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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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습니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이야기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나 역시 좋아합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넘게 읽었으므로, "나는 하루키의 친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한 일도 몇 번인가 있습니다. 물론, 제 생각일 뿐이지만.


 습관처럼 책을 샀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되어버렸다'라고 하면 역시 무책임한 게 되겠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게 사실이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걸 어느 정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바빠서'라며 핑계를 대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더는 그럴 수 없겠다'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바빠서' 달릴 수 없다고 말하게 되면 언제까지나 달릴 수 없다고 하는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나가겠다는 결심을 새삼 다시 하게 된 거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은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하루키 답다고 할까요.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회고록'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소설과 글쓰기, 달리기와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 삶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고, 추구해 온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읽힙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하루키는 스스로가 '재능 있는 소설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하루키의 말을 들어보면 납득할만한 이야기들이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게 됩니다. 하루키를 롤모델로, 목표로 하고 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뭔가 '신격 모독'처럼 들릴지 몰라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소설은 하루키의 말처럼 분명 재능보다는 경험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걸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라도 이유 혹은 근거를 대보라고 하면 이렇게 말할 셈입니다.

하루키의 작품은 천재적인 발상의 전환보다는 내면으로의 침잠과 들여다보기를 주요 소재로 삼고 세계를 만들고 확장해가고 있다고 말이죠. 그런 하루키의 작품이 일본에서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건 제게는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겨줍니다. 그보다 얼마나 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야 '문학성'을 갖추게 되는 건지.

 하루키는 오히려 수상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보입니다. 

"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하루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할 법한 그런 생각이라 역시 하루키 답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납득할 수밖에 없어지죠.


 야구를 관전하다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점, 자리를 잡은 가게를 접으면서도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한 점, '실패하면 돌아갈 수 없으니 필사적으로 썼다'는 점. 

 하루키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작품 속 인물들과 닮아 보이는 것 역시 우연은 아니겠지요.


 저보다 먼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은 이는 추천하는 말에 붙여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때 읽으면 좋겠다."

 정확히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제게는 그런 말로 기억됐으니 어쩔 수 없겠죠. 

2017년이라는 미지의 해, 시작, 출발점에 읽기에 알맞겠다는 생각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기에, "오늘은 뭘 읽을까?"하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이 책이다!"라고 답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무엇을 시작할 때, 어떤 계기가, 운명적인 계시가 필요하다며 기다리는 건 다만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핑계 안에는 '바빠서'라는 흔히 써왔던 말도 들어있고, '얼마나 더 해야 해?'라는 볼맨 마음도 포함됩니다. 하고 싶으면 그저 하면 되는 것뿐이죠.


 이만큼이나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은 주제에 이제 와서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하루키는 자신이 '좋아서'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말이죠. 

 누가 '시켜서'라거나, '어쩔 수 없이'하는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서문에서 하루키가 '마라톤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며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리기를 '하라'고 하는 책도, '글을 써라'라고 하는 책도 아닙니다. 다만 하루키 자신이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왔고, 이루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담담하게 적어나가고 있을 뿐이죠.


 하루키에는 전혀 못 미치지만 한때나마 꾸준히 달리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10킬로만 달리려고 해도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숨을 가누기 힘들었죠.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점점 더 수월하게 달릴 수 있게 되더군요. 다만 다음에 발을 디딜 자리, 곧 돌게 될 코너, 마음으로 정해둔 목표, 그 외에는 생각하지 않던 시간이 문득 그리워졌습니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하루키가 달리기 때문이 아니라, 달리기를 하던 그 날들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말이죠.


 하루키는 마라톤으로 치면 베테랑 러너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루키조차 그날의 레이스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라는 겁니다.

 어쩐지 뻔한 얘기 같지만, 삶 역시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제를 살았다고 내일이 어떨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중요한 건 막무가내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꾸준히' 살아내는 일.

 그런 태도야말로 자신의 삶에 진지하게 임하는 성실한 사람의 삶일 겁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너무 많은 '외부 세계'의 정보에 휘둘립니다.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된 만큼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하고,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까지 '해야 할 것 같아서'라거나, '어쩔 수 없어서'라며 어중간한 태도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묻는 일은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때' 최선이었던 것이 '지금도' 최선인지 말이죠.

