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는 움직인다 - 비핵화와 통일외교의 현장
송민순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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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집권기 외교부장관으로 일하셨던 송민순 전 장관님의 회고록을 지난 주말에 읽었습니다. 얼마 전 문재인 후보와 관련된 논란으로 인해 화제가 된 책이기도 하죠.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총 4부로 나뉘는 550페이지 가량의 책입니다.

책 제목 '빙하는 움직인다'는 북핵문제가 불거진 때로부터 근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해결은 제자리걸음인 현 생황과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만 매년 움직이는 빙하처럼 북핵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지를 담은 표현입니다 1999년 6차 4자회담에 차석대표로 참석했을 때 언론 회견에서 본인이 했던 '회담이 빙하의 움직임과 같다'는 말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전 33년 간 외교관 업무를 해온 전직 관료가 정성을 기울여 쓴 회고록이라 궁금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윤준병 서울시 도시교통본부장의 책이나 이 책처럼 공공의 영역에 오래 종사한 분들이 회고록을 많이 펴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 후 감투 찾아쓰기 급급해하는 문화는 제발 없어지고, 회고록을 집필해서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도움도 주고, 그들 앞에서 떳떳하게 일했다고 자부하는 공직문화가 형셩되면 좋겠네요.

제1부는 1989년 위성이 탐지해낸 영변핵시설로 인해 시작된 핵문제가 1993년 북한의 NPT탈퇴 선언과 '서울 불바다' 발언 등 등 험악한 대치 국면으로 갔던 시기를 다룹니다. 김영삼 정권 시절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를 지어주고 중유 50만톤을 공급하고, 조미관계 정상화의 대가로 핵개발을 폐기하는 제네바합의(94.10)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라는 국제기구가 설립되었고 협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한국이 경수로 건설비용의 70%가량을 부담하면서 말이 많았죠.

임기말 클린턴 정부의 의욕적인 노력으로 제네바 합의의 이행이 잘 되는 듯 했지만 2000년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군사용 미사일 or 위성발사용 로켓)와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으로 인해 클린턴 임기내 평화기조 정착은 무산됩니다.

2003년 완공을 목표로 했던 경수로는 2002년에서야 첫 콘크리트 타설을 할 정도로 지지부진 하였고(합의 직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 --;),  2001년 출범한 조지 부시 2세 행정부는 2002년 북한의 우라늄농축 의혹을 제기하며 제네바 합의를  선언합니다. 당시 저자는 싱가폴 참사관, 하버드 유학, 외교부 북미국장, 외교통상비서관 등으로 정책결정의 핵심에 있지는 않았기에 관찰한 사실관계 위주로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2부에서 다루는 2003년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촉발된 제2차 북핵위기는 미북중간 3자 회담, 한국이 추가된 4자 회담을 거쳐 러시아와 일본도 참여한 6자 회담으로 다자관계를 통해 2005년 '9.19 성명'으로 합의에 이르게된 과정과 그 이행에서 암초가 된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계좌문제 등을 다룹니다. 저자는 이 시기 외교부 차관보(당시 장관은 반기문), 6자 회담 한국 수석대표를 맡아 북핵과 관련된 외교정책을 주도했습니다.

고만고만한 소국이 강대국들을 상대로 국제안보와 관한 민감한 사안을 다루며 자국의 이익을 지켜나가는 다자회담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러한 협상테이블에서 합의를 도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지 접해볼 수 있어서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제3부는 저자가 노무현 정권 때 신설된 외교안보실장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맡아 노무현 정권과 조지 부시 2세 대통령간의 조율을 하고 BDA문제 해결 후 '9.19성명'의 이행을 위한 실행계획인 2007년 '2.13합의' 에 도달하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상대국 대표들과 1대1로 대화하는 내용들이 가장 인상깊더군요. 본인의 구상을 한 장의 종이에 정리해서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 그 자리에 당연히 요구되는 능력이지만 자리에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북한의 미사일발사와 핵실험으로 인한 미국과 한국 국내 정치의 비판, 겨우 2500만달러의 자금동결로 인해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호기를 놓치게 된 경위, 미국 내 강경파들의 북한에 대한 깊은 불신과 BDA를 둘러싸고 결정적인 순간 드러난 중국의 체면중시로 인해 날아간 기회는 정말 아쉽더군요. 이젠 중국의 굴기로 인해 2007년 당시보다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지요. ㅠ.ㅠ 게다가 중국이 베이징에서 의장국이 되는 등 6자 회담에 나름 투자를 많이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미국에 MD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경북에 THAAD 배치가 초일기에 들어왔으니 다자협의의 가능성은 더 낮아졌지요.

