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친구는 전우익이면서 만날 좌익만 안 하는기요."하는 친구의 우스개."

 한 때 사회안전법에 걸려 주거제한을 당한 보호관찰자.

 

하지만 이 책 속에서 선동자요 시위자인 그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우직하고 순박하게 나라의 미래와 안위를 걱정하는 농부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전우익님이 지인인 스님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담은 것이다.

  편지 속에는 그가 농사와 자연을 통해 깨달은 이치들을 하나하나 세상 이야기와 함께 풀어간다.

 

찬 두개, 밥 한공기 소박한 시골 밥상을 보는 것 같고, 소담히 핀 한 무더기 들꽃을 보는 것 같은 흐뭇하고 애틋한 느낌을 준다.

 

욕심이 담기지 않은 삶을 살기란 촌 생활에서도 쉽지 않은 일.

 그에게 그런 생활이 가능한 것은 그가 시대착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 자연인이기 때문일 것 같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6쪽. 스님 술에다 수유를 담구어 석 달쯤 두면 약주가 됩니다. 약효는 수렴, 자양강장, 식욕 증진 등인데 술을 담그면서 생각해 봤어요. 사람도 변할까? 술은 담그다 보면 왕왕 썩기도 해요. 부패, 타락, 왜소화가 아닌 참된 의미의 인간 개조가 과연 가능할까? 이건 사람에 대한 믿음 같기도 합니다.

 

같은 재료를 이용해 같은 단지에 넣어도 어떤 단지는 약주가 되고 또 어떤 단지는 썩어버린다 합니다.

 그것은 사람도 똑 같아서 모두 같은 사회에서 모두 같이 사는데 누구는 청렴하고 누구는 부패하고, 누구는 넉넉하고 다른 누구는 인색하기가 개 먹는 밥그릇까지도 채뜨릴 기세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는 것일까요?

 잘 살면 모두 행복한 세상이 올 줄 알았답니다. 하지만 잘 살게 될수록 불행한 사람은 더 느니 이것은 어찌된 노릇일까요?

 

 누가 뭐래도 '믿음'에 갈급한 세상으로만 보입니다.

 사방에 '사랑'이 넘쳐흐르지만 모두 겉만 번지르한 가짜 사랑투성이지 진짜 사랑은 나날이 메말라갑니다.

 

참된 의미의 인간 개조란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저자의 물음을 홀로 되뇌어 봅니다.

 

30쪽. 우리는 통계 숫자로 사는 게 아니라, 그해 여름 그해 겨울을 살기에 언제나 그해 겨울과 그해 여름이 가장 춥고 더워요.

 

하하, 정말 그렇습니다.

 매해 여름은 더워서 못살겠고, 매해 겨울은 어찌나 매서운지 여름엔 겨울이 걱정이고 겨울엔 여름이 걱정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이에겐 이렇게 말을 보탭니다.

 그만큼 더워도 그만큼 추워도 그동안 잘 지내왔는데 무얼 새삼스레 걱정하느냐구요.

 

통계에 55년만의 강추위다 무어다하니 너도나도 유난히 추운 모양입니다.

 사실 겨울은 늘 추우니까 겨울인데 말이지요.

 걱정해도 더워지지 않으니 그저 덤덤히 맞고 보낼 뿐입니다.

 

67쪽. 삶 자에서 가장 작은 점 하나 떼어 보자고 그랬더니 싦이 돼요. 싦이란 사전에도 없는 아무것도 아니래요. 확실히 싦은 싦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작은 점 하나 찍으니 '삶'자가 되어요. 삶에서 점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점 하나는 누구나 뗄 수도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 살에 닿고, 뼈에 새겨지는 이야기입니다.

 단 하나의 점을 떼어낸 것으로 '삶'이 '싦'이 되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니요.

 우리가 '삶'을 살아 간다지만 정말 우리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가끔 되돌아봅니다.

