송이를 두 눈에 품어 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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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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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윌리스 첫 책인줄 알았건만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코니 윌리스라 깜짝 놀랐다.
역시 기대할만한 책이었다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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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인 - 대한민국 사춘기 심리학
허태균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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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헬조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우선 이 표현은 지나치게 '가볍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건이나 현상, 심지어는 시대까지를 단순화시키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것 같다. 

'헬조선'이라는 표현 역시 입에 맞도록, 부르기 쉽도록, 마치 남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의 거리를 두도록 만드는 단순화의 산물인 것 같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조상님일까? 

정치인일까?

아니면 이웃집 아저씨?

아니다. 이 문제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건 우리 모두다. 

노인에서부터 아이까지, 국민 모두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 함께 하고 있는 거다. 


"누구 탓이냐?"고?

누구 하나의 탓이 아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누구'를 찾아서 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끝내도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누구 탓이냐는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하는 건 우리 모두 함께다.


<어쩌다 한국인>은 <가끔은 제정신>을 통해 알게된 심리학자 허태균 교수의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에 관한 저서다.

이 여섯 가지 심리가 정확하다거나 틀림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접근과 해석 방식이 흥미롭다.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가 뭔지 궁금한가? 

그럼 일단 그 이름만 적어보기로 한다.


1. 주체성 

 부제 : '내가 한 턱 쏜다'에 숨겨진 본심


2. 가족확장성

 부제 : 한국형 국가 모델 : 큰아버지와 조카?


3. 관계주의

 부제 : '저희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


4. 심정중심주의

 부제 : 한국인의 진심 확인법


5. 복합유연성

 부제 : 한국인이 유독 포기를 싫어하는 이유


6. 불확실성의 회피

 안 보일까봐 불안한 사람들


 각각의 주제만 봐도 적잖이 흥미가 일어날 거다. 사실 내용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다. 그럴 것이 한국인의 민감한 심리를 들추는 것이다보니 지금도 거의 모든 조직과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고, 경험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불편하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책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태도, 떨쳐내지 못하는 학연과 지연, 폭탄주와 인재상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거의 모든 '현상'에 숨겨진 한국인의 심리를 파헤친다. 저자는 흔히 '헬조선'이라고 하는 현재의 한국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거나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엄청난 발전을 이루는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대한민국의 경제와 사회 등 여러 방면이 성숙의 시간에 들어갔다고 본다. 그런 모습이 마치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사춘기와 같다고 해서 대한민국은 사춘기다라고 선언하는 거다. 


 본문에서 저자는 한국인이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가치와 제도가 이제는 변화를 맞이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다른 나라와 역사적 흐름을 들어 주장한다. 주장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저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대와 세상에 맞게 변화하기 위해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꼽은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는 모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버려야 하거나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음을 꼬집는다. 


특별히 마음이 끌렸던 몇 부분을 적어보기로 한다.


 220쪽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고의 착각이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 사람들은 불안하니까 그냥 아무거나 한번 해보려고 한다. 아니, 남들이 하는 걸 그냥 따라한다. 매도 같이 맞으면 덜 아프니까.

 


처음에는 '인고의 착각'이 인과의 착각의 잘못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고의 착각은 인고의 착각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의 표현이었다. 인고의 착각은 간단히 말하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속아 고생을 사서 했던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마치 미덕처럼 일컬어 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행위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시키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일이 적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며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권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을 뿐이고, 허울뿐인 권위를 미워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쓸 데 없이 고생해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발, 무의미한 고생을 사서 하지도, 시키지도 말자.