제4부는 '2.13합의'의 추진을 통한 북핵문제의 해결이라는 플랜이 한미양국의 정권교체기로 인해 사실상 무산된 상황에서 좀 더 포괄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위 UN의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표결과 관련된 '북한보고 논란'이 이 안에 몇 페이지 가량 언급되어 잇지요.

저는 문재인 후보가 이라크에서 샘물교회 선교단을 납치한 탈레반 단체가 요구했던 신임장(아그레망?)을 발급하자고 했다는 사실에 좀 놀랐습니다. 사실관계를 두고 다툼이 있지만 대북인권결의안 찬성 여부에 대한 북한의 의사를 물어보자는 말을 했다면 외교문제에 대한 판단력에 의구심이 들고요.

이미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지야 인질 협상 성공 후 요원 사진 노출, 2015년 새누리당 입당신청 및 재보선 공천신청 등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이 책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더군요. 송민순 전장관님이 이 책 전체에서 혐오의 감정을 표출한(은근하게나마) 유일한 인물이 김만복인 것 같습니다. 노대통령은 왜 이런 함량미달을 국정원장으로...

저자가 우회적으로 비판한 임기막판 실효적인 북핵문제 해결에 전념해야할 시점에 남북정상회담 병행추진, 아마추어적인 '종전선언' 논의 등도 아쉬웠고요. 다만 당시 야당쪽이 군사작전권은 갖지 않겠다고 하면서 걸핏하면 대북 강경 군사행동을 주문하는 '안락의자의 전사'들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쪽 손을 들어줄 생각은 전혀 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전략과 역할분담, 국군의 역량강화 차원에서 필요했던 전시 전작권 이행을 무기한 연기한 분들이니.

재미있는 여담들이 많은데 항공과 관련해서 1997년 호놀룰루에서 열린 한국의 미사일 개발능력에 대한 한미간 실무회담에서 미국이 미사일 관련 기술 이전 허가의 조건으로 '한국 민간기업의 드론 개발과 생산 금지'를 요구했었는데 당시 ADD와 항우연이 포함된 협상단을 이끈 저자가 이를 막아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저자는 핵무장한 북한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한반도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한다는 신념으로 한반도 비핵화 외교를 추진해왔고, 입부 33년만인 2008년 2월 말일 '어떤 국가도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면 해결의 객체가 되어버린다는 냉혹한 역사의 교훈을 다시 새기면서 스스로 우리 역사를 쓰는 주인공이 되어달라'는 퇴임사를 남기고 외교 일선을 떠났습니다.(민주당 18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역임)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한국 오교의 핵심을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퇴로가 없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는 데 있고, 사드 배치 가능성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드를 배치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분단은 이미 70년이 넘었고, 북핵문제에 대한 그간의 노력이 무산된 상황입니다. 작년 9월 북한의 제5차 핵실험에 이어 잠수함 발사 미사일 실험까지 했지만 저자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북미수교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지렛대로 우리가 분단과 핵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방안을요.

그런데 저자가 예정된 출간일을 1년이나 넘길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서 펴낸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총선 직전의 정쟁의 도구로만 소비되어버리고 공론장에서 별다른 논의가 된 것 같지 않아 아쉽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보다보니 실제로 역량도 별로 없는 통일부를 폐지하고 외교부 산하의 통일국 정도로 개편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노대통령과 저자가 나눈 대화 중에 '값아서'라는 표현이 나오길래 오타인가 했는데 '갋다'라는 경상도 방언이 있었다니. ㅎㅎ '애써 따지고 괴롭히다'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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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1979년 인도는 위성발사용 로켓을 조립 장소에서 발사 장소까지 소달구지로 운반했다. (첨단장비를 원시적인 수단으로 운반했을 때의 영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어쩌면 보안유지를 위한 허허실실 책략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74쪽

한반도 분단 후 70년간 북한은 3명의 지도자가 통치한 반면, 미국과 한국은 각각 12명과 11명의 대통령이 나왔다. 정치 시계의 속도가 4배 정도 차이가 난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대북정책을수립해 손에 잡히는 결과를 보여주려면 다음 대선 또는 중간선거까지 길어야 2년 정도밖에 여유가 없다. 북한은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를 이처럼 짧은 시간표에 맞춰서 움직이지 않는다.

