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 한국 공직사회는 왜 그토록 무능해졌는가
노한동 지음 / 사이드웨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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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노한동님은 20대에 행정고시에 합격 후, 문체부 사무관으로 입직해서 10년 동안 일하면서 경험한 공직사회에 대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관처럼 전해줍니다. 그래서, 4부 중 1~3부는 장강명 작가님 추천사처럼 르포르타주에 가깝습니다.

책을 덮으며 천황제 군국주의의 세뇌를 받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해군 귀환병 와타나베 기요시가 해군복무 시절 자신이 받았던 월급총액을 되돌려주면서 천황에게 “나는 당신에게 더 이상 빚진 게 없습니다.”라고 했던 <산산조각 난 신>과 비슷한 단호한 결의를 느꼈네요.

누군가는 첨부터 사무관으로 혜택 많이 받고 근무했으면서 전 직장을 헐뜯는 책을 퇴직한 마당에 왜 썼는지, 문체부 한 곳에서 10년 있었으면서 전체 공직사회의 조직과 업무문화가 모두 그런 것처럼 과도하게 혹평했다고 손가락질을 할 게 뻔히 예상됩니다.

하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읽어보면, 저자 노한동님께서 왜 퇴직 후 1년의 시간을 할애해서 이 책을 쓰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료와 소속부서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이런 책을 쓸 수가 없죠.

제 부모님과 두 동생 내외에 모두 다양한 직렬의 공무원(소방, 보건, 사회복지, 건축, 일반행정, 경찰)들입니다. 저도 학부시절 행정고시 공부를 했던 데다, 공공기관인 정출연에 다니면서 지난 10년 동안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발주하는 연구과제나 대행사업을 수주해서 일해왔으니 비공무원치고는 공무원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된 세종시 문체부 본청 공무원들의 일하는 모습들은 제가 봐왔거나 짐작해온 바와 다른 부분이 별로 없었고요.
(서기관 승진시 다면평가의 압박으로 승진후보들이 타부서 직원들에게 밥과 차를 사면서 평판관리를 할 정도인지는 몰랐지만요.)

동시에 제가 본 국토교통부, 환경부, 해양수산부의 사무관, 주무관님들은 훌륭한 분들이 이상한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소위 ‘갑질’에 시달릴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저는 이렇게 못산다고 생각될 정도로 과도한 초과근무와 조직 및 국회 등의 압박을 감당하면서, 사무공간이나 출장비 등에서 형편없는 처우를 감내하고 있고요.

저도 공공기관인 정출연에 있으면서 과거 영광의 시절이 있었던 이 조직이 무기력해지고, 진짜 일이 아닌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가짜노동을 숨쉬는 것처럼 시키고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저나 동료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요.

그나마 실제 집행과 가까운 도로민간투자사업 지원부서에서 일하길 선택해서 보람을 찾긴 했지만, 지금도 내년초에 납품하는 24년도 기관 경영평가 보고서라는 의미없는 일에 동원 중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 효용을 잃은 거대한 가짜업무체계를 어떻게 바꿀지 답이 안나오고 저항할 엄두도 안나더군요. 그래서 직장이 주는 과실은 누리면서 자아효능감이나 자존감은 책을 읽고 취미생활에서 채우며 살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로 최소한 1997년까지 한국의 공무원들은 정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우리사회가 가야할 정책방향에 대해서 해외의 선례와 민간의 요구 등을 적절하게 반영하여 합리적인 정책들을 수립하고 실행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부문의 인원과 예산에 비하면 말이죠.

많지 않은 분량으로 왜 요즘의 중앙부처의 엘리트 공무원들이 예전처럼 개인의 워라밸도 포기하고 일에 소모되기를 거부하는지, 설령 주어지는 일을 감당하더라도 현실의 작동원리를 파악하고 유효한 정책들을 내놓는 확률이 떨어졌는지, 무슨 일만 벌어지면 정치인이나 여론이 행정각부나 지자체 담당자들만 조지는 분위기가 공무원들을 어떻게 수동적/방어적으로 만드는지를 정말 잘 정리한 책입니다.

