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장 '책을 내려놓는 방법'을 읽게 되기만을 기다리며 읽었던 책.

 

우와, 정말 오랜만에 벙~하고 머엉~하니 부웅~떠서 흐물흐물한 정신상태로 읽어야했던 책을 만났다.

 처음 의도는 프루스트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고 싶어서 구입했던 것인데, 이 사람 '보통'이 아니다.

 

이 책은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의 견해에서 프루스트의 작품과 생전의 행동, 이야기, 친구들의 말을 통해 프루스트라는 사람을 '해석'이랄까 '해설'이랄까를 해주고 있다.

 읽는 내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난 후에 이 책을 읽었으면 조금 더 프루스트라는 인물에대해 이해하기가 수월했을까?하는 물음을 되뇌고 되뇌고.

 

이 책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재미있고 매우 상쾌한 책이다."라는 서평을 내놓고 있는데 난 "뭐가? 이 책이? 재밌어?"라는 의문만 더하게 됐다.

 

프루스트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불과 수 개월 전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으로 들려 그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읽지 않고 있는 것은 역시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방대한 '분량'이다.

 알랭드 보통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기 전에는 읽을 기회를 얻기 힘들다'고 할 만큼.

 (이부분은 좀 웃기긴 하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을지 몰라도 무척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수 많은 끊임없는 질병에 시달려).

 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통이 뛰어난 작품을 낳게 해준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를 괴롭혔던 고통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프루스트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열차 시각표'를 보곤 했다고 한다.

 그는 '작가란 외관상 위대한 예술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듯 보이는 것을 향한 열광을 가졌으리라고 여겨질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그는 자신이 '작품과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열차 시각표를 보면서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열광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프루스트적 자극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은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맞서고자하는 자극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삶을 고통과 함께 보냈던 프루스트지만 그 고통을 넘어 뛰어난 통찰과 묘사를 담아낸 작품을 지어낸 그의 노력을 기리는 말이기도 하다.

 

이해가 어렵다라고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많았다.

 "저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말은 좀 더 특별했는데,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고 해도 저자의 뜻이 우리의 뜻과 완전히 부합할 수 없다는 독서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조금은 마음 편히 책을 읽어도 되는 이유가 그것이리라. 난해해도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저자가 내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든 의도적으로 끌고가려고 하는 것 같은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며 나를 꺽고 굳이 작가의 생각에 맞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딱 거기까지가 우리가 책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아닐까?

 저술가는 결코 예언가가 아님을 잊지 말자.

 

이 책을 마무리하며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테니까.라고.

 난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프루스트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진심을 보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현지 배경이나, 인물, 음식 등의 표면적인 것에 혹되지 말라.라고.

 

위대한 작가는 그 작가가 그 작품을 쓰는데 배경이 된 지역이나 풍경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 그 자체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리라.

 

프루스트를 알고 싶어서 산 책인데 되려 궁금증만 더하고 말았다.

 역시 프루스트를 만나려면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보다.

 

곧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늘은 이만 보내주기로 하자.

 

 

독서를 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기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을 넘나드는 것이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로 이끌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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