 혹시 점 하나를 떼어내고 의미없는 '싦'을 계속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바쁘다고 '삶'에서 떨어진 점 하나를 두고 서둘러 떠나오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랬다가는 정말 남은 삶이 의미 없는 '싦'이 되어버릴테니까요.

 바빠도 힘들어도 '우리 삶'이 제일입니다.

 

73쪽. 도랑물이 바다에 이르자면 많은 우여곡절이 있듯, 세상과 인간도 완성을 위해서는 숱한 고비를 넘어야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랑물은 흐르지 않으면 고여 썩거나 곧 말라버립니다.

 세상도 사람도 마찬가지지 싶은 것이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날이 활기를 잃어 무기력해집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흐름을 가로막는 수 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돈이, 지위와 권력이 그 모든 욕심이 마음속의 찌꺼기가 되어 길을 막습니다.

 

그러니 그래도 흘러야 합니다. 바다로 넓은 세상의 소통의 장으로 매일 매일 나가야 합니다.

 

86쪽. 우린 비록 작고 작을지라도 발광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에 빛나는 발광체들이 나날이 떠오르다보니 우리는 그 빛나는 불빛에 눈이 멀어 달려들 뿐인 부나방이 되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신도 빛을 낼 수 있는 발광체라는 사실을 잊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의 빛을 반사할 뿐인 반사체가 되어있지는 않았나 역시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빛과 우리의 색깔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빛 낼때 세상은 더욱 찬란한 빛을 띄게 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107쪽. 상 차리는 데 힘을 다 쓴 나머지 지쳐서 설거지를 못하는지, 설거지를 시시하게 여겨서 그런지, 저도 설거지를 며칠 만에 한 번 합니다만, 그때그때 하는 것이 좋은데도 잘 안돼요.

 

사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에는 편지한 이의 사상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럴 밖에요.

 그가 그의 생각을 적은 것인데 그의 사상이 담기지 않았다면 되려 이상하기도 하겠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설거지는 행사 혹은 시위나 집회따위의 뒷정리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 크게 행사를 치러놓고 행사 뒤를 보면 남는 것은 늘 쓰레기와 무질서하고 통제되지 못한 혼란의 흔적 뿐입니다.

 

이것은 행사만을 중요시하고 뒤처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때문일까요?

 아니면 정말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느라 온 힘을 쏟은 나머지 뒷정리할 여력은 없었던 것일까요?

 

크고 활기있게 일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야만 끝이 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뒤도 돌아봐야겠습니다. 

 

130쪽.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무엇이 착한 사람에게 독한 것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일까요?

 분명 교훈적인 이야기이고,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입에 쓴 것이 차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역시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허허실실과 헤헤실실은 분명 다르니까요.

 

허와 실을 적절히 삶에 담아 낼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겠습니다.

 웃음과 여유가 분명 미덕의 으뜸에 오를만 하지만 화를 내야할 때는 단호하고 분명해야겠습니다.

 

총 130쪽의 짧은 이야기를 읽었는데 곳곳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모아놓으면 두배가 되어버릴 것 같은 책이었네요.

 

손으로 땅을 일구고 계절 따라 씨를 뿌리고 가꾸며 저자는 농사꾼으로 살고 있습니다.

 1990년 쯤 보낸 이 편지에서도 '물자가 너무 흔하다'는 말을 자주하는 그가 지금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까요?

 혼자만 잘 살면 된다, 나만 잘 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자는 그 때보다 더 흔해졌지만 못살겠다는 사람은 더 늘어버린 오늘날을 봅니다.

 시대착오적인 사람의 글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가만히 읽으며 생각해보면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있는 사람의 글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깊은 맛이 납니다.

 

배웠다고 무엇을 안다고 꼭 나서서 손을 쳐들어야 눈에 띄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가만히 걷다보면 어떤 온실의 꽃보다 더 아름답고 놀라운 들꽃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곳에 그 순간에 단지 '존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빛나도록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해보며 그만 감상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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