260쪽

동아태 차관보는 세계 6개 지역을 나누어 담당하는 책임자의 한명이고 국무부에는 통틀어 35개의 차관보급 직책이 있다. 국무장관이 차관보로부터 상세히 보고를 받을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270쪽

레바논 파병은 이라크와 달리 유엔 깃발 아래의 평화유지군이었다. 한국은 규율이 잡힌 강한 군대를 가진 국가 가운데 역사, 인종, 종교, 정치 면에서 중동에 편견이 없는 사실상 유일한 나라이다. 레바논 파병은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이 분명했다.

364쪽

우리의 미래에 대한 본질적 문젱는 관여자가 적을수록 좋다. 어떤 나라도 한번 발을 디디면 그냥 떠나지는 않는다. 때로는 다자대화가 한반도의 분단구조를 관리하는 데는 유용할 경우도 있지만, 분단을 넘어 현상을 변경하려면 참여자가 적을수록 좋을 것이다.

377쪽

2006년 북한의 대외무역 의존도는 줄잡아 15% 선에 불과했는데 그마저도 70%이상이 중국과의 교역이었다. 당시 우리 국내에서도 금융제재의 결정적 효과를 기대하며 금강산과 개성을 통해 흘러들어가는 돈줄의 차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돈을 합쳐봐야 북한 전체 외화유입 규모의 대략 2% 선에 해당되었다. 실효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만 더 고조시켰을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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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재구성 - 현대 일본이 부끄러워하는 진짜 일본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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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해서 애번 오스노스가 쓴 <야망의 시대>, 피터 헤슬러의 <컨트리 드라이빙>처럼 통찰력있는 이방인 기자가 자신이 체류한 나라를 예리하게 관찰한 모범적인 책입니다. 저자 패트릭 스미스는 20년 가량 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해왔고 1987~1991년에 해럴드 트리뷴의 도쿄 지국장으로 일본에 체류했더군요.

비록 이 책이 1998년에 출간되었지만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인 지금 읽어도 여전히 타당한 분석이라는 게 일본의 비극인 것 같습니다.

업무상 일본 법을 찾아볼 일이 종종 있는데도 일본국 헌법(소위 '평화헌법')이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고 올해까지 70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저자 패트릭 스미스 덕분에 평화헌법 제9조에 대한 개정 논의에 대해서 아베 신조가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는 딱지까지 붙여가며 '정상국가화'라는 개헌파의 주장을 매도하는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진영의 주장에 대해 마뜩찮아 하면서도 전쟁책임 인정에 소극적인 극우의 손을 들어주기는 했던 애매함을 후련하게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항복 후 미국이 대신 만들어준 헌법을 70년 동안 계속 사용해왔던 국민들이 불쌍하고 극악인 일본 정치인들의 리더쉽이 한심해서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아무리 헌법과 민주주의를 가르쳐봐야 뭐하나요? 1920년대의 짧았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태평양전쟁 종전 직우 몇 달을 제외하고 주권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권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도 없었는데요. 우리나라의 1987년처럼 강렬한 체험은 아닐지 몰라도 외국의 간섭없이 내부적으로 헌법을 개정해보는 경험을 해보길 바랍니다. 저자의 말처럼 일본인들이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권리도 있다고 보고요.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가 틀을 짠 일본주식회사와 미일안보조약 시스템이 그 수명을 다한 이후에도 나카소네 야스히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시스템 개편이 실패했는데 아베 신조의 이번 시도는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송민순 전 장관의 <빙하는 움직인다>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제1,2차 북핵위기에 대응하는 6자 회담에서 일본 외무성이 보였던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한 집착이 참 바보스러워보였거든요. 일본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러시아가 국외자로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종종 통찰력있는 조언을 해주던 것과 비교되더군요.

읽으면서 일본이 유럽의 독일과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존재로 남아있는 덕분에 한국이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자율성을 누려온 측면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일본의 정치인들이 일본의 정상국가화에 성공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지금처럼 일본을 지시나 푸대접으로 별생각없이 다룰 수 없겠죠. 그렇게 되면 일본의 하위버전인 한국이 그동안 일본이 맡아왔던 역할을 담당해야할 것이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제주도로 옮겨올 수 있겠죠. 제가 바라는 상황은 물론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일본이 계속 이대로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으라고 저주를 내리기는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었던 일본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책들이 이 책에서 비판하는 소위 '국화회' 의 시각이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만주침략부터 태평양전쟁 종전까지의 시기를 일시적인 일탈로 보고, 일본의 아름다운 '전통'과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잘 착근이 되었다는 시각말이죠.

