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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리의 특별한 로맨스
레베카 밀러 감독, 키아누 리브스 출연 / 이오스엔터 / 2011년 3월
평점 :
피파 리는 남편의 ‘첫번째 부인’은 아니다. 지금의 아내라는 위치에 대해 피파 리는, 그녀만의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모범적인 아내가 되는 것이 그녀가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내조를 잘하고, 자신의 일정부분은 포기하고 억누른채로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밖에서보나 안에서보나 그녀는 완벽에 가까운 아내역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다. 그것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게다가 자신보다 훨씬 젊은 여자와의 외도.
피파 리는 그러나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자신의 죄책감이 그녀를 떠나 갔음을, 그 바톤을 새로운 내연녀에게 옮겨줬음을 느끼게 된다. 그녀가 느낀건 자유.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그녀가 한 일은 햄버거와 콜라와 후렌치 후라이를 사 들고 옆집 남자가 자고 있는 방 안의 창문을 넘어 들어간 일. 난 이제 자유에요, 라고 그의 침대에 앉아 말한 일.
숨어서 담배를 피던 그녀가 이제 딸 앞에서도 담배를 피고, 가정이야 어찌됐든 여행을 가겠다고 말하고, 집 앞에 여행을 함께 갈 젊은 남자가 찾아오게 한다. 이런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그녀를 이해하는건, 그녀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딸. 아들은 저 남자는 누구냐, 고 확연히 놀라고 싫은 표정을 짓지만, ‘내 친구야’ 라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는건 딸이다. 아 맙소사, 나는 그녀의 딸이 된 듯 함께 웃고 있었고, 나는 피파 리가 되어 딸을 낳기를 잘했다는 느낌도 함께 든다. 역시 딸을 낳아야 하는건가. 나는 딸을 낳고 싶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름 아닌 ‘엄마의 젊은 남자친구’를 환영하는 딸을 보면서. 하핫.
그래, 이 영화는 피파 리의 ‘로맨스’를 포함하고 있지만 ‘특별한 로맨스’가 전부인 영화는 아니다. 로맨스는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 물론 로맨스가 있으면 세상은 더 재미있지만, 삶이 더 즐겁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일년 내내 로맨스를 즐길수도 없고, 하루종일 로맨스에 푹 빠져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삶은 로맨스로만 채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밥도 먹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친구랑 싸우기도 해야 하고, 옆집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기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방탕한 삶을 좀 즐기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 피파 리의 삶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 대체 왜 ‘특별한 로맨스’라고 제목을 붙여버림으로써, 그녀 삶의 일부인 로맨스를 마치 전부인 것 처럼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바보같아.
자, 다시 처음의 죄책감으로 돌아가서.
나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가진 죄책감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랜 시간 묵은것이라 해도 좋다. 이것은 앞으로도 나를 따라다닐 것 같고, 아마도 내내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게 될 선택을 그때 하지 말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도 물론 죄책감과 함께 덩달아 따라온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을 후회하는 것은 부질없다. 그런데 올해 초, 친구가 보내준 별자리 운세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만난다.
[과거의 10년정도 당신은, 다른 사람과의 1:1 관계에 있어서 무언가 놓쳐왔던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그로인해, 깊은 슬픔, 의심, 무력감이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패턴이라든가, 자신의 상념이 너무도 혼잡해져버려서, 결국에는 무언가를 놓치고 계속 실망해왔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상한 근심이 2011년부터 2012년에 걸쳐 조용히 사그러들기 시작합니다.]
맙소사, 그러고보니 정말 십년이 다 되었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을 보내면서 내가 이 일을, 이 감정을 잊을 날이 오게될까 싶었는데 벌써 십년이 지나버렸다. 물론 아주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고 또 중요한 감정들은 기억하고 있지만, 내가 가진 이것-죄책감과 후회와 미련-이 나를 내내 가두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서서히 없어질거라고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바톤을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넘길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니 나는 세상에 흔적도 없이 흩뿌렸으면 좋겠다. 나는 2011년에 이 감정을 정말 지울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올해 초에 별자리 운세를 보며 아 없어질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던 것을 잊을만하니 이 영화,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가 다시 상기시켜준다. 너는 그걸 잊을 수 있게 될거야, 바톤 터치를 하게 될거야, 라고. 그래, 나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위노나 라이더-그녀가 상처받아 병원 소파위에 엎드려 있는 연기는 최고였다. 압권!-, 모니카 벨루치도 좋았고, 오, 키에누 리브스는 이루 말할 것도 없다.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너무 예뻐. 무엇보다 피파 리 역의 로빈 라이트 펜이 정말이지 엄청 예쁘다. 그렇게 나이 드는게 과연 나에게도 가능한 일일까? 중년의 여자라도 옆집 사는 젊은 남자 키에누 리스브와 사랑하려면 적어도 그정도 미모는 유지해야 하는게 아닐까?
아, 정말 재미있는, 마음에 쏙 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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