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이화경 단편선
이화경 지음 / 모놀로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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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훌륭한 소설가의 작품이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50년 이상을 살아온, 여전히 따스한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는 작가님이 쓴 단편들의 아름다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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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이화경 단편선
이화경 지음 / 모놀로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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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각도로 표지를 찍어도 빛 아래서는 프리즘처럼 전등 빛을 분광해서 반사하는 재질이군요. 조도를 낮추고 찍었더니 뿌옇게 안개가 낀 시계탑 풍경처럼 보입니다.

글쟁이로 50대 이상까지 살아올 정도로 어느 정도 입지가 있는 작가라면, 차라리 문체부나 공공기관, 지자체의 지원사업들의 제안서를 쓰며 사람들을 만나고, 상근자 한 명 없지만 거창하게 열 글자 이상인 이름의 사단법인이나 사회적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서 사업계획서를 쓰는게 더 나을 겁니다. 최소한 지역신문 문화면에 행사소식이나 자신의 인터뷰기사가 실리고, 글을 쓰려는 열의가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기회를 나눠주고, 생계를 돕는다는 충족감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욕심도 안내고 그저 글로써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며 주변사람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지역에서 무관심에 방치된 벼랑에 선 지역사람들을 돕는 작가는 사람들이 책을 사고 읽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 계속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줄 수 있을지 답답한 마음이 드는군요.
아마 저보다 좀 손위인, 이화경 작가님 또래인 독자라면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같은 단편들에 깔린 회한의 정서를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평균적으로 주어진 수명의 반절 이상을 살아온, 반쯤은 짐승처럼 생존을 위해 발버둥처야 했을 정도로 강퍅했던 시기를 경험했던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너울같은 울림을요.

현해탄에 몸을 던졌던 윤심덕-김우진이 아닌 남겨진 김우진의 아내를 주인공으로한 <노라의 本>, 고려가요 쌍화점의 가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고려 개경의 기생이 주인공인 <앵혈, 꾀꼬리의 피>는 남성작가들의 시선으로 포착하기 힘든 단편 역사소설이고요.

표제작이자 권두작인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가 좀 난해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찾아보니 1922년에 나온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개여울>이란 시의 서두에 나오는 문장으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라는 제목을, 중간에 나오는 문장을 따서 표제작의 제목으로 삼으셨더군요.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는 꽤 많이 살아왔는데 아직도 상당히 남은 중년 이후의 시기를 도무지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살아가야할지 갈피를 못잡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느꼈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PPT 슬라이드 두 장이 등장하는 건 재미있었고, 사자성어 작취미성(昨醉未醒: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아니함)이 영화 <동사서독>에서 '취생몽사(醉生夢死 : 아무 뜻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의 변용같았고요. 하지만, 한국의 중년 남매의 이름으로 '엘제'와 '한스'라는 독일쪽 이름이 함께 등장하니 현실감이 알콜처럼 증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단편 안에서 등장하는 독일의 라푼젤(이 소설 덕분에 독일어로 '들상추'란 뜻이라는 걸 알았네요.)설화와의 연결고리를 제가 찾아내는 재미가 있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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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쪽,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중에서

맞고 사는 게 슬퍼서 가출했다. 세상은 가출한 소년에게 퍽도 다정하게 훈계질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다. 가출한 소녀는 순식간에 발라당 까져서 문란해지고, 소년은 세상의 질서를 생까는 양아치가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가출한 소년소녀들이 얼마나 가족에 매달리는지 모르고들 하는 소리였다. 오죽하면 가출팸이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지겠냐고. 얘들은 시한폭탄같은 핏줄들이 있는 씨족공동체 가족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품어주는 다정한 공동체 가족을 꿈꾸었다. 그런 가족은 영화 세트장에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무엇보다 돈 문제가 걸리면, 서로의 등짝을 보일 새도 없이 흩어지곤 했지만.