역자 후기에서 번역자 노시내씨가 술회한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패트릭 스미스의 지적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도 정확히 해당하는 내용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개인성을 억누르고 집단에게 극도의 충설을 바치는 무사 전통, 봉건주의, 계급의식, 외국인 차별, 지역차별(제주도나 전라도차별과 부라쿠나 오키나와 차별에 비교하면 아주..), 텐노와 궁내청(아키히토 천황의 자진 퇴위에 박수를~),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한 '개인성의 충분한 발현이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에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야한다'는 탁견이 패트릭 스미스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이 개인들의 '공적 개성'을 인정하는 근대국가가 되기를 기원하는 애정이 담겨있지요.

이 책에서 인용한 나쓰메 소세키의 강연 중 '제가 말씀드리는 개인주의라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중략) 나는 나의 길을 마음대로 갈 뿐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나름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가피하게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고독한 것입니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의 지적이고요.

일본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줬고, 일본이라는 거울에 한국을 비춰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여행가기 좋은 나라뿐만 아니라 이민가고 싶어지는 나라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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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맥아더는 일본 평화 헌법을 총사령부의 기념물로 삼고 싶었다. 일본 평화 헌법은 맥아더가 필리핀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1935년에 미국 헌법을 본따 제정된 필리핀 헌법을 모델로 한 것이다.

65쪽

과거 요시다 협정이나 현재 일본이 서방 안보 협조체제 내에서 처한 위치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걸프전에 대해 도쿄가 보여준 어설픈 행동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이 일본에 만들어준 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미국 정부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 관료들은 또 그들대로, 예의상 그와 같은 사실을 드러내놓고 지적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지 오래됐다.

351쪽

731부대는 세균전 부대로, 다른 부대와는 달리 유일하게 텐노의 칙령으로 설치가 허가되었다.

406쪽

일본사회에는 외로움이 만연해 있다. 일본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금방 느낀다.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됨을 뜻한다. '타자'로부터 단절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내면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자기와 진짜 자기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일본인이 스스로를 너무도 철저하게 타자화해왔기 때문이다.

420쪽

부락민의 옛 선조는 동물이나 사람 시체와 관련이 있었다. 동물을 도살하거나 가죽을 무두질하거나 무덤을 팠다. 신토 신앙은 그런 일을 불결함의 상징으로 보았고 부락민의 지위는 그런 시각의 반영이었다.

453쪽

극우가 역사를 부정하고 역사적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에 좀더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느낀다. 백발이 된 노병들은 비록 꺼림칙한 방법으로 표현할지언정 여전히 자존심, 주권, 일본인다음 같은 관념을 지니고 있다. 오직 극우만 홀로 그런 관념들을 대변하면서 희화시키는 현 상황은, '국제주의자'들이 이 부분을 포기해버린 탓이기도 하다.

480쪽

일본은 내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되 대외적으로는 자신과 외국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역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이 이런 사고에 능숙해지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국가적 목표를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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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페친님을 통해서 나심 탈렙의 <블랙 스완>을 읽고 충격을 많이 받았었죠. 그런데 그 분께서는 <행운에 속지마라>를 더 추천하셨습니다. 절판이라 계속 못구하다가 개정판이 작년 연말에 출간되서 샀습니다. <안티프래질>은 사놓고도 못 읽고 있는데 두툼해서 엄두가 안나네요.

초판과  개정판 모두 번역자가 이 건 교수님이셨군요.  나심 탈렙의 설명이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라 두서없이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한데 문장은 쉽고 간결합니다. 이 건 교수님 말씀대로 번역은 독자를 위한 것이지 원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독성있게 잘 번역해주셔서 좋았습니다.

블랙 스완에서 서술된 아이디어들이지만 좀 더 개인사적인 이야기와 아이디어의 원류 위주로 설명하고 있어서 <블랙 스완>보다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땐 좀 장황하고 현학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계량경제학에서 출발해서 통계학, 인지과학(과학철학), 인지심리학, 진화생물학 등에 대해서 본인이 읽어온 책과  경험한 것들을 간결한 지혜로 풀어놓고 있는데 결국 '인간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우리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기 때문에 금융이나 투자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모두까기의 대가인 나심 탈렙이 제일 싫어하는 세 부류가 MBA 출신 금융인, 언론인, 일반인 서평쟁이인 것 같은데 제가 바로 세 번째 부류라 뜨끔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서평은 책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서평을 쓰는 사람의 지적 수준을 드러낼 뿐이라는 독설이 맞는 말이라 ㅠ.ㅠ

저자가 유이하게 존경(인정보다 더 높은 수준)하는 사람이 칼 포퍼고, 그의 사상을 구현한 조지 소로스인데  저는 칼 포퍼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빌려읽지 마시고 사놓고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서 꺼내서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매일 실제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인지적 편향을 극복하고 있는 나심 탈렙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책을 다시 읽으며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는 효과는 있으니까요.