동생 부부에게 한 권씩 선물하고, 세종시 관내 도서관에 도서구매신청을, 사내 노동조합 도서고에도 비치해달라고 신청할 예정입니다.

책의 마지막 제4부는 저자가 ‘의미를 잃은 가짜노동으로 점철된’ 현재 공직사회의 업무문화를 개혁하기 위한 방안들을 제안해주시고 계시는데 직접 읽어보고 평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순환보직이 아닌 전문트랙을 선택해서 전문성을 쌓은 공무원이 있어야 순응을 강요하는 조직문화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건의처럼 동의할 수 있는 제안도 있었고 아닌 제안도 있었는데요.

첫째, 저는 공무원들이 부처와 부서의 예산과 인력을 늘려야 유리한 상황을 바꾸는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무관 이상 공무원의 BSC평가에서 법개정 실적은 규제폐지나 완화만 인정해야 합니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수립하는 중앙부처 사무관들에게는 급여부터 직무급제도로 지금의 2배를 지급해도 부족합니다. 이들이 담당하는 정책에 따라 증감하는 예산규모에 비하면 먼지같은 규모니까요. 충분한 급여를 주지 않으니 부서예산과 영향력으로라도 보상받으려고 하지요. 추가로, 부처의 예산 감축 실적과 사후규제영향평가 의무화 및 법령 및 행정규칙 규제 폐지 실적의 승진 및 인센티브 연동해서 국회에서 무분별하게 양산 민간을 제약하는 규제들의 해악을 행정부 차원에서나마 줄이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기계 출연연의 경우 계약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사업비를 절감하면 그 중 일부를 참여연구진 성과급으로 되돌려주니 볼펜 한 자루도 잘 안사고 저녁회식도 1차에서 끝낸다고 들었습니다. 예산을 다 쓸 수록 차년도 예산증액 요구에 유리한 일반 공공조직에도 이런 제도 도입이 필요합니다. 당연한 일을 하면서 인센티브를 요구하냐고 비난할 수 있지만, 이게 결국 국민들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일 겁니다.

둘째, 면피용, 방패막용, 시간끌기용으로 남용되는 행정/자문위원회와 연구용역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폭 줄여야 합니다. 그래야 정출연도 고유연구보다 수탁과제를 수주하려는 경향이 줄어들 것입니다.

셋째, 국회의원들도 장차관이 아니라 각 업무를 실질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국장과 과장을 불러서 답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회의와 간담회 행사들을 동영상으로 남기고 실적보고용 회의록말고 참석자들의 모든 문답 발언들을 스크립트로 제공하는 등 공개해서 관료의 실력을 대중들이 볼 수 있게 해야합니다. 그래야 정책결정의 책임소재도 남을테고요. 지금은 회의내용이 비공개되거나 안건 처리결과 위주로 간략하게 정리되니 의사결정의 책임이 불명확합니다. 성과와 책임이 불명확하니 인사평가의 예측성과 수용성이 낮아 일을 열심히 할 유인이 없습니다.

넷째, 국회의원실의 행정부에 대한 자료요구는 국회법대로 상임위를 거쳐서 정식으로만 와야하고, 어차피 보지도 않는 ‘과거 10년치 자료’ 같은 괴롭히기식 요청과 행정주체와 기관이 생산한 자료가 아닌 민간이 보유한 자료에 대해서는 요구하지 못하도록 해야합니다.

다섯째, 공무원들의 순환근무기간이 형식적으로 2년이지만 1년도 못채우고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적어도 1/3 이상의 업무에 대해서는 최소한 3년으로 부서 근무기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인사발령은 수시인사에서 연 1~2회 정기인사로, 각 과마다 최소 1개의 계는 내부 FA계약처럼 본인 의사대로 결성한 장기프로젝트를 맡도록 해서, 짧지 않은 기간 동안의 정책수립 목표를 부여받고, 1과~말과 차별없이 해당 프로젝트의 성과를 평가하여 그 실적을 승진여부에 반영했으면 좋겠습니다. 일종의 소사장제 사내벤처처럼요.

