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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감각 - 국내 1세대 A&R 프로듀서 정병기가 써내려간 기획의 세계
정병기(Jaden Jeong)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10월
평점 :
엊그제 크리마스이브부터 연초까지 쭉 쉬는 김에 그간 사놓고 쌓아만 뒀던 책들을 한 권씩 읽고 있습니다.
저는 A&R이 무슨 말의 약자인지도(Artists & Repertoire)몰랐던 사람인데, 소중한 90년대생 지인 임명묵님덕분에 몇 년전부터 아이돌 세계관 기획자 정병기님이란 분이 있고, 그 분이 엄청난 천재라고 들어왔지요.
뮤비를 같이 보면서 '이달의 소녀' 프로젝트가 왜 위대한지에 대한 해설도 들었고요. 물론 1세대 아이돌 '핑클' 이후로 까막눈으로 살아와서 태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가 모르는 넓은 세계가 있다는 느낌은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을 때, 분야는 다르지만 기획에 대한 관점들을 듣고 싶어 보게 되었죠. 책갈피로 들어있는 포토카드는 뭔가 했는데, 외모를 보니 저랑 같은 1979년생이 맞나 싶네요. 이 불공평한 세상 ㅠ.ㅠ
완독하고 보니 이 책은 제 올해의 책에 넣어야겠습니다. 이 시대의 정주영, 이병철 어록집 느낌을 받았거든요. 대략 2000년대 초반에 설립된 네이버, 셀트리온, 카카오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비공기업 10대 기업 순위에 들어가는 기업이 나온다면 그 대표이사는 바로 이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강하게 드네요.
네이버의 시가총액이 약 37조 원, 엔터업계의 수위기업인 하이브가 13조 원인데, 정병기님이 구상하는 사업모델이 성공하면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엔터기업이 나올 것 같습니다.
저는 정병기님의 비전이 확장되면 '온오프라인 융합 MMORPG + 종교비즈니스 플랫폼'에 가까워진다고 이해했습니다. 엔터사의 BM에 부분유료화 게임의 BM을 섞은 건 하이브와 비슷한데, 지속가능한 사업모델에 대한 완성도가 훨씬 높아 보여서요.
물론, 페이스북 같은 SNS가 만들어낸 비교와 강박의 우울증 대잔치처럼 이런 사업모델이 세상에 이로울 것 같지는 않지만, 많은 10대와 20대들이 정병기님이 구상한 아이돌 사업모델이 주는 효용을 누리고 싶어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아이돌산업이 신흥종교 창설 및 포교 RPG에 가까워지고, 팬덤의 보다 강한 몰입을 유도하다보면 유독한 과금제나 피라미드식 다단계 구조를 짜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개고기 탕후루' 꼴은 피했으면 좋겠네요.
인상깊은 문구들이 거의 페이지마다 나오는 책이라서, 저같은 엔터업계 문외한에게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데뷔곡은 '좋은 노래'를 발표하는 것이 아닐, 그룹의 컨셉을 담아낸 하나의 '명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대중에게 "우리는 이런 그룹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데뷔곡을 통해 그룹의 색깔, 퍼포먼스 스타일, 그리고 앞으로의 서사를 모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K-POP 팬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태와 성격이 크게 변화했다. 과거에는 팬들이 알려지지 않은 '불쌍한' 아이돌을 스스로 키우고 육성한다는 개념이 강했다. 마치 '내가 키운 내 새끼'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팬덤은 '잘 될 만한 아이돌에 내가 베팅한다'는 개념으로 변모했다.
(중략)
게다가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아티스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명품 브랜드를 소비하며 자부심을 느끼듯, 자신이 응원하는 아티스트가 고예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팬덤의 규모와 충성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팬들에게 어떤 결정을 맡길 때, '망할 것 같은 안'은 애초에 옵션에 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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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주되, '실패할 자유'는 주지 않는 방식으로 건강한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팬들은 자신이 직접 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어떤 선택을 하든 팀이 성공적인 길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달의 소녀와 트리플에스는 좀 더 복잡하고 깊이 있는 세계관을 즐기며, 직접 조합하고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 탄생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레고나 로블록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팬들은 소비하는 것을 넘어, 투표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룹의 방향성에 직접 참여하며 그룹과 함께 성장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참여형 시스템은 팬들에게 엄청난 몰입감과 소속감을 제공하며, 단순한 팬심을 넘어 그룹에 대한 애정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상업적으로 보일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티스트를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쓴 팬들의 노력이 '기록'되고, 그에 합당한 가치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블록체인 기술은 팬들의 활동을 투명하게 기록하고, 그것이 하나의 레벨이나 경험치처럼 쌓이게 만들 수 있다. 단순히 돈을 쓴 팬뿐만 아니라, 돈이 없더라도 온라인상에서 시간과 노력으로 그룹을 홍보하고 응원한 팬들의 열정 역시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브젝트(아티스트의 초상)에 대한 판매 수익은 손익분기점과 상관없이 아티스트에게 직접 정산해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티스트는 노력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을 받으며 즐겁게 활동할 수 있다.
팬들에게도 이 사실을 투명하게 알린다.
내가 생각하는 아티스트의 진짜 재능은 '고민하지 않는 것'에 있다.
(중략)
고민은 최대한 짧게, 그리고 노력과 실행에 더 집중하는 이들이 자신을 소모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방송에 나가서 순발력 있게 재치 있는 멘트를 던지는 아티스트들도 대부분 깊은 고민 없이 본능적인 영역에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타고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무의미한 고민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행동으로 전환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아티스트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