여담으로 중등과정 수학교육의 핵심 목표가 미적분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에서 확률의 기본을 이해하는 걸로 바뀌는 것이 대다수의 시민들에게는 훨씬 유용하다고 생각되고요.

참고로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적어도 인용한 로젠 로즈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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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쪽

얼마 전 나는 식당에서 이 책의 초고를 읽어준 트레이더 로렌 로즈와 식사를 했다. 우리는 동전을 던져서 밥값을 계산할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내가 져서 돈을 냈다. 그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자기가 확률적으로 절반을 냈다고 말했다.

81쪽

빌려온 지혜는 틀리기 쉽다. 그럴듯한 논평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상식은 18세까지 습득한 오해의 종합체에 불과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85쪽

수학은 사고의 도구이지, 계산의 도구가 아니다.

100쪽

소음과 정보를 구분하자면, 소음은 언론에 비유할 수 있고 정보는 역사에 비유할 수 있다.

147쪽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아니라 돈이다.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얼마를 버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이익이 발생하느냐가 아니라, 그 결과 발생하는 이익 규모다.

287쪽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며 훈계할 때 가장 화가 난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314쪽

충족을 추구하는 사람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대개 충족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그는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았고, 충족을 얻는 순간 멈출 줄 안다. 목표를 달성해도 욕망을 계속 키워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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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운명의 캉캉
박정윤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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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씨의 생애에 대해 몇 년간 자료를 수집한 끝에 펴냈다는 소식에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요? 많이 아쉬웠습니다. 제가 묘사를 기대했던 그녀의 유년기부터의 행적들이 소략하게 몇 문장으로 처리된 부분이 너무 많네요.

그녀의 불꽃같은 삶을 한 권으로 압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굳이 가공의 인물과 다양한 플롯, 액자의 액자 구성이 필요했을까 싶네요. 차라리 분량을 두 세 권으로 늘리는 편이 나았을텐데.

쪽글도 끙끙거리는 주제에 등단하신 작가분께 심한 악담이지만 나혜석이라는 인물의 발굴자라는 왕관을 쓰려는 이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애지중지하는 5만원권의 도안에 나혜석씨가 들어갔어야 하는 사람이라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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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건축대학의 유현준 교수라는 분께서 쓰신 책. 조금 성의없게 지은 듯한 제목보다는 부제인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이 그나마 좀 낫다. 사내 도서관에 새로들어온 책으로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안봤을 듯 싶다.

우중충한 날씨때문에 팝콘 깨물어 먹으며 읽었다. 캐러멜 팝콘도 달콤했지만(수북히 두 그릇 먹었다 ㅠ.ㅠ) 유학에 건축사무소 실무까지 하셨던 분이 언제 이렇게 다방면의 책을 많이 읽으셨나 탄복했다. 그 지식들이 건축이 아닌 분야에 대한 오지랖이 아니라 본인이 느낀 공간디자인과 도시계획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적절하게 쓰이고 있어서 더 대단하다고 느꼈다.
"제1장 왜 어떤 거리는 걷고 싶은가"를 처음 보면서부터 감탄했다. 주관적인 인상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논리적으로 정량분석을 통해 간결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정말 아름다웠다. 마야 린의 베트남 기념관 현상 설계 공모작에 대한 부분도 버금갔고.

건축에 문외한들을 대상으로 한 비슷한 책을 여러 권 읽어봤다. 외국사람이 쓴 책도 있었고. 하지만 이 책이 개중 가장 빼어나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정반대쪽인 도시계획과 건축에서 출발해서 도시를 이해하고자 접근해온 이 책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중에 이 분이 우리나라의 주요 신도시들의 도시계획에 대한 비평을 책으로 엮어주시면 꼭 사봐야지.
정말 좋은 분석들이 많은데 이 책의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몇 단락만 추려서 인용하느라 혼났다. 스승의 날 기념으로 이 책을 한 권 사서 교수님께 선물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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