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화이트 팽 펭귄클래식 137
잭 런던 지음, 오숙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1984년> 청목 출판사 1994년 초판

요즘 미국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조지 오웰의 <1984년>.

위에 적은 세 줄의 문장은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드가 속한 오세아니아의 슬로건입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적 예언이 여전히 유효하기에, 지금도 그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고 있죠.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 감상을 적으면서 조지 오웰을 언급한 이유는 <1984년> 속 슬로건과 이 두 작품의 메시지에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야생'.

야성, 때로는 야만이라고 부르는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순간, 모든 것이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적어도 현대인이 생각하는 '평화'는 찾을 수 없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에는 많은 제약과 조건이 따릅니다. '자유'를 내주고 얻은 평화인 셈이죠. 

 그렇다고 '자유롭지 못하다'고만 볼 수도 없는 건 우리에게는 '구속을 선택할 자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1984년>은 많은 판본으로 출간되었는데 굳이 청목 출판사의 '예속'을 골라 적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굴종이나 구속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는데 틀리지는 않지만 예속이라고 적었을 때의 느낌은 어느 정도는 자발적이고, 때로는 적극적이며, 순응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다는 이야기니까요.


 예속된 상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것도 평화롭게 계속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앎'은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지'.

여기서 무지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라기보다, '불필요한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1984년> 속 슬로건을 정리해볼까요.

 생존에 필요한 것만을 알고, 
생존과 안전을 위해 예속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얼마간의 자유 대신 안락함을 구하고, 
상시적인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 일상의 평화를 누린다. 

  제게는 많은 사람들, 많은 책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세상은 타협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며,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하죠.


잭 런던의 두 작품,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그런 자유와 예속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야성의 부름>은 따뜻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한 마리의 개가 납치되어 팔려가면서 시작됩니다. 야성이나 야생의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벅(개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은 세계와 맞닥드리면서 충격과 공포를 느낍니다. 하지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게 되고, 마침내는 아주 오래전, 개가 인간에게 길들여지기 전의 자유를 찾게 됩니다.

<화이트 팽>은 야생에서 태어난 늑대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의 경이로움과 생존 경쟁의 혹독함을 몸에 익힌 '화이트 팽(늑대의 이름)'이지만, 인간과 맞닥드리면서 야성보다는 종속을 선택하죠.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곁에 머물기를 선택한 거였던 겁니다. 하지만 이 선택이 화이트 팽을 괴롭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는 '사랑' 안에서, 유희처럼 야성을 즐기며 삶을 즐기죠. 


 벅과 화이트 팽, 어느 쪽의 선택이 더 옳다거나 낫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선택의 이유가 있고,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도 감당하고 있으며, 그들이 선택한 삶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으니까요. 둘 모두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야성을 이야기하지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벅과 화이트 팽은 문명과 자연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은 몹시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랑으로 이들을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잭 런던은 문명을 비판한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인간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단순히 이용하고 개발하는 사물로 대하는 모습을 비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야성의 부름>에서 벅이 안락한 세계에서 야성으로 옮겨갈 때 세례라도 되는 것처럼 매를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벅의 말을 빌리자면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인데, 야성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몽둥이와 상대의 이빨을 조심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교훈이죠. 여기서 몽둥이와 이빨이 동일하게 다뤄졌다는 건, 인간의 야만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화이트 팽>에서 잭 런던은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합니다.

황야가 하는 이 가운데 무엇보다 잔인하고 끔찍한 것은 인간을 짓밟고 깔아뭉개 굴복시키는 것이다. 인간, 인간이야말로 가장 부산스러운 생명이었고, 모든 움직임은 결국에는 움직임을 멈추어야 한다는 금언에 항상 반항하는 생명이었다.
<화이트 팽> 中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연을 정복하는 걸 선택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특히 서양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너무 많은 개발과 파괴는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재앙을 예고한다는 전조가 곳곳에서 보이는 지금의 모습으로요. 지금의 태도를 바꾸기보다 더 발전시켜 극복하겠다는 게 지금의 방향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늘 그래 왔기에,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며.


 그 결과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아직은요.


잭 런던은 야성의 생존을 최우선 문제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랑의 문제'에 마음을 쏟습니다. 

함께 사냥했던 날들, 함께 쓰러뜨렸던 사냥감, 함께 견뎠던 굶주림의 기억은 잊혔다. 그런 것들은 과거의 일이었다. 당면한 문제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먹이를 구하는 것보다 가혹하고 잔인하다.
<화이트 팽> 中

이 장면은 함께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던 동료 늑대와 암컷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일어나는 부분을 그린 겁니다. 먹이를 구하는 문제보다 사랑을 얻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피를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죠. 낭만적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조차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습니다. 맹목적인 사랑, 오직 사랑, 생존을 위한 사랑.


야생에는 하나의 법칙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생존의 법칙'이죠. 사랑조차 생존을 위한 거라고 적은 건 그런 의미입니다.

이 분류법에서 법칙이 생겨났다. 생명이 노리는 것은 고기이다. 생명 그 자체도 고기이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세상에는 먹는 것들과 먹히는 것들이 있다. 먹느냐 먹히느냐, 이것이 생존의 법칙이었다. 그는 이 법칙을 명확히 공식화하진 않았다. 심지어 그 법칙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법칙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화이트 팽> 中

'먹느냐 먹히느냐', '죽느냐 사느냐',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생존의 법칙은 이분법입니다. 

인간이 하는 것처럼 명확한 공식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단순해서 저급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세상의 많은 부분 역시 이분법적으로 분류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너는 누구 편이야?"

이 물음에는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분법적이죠. 지극히. 


 <화이트 팽>은 인간을 사랑해서 그들의 곁에 머무는 늑대 이야기지만, 화이트 팽이 느끼는 사랑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신을 가지는 것에는 봉사가 따른다. 화이트 팽에게 그것은 의무와 두려움의 봉사였지, 사랑의 봉사는 아니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화이트 팽> 中

화이트 팽은 사랑을 '의무와 두려움의 봉사'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몽둥이에 대한 두려움, 처벌, 버림받음,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학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동물은 그러한 과정을 경험하기 어려우니까요. 화이트 팽이 만약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다면, 조금은 달라질 텐데 말이죠.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동물처럼 학대당하고, 가혹한 대우만을 받았던 한 범죄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범죄자는 야성의 잔혹함을 이겨내고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비열하고 잔혹해졌던 화이트 팽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굳이 늑대 이야기에 인간 범죄자의 성장 배경을 넣은 건 인간 역시 짐승처럼 대우하면 짐승보다 나아질 수 없다는 단순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너무 단순하고 명확해서 식상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우리가 인간을 얼마나 인간답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카리스마, 체벌, 처벌, 제재, 불이익. 

부정적인 기재를 통해 인간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일은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고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만 신뢰하기보다는 복종시키는 게 쉽다고 생각하죠. 마치 자연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정복하는 것이고, 동물이 학습할 수 없기에 각인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그런 인간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래전에 쓴 작품이지만 이질감 없이 편안하게 읽혀서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 


 오래전 <견신>이라는 만화에서 개들의 신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전에 전령을 보내 인간을 관찰하게 합니다.

그때 내린 명령이 "인간을 보라"였습니다. 

 문학은 인간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복잡해서 알 수 없었던 모습도 쪼개고 나누어 보여줍니다. 그 모습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야생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책 읽기를 권하는 걸로 끝나버렸군요.

시작하며 <1984년>의 세 슬로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슬로건, 우리 삶에는 어떤 모습으로 녹아들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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