  

 알 수 없다는 건 두려움이 되기도 하지만, 설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네, 뻔하고 흔한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 익히 들어온 말들, 얼마만큼 스스로의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지요.


 우리 삶에 있어 우리는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레이스를 치르는 러너입니다. 저마다의 레이스를 치르는 것이기에 결승점 또한 달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함께 달리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혼자만의 레이스이기도 합니다. 

  

 하루키가 묘비명으로 삼고 싶다고 적은 말은 이렇습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단순히 마지막까지 살아내겠다는 결심이었다면 이렇게 적을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하루키는 마지막까지 '러너'로 살아내겠다고 결심했기에 이렇게 적고 싶다고 말했을 겁니다.

 흐지부지 살지는 않겠다는 거겠죠. 하루키의 이야기 속 하드보일드 한 삶을 추구하는 인물들처럼 말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자주 걸었습니다. 걷는 것도 아주 천천히 거의 멈춰 서듯 걸었던 날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은 멈췄던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제까지의 일입니다. 달라지지 않을 이유, 달라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작할 때, 혹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 좋을 이유는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역시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올해를 특별한 한 해로 만들고 싶습니다.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베테랑의 러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루나 이틀 무리해서 달려봐야 남는 건 근육통과 부작용뿐이죠. 진지하게, 성실하게, 꾸준히 해나가렵니다. 

 이유요,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안으로' 돌리세요.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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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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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부끄러운 게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창피한 게 많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우냐고 물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답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모르거나 모른 척 지내왔고, 지금도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다."라고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학살자에 대항하여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맞섰던 이들의 이야기. 

 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잘 알려진(정말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과정, 그 한 장면이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이미 서너 번이나 추천을 받고도 읽기를 미루다 이제야 읽은 것이 또 부끄러워집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어렴풋이 혹은 막연히나마 그날의 일을 알고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자 기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겁니다.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져 나가는 느낌,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과거가 기어코 제 앞에 마주 서서 비켜서지 않는 것만 같은 답답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나자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책에 대해,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에 대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을 보낸 오늘에야 그나마 적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모르는 나이기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모르는 소리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읽고 나서 느낀 부끄러움은 하나나 둘이 아닙니다. 그중 가장 컸던 건 '모른다'였고, 그다음 혹은 그 다음다음으로 부끄러웠던 게 서툰 글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과거의 시간, 과거의 사람들을 현재로, 미래로 몽땅 이끌고 와서 현실의 나와 미래의 나를 일깨우건만, 저는 고작 끄적이기를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못 되는 '지금'을 낙서처럼 휘갈기기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떤 이는 현재의 우리를 과거의 시간으로, 과거의 사람들 속으로,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다 놓건만, 저는 그나마 끄적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일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친일파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군부의 독재와 폭력을 청산하지 못했고, 비리를 저지른 재벌과 권력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가 만들어낸 현실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당면한 현재의 모습입니다. 수십 년 전에 납치되고 살해되어 사라진 후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여전히 매일매일의 깨어있으면서 마주하는 악몽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의 외침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비명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 대통령이라는 자가 권력에 부역하는 자들과 함께 저지른 범죄행위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혐의를 부정하고, 부정하는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이 외쳐대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 과거로, 과거로 끌고 가려는 듯 보입니다. 망령처럼 간단히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분노와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는 아수라장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듯 말입니다.


 기이한 일이 자꾸만 벌어집니다. 

 당사자들은 누구를 용서하지도, 용서할 생각도 없건만, 전혀 무관한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죄인들을 용서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쩌겠느냐고, 용서하지 않으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말합니다. 부끄럽게도 저 역시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나?'하고 속으로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문은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동의'가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과거가, 잘못이, 과오가 청산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약해서'라는 걸요. '어쩔 수 없다'는 타협의 말은 '내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눈감을 수 있다'는 '비겁한 변명'이었다는 걸요.