여섯째, 국회의원에 대한 의정활동 실적도 지금처럼 법안발의실적이 아니라, 실제 발의하고 개정된 법안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판단해서 평가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법률들이 민간에 불필요한 비용부담을 늘리고, 이미 판이 짜여진 기존 업계에 유리해서 유연한 변화를 늦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행정력을 요구해서 번아웃을 자초하고요.

그리고 근본적으로 언론, 정치인, 여론 모두 사건만 터지면 말도 안되는 스피드 대책을 요하는데, 7~9명 내외인 정부부처 한 과에서 고민하고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고 교섭해서 개선대책 수립을 몇 주나 몇 달만에 완료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국사회가 발전해서 해외사례를 참고해서 손쉽게 고칠 수 있는 제도는 이제 별로 없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계속 대책을 내놓으라고 괴롭히니 담당자로서는 차라리 위원회를 급조하고, 학술연구용역 발주해놓고 시간끌면서 부서이동 신청하는게 낫죠.

사법부도 문제없다고 판단한 타다 사업모델을 국회의원이 여객자동차법까지 개정해가면서 불가능하게 만들어놓고서, 플랫폼가맹운송사업이 왜 제대로 안되냐고 국토교통부 담당자를 호통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납금제의 부작용을 부풀려서 시장에서 작동도 안되는 운송수입금 전액관리제를 국회의원 자신들이 제도화해놓고 행정부가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것 같은 행태들이 너무 많습니다.

끝으로, 국민들도 제발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일에 대해서 공무원들에게 대책수립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안에 첨부된 규제비용 추계서가 없더라도 규제는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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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쪽

장차관 등 정무직에게 사안을 보고해야 하는 국장급 간부는 현실을 평탄화하여 보고하기에 수월한 짧고 간결한 보고서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보고서만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하거나, 문제의 적확한 해결을 위한 복잡하고 다양한 정책적 논의를 부처 내에서 촉발하기는 어렵다. 형식은 내용을 잡고 뒤흔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더군다나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정부 보고서 작성법에 능해질수록, 정책의 실무를 직접 담당하는 사무관조차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습성을 갖게 된다. 복잡하 문제를 다양한 맥락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정부 보고서의 형식상의 한계 때문에 문제를 깊이 탐구하기보다는 보고하기 쉬운 틀에 맞는 적당한 통계와 자료를 짜깁기 하는 데 몰두한다.

72쪽

중앙부처의 정책은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조직도상의 순서는 과가 발생한 순서를 따르기 때문에 말과는 최근의 시대 흐름과 가장 밀접한 산업적 측면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의 먹거리는 오히려 일과가 아닌 말과가 맡은 분야에서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고작 행정 조직도상의 순서에 따라 담당자의 열의가 달라진다면, 민간의 입장에선 이만큼 부당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정부가 민간의 특정 분야를 잘 되게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법령 등 규제와 룰을 제때 현행화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으면 그 분야의 발전은 요원하다.

83쪽

공무원은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공직사회의 일이란 그저 관습에 따르거나 기관장을 빛내기 위한 거대한 비효율의 반복일 뿐이라는 학습된 무기력을 체득한다. 주말과 밤낮없이 일하는 자신의 노력이 궁극적으로 국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공무원 스스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112쪽

그런데 직접 정책을 집행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이 다시 그 역할을 외주로 주는 시스템이 현장에선 너무 흔해졌다. 공공보다 민간에 더 전문성이 있기에, 민간이 정책 집행도 더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신화를 등에 업고서 말이다.
(중략)
예산의 낭비보다 더 큰 문제는 직접 해보아야 습득하는 지원 사업의 암묵지가 공공부문에는 전혀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20쪽

사실 정무직은 자신이 모르는 내용이 회의에서 등장하는 걸 매우 싫어하고, 애초에 그들 중 현장의 돌발 발언에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상황을 넘길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도 드물다. 또한 정말 정무직이 현장의 가감 없는 목소리를 듣기 원한다면, 격식을 갖춘 간담회가 아니라 식사 자리 등 편안한 자리를 통해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애초에 격식 있는 간담회 자리를 만들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현장의 진짜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을 마음이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156쪽

특별히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아니라면, 본인이 있을 땐 결정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하는 것이 공무원의 태생적 속성이다. 연구용역과 위원회는 정책의 전문성과 민주성 증진을 핑계 삼아 공무원이 시간을 벌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결정의 완충지대다. 이런 완충지대는 논의와 검토의 과정을 길게 끌며 결정을 뒤로 미루는 데 적합하다. 즉,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호막인 셈이다. 공직사회의 이러한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 몇명은 그 덕분에 연구용역비에 위원회 수당까지 살뜰히 챙긴다.