 253쪽

 결핍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다만 한국인들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낄 뿐이다. 이제는 결핍의 사회에서 성숙의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래 전 일이다. 해외 유학파 출신의 대학생이 유명 목사인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 범죄가 뉴스에 보도됐다. 그런데 이 범죄의 이유가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유흥비를 주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해서 놀랐다기보다 그 이유가 너무 하찮아서 놀랐었다. 그 이후에도 수십 만원의 카드 값을 갚으려고 강도가 되어 살인에까지 이른 사건이나 명품을 갖고 싶어, 상습 절도범이 된 사건 등이 끊임 없이 일어났다. 이제는 거의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없을만큼 너무나 '흔한' 현상이 되어버린 거다. 

 "얼마나 가져야 행복한가?"라는 물음이 있다. 사람에게 얼마가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생계'는 어느 정도 수준이면 되는 걸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배웠다. 앞을 보며 나아가면서 발 밑에 짓밟히는 것들은 무시하라고 했다. 나아가려다 보면 누군가를 상처입히거나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했다.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지 말고 더 위를 바라보라고 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 진 것이 지금의 불행한 세대다. 얼마를 가져야 행복해진다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그러나 '남보다 많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은 끊임 없이 샘 솟는다. 충분하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지독하게 욕심을 내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영원히 목말라하다 죽어갈 게 분명하다. 


 393쪽

 인문학은 결코 교양도, 수단도 아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불편했다. 그 열풍을 이어가기 위해 나왔다는 책들을 읽으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자기계발서와 인문서의 구분이 모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인문서에서조차 '무엇무엇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을 수 없이 봐왔다. 인문학까지도 '학습'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시도를 따라가다가 '별 것 아니구만'하며 내려놓는 걸 보았다. 

쉬운 인문학.

가벼운 인문학.

친근한 인문학.

모두 좋다. 하지만 인문학이 단순히 역사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의 '상식'이나 '지식'을 쌓고 채우기 위해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이상 인문학 책을 읽지 않겠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학의 정의'가 바뀐 것만 같다.

누가 그랬는가?

모두가 그랬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을 누군가가 제시해주는 지식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인문학은 수단이 아니다. 본질이다. 그 속에 담긴 생각과 고민이 우리의 삶에 옮겨져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이 인문학이다. 무슨 철학자의 말을 외우고, 무슨 이론을 읊는 것이 인문학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어쩌다 한국인이 된 걸까?

누구도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다. 이중국적이 있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의 부모의 선택일 뿐 태어난 자의 의지는 아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원망만 하고 있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 고민할 때다. 지금까지의 이론과 상식, 법칙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곧 온다. 이미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 개개인을 살려내고 구원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스스로 나아가자.


 사실 이 책에 담긴 한국인의 대표적인 여섯가지 심리 따위 아무 의미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 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보고, 알아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앎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서는 어디로 가야할 지 그 방향을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마음껏 이용하면 된다. 그것이 정당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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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교향악 펭귄클래식 39
앙드레 지드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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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눈이 멀어 저마다의 코끼리 다리를 더듬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자신은 마음의 눈이 멀어 있으면서 육체의 눈이 먼 사람들에게 한 치 앞도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나'가 목사로 부임해 있는 한 마을에서의 어느 겨울.

 한 노파가 눈이 먼 손녀 하나를 남기고 죽는다. 목사는 거의 아무런 생각도 없이(실제로는 어떤 의도가 있었어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소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 소녀를 본 아내는 '예상과는 달리' 지나치게 화를 내고(어쩌면 그 태도는 집안에 들어오려는 재앙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써 아내를 달래며 다음 날을 기약한다. 이 소녀는 거의 교육받지 않은 상태였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음에도 웅얼거리는 소리 외에는 내지 못한다. '나'는 목사로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하듯 소녀를 가르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나'는 거의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그 소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이 대단히 어그러지고 뒤틀려 있음을 말이다. '나'는 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믿었으나 결국은 자기 자신,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 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자기애가 부른 절망적인 결과 앞에 쓰러지듯 무릎 꿇는다.