 『소년이 온다』에서 한강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소년이 온다』45쪽.

'용서'는 미덕이라고, 용서하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용서하면 이기게 되는 걸까요. 영원히 패배하는 게 아니라요? 용서를 종용하는 분들께, 그토록 마음이 넓고 큰 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의 일이라도, 당신이 경험한 일이라도 그렇게 말하시겠습니까?"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그날의 일을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날 죽어간 이들의 가족이건, 친구건,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고는 '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날의 일들이 사진으로, 영상으로, 소문으로 보고 들은 게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안다'라고 말해왔던 걸까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어쩌면 그들의 말이 '거짓' 혹은 '과장'이라고 믿으면서 어떻게 '안다'라고 고개를 숙일 수 있던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중대한 사태가, 비극이 그처럼 태연히, 조용히, 오래도록 묻혀 있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몸처럼, 그토록 무력하게 침묵해 왔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습니다. 오늘날에 벌어지고 있는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보니 이제는 알겠습니다. 다시 이대로 침묵한다면 앞으로도 같은 일이 계속될 테지요.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또 알겠습니다.


  한강은 '온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오느냐, 한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소년이 온다』174쪽.

누구인지, 누가 오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 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그 누군가는 지치지도 않고 거듭 걸음을 옮겨 오늘로, 내일로 나아옵니다. 네, 가지 않고 오고 있는 겁니다. 


『소년이 온다』 속 '너'는 열다섯 살 학생인 '동호'입니다. 군인의 무자비한 총격에 숨진 아직 애티를 다 벗지 못한 소년입니다. 

 어떻게 군인이 어린아이에게 총을 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쐈습니다. 한 명, 두 명에게도 아닌 무수히 많은 소년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악의 평범성',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처리'했던 독일의 나치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이 땅에도 몇 번이나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럴 리 없는' 사람들이, '그럴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고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태연히 증언하는 일도 거듭, 거듭 일어났습니다.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도,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

이 말을, 정말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들의 기만입니다. 비웃음입니다. 그들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복수할 기회를 찾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있으면서 막지 못했던 이들, 의심하면서 명령에 복종한 이들, 마지막까지 거부한 이들은 마음의 병을 앓았습니다. 누가 때린 자이고, 누가 맞은 놈인 겁니까. 누가 다리를 뻗고, 누가 웅크리고 자게 됩니까.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한 없이 길어지고, 앞뒤를 갖추지 못한 글은 점점 더 부끄러워지기만 합니다. 


 한강의 다른 작품은 모르겠습니다. 고작 맨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와 단편 몇 편을 읽어봤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 『소년이 온다』는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누가 오는 건지, 왜 오는 건지, 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건지,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책 내용을 더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쓰고 나면 조금은 후련해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건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적어도 두 가지는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하지 않는 겁니다. 

강요당하고 종용당하더라도 진정한 청산의 날까지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잊지 않는 겁니다.

기억한다면,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를 향해 오는 그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만남이 우리를 다시 내일로 이끌어 줄 겁니다.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안다고도 이해한다고도 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기억에 새겨볼 뿐입니다. 그들이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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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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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한 감상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 읽어보는 그런.



스스로에게 일 년에 한 번 씩은 꼭 묻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왜 읽는가?"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쓰는가?"입니다.

근 6년 간, 한 해에 두 번 이상 묻는 적은 있어도 한 번도 묻지 않은 해가 없던 물음입니다.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그때마다 다르면서, 그리 다르지 않아서 비슷하게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달라져왔고, 앞으로도 달라질 거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미숙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휘갈기면 그만인 감상(구상은 물론이고, 퇴고는커녕, 다시 읽어보지 않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과 횡설수설이란 말이 대단히 적절하게 느껴지는 칼럼이라 끄적인 글들과 감정과 현상을 뒤섞어 충동적으로 내질러 놓은 시의 아류들.

 왜 이런 것들을 그렇게나 많이, 끊임없이 쏟아내었던가, 오늘 맞닥뜨린 물음은 "왜 쓰는가?"였습니다.


