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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구락부
이화경 지음 / 한길사 / 2026년 6월
평점 :
이화경 작가님의 장편소설 비밀구락부를 읽으면서 2023년에 읽었던 단편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던 노라의 뽄에서 이미 나왔던 문제의식을 저자께서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종전까지의 현대사로 확장시킨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
저한테는 이미 역사의 영역이었지만, 한국에서 살아온 1960년대생으로서 이 나라의 건국까지를 저자 자신의 시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고 싶으셨던게 아닌지. 한국인으로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인 박상연 작가의 DMZ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이 이야기에서 등장한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 천아지/천애란(김수임), 채현욱(이강국), 에이든(베어드 대령), 주드(CIC 요원)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봤습니다. 이들 모두 가난했고, 주류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 계속 성취로 자신을 증명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인물들입니다. 에이든 헌병대장을 아일랜드계로 설정한 것에 감탄했네요.
그리고, 이미 센세이셔널한 에피소드인 이강국-김수임의 관계를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치정물로 다루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그 전개를 처리한 부분도 좋았습니다. 채현욱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아내와 독일 유학까지 지원해준 처가(처남)에 대해 미안한 기색이나 사과를 하지 않았던 모습이나 애란을 찾으면서도 정작 아내와의 관계는 정리하지 않은 비겁함이 현실적이었고요.(조용히 채현욱을 데려간 처남이 진짜 보살..)
혁명가라는 직업 자체가 보통 자아가 비대하지 않으면 어렵고, 배우자가 있으면서도 남들에게 드러내놓을 수도 없는 밀회밖에 없는 관계에 낭만을 치사량만큼 들이부을 수 있다는 건 역사 속의 무수한 사례들이 있으니까요. 당장 스무살 연하의 레이디를 그녀의 엄마가 같이 있는 앞에서 꼬신 이승만 박사도 있고요.
저는 다만 홀어머니와 살다가 11세에 민며느리로 팔려갔던 빈민가 출신의 천애란이 바랐던 인생의 Go Forward가 꼭 이런 방향이었어야 했을까 싶어서 아쉽습니다. 아무리 모태솔로였다고 하고 썸남이 당시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의 독일 유학파라고 하지만 이미 부유한 가문의 사위이자, 공산주의 활동가로 낙인이 찍혀버린 남자를 20대 초반 비밀구락부에서 본 후광때문에 두 번이나 선택하지 않는게 나았을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맨몸으로 도망쳐나와 면식도 없은 외국인 선교사의 집을 찾을 정도의 과단성 있고 미국 유학을 꿈꿨던 사람이 유부조선남의 후처도 마다하지 않을 결정이나 36세에 이미 중년인 미군 헌병대장과의 재혼을 그다지 절실하게 밀어붙이지 않기(굳이 밝힐 필요 없어보이는 과거 고백까지)엔 유년기의 생존본능과 결핍의 경험이 혹독했다고 느꼈거든요.
밑바닥 사병출신 미육군 방첩대의 주드가 채현욱을 심문할 때 한국어로 연극의 대사처럼 길게 대화한 것도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주드가 없었더라면 이 이야기의 구도는 완성되지 않았을터라 이해는 갑니다.
잔반가문 출신의 경성제대 3대 천재네(죽지도 않는 그놈의 서울대 3대 천재론의 원류가 여기에…), 빈민가 출신의 이화여전 학생이네 하는게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아우라를 풍겼겠지만, 그래봐야 20대 초중반이었던 남녀의 풋사랑이 격변기의 시대상에서 어떻게 정치의 소도구로 쓰고 버려지는지에 관한 충분히 있었을법한 이야기를 읽으니, 30대까지도 아직 어린 걸로 취급되는 중위연령 47.3세의 시대가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예전 교과서에서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만 들었었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최근 학계에서는 CIC 등의 공작이었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둔 논의가 되고 있고, 2025년에 법원이 재심에서 독립운동가 이관술씨의 정판사 사건 혐의에 대해 위법수집증거의 효력을 부인하여 무죄를 선고했다는 것도 몰랐고, 1927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지원하다가 옥고를 치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에 대해서 전혀 몰랐었는데 이 소설덕분에 처음 알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