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인과의 하루
한스 카노사 감독, 헬레나 본햄 카터 외 출연 / 기타 (DVD)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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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결혼식 피로연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샴페인을 권하며 다가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추고 웃는다. 그들은 조금 더 시간을 함께 하고 싶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밤이 깊어가는 그 시간, 여자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 런던으로 가기 위한 비행기를 타야 한다.

결혼식 피로연이 끝나고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자가 묵고 있는 방으로 올라간다. 남자가 방안의 불을 끄는 순간 여자는 그를 기억해냈다고 말한다.

사실, 그들은 서로의 15년전 모습을 알고 있다. 15년전 그들은 함께 걸었고 함께 웃었고 아침저녁으로 한번씩, 혹은 두번 섹스를 나눴다. 남자는 여자에게 너의 섹스는 정말 끝내줬었지, 라고 말한다. 그 둘이 각자 자신의 과거를 말했을 때, 사실 그 과거는 ‘그들’의 과거였다.

15년전, 그들은 어렸었다. 철이 없었다. 처음 본 순간 키스를 했던 그들은 얼마 못가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여자는 런던으로 날아갔으며 남자는 여자를 찾곤 했다. 지금은 여자에게도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도 애인이 있다.

여자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와 섹스는 하겠지만, 이것이 잘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남편을 사랑하고 식구를 사랑한다고 했다. 남자는 애인에게 큰 정이 없다. 남자는 여자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듣고 싶다.

15년이 흘렀고 그들은 지금 서른여덟. 여자는 추억은 추억일 뿐, 지금와서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여자는 시종일관 시니컬한 말투를 버리지 못한다. 여자는 나이에 대한 언급이 싫고, 조금 지쳐있다. 과거에 열정을 쏟았던 남자가 눈앞에 있어서 그때가 떠올라 가끔 웃긴 하지만, 시종일관 그녀의 눈에는 삶에 대한 피로가 역력하다.

그래서 남자의 눈빛이 인상적이다. 여자가 하는 말를 들어주는 그의 눈빛은 밝게 빛나고 있다. 따뜻하다. 그는 원래 미소를 머금은 얼굴인걸까. 지친 여자의 시니컬한 말들을 들으면서도 그는 내내 따뜻한 눈빛을 유지한다. 어쩌면 그래서 지친 여자도 계속 얘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데야 무시할 수가 없지.

『프랑켄슈타인』에서였던가. 나는 ‘헬레나 본햄 카터’를 보고 전형적인 미를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작고 하얗고 예뻤다. 그런데 서른 여덟을 연기하는 지금, 아니 그녀는 현재 그정도의 나이이겠지만, 그녀는 더이상 예쁜 소녀가 아니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가진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삶에 지친 여자다. 이 영화속의 남자가 그녀에게 얘기하듯이 15년전의 살결이 조금 더 부드러웠을 것이다.

서른여덟이 되어 15년전의 그와 섹스를 하려고 옷을 벗는 여자는 더이상 예쁘고 탱탱한 몸매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남자는 15년전보다 조금 더 살이 쪘다.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그들의 모습을 변화시켰고, 되살아난 추억속으로 기꺼이 걸어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진 않는다.

영화는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을 따로따로 쫓아간다. 화면의 절반속에는 남자가 있고 또 화면의 절반 속에는 여자가 있다. 한쪽에는 여자가 보는 남자가 있고 한쪽에는 남자가 보는 여자가 있다. 그들은 쉽게 한 화면속에 잡히지 않는다. 때로 그들이 한 화면속에 잡힐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이다.

그래서 처음엔 이 필름이 혹시 망가진 필름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왜 절반으로 뚝 떼어놓아서 나로 하여금 그 둘을 동시에 보게 할 수 없는걸까. 참 신기하다. 화면은 하나인데 둘로 나눠 놓으니 나는 여자를 보거나 혹은 남자를 보거나 해야 한다. 그 둘을 동시에 보는 것이 어렵다. 나는 주로 여자의 시니컬한 표정을 보았지만, 가끔 시종일관 따뜻한 눈빛을 지니는 남자를 보면서 그에게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희망이 한쪽만의 것이라면, 그 희망의 최종 목적지가 사랑일때, 이루어질 수가 없다.

화면은 나뉘어져있고, 등장인물도 거의 없다. 때때로 그들이 함께 화면의 한쪽을 차지하고 얘기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의 애인이나 혹은 그들의 과거가 보여진다. 아, 물론 각자의 현재의 말과 마음속의 마음들이 보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독특하다.

3시 15분. 여자는 샤워를 한다. 들러리 옷을 두고 일상복으로 갈아 입는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느라, 남자가 내뱉는 말들을 전혀 들을 수 없다. 이제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 그들의 하룻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같이 웃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몇시간전에 한 침대에서 웃었던 것 처럼 계속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안에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어쩌면 상대가 앉아있을지도 모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은 되겠지만, 우리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만나게 될 상대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내내, 낯선 사람을 만나 한순간 웃다가, 조금 더 오랫동안 씁쓸하고 지친 표정으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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