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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웃긴 사진관 - 아잔 브람 인생 축복 에세이
아잔 브람 지음, 각산 엮음 / 김영사 / 2013년 7월
평점 :
언젠가 이야기 했는지도 모르지만 내 가방엔 늘 '두 권' 이상의 책이 들어있다.
다른 한 권의 책을 읽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하더라도 굳이 두 권을 들고 다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읽을 거리가 떨어지면 '불안하다'라고 생각하는 약간의 강박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 가던 버스에서 읽을 거리가 떨어져서는 방금 다 읽은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안절부절 못했던 기억.
빈 손으로 나갈 수 없어 반드시 뭔가에 책을 담아가지고 다니는 버릇.
뭐, 그런 기억과 버릇의 연장선 상에 있는 습관이라고 보면 되는 게 '두 권'의 비밀이다.
화요일이나 수요일의 일인데, 이 책 <슬프고 웃긴 사진관>을 다 읽고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 책은 흐름출판의 <마이더스 터치>라는 책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두 책이 완전히 다른 이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 같은 거였다.
한 권은 '내려놓음', 다른 한 권은 '움켜 쥠'.
한 권은 '내려 섬', 다른 한 권은 '올라 섬'.
공통점도 있었는데 두 권 다 저자들이 하나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이었다.
한 쪽은 비움의 경지에, 다른 한 쪽은 쌓음의 경지에.
그 경지 가운데 이 책은 '비움'을, '내려놓음'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불안의 이유 중 하나로 '추락'의 두려움을 이야기했는데, 비단 알랭 드 보통 뿐 아니라 우리 속담이나 명언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니 익숙하리라.
그러한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은데, 독보적이고 절대적인 우위, 정점에 서는 방법과 가장 낮은 곳에 처하는 방법 말이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가장 낮은 곳이라 해서 가장 비참하고, 가혹한 곳 혹은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책의 겉면을 읽어내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가치에 집중한 나머지 '낮은 곳에 처하라, 내려놓으라'는 말을 '비참해지라'는 말과 동일시 하곤 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이기에 그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타인의 우위에 서지 않아도,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더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기쁨을 누리고, 그 가운데서 행복을 발견해 낸다면 그 사람은 결코 불행해 질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더 물질적인 풍요에 가까워지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다.
'내려놓음'이 좋고, '비움'이 편안하다 해도 내게 이 책의 저자인 '아잔 브람(아잔 브라흐마)'처럼 살아가라고 한다면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었다면 나도 수도승이 되어 명상으로 하루를 보내러 산 속으로 들어가 있겠지.
거의 모든 것의 기준은 확정적이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 상징하는 '법 앞의 평등'조차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선처를, 다른 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던가.
95쪽에 이런 말이 적혀있다.
마지막 줄 : 그곳이 어디든 머물고 싶지않다면 감옥입니다.
흔히 감옥은 '부자유', '처벌', '빈곤', '피로', '어둠', '갇힘'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습니다. 하지만 풍요로움으로 차고 넘치는 '감옥'이란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자유가 넘치는 '감옥'은 없을까요?
감옥과 자유를 정하는 건 오로지 '마음'에 달렸다고 아잔 브람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루려는 작은 마음, 욕심까지도 내려놓아야 평온해 진다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의도의 말이 나올리가 없지요.
119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친절하고 자비로우려면, 반드시 자신한테도 자비로워야 합니다. 남보다 더하지도 않고, 남보다 덜하지도 않고, 똑같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황금률'이라고 칭하는 "네가 받고 싶은대로 타인에게 행하라" 혹은 반대로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건 타인에게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기독교나 불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단언 하지는 못하겠지만 "똑같아야 한다"는 말은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라고 하면 그렇지 않다 하실지 모르니 '저'는 예전에는 '타인'에게 좀 더 많이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과거형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걸 먼저 넉넉히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하지만 스스로가 하해와 같이 넘치는 인정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란 걸 뼈저리게 깨닫는 일의 연속을 경험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좀 더 이기적이 되었더니 마음은 그런대로 편해졌지만 필연적으로 오해를 부르게 되더군요.
왜 그런 말이 있지요.
타인을 재는 자와 자신을 재는 자는 눈금이 다르다고.
단순히 생각하자면 '똑같이'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똑같이 한다고 느껴도 타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테니까요. 하지만 '똑같이'라는 건 상대와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똑같은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묘하지만 분명 다른 말입니다.
아무튼 자신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참고 베풀지는 말기로 하지요. 그건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178쪽에서 다시 익숙한 '담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만 없어지면 해결될 거라고 말입니다.(문장이 어색합니다.만)
문제는 항상, 언제나 존재한다고 하지요. 진짜 문제는 그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냐일 뿐이라고요.
아잔 브람은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흔히 '엘리트 코스'라 불리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가는 사람이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난 후 더 없는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서로서로 다르다 해도 결국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말은 역시 설득력이 없는 걸까요?
갑이니 을이니 위너니 루저니 하는 말은 사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일 뿐 절대적인 행복의 척도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꼭 수행승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만 정말 그렇습니다.
책의 제목이 '사진관'이라고 해서 사진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많이 당황하실 겁니다.
우리는 과거를 추억할 때 하나의 장면으로 시작해서 그 장면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합니다. 그런 과정 가운데 슬픈 장면, 또 웃긴 장면들에 떠올릴 법한 그런 순간의 깨달음들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열심히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준비하고 뛰고 달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 걸까요?
으음,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아쉬울 것이 사람은 휴식 없이 끊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기계'와 엄연히 다릅니다. 기계조차도 윤활유가 필요하고, 정비가 필요하며, 쉬는 시간이 필요한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잠시 쉬어가며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작은 만족, 작은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당연한 책이라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런 재미로 읽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며칠 간 시체와도 같이 뇌활동도, 심장의 움직임도 없이 있다 다시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재미요.
요즘 많은 생각을 합니다.
어떤 책에 쏟아부었던 비난들이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후회와는 다른, 또 다른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다는 부족함에 대한 생각입니다.) 모든 책이 내 취향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상대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 잠시 가슴이 찌릿했더랍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