 한국의 작가들, 젊은 작가들 중에서도 그 가능성의 싹이 돋보이는 작가들의 작품 발굴이 '젊은작가상'의 목적일 겁니다. 그렇다면,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은 한국문학의 기대주, 혹은 한국 문학의 현주소 정도의 의미는 갖고 있으리라 봅니다. 


 '기대주들' 이 작가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왜 쓰는가?"하는 질문이 이들 젊은 작가들에게 옮겨간다고 해도 기이하지는 않을 겁니다. 

단지, 궁금한 것뿐이니 말입니다.


 『2013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들은 다른 해에 실린 작품들보다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더 균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종옥, 이장욱, 김미월, 손보미, 박솔뫼, 정용준, 황정은. 

 한국 문학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게도 대부분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만큼,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며, 그만큼, 잘 쓰는 사람들일 겁니다.

  

 김종옥과 이장욱, 정용준과 박솔뫼의 작품은 한참 전에 읽었고, 이번에 마저 읽은 게 김미월, 황정은, 손보미였습니다. 

 기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반발감, 반항심이 일어난 건 황정은의 <上行>을 읽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여, 작가의 노트까지를 읽어보니 작가의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라 합니다. 그 경험이란 나이 든 모녀, 그러니까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어머니가 마당에 나란히 서서 배웅하던 모습이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上行>은 별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와 오제가 오제의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내려가 고추를 따고, 감을 따고, 호박이며, 배추며, 은행까지를 받아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른 날이었다면, 이 이야기를 읽은 것이 일요일이 아니었다면, 피곤하다며 누운 자세로 읽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를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우연',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대단히 충동적인 반항심은 그렇게 불거졌습니다.

 처음의 반항심은 시골을 향해 내려가는 차 안의 풍경을 그린 장면에서 생겨났습니다. 첫 장도 넘기지 않았던 시점이니, 어쩌면 처음부터 반항심을 숨기고 페이지를 펼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별 감정도 없으면서, 참 못된 마음입니다.

 오제의 어머니는 나에게 토마토를 먹으라고 건네줍니다. 나는 토마토를 쥐고 있다가 조금씩 먹습니다. 여기서 떠올린 생각이란 역시 엉뚱하고 억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토마토를 만만히 보는 거야? 토마토가 차 안에서 먹기 얼마나 힘든데!"

줄여 적으면 이 정도의 생각을 떠올렸던 겁니다.

 아, 토마토는 잘 익어도 여전히 껍질이 질길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토마토의 속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한쪽을 잘못 깨물면 씨와 함께 즙이 터져 나가거나 흘리기 쉽습니다. 그런 토마토를 나에게 건넨 오제의 어머니에게 반항심이 생긴 건지, 감히 차 안에서 소설의 인물에게 토마토를 먹인 작가를 향한 반항심인지 솔직히 지금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신, 차 안에서는 토마토를 먹거나 먹으라고 건네지 말아야지 하고 엉뚱한 다짐을 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반항심이 일었던 장면도 토마토와 관련이 있습니다. 창 밖으로 토마토 꼭지를 버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깃털처럼 기척도 없이 허공을 날아'갔다고 합니다. 토마토의 꼭지가 말입니다. 차 안에서 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건 기본 소양입니다. 그리고 토마토 꼭지가 어떻게 날아가는지 볼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시력'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토마토 꼭지를 창 밖으로 버리다니?"

"게다가, 토마토 꼭지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고?"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황당하고 부당한 의문입니다마는 떠올려 버렸으니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적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으니 간략히 적고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으로 반항심이 일었던 건 '여긴 00 사람도 없다'라고 자꾸만 거듭 되뇌는 부분이었습니다. 시골이라고, 사람이 없다고, 자꾸만자꾸만 되뇌는 게 싫었습니다. 

그다음은 시골 할머니를 두고 '노부인, 두 부인'하고 부인칭 하는 거였습니다. 