241쪽

누구나 인생 이모작을 준비해야 하는 이 시대에서 단순히 직급을 높이는 것보다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을 선호하는 공무원은 오히려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특히 평생직장 개념보다 정부-의회-민간-학계를 넘나들며 다방면의 경력을 쌓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가 다가올수록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일은 사회와 개인 모 두에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이다.
(중략)
이러한 제도적 변화를 통해 관료가 전문성을 갖게 되면, 그 효과는 단순히 정책의 품질 제고에 그치지 않는다. 전문성은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는 가장 큰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탄탄한 논리로 무장한 하급자를 대상으로는 제아무리 상급자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일을 무작정 밀어붙이기 어렵다.

247쪽

총액배분자율편성 제도 아래에서 예산의 편성이 하향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재부는 각 부처의 합리성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부처에게 자율을 주면 이익단체 등에 휘둘려 방만하게 예산을 편성할 것으로 생각하기에 기재부는 칼잡이 역할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정해진 한도 안에서 각 부처에 자율을 주는 것이 오히려 예산의 방만함을 줄이는 일이다. 각 부처에 재량이 주어지면, 예산의 한도 안에서 효과성 없는 기존 사업은 과감히 없애고 그 예산으로 더 좋은 사업을 기획해도 업무가 많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기존의 악순환이 깨질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각종 정부 사업의 효과성을 증진할 것이다.

268쪽

공직사회에서 진짜 해야하는 일은 일단 손을 대기 시작하면 무수한 고민이 따라온다는 특징이 있다.
(중략)
공직사회는 가짜 노동이 진짜 노동을 압도하는 곳이기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일의 필요성을 따져봐야 한다.
(중략)
공직사회는 일을 못 한다. 관료가 게을러서도, 철밥통이어서도 아니다. 그저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다.
(중략)
우리는 그동안 무능의 본질을 외면한 채, 관료가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인 비효율과 책임 회피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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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 한국 공직사회는 왜 그토록 무능해졌는가
노한동 지음 / 사이드웨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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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중앙부처 사무관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왜 공직사회의 엘리트들이 무기력해지고, 번아웃에 시달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빼어난 책입니다. 제가 중앙부처 공무원들과 자주 만나는 정출연에 있으면서 본 공무원들의 고민과 공공기관인 저희 조직의 문제와도 상당부분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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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이화경 단편선
이화경 지음 / 모놀로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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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훌륭한 소설가의 작품이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50년 이상을 살아온, 여전히 따스한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는 작가님이 쓴 단편들의 아름다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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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이화경 단편선
이화경 지음 / 모놀로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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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각도로 표지를 찍어도 빛 아래서는 프리즘처럼 전등 빛을 분광해서 반사하는 재질이군요. 조도를 낮추고 찍었더니 뿌옇게 안개가 낀 시계탑 풍경처럼 보입니다.

글쟁이로 50대 이상까지 살아올 정도로 어느 정도 입지가 있는 작가라면, 차라리 문체부나 공공기관, 지자체의 지원사업들의 제안서를 쓰며 사람들을 만나고, 상근자 한 명 없지만 거창하게 열 글자 이상인 이름의 사단법인이나 사회적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서 사업계획서를 쓰는게 더 나을 겁니다. 최소한 지역신문 문화면에 행사소식이나 자신의 인터뷰기사가 실리고, 글을 쓰려는 열의가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기회를 나눠주고, 생계를 돕는다는 충족감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욕심도 안내고 그저 글로써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며 주변사람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지역에서 무관심에 방치된 벼랑에 선 지역사람들을 돕는 작가는 사람들이 책을 사고 읽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 계속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줄 수 있을지 답답한 마음이 드는군요.
아마 저보다 좀 손위인, 이화경 작가님 또래인 독자라면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같은 단편들에 깔린 회한의 정서를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평균적으로 주어진 수명의 반절 이상을 살아온, 반쯤은 짐승처럼 생존을 위해 발버둥처야 했을 정도로 강퍅했던 시기를 경험했던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너울같은 울림을요.

