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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을 배우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상이나 문화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어려운 단테 신곡을 시작하기 전에 호메로스부터 꺼내놓는다.
이는 단테를 배우고 읽어 그 내용만 익히는 게 아니라 그 창조정신까지 배워야 한다는 그의 말을 대변하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를 기점으로 서사시가 나왔고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에 닿아 있으니
당연히 호메로스를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일리야스'와 '오디세이아'는 각각 24권이나 되는데 낭송으로 전해졌던 그것을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안 들 수가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전부 읊으려면 삼 일가량 걸린다는 이 시들이 암기를 통해 전해졌다는 사실을 일례를 들어 설명하며 각각 다른 사람에게 받아 적은 그것들이 일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사시가 나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서사시를 창조한 베리길리우스가 호메로스를 존경해 그것을 모방해 만든 것이 서사시이고
이는 가벼이 지나갈 일이 아니다. 모방이라고 하지만 호메로스가 순수한 구송언어예술이었 데 반해 베르길리우스는 라틴어로 쓴 기록 문학이라는 점이 다르다.
로마가 늑대가 키운 불쌍한 고아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예인 야만인이 아님을 바랐으므로 로마의 민족의식과 같은 것을 '아이네이스'라는 시로 창작해 냈는데 그것은 그들의 새로운 신화나 다름없었다.
아이네이스의 내용 중에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졌다가 어머니 베누스(비너스)의 충고로 다시 나라를 위해 그녀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 있는데, 보통의 흠잡을 데 없는 신화와는 달리 아이네이스에서는 영웅에게도 그런 오점이 있다는 비애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애인을 잃고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디도의 모습과 그녀의 울부짖음,
그리고 칼에 찔린 가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아래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술렁이는데 이것이 바로 베르길리우스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며, 여기에는 음악적인 것과 회화적 이미지, 연극적인 것이 모두 종합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단테가 배우고자 했던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말도 덧붙인다.
88쪽부터 나오는 로마의 정세, 성서의 성립이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교를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나 같은 비 종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고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알 수 있는 좋은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페이지 되지 않으니 꼭 다시 한번 읽어 볼 만한 것들이다.
기나긴 지옥편 강의가 시작된다.
지옥의 구조.
한 통으로 된 것이 아니고 층으로 구성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죄인과 가장 위에 있는 죄인을 구별한다. 저자는 여기서 말의 구조, 다의성 있는 말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해석에 대해서는 '의미의 부여'가 아니라 '의미의 발견'이라고 강조한다.
의미가 깊어지는 방향성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의미의 발견'이라고 한다.
어쩌면 지옥을 구별해 놓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 의미를 근거 있는 상상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생경할지도 모르는 연옥편 강의.
지옥은 가면 갈수록 깊어지고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한편 연옥에서는 산을 오른다. 지옥과는 반대되는 경사이다. 그리고 오를수록 편해진다.
현세에 사는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일이 쉬워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옥은 노력하면 그 효과가 나타나는 곳임을 의미한다.
문제는 어느 쪽이 원형이고 어느 쪽이 모형인가에 있다.
그림자가 살아 있던 사람의 모형인 한에서는 현세가 원형이고 연옥은 모형이다.
그러나 정확성이 원형이라고 한다면, 단계에 따라 덕이 보상받는 연옥이 원형이고 현세는 실체적이더라도 모형이다.
구쪼는 예술이 현실의 모방이라는 고전적 사고에 대해,
현대에는 예술이 원형이며 현실은 예술을 모방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단테의 연옥은 이런 전환의 기점일까.
이와 같은 설명을 읽고 나니 '연옥'은 천국과 지옥만이 친숙한 우리 무지렁이들에게
전환의 기점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겠다.
천국편. 천국을 소재로 하면 늘 나오게 마련인 무조건 풍요 평안일 단순한 상상으로만 쓴 것이 아니고,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둔 천계의 규칙, 구조 또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구조를 따르고 있단다.
구조는 자연과학, 내용은 신학과 철학이라고 하면 쉽겠다.
천국편 속에 있는 시 중 하나.
자신의 소망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지성은 깊은 구렁에 이르니
기억이 그곳까지 미치지 못함이다.
다음은 이마미치가 마에노소노라는 청강자의 질문에 답한 내용인데,
천국에 관해 제대로 설명된 부분이란 느낌이 들어 옮긴다.
천국편에서는 제7곡에서 보듯이 교의상의 문제를 쓰고 있습니다.