 흔히 '적당한 자기애'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적당한 자기애는 자신감이 되어 준다. 자신도 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사랑받고 있고,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 자기애를 근거로 한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말로 자존감이 있겠다. 자존감이 온전히 높은 사람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자존감이 지나치게 낮은 사람은 소심함을 넘어 비참해 보인다.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경우에는 오만하고 교만해 보인다. 

 자기애와 자존감의 학술적인 정의는 어떻든 둘은 무척 닮아 있다. 적당히는 필요하지만 많든 적든 지나치면 고통과 불행을 부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이야기 속 목사는 소녀를 대하는 동안 서서히 눈멀어 간다. 육체의 눈이 멀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가족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을 목사만은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를 신성한 과업을 수행하는 자, 순수한 선행을 베푸는 자, 사랑으로 곤란에 처한 자를 이끌어 주는 목자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나쳐서 애처로워 보이는 '사랑' 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목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랑을 못 본 척, 모른 척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족의 괴로움 역시 외면한다.


 아무도 소녀의 이름을 몰랐기에 소녀는 목사의 딸이 부르는 대로 이름을 붙여 '제르트뤼드'라 불렀다. 소녀는 할머니와 사는 동안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다. 지식은 물론 감정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소녀였지만 목사의 지도를 따라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서서히 인간의 마음에 눈뜨게 된다. 그리고 모든 소녀가 그런 것처럼 이 소녀 역시 사랑에 빠진다. 그 대상은 목사가 아니라 목사의 아들인 자크였다. 

 소녀는 눈멀었으므로 집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로 사람들이 웃는지 우는지는 알았다. 소녀가 사랑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떤지 소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랑 역시 확인할 수 없다. 그런 그녀의 주위를 채우는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목사였다. 그것은 목사의 열망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그들이 자신보다 제르트뤼드를 이해하고 아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독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더 멀리 떨어뜨린다. 아니다. 멀리 떨어뜨린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의 거리를 멀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소녀는 목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목사 역시 사랑한다고 말한다.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목사는 눈이 보인다. 소녀는 가족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목사는 가족의 표정을 언제나 보고 있다. 


 소녀의 눈을 검사하고 간 의사 친구는 소녀의 눈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목사는 불안해한다. 그러나 소녀에게 세상을 보여주기로 한다. 수술은 성공했고, 소녀는 돌아왔지만 결말은 비참하다. 

 소녀는 비로소 가족의 표정을 보았다. 그 절망과 근심으로 가득한 표정이 소녀가 거의 처음 본 사람의 얼굴이었으리라. 세상은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으나 사람은, 인연은 엇갈리고 빗나가 비참해져 있었다.


 소녀가 사랑한 사람은 자크였다. 

목사가 사랑한 사람은 소녀였다. 

목사는 자신만이 소녀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오만한 감정을 가슴에 품었다. 그것은 비극 외에 어떤 결말도 준비할 필요가 없는 외길을 닦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모두가 보는 것,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몰랐을까.


세상에 '오직 나만이'라는 가정은 없다. 

"나만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이런 생각은 오만이다.

그런 오만이 상대를 불행하게 만든다. 


세상은 음악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눈을 돌리지 않도록, 눈을 감지 않도록 애써야만 한다.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눈멀어 있으면서 살아간다. 

모든 것을 아는 존재는 '신'외에 아무도 없으며, 확신이라는 것조차 순간순간 변하고 또 흔들린다.


사랑도 좋고, 헌신도 아름답다. 그러나 사랑이나 헌신은 값이 없다. 대가를 기대해서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사랑도 헌신도 아니다. 순수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많아도 순수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 '나', 목사는 자신의 가정, 아내, 아이들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더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냥 친한 99명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이 더 빛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길을 잃었다 돌아온 양은 무리 속에 다시 섞여야 한다. 그를 구분하는 순간, 그 한 마리의 양은 언제까지나 길 잃은 채로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로지 목자의 손에만 이끌려 다녀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선과 악은 인간이 분별할 수 있는 성질을 넘어선다. 