현해탄에 몸을 던졌던 윤심덕-김우진이 아닌 남겨진 김우진의 아내를 주인공으로한 <노라의 本>, 고려가요 쌍화점의 가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고려 개경의 기생이 주인공인 <앵혈, 꾀꼬리의 피>는 남성작가들의 시선으로 포착하기 힘든 단편 역사소설이고요.

표제작이자 권두작인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가 좀 난해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찾아보니 1922년에 나온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개여울>이란 시의 서두에 나오는 문장으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라는 제목을, 중간에 나오는 문장을 따서 표제작의 제목으로 삼으셨더군요.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는 꽤 많이 살아왔는데 아직도 상당히 남은 중년 이후의 시기를 도무지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살아가야할지 갈피를 못잡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느꼈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PPT 슬라이드 두 장이 등장하는 건 재미있었고, 사자성어 작취미성(昨醉未醒: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아니함)이 영화 <동사서독>에서 '취생몽사(醉生夢死 : 아무 뜻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의 변용같았고요. 하지만, 한국의 중년 남매의 이름으로 '엘제'와 '한스'라는 독일쪽 이름이 함께 등장하니 현실감이 알콜처럼 증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단편 안에서 등장하는 독일의 라푼젤(이 소설 덕분에 독일어로 '들상추'란 뜻이라는 걸 알았네요.)설화와의 연결고리를 제가 찾아내는 재미가 있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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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쪽,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중에서

맞고 사는 게 슬퍼서 가출했다. 세상은 가출한 소년에게 퍽도 다정하게 훈계질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다. 가출한 소녀는 순식간에 발라당 까져서 문란해지고, 소년은 세상의 질서를 생까는 양아치가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가출한 소년소녀들이 얼마나 가족에 매달리는지 모르고들 하는 소리였다. 오죽하면 가출팸이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지겠냐고. 얘들은 시한폭탄같은 핏줄들이 있는 씨족공동체 가족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품어주는 다정한 공동체 가족을 꿈꾸었다. 그런 가족은 영화 세트장에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무엇보다 돈 문제가 걸리면, 서로의 등짝을 보일 새도 없이 흩어지곤 했지만.

