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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스탈린 - 강철 인간의 태동, 운명의 서막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김병화 옮김 / 시공사 / 2015년 8월
평점 :
급작스럽게 찾아온 초겨울 추위덕분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의 <젊은 스탈린>을 완독했습니다. 색인까지 다하면 7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분량인데 좁은 시장에서 이렇게 정성들여 번역해주신 김병화님 그리고 시공사에 감사하며 읽었습니다. 임명묵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책이 있는 것도 몰랐겠지요.
스탈린이 어떻게 볼셰비키 혁명에 기여했는지, 권력을 잡게된 과정이 어땠는지도 전혀 몰랐고 독소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세운 인명들과 대숙청, 소수민족 이주 정책, 한국전쟁 지원 결정 정도밖에 몰랐는데 이 책덕분에 그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왔던 사람인지 좀 알 수 있었습니다. 션판의 <홍위병>처럼 약간 딴 세상 이야기 같아서 역사소설이나 무협소설같은 느낌으로 읽다보니 잘 읽히긴 하더군요. 게다가 툭하면 각주에서 “~~에 대한 내용을 에필로그를 확인하기 바란다.”하는 식으로 저자가 수시로 떡밥을 던져두니. ㅎㅎ
대학원 수업 때 외교관 출신이셔서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셨던 모교수님께서 조지아(옛 그루지야)의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들을 이야기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남아공 대사도 지내셨던 분께서 은퇴 후에 조지아에서 컨테이너 단위로 와인을 수입하려고 진지하게 알아보셨을 정도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더 가보고 싶어졌네요.
그리고 대니얼 예긴의 <황금의 샘> 1권에서 아주 옛날부터 역청이 들끓던 바쿠 유전, 거기로 몰려든 노벨 일가와 로스차일드가(로쉴드가 프랑스에 정착한 로스차일드인지 처음 알았네요. 샤또 무통 로쉴드가 로스차일드의 와이너리였다니..)와 로열 더치 쉘의 영업에 심대한 훼방꾼이었던 노동운동가 스탈린에 대해 언급하고 지나갔었지요. 그런데 석유를 캐러 몰려든 그들이 유전설비를 세우고 바쿠~바툼 철도를 건설해서 만든 사회분위기가 있었기에 조지아에 볼셰비키가 의미있는 세력으로 커나갈 수 있었고, 스탈린이 출현할 수 있었으니까요. 스탈린이 스탈린그라드를 악착같이 지킨 덕에 독일이 바쿠 유전을 뺏지 못해서 패망한 것까지.
스탈린과 볼셰비키 혁명 동지들의 여성 편력들은 제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더군요. 얼굴도 잘 생긴 편이고 시를 읊고 노래도 그렇게 잘 불렀다지만 와룡강 무협소설 주인공들을 찜쪄먹는 수준이라니. 허허허... 마찬가지로 강인한 인간이지만 스탈린과 대척점에 있다고 보이는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떠오르더군요.
런던의 역사학자인 저자가 <젊은 스탈린>을 쓰면서 인용한 1차자료와 1차자료의 방대함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2008년 남오세티아전쟁으로 CI S에서 탈퇴한 조지아가 저자에게 자국 문서고의 기밀서류들을 공개한 덕분에 내용이 더욱 풍성해진 듯 합니다. 시베리아 북극권에서 스탈린의 체류경험에 대해서 인류학자의 자문까지 받아가며 잘 묘사했는데 강철의 독재자가 마지막으로 단조된 시기가 아닌가 싶더군요. (그 전까지의 유배형들은 이게 형집행인가 싶더군요. 조선시대 유형이나 위리안치보다 널럴하니 원)
우리나라도 90년대 이후 구한말과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풍부하게 이뤄진 것으로 아는데 누가 <젊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런 두툼한 책 한권 펴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그런 책이 이미 나와있다면 추천 부탁드릴께요.
우크라이나 남부의 제철소 소유자의 딸인 루드밀라 스탈은 소소보다 여섯 살 위였고, 감옥에도 이미 여러 번 다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파리로 망명을 떠났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좀 더 젊었던 스탈린에게는 그 영향이 좀 있었다. 뒤에 스탈린이 레닌을 만나러 외국에 나갔을 때, 레닌과 가까이에서 일하던 루드밀라와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친분을 보여주는 증거로 남은 것은 전혀 없다. 오직 평생에 걸친 놀라운 유물 하나, 스탈린이라는 그의 유명한 이름만 남았다.
스탈린은 아들을 포기했지만, 투루한스크는 어떤 면에서든 그를 더 러시아인으로 만들었다. 아마 시베리아가 그에게 있던 그루지야식 이국적 특성을 얼려서 없애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베리아 사냥꾼들의 특성인 자립성, 경계심, 고독을 크렘린으로 가져갔다. 스탈린 원수가 1947년에 쿠레이카에서 함께 낚시하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말은 진실이었다. “난 당신과 투루한스크에서 만난 내 친구들을 잊지 않았소. 아마 난 당신들을 절대 잊지 않을 거요.” 몰로토프의 말이 그 점을 가장 잘 표현했다. “시베리아의 작은 조각이 스탈린의 여생 동안 그 속에 박혀 있었다.”
스탈린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는 절대 아니었다. 두뇌, 확신, 지적 집중, 정치적 재능, 폭력에 대한 믿음과 경험, 까다로움, 보복심, 매력, 감수성, 무자비함, 감정이입 능력의 결여 등, 그라는 인간의 전적으로 괴상한 특이성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지만 활약할 무대가 없었다. 1917년 그는 무대를 발견했다.
역사상 다른 어떤 시대에도 그는 권좌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 인간성과 그 순간이 동시에 존재해야 했다. 그루지야인으로서 러시아를 지배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선다는 일어나기 힘든 일은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적 성격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그의 독재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포위된 상황에 의해, 유사종교적인 그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광신주의에 의해, 무자비한 볼셰비키적 남성성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의 살육 정신에 의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레닌의 살인적인 비전에 의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