어떤 선은 악이고, 어떤 악은 선이 되는 것이 신에게도 가능할까?

인간은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흐름을 오가며 혼란스러워하는 존재다. 그런 인간 가운데 하나인 목사가  눈먼 소녀 제르트뤼드에게 가르친 것은 자신이 믿는 선 뿐이었다. 갑자기 알아버린 현실에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결과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인간은 모두 저마다 조금씩 눈멀어 살아간다.  

사물도 현상도 저마다 다르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절대적인 '나'는 인간의 세상에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강요하지 말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나'를 강요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말자.

우리는 저마다의 우리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어떤 사람은 코를, 어떤 사람은 귀를 쓰다듬으며 저마다의 진실을 말하며 살아가도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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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적당히 취할만큼 술을 마신 후에 적은 감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이 감상을 읽어보면 되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읽어볼 예정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감상 역시 내리 휘갈린 후 올려 버릴 것이므로. 

예고하건데, 이 감상은 몹시 감상적인 감상이 될 예정이므로 감상적인 것을 싫어하는 이는 읽지 말 것을 권함.


 책마다 읽는 이유와 목표가 제각각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출근과 퇴근 시간동안 읽었기에 거의 일주일 가까이 걸려 읽은 책이다. 시작부터 완독까지는 일주일도 넘게 걸린 책이기도 하다.


 <안녕 헤이즐>이라는 영화의 원작으로 알려진 소설이기도 한데 의외로 영화는 알지만 소설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우울한 이야기다. 불행한 이야기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우울, 동정, 슬픔은 소설 속 화자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의 부작용'일 뿐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이며 필연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 없는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이 책을 다 읽었을즈음 한 편의 글을 편지에 적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 그 죽음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꼈기에 그런 편지를 적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적고도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데는 언제 죽음이 닥칠 지 모른다는 막연함이 작용하고 있었다. 10년 혹은 50년을 더 산다면 그 편지가 부끄러워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다. 


 이런 생각은 불확실한 내일의 소유자인 나에게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것이다. 

그런 사치를 아무렇지 않게 거듭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삶이다. 나는 얼마나 방탕한가. 이런 자책을 이해할 수 있는가?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는 아직 10대에 불과하지만 치명적인 암으로 인해 언제 그 생명을 잃어버릴 지 모른 채, 어느 정도의 체념과 어느 정도의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소아암 환자들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다르게는 사랑과 세상에 대한 애정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래 전 이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던 날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죽을 병에 걸렸음이 밝혀지면 어쩌지?" 

"어느날 갑자기 죽게 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두 가지 상황의 결론은 동일하다. 

"어쩔 수 없지. 곧 죽게 될 것이거나 이미 죽어버린 걸."

이외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아암 환자들의 자기 인식이 슬픔을 안기는 결정적인 이유는 '수용'과 '체념'이다. 

이미 모든 고통이나 두려움, 슬픔이나 미련이 '죽음의 부작용'임을 인식하고 있는 아이를 보는 일은 얼마나 슬프고 힘겨운 것일까.

무슨 짓을 해도 언제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장날 지 알지 못하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려운 삶은 오히려 끝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곧 죽을 것이기에,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기에, 내일을 확신할 수 없기에 이들은 절망에게 희망 몫의 자리까지 내놓는다. 온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한 동안은 오히려 슬픔이나 설움이 마음을 장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보는 일이란 몹시도, 대단히도 서글픈 일이라 마음으로 울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주인공은 고작 열여섯이다. 그리고 그 나이에 이미 모든 희망이 박탈되었다는 것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 앞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좌절이나 슬픔을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 필멸자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어떤 생명체도 죽음을 자처하지는 않는 법이다. 모두가 생을, 삶을, 시간을 갈구한다.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완벽하고 철저하게 박탈한다. 거기에는 어떤 희망도 약속도 없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완결이다. 

죽음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사랑을 막지는 못한다. 