서울 사람의 알량한 표현이라는 베베꼬인 마음에서 그렇게 생각했음을 밝힙니다. 촌에 사는 할머니에게 '부인'하는 호칭을 붙이는 시골 사람을 본 일이 없는 제 견문이 좁은 건지 모르겠으나,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실적이지 않은 호칭을 쓰다니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습니다.

 그저, 다만 '노인'이라고 하면 됐을 것을 굳이 왜 그랬을까 싶은 마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다 건너뛰고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마르지 않은 고추는 무겁습니다. 자루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루가 가득 찰 때까지 고추밭을 끌고 다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자루를 가득 채워 끌고 다녔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서울 사람의 시골 판타지 소설처럼 읽혔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작 이 한 문장을 적기 위해 구구절절 그렇게 많은 말을 해야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래야 했다고, 필요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까 말입니다.


 "왜 쓰는가?"하는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엉뚱하게도 황정은의 <上行>에서 느낀 반항심을 이어 적었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필요했습니다. 조금 전에 적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 말입니다.


 올해의 "왜 쓰는가?"하는 물음에 적을 대답은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입니다.

적지 않으면 모르니까라고 바꿔 적어도 그 의미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모르는 게 누구냐?"하고 물을 수도 있겠는데, 어느 쪽이냐 하면 둘 다입니다.

둘이 누구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과 적은 걸 읽는 이, 둘이라고 답할 생각입니다.


 사실, "왜 쓰는가?"를 묻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회의감'입니다.

"내가 이것을 적어서 무엇이 달라질까?"

"결국 완성시키지도 못하고 언제나 대충 휘갈기고 마는 이 몇 마디 문장의 나열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래서, 누가 이 글을 읽게 될까?"

"이걸 읽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알게 될까?"

"알게 된다고 해서 어떤 걸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한다고 해서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무수한 물음에 답하기를 그만두고자 하는 회의감 말입니다.

글이 없으면 물을 이유도 사라질 것이고, 이유가 사라진다면 회의감이 생겨날 이유도 없을 텐데.


 그러면서도 또 이렇게 구구절절, 떠들고 있는 걸 보면 저는 참 떠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쓰는 걸 간단히 멈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왜 쓰는지 이유도 제대로 모르면서, 뚜렷한 목적도 없으면서 자꾸만 쓰려고 드는 자신이 우스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저는 "왜 쓰는가?"하는 물음에 나름의 답을 달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한 결에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왜 읽었습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기에 적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 글에 대한 것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나는 왜 읽는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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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6
강상중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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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교수를 처음 알게 된 책은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민하는 힘』이었다. 재일 교포인 강상중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과 막스 베버의 사상을 통해 현대의 세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고민, 좌절, 슬픔, 고통, 외로움. 100년도 전에 쓴 이야기 속 인물들과 사상이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것, 최초의 발견은 아니지만 아마도 가장 강렬하게 그 사실을 인식시켰던 작가가 바로 강상중 교수였다.

 이후에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통해 강상중 교수의 아들이 자살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세키의 작품 속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외로움으로 선택한 죽음의 길이었다. 강상중 교수는 몹시 좌절하고 절망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도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며 깨달은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아들과 더 가까워지지 못했던, 아버지로서의 미안함을 가슴에 묻고 다시 소세키의 작품을 이야기하던 강상중 교수의 모습. 딱 한 번 다녀온 강연에서 본 그 모습은 담담해서 더 처절해 보였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세 번째로 읽는 강상중 교수의 책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주제는 어김없이 나쓰메 소세키와 그의 작품이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첫 번째 장편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시작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세키의 작품인 『마음』으로 끝이 난다. 