170쪽,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중에서

온전치 않은 비릿한 합의, 성치 않은 씁쓸한 결론, 돌려받기를 요구하지 않는 어떤 목숨......
시골 전원의 고즈넉한 풍경의 비주얼 뒤엔 늘 어둠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음을 집성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조각조각 부서진 든 자리가 보이는 거센 바람의 보이지 않는 무서움, 저물녘의 술래잡기처럼 숨은 누군가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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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폐교생활백서 세트 - 전2권 폐교생활백서
로서하 지음 / 드루이드아일랜드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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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의 유명한 식물 블로거이자 네이버까페 <모초진>(모두가 초록에 진심)의 운영자이신 '프로개'님과 배우자이신 '로서하(김주희)' 작가님께서 함께 쓰신, 5년 동안의 경북 안동시의 폐교 임대 생활 경험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운동장과 뒷산까지 약 1만 2천평의 부지와 470평의 2층 건물을 빌려쓰는 대부료가 1년에 800만 원씩이니 엄청 저렴한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폐교가 되고 나서 10년 동안 방치된 이 거대한 건물과 부지를 사용료까지 내가면서 유지관리하는 업무를 떠맡은 거라고 볼 수도 있지요.
프로개님의 책 <드루이드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는 발코니 공간도 누릴 수 없는 한국의 공동주택 공간에서 식물을 키우는 이들을 위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로개님은 이런 실내공간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들의 한계와 어찌보면서 자신의 섬세한 노력들조차 그저 최대한 죽지 않고 버티게 도와주며 식물의 숨이 붙어있는 시간을 늘이는 것 뿐이 아닌가 하는 무력감에 번아웃이 오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남편을 위해 아내 로서하 작가님은 1년의 안식년(+1천만 원의 용돈까지!)을 선물해주신다고 하셨고, 이 선물이 불씨가 되어 <모두의 pH>라는 연구실험 프로젝트를 위해 프로개님과 로서하님이 육지의 오지에서도 섬처럼 외딴 곳인 폐교생활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요.
두 권으로 이루어진 <폐교생활백서>의 1권은 프로개님이 쓰셨고, '아주 많이 부족한 희망찬 하루'라는 부제입니다. 저는 세세한 내용들을 프로개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보다 풍부하고 생생하게 읽은 후였지만, 프로개님과 이 폐교생활 시도를 알지 못했던 분들에게 간결하게 소개해주기에 딱 알맞은 내용이었습니다. 원래 영상 전공으로 단편영화도 찍으셨던 분이라 책에 등장하는 사진들과 시나리오같은 글솜씨도 일품이고요.
2권은 폐교생활의 동반자였던 배우자 로서하 작가님이 쓰신 에세이인데, 시골생활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도시 여성이 외진 시골 폐교에서 5년 동안 도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면서 느낀 점들을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서술해주셨습니다.
프로개님과 로서하님은 이번 주말 사흘 동안의 모초진 회원 폐교초대행사를 통해 그간 키워오신 수천 개의 화분들을 대부분 나눔하신듯 싶고, 이제 폐교 생활을 정리하시고 보다 작은 규모이고, 모르는 사람들이 불쑥 찾아올 걱정을 내려놓고 지낼 수 있는 아늑한 공간으로 이사하실 것 같습니다.
(아마 식물들을 충분히 키울 수 있는 단독주택이면서 좀 더 따뜻한 곳이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프로개님을 알기 전부터 농막을 준비했고, 아파트에서 살면서 차로 30분이 안걸리는 거리의 190평 밭에서 텃밭을 가꾸고, 유실수들을 심고, 닭들을 키우고 있어서 어찌보면 이 두 분의 폐교 프로젝트의 미니멀한 버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의 에세이 속 문장과 사진들에서 생략한 어려움과 마음의 상처들이 짐작이 되고, 좋았던 경험들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경제적 효율성으로 치환되지 않는 삶의 경험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요.
이런 시도가 들판에 피어난 서양민들레처럼(정원사나 농부에겐 악몽이지만) 소멸해가는 전국의 시골 곳곳으로 번져나가면 좋겠고, 국회나 지방정부, 공무원들 역시 도시가 가지지 못한 시골의 강점인 '넓은 나만의 공간'을 어떻게 도시인들에게 어필해서 유혹할지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네요. 시골은 '시간을 내어 가만히 바라보는 여유'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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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많이 부족한 희망찬 하루> - 프로개
42쪽
모든 건 '가드닝 식물들은 어떤 pH의 흙에서 잘 자랄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어요. 그걸 알아보려면 비를 맞지 않는 장소에서 다양한 흙으로 식물을 키워보는 수밖에 없었죠.
204쪽
경악의 첫해, 감탄스러운 두 번째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삼 년 차가 되자 폐교에도 더는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상이 되어버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어두운 숲을 지나는 방법> - 로서하
29쪽
폐교에서의 생활은 내내 그랬던 것 같아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막연하게 좋을 것 같았던 부분은 훨씬 더 좋고,
막연하게 불편할 것 같았던 부분 역시 훨씬 더 불편했습니다.
151쪽
시간을 내어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나든.
192쪽
자신을 살펴주세요. 가능한 한 다정하게.
이기적인 마음이 넘쳐나는 세상에 친절과 다정함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되었나요. 다정함과 친절을 긁어모아 나를 위해 쓰는 거예요.
그렇게 내 안의 다정함이 조금 더 자라나 충분해졌을 때 다른 이에게도 그 다정함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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