"돈이 없어서 사랑을 못해요." 

"사랑하지만 시간이 모자라요."

"그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사랑하기를 그만두거나 포기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게 이런 이유들은 모두 사치스러운 투정처럼 들릴 것이 분명하다. 이들이야말로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하고 또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이야기는 스스로의 존재의 마지막인 죽음과 죽음을 앞두고 소중한 사람을 만들려는 시도에 대한 성찰, 남겨질 지 모를 사람에게 안길지 모를 상처까지를 염려하며 자기 안에 갇혀 마지막을 기댜리는 소녀의 이야기다. 그러나 암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내일의 삶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다. 병이 있고, 암에 걸렸기에 먼저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을 위협하는 죽음은 암 하나가 아니다. 삶의 부작용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삶의 어디에나 웅크리고 있다가 삶을 거꾸러뜨릴 수 있게 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삶은 사랑하면서 죽음은 두려워하고 또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피하려고 애쓰는 동안 흘러가버리는 삶은 두려움의 부작용으로 삶의 어느 부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술에 취한 상태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횡설수설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상태다. 거기에 이 시간이다. 술에 취한데다 잠까지 부족하다면 도대체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나부터 궁금할 지경이다.


 앞에서 책마다 읽는 목표나 이유가 제각각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처음부터 목적이나 이유를 정하고 읽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책 역시 처음에는 아무 목적 없이 읽기 시작했었다. 그러다가 하나의 목표가 생겼는데, 그 목표란 이 책의 제목인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라는 문장에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거였다. 


 결론부터 적자면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일단 무슨 '잘못'인지 알 수 없고, '우리'가 누군지도 불분명 하며, '별'이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지 않다"는 의미의 문장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누구인지, 무슨 잘못인지, 어느 별 이야기인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역시 오리무중인 거다. 


 이야기가 끝나갈즈음에는 이 문제를 푸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그저 인간이라는 '필멸자'의 존재를 좀 더 확실히 각인시켰을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내일이 '반드시' 시작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죄가 없으면, 순수하다면 그 삶은 죽음으로부터 우선적으로 보호받게 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내일? 내일은 내일이 오기 전까지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의 의지를 벗어난 선형적인 흐름 속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그 지점의 어떤 부분을 떼어내어 재생시켰을 때 그 시간에 내가 있을 지 없을 지도 알 수 없다. 온통 불확실한 것 뿐인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삶이다. 죽음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작용이다.


 이 책은 '사랑'의 속성을 일깨워준다. 

사랑은 '영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느끼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언제 끝날 지, 어떤 이유로 파괴될 지 염려하는 동안에는 사랑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가족, 친구와의 사랑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보통의 사람과 암 환자의 삶이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다. 혹 남겨질 사람에게 상처가 될 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이 소설 속의 '헤이즐'처럼 마음을 여는 것을 망설인다면 또다른 의미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어떤 '상징'에 얽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나' 혹은 '자아'라는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것에 얽매이는 것처럼 어떤 완벽하고도 완전한 '상징'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삶, 사랑, 죽음.

 이 셋은 언제나 충돌하지만 항상 함께 한다. 잊혀지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은 슬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 슬픔은 모두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다. 아무 것도 아닌,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어떻게 마무리를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다. 

실컷 삶과 죽음, 사랑과 두려움에 대해 떠들었지만 그 가운데 무엇하나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되는 거다. 죽음은 염려나 걱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오로지 삶만이 걱정과 미련을 남기는 거다. 그러므로 삶의 부작용을 마음껏 즐기자. 그 부작용은 걱정일 수도 있고, 미련일 수도 있으며, 후회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픔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삶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잘못이 어느 별에 있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어느 별에도 잘못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뭇거리고 망설이다 기회를 잃어버리는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감상이 엉망진창이 된다면 그 잘못은 확실히 내게 있다. 역시 어느 것 하나는 확실한 게 좋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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