  

 나쓰메 소세키를 읽어보려는 사람들, 호기심은 있지만 어쩐지 고전이라 읽기 힘들지 않을까 망설이는 이들에게 이 책은 소세키의 작품 세계를 친절하고도 쉽게 깊은 곳까지 열어 보여준다. 지인 중에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언제 읽는 게 좋냐고 물어본 이가 있었는데, 한 작품쯤 읽은 후나, 이제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읽어보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뛰어난 재원이었지만, 영국 생활 중에 마음의 병을 앓을 정도로 섬세했고, 나라의 잘못된 정책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글을 쓸 만큼의 소신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세키였기에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소세키의 마음이 작품에 담기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강상중 교수는 소세키의 대표작들의 작품 세계와 인물,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자신이 삶을 통해 깨달은 사실에 비추어 해석해서 들려준다. 강상중 교수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세키 연구자가 아닌 독자라는 입장은 소세키를 읽고 있거나 읽으려는 우리와 동일하기에 참고 삼아 알아두기에 거리감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라면 작품이나 작품의 의미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쓰메 소세키라는 '한 인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왜 하필 이렇게 해야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길 때가 있는데, 강상중 교수는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던 이유를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풀어주고 있다.


 일본 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나쓰메 소세키라는 위대한 작가도 실제로는 외롭고 유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현대인들이 그러하듯 약하고 깨지기 쉬운 내면을 간신히 붙들어 가며 하루를, 일 년을 살아냈다는 거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만 같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논문도 아니고, 전문가의 저작도 아니다. 한 독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풀어주는 이야기인 만큼 어렵지 않게 읽힌다. 부작용이 하나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나면 부쩍 소세키의 작품이 궁금해질지 모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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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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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예고 없는 비를 만난다면 백에 구십구는 비를 피할 곳을 찾아들거나, 우산을 쓸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나는 급한 일이 없다면 비를 피하고, 좀처럼 그치지 않겠다 싶으면 우산을 사는 편입니다(덕분에 혼자 사는 집에 우산이 여섯 개쯤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폭우 속을 우산도 없이, 쫄딱 젖은 상태로, 아주 바쁘고 급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그런 사람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때그때 다를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비 맞는 걸 좋아하는가 보다'할 수도 있겠고, '미친 거 아니야?'할 수도 있겠고, '급한 볼일이 있나 보다'할 수도 있겠고, '우산 살 돈이 없나 보다'할 수도 있겠고, '더운가 보다'할 수도 있겠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상상을 조금 더 진행시켜 보죠. 

좀 전에 말한, 폭우 속을 우산도 없이 아주 바쁜 듯 걸어가는 그 사람이 1년 365일 정말 미친 듯이 걸어 다닌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운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직업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요. 그 사람은 단지 걷고 또 걷기를 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쳤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모른 척해야 할까요?


 이미 예상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앞서 얘기한 '그 사람'의 이름은 '좀머 씨'입니다. 이 책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죠. 좀머 씨에게는 '강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강박을 간단히 설명하면, 한 곳에 멈춰서 있으면 '무엇'인가가 자신을 찾아낼 거라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정말 좀머 씨는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그 '무엇'으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쳐 다닙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박이 쏟아지는 날에도,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끊임없이 걷고 또 걷지요. 좀머 씨를 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병이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 병이란 게 정신병이기에 결국 거칠게 말하면 미쳤다는데 동의하는 셈이죠. 

 책의 제목은 『좀머 씨 이야기』지만 실제 화자는 '나'이고, 전체적인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좀머 씨는 그 이야기 속에 서너 번 등장할 뿐이죠. 그럼에도 책의 제목이 『좀머 씨 이야기』인 이유는 '나'의 삶에서 좀머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정적인 역할'인지 궁금하신 분은 한 번 읽어보세요. 길지 않은 이야기라 금세 읽을 겁니다.


 '나'는 좀머 씨가 이야기하는 걸 딱 한 번 보게 됩니다.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던 날이었고, '나'는 아버지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죠. 폭우와 우박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들판을 지나갈 때 '나'는 좀머 씨를 보게 됩니다. 폭우와 우박에도 걷기를 그치지 않은 좀머 씨였지요. 

 '나'의 아버지는 좀머 씨에게 자동차에 타기를 권하며, 평소에는 '틀에 박힌 빈말'이라며 쓰지 말라고 하던 표현인 '그러다가 죽겠어요'라고 말해버립니다. 아버지 나름대로는 좀머 씨를 생각해서 한 말이겠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좀머 씨는 몹시 흥분해서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말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처음 『좀머 씨 이야기』를 읽었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라는 좀머 씨의 외침이 단숨에 가슴에 와서 박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굳이 이런저런 설명의 말들을 가져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죠. 