신학자 단테, 철학자 단테가 생각한 것을 베아트리체가 말하고, 신학자가 아닌 베아트리체가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은 어려운 문제는 성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두 가지 학문, 즉 자연과학적인 구조에 따른 세계상과 당시의 신학,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따른 교의가 논해집니다. 그리고 그 밖에 베아트리체와 만나 그와 함께 그 세계를 걷는다는, 단테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묘사가 있습니다. 이는 아폴론적인 것, 즉 종교의 예언과 미네르바의 지식인 과학, 그리고 무사의 예술을 통합한 것, 다시 말해서 정신의 총합을 다시금 신의 계시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History의 뿌리가 된 라틴어 Historia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발자취를 따라 대상을 쫓아가다'라는 의미가 있다는데 사냥 용어로 쓰인 동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발자취를 보고 동물이 도망친 방향을 안다'는 것이며
그것과 동일선상의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 역사적 해석 방법이었다고 한다.
역사를 얘기하기 위해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에 거점을 둬야 하는 것은 존재의 이유를 모르는 우리에겐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이와는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하늘의 신과 연결 짓는 사고방식은 극히 단순히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전쟁이라는 사실을 신의 백성과 신을 믿지 않는 백성의 다툼으로, 즉 종교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단테는 그에 따라 역사를 종교 교리로 설명하려 시도한 것이다. 단, 티투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싱글톤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 오로시우스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역사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은 헤겔이라고 한다. 헤겔은 변증법으로 역사를 설명했다. 이를 사회의 계급제도나 생산수단에 적용시켜 설명한 것이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이다. 이처럼 역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다양하게 있지만,
단테가 시도했던 것은 역사를 '하늘 세계'와 연관 지어 설명하고자 하는, 즉 종교의 교리로 역사를 설명하는 입장이다.
베아트리체는 로마 황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은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온 종교적인 이념에 따른 내력이 깊은 일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설명을 통해 신을 원리로 하는 그리스도교적 사관을 배우게 된다.
천국편 제7곡의 주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다.
문학, 그것도 시로 신학을 논하는 예는 드문데, 단테가 과감하게 그런 시도를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지옥편. 연옥편을 통해 그렸던 죄들은 모두 개인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죄악이었다. 그런데 죄는 과연 그것뿐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여기에서 원죄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같은 이중 구조적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해방자로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해야 하는 의미를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테는 서사시의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했던 민족 영웅을 대신해, 이 세상의 망명자 단테 자신을 매개로 삼아 이 세상의 사형수 예수, 즉 인류의 구세주에 의해 인류에게 열린 천국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이마미치는 말하고 있다.
천국편에서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질문이 세 가지 나온다.
제8천 항성천에 오른 단테에게 베드로가 묻는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단테는 '바라는 것의 실체/ 아직 오지 않은 것의 확증입니다'라고 말한다.
제25곡에서는 사도 성 야고보가 묻는다.
'소망이란 무엇인가' 단테는,
'소망은 미래의 영광을 확고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 은총과 공덕이 낳은 것입니다'라고 한다.
제26곡에서 요한은 묻는다. '사랑이 무엇이냐'
이에 단테는 '선이 선으로 이해되면 이내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선이 클수록 사랑도 큽니다'라고 한다.
이 대답들은 모두 그의 스콜라 철학 교양의 깊이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마미치에 따르면 천국편은 고요히 잠든 곳이 아니고 희망이 솟아나는 곳이라고 한다.
뱃머리와 고물이 뒤바뀔 만큼, 함대가 방향을 뒤바꿀 만큼 거대한 폭풍이 오면 그거야말로 좋은 기회라고 여긴다는 게 천국편에서 언급된 이야기라고 한다. 그곳은 곧 완성이 아닌 또 다른 시도, 희망을 향한 시도인지도 모르겠다.
학교 형식의 공부가 아닌 문답을 통한 지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이 수준 높고 지적인 '환희는 영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장 희망적인 것이라 여기는 내 교육관과도 일치한다.
다음은 오탈자로 의심되는 것.
93쪽 1줄: 사라지지 -> 사라지기
153쪽 밑에서10줄: 잘 된 -> 잘된
257쪽 끝줄: 다음날 -> 다음 날
326쪽 7줄: 제사장로서 -> 제사장으로서
384쪽 11줄: 검정색 -> 검은색 또는 검정
589쪽 밑에서3줄: 잘 된다는 -> 잘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