170쪽,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중에서

온전치 않은 비릿한 합의, 성치 않은 씁쓸한 결론, 돌려받기를 요구하지 않는 어떤 목숨......
시골 전원의 고즈넉한 풍경의 비주얼 뒤엔 늘 어둠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음을 집성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조각조각 부서진 든 자리가 보이는 거센 바람의 보이지 않는 무서움, 저물녘의 술래잡기처럼 숨은 누군가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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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폐교생활백서 세트 - 전2권 폐교생활백서
로서하 지음 / 드루이드아일랜드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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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의 유명한 식물 블로거이자 네이버까페 <모초진>(모두가 초록에 진심)의 운영자이신 '프로개'님과 배우자이신 '로서하(김주희)' 작가님께서 함께 쓰신, 5년 동안의 경북 안동시의 폐교 임대 생활 경험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운동장과 뒷산까지 약 1만 2천평의 부지와 470평의 2층 건물을 빌려쓰는 대부료가 1년에 800만 원씩이니 엄청 저렴한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폐교가 되고 나서 10년 동안 방치된 이 거대한 건물과 부지를 사용료까지 내가면서 유지관리하는 업무를 떠맡은 거라고 볼 수도 있지요.
프로개님의 책 <드루이드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는 발코니 공간도 누릴 수 없는 한국의 공동주택 공간에서 식물을 키우는 이들을 위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로개님은 이런 실내공간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들의 한계와 어찌보면서 자신의 섬세한 노력들조차 그저 최대한 죽지 않고 버티게 도와주며 식물의 숨이 붙어있는 시간을 늘이는 것 뿐이 아닌가 하는 무력감에 번아웃이 오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남편을 위해 아내 로서하 작가님은 1년의 안식년(+1천만 원의 용돈까지!)을 선물해주신다고 하셨고, 이 선물이 불씨가 되어 <모두의 pH>라는 연구실험 프로젝트를 위해 프로개님과 로서하님이 육지의 오지에서도 섬처럼 외딴 곳인 폐교생활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요.
두 권으로 이루어진 <폐교생활백서>의 1권은 프로개님이 쓰셨고, '아주 많이 부족한 희망찬 하루'라는 부제입니다. 저는 세세한 내용들을 프로개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보다 풍부하고 생생하게 읽은 후였지만, 프로개님과 이 폐교생활 시도를 알지 못했던 분들에게 간결하게 소개해주기에 딱 알맞은 내용이었습니다. 원래 영상 전공으로 단편영화도 찍으셨던 분이라 책에 등장하는 사진들과 시나리오같은 글솜씨도 일품이고요.
2권은 폐교생활의 동반자였던 배우자 로서하 작가님이 쓰신 에세이인데, 시골생활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도시 여성이 외진 시골 폐교에서 5년 동안 도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면서 느낀 점들을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서술해주셨습니다.
프로개님과 로서하님은 이번 주말 사흘 동안의 모초진 회원 폐교초대행사를 통해 그간 키워오신 수천 개의 화분들을 대부분 나눔하신듯 싶고, 이제 폐교 생활을 정리하시고 보다 작은 규모이고, 모르는 사람들이 불쑥 찾아올 걱정을 내려놓고 지낼 수 있는 아늑한 공간으로 이사하실 것 같습니다.
(아마 식물들을 충분히 키울 수 있는 단독주택이면서 좀 더 따뜻한 곳이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프로개님을 알기 전부터 농막을 준비했고, 아파트에서 살면서 차로 30분이 안걸리는 거리의 190평 밭에서 텃밭을 가꾸고, 유실수들을 심고, 닭들을 키우고 있어서 어찌보면 이 두 분의 폐교 프로젝트의 미니멀한 버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의 에세이 속 문장과 사진들에서 생략한 어려움과 마음의 상처들이 짐작이 되고, 좋았던 경험들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경제적 효율성으로 치환되지 않는 삶의 경험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요.
이런 시도가 들판에 피어난 서양민들레처럼(정원사나 농부에겐 악몽이지만) 소멸해가는 전국의 시골 곳곳으로 번져나가면 좋겠고, 국회나 지방정부, 공무원들 역시 도시가 가지지 못한 시골의 강점인 '넓은 나만의 공간'을 어떻게 도시인들에게 어필해서 유혹할지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네요. 시골은 '시간을 내어 가만히 바라보는 여유'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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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많이 부족한 희망찬 하루> - 프로개
42쪽
모든 건 '가드닝 식물들은 어떤 pH의 흙에서 잘 자랄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어요. 그걸 알아보려면 비를 맞지 않는 장소에서 다양한 흙으로 식물을 키워보는 수밖에 없었죠.
204쪽
경악의 첫해, 감탄스러운 두 번째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삼 년 차가 되자 폐교에도 더는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상이 되어버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어두운 숲을 지나는 방법> - 로서하
29쪽
폐교에서의 생활은 내내 그랬던 것 같아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막연하게 좋을 것 같았던 부분은 훨씬 더 좋고,
막연하게 불편할 것 같았던 부분 역시 훨씬 더 불편했습니다.
151쪽
시간을 내어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나든.
192쪽
자신을 살펴주세요. 가능한 한 다정하게.
이기적인 마음이 넘쳐나는 세상에 친절과 다정함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되었나요. 다정함과 친절을 긁어모아 나를 위해 쓰는 거예요.
그렇게 내 안의 다정함이 조금 더 자라나 충분해졌을 때 다른 이에게도 그 다정함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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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폐교생활백서 세트 - 전2권 폐교생활백서
로서하 지음 / 드루이드아일랜드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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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개님과 로서하님이 5년 동안 안동의 외진 곳에 위치한 폐교에서 5년 동안 수천의 식물, 그리고 사방신 동물들과 함께 거주하신을 경험을 이렇게 두 권의 에세이로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90%의 한국인이 도시에 살고 50%의 한국인이 아파트(다세대/다가구를 빼고도요.)에 거주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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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도둑 - 예술, 범죄,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위험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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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한 작가가 사건을 겪은 인물과 충분한 시간을 통해 공감을 얻고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재구성한 빼어난 르포르타주 작품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도 있고요.

빈티지 가구나 소품같은 공예품들이긴 하지만, 저도 길게는 100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들을 일상에서 직접 보고, 만지는 경험을 할 때 얻는 만족감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이 때로는 예술품들을 표백해둔 채 수용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기에 브라이트비저와 그를 이해해주려 했던 주변사람들의 마음에도 어느 정도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고요.

아름다운 물건들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야 자연스럽지만 공공을 위해 전시된 작품들을 훔치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이후에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작품과의 거리를 얼마나 더 넓히는지, 주위에 반사회적인 행동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변질된 수집벽을 스스로 그만두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간접적으로 배웠고요.

왜 간송 전형필 선생이나 이건희 회장같은 유수의 컬렉터들이 자신이 소유한 작품들을 대중을 위해 공개했는지도요. 더 없이 사랑하기에 그 가치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놓아준 소장자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게, 예술품 도둑이라는 걸 이 <예술도둑>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예술도둑의 수법들이 자세히 나오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예술도둑이 되겠다는 마음을 버릴 겁니다. 산 마르코 광장의 네 마리 말 조각상처럼 이리저리 떠돌더라도 어디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있는 것과 숨겨진 장물로 보관된 상태를 비교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변호인들의 변호전략도 상당히 좋았다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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