 이런 게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좀머 씨에게만 보이는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보통의 사람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좀머 씨는 그 '무엇'이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오는 게 느껴졌던 것일 거라고요. 


 우리는 종종 '호의'를 베풉니다. 대부분의 경우 호의는 받아들여지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정중히 거절당하기도 하죠. 하지만 좀머 씨처럼 배은망덕하게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네, 배은망덕이라고 적었습니다. 일부러 적은 거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좀머 씨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오히려 꺼려하는 호의를, 그것도 '틀에 박힌 빈말'을 건네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던 것 아닐까요.


  정말 의미도 없이, 무용하게 매일 걷기만 하는 좀머 씨는 우연히 '나'의 생명을 구합니다. 자기 자신은 아마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할 줄도 몰랐던 어린 생명을 구한 거죠. 상투적인 줄 알지만 아이러니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좀머 씨는 '나'를 구합니다. 좀머 씨가 원해서 그랬든 아니든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구하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는 '나'가 좀머 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평생을 '무엇'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좀머 씨가 스스로 호수 밑으로 가라앉는 걸 선택한 그날에 우연히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거죠.

 좀머 씨는 도망치기를 그만두고 가라앉기를 선택합니다. '나'는 그런 좀머 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있고요. 

'나'는 좀머 씨를 부르지도, 구하지도 않습니다. 서서히 멀어지며, 좀머 씨의 허리가, 가슴이, 어깨가, 머리까지 잠겨 파문이 사라질 때까지 다만 바라보고 있었죠. 

 법적으로 '나'는 자살을 방조한 셈이 되기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구할 수 있었던 소중한 생명을 죽게 내버려둔 도의적인 책임 또한 피할 수 없고요. 하지만 좀머 씨가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좀머 씨 자신이 이제는 그만 도망치기를 멈추기를 바란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도 '나'였던 거죠. 

 좀머 씨의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부탁을 '나'는 들어줬던 거죠.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평생 도망치기만을 계속하던 사람이 도망치기를 그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겠죠.

 좀머 씨만큼은 아니지만 저 역시 많은 것에서부터, 아주 많은 순간에 도망치기를 거듭해 왔습니다. 지금도 어떤 일들에서는 도망치기를 계속하고 있고요. 도망치기를 그만둔 일들을 생각해보면, 도망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일이 더 많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서 도망치는 건 쉽지는 않지만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평생 동안 도망쳐 다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 경우를 얘기해 보죠.

나는 언제 도망쳤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두려울 때 나는 도망쳤습니다. 마주하기 벅찰 만큼 두려움이 클 때, 도망치고 또 도망쳤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바닥이 없는 두려움의 구덩이로 몰아넣었습니다. 모르기에 두렵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도망치기에 알 수도 없는 상황이 반복됐던 거죠.

   

 평생을 도망쳤던 좀머 씨는 마지막에 무엇을 알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일을 그만둘 만한 어떤 것을 얻었을 테니까요. 

좀머 씨가 지쳐서 포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포기라는 감정의 근원은 약함이기에 그렇게 단호하게 가라앉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저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도망치기를 그쳐 가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덤벼들었다가, 이상한 세상이라거나, 이해 못할 세상이라며 포기하기를 거듭했죠. 정말 뻔하고 단순한 거지만 나를 모르고서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덤볐던 게 무모했던 거죠. 

 그릇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물을 담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셈이랄까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일들에서, 생각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평생 도망치다 끝이 날지도 모르죠. 그래도 조금은 더 필사적이 되어야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도망치는 것도 필사적으로, 맞서는 것도 필사적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도망치기를 그쳐도 되는 날에 닿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인들 어떤가요.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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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3648 2016-10-1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는데 생각하는 깊이가 다른것 같습니다. 정말 글 잘 쓰신것 같습니다

대장물방울 2016-10-20 00:32   좋아요 0 | URL
영광입니다. :)
같은 책을 읽은 분과 알게 되어서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