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8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혼불8권은 강모의 역사 선생 심진학과 함께 역사 이야기가 꽤 등장하는데,
저자는 이를 위해 남원이라는 장소를 기준으로 역사라는 시간을 향해 파고들기 시작한다.
능주 이야기에서는 조선 중종시절 정암 조광조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데,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참 재미나다.


강호의 말대로

어리석다. 한 나라를 이끌어 올릴 지렛대를 그 하찮은 꿀 몇 점으로 징표 삼아 부러뜨려
죽이다니, 참으로 군자의 취할 바가 아니었다.

결국 조광조는
오십 년이 지난 선조 시절 다시 사후지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82쪽부터 106쪽까지 이어지는 심진학 선생이 말하는 후백제부터 고려의 건국까지는
언제든 필요할 때 읽어보면 좋겠다.

 

128쪽, 심진학이 말하는 역사.


나로부터 엮어보는 역사.
역사의 현장을 교과서에서 찾지 말라.
바로 나 자신에게서 역사를 찾으라.
내가 없는 역사를 무엇에 쓸 것이냐.
까마득한 조선의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몇 천 년을 편년체로 지루하게 엮어 내려오는 역사는,
나한테까지 당도하기도 전에 기진맥진 지치고, 외우기 너무 멀어 오다가 길을 잃어버린다.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누구인가."
정말 궁금하여 아버지, 아버지가 살던 땅,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 증조부, 고조부,
선세 옷깃을 찾아 오르고 오르면서 드디어 단군 할아버지에 도달하는 길은 절실하고도 구체적이다.
내가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129쪽부터 183쪽까지 나오는 역사에 잘못 쓰여진 백제의 현실과 의자왕에 대한 것.

그리고 161쪽에 삼국유사, 경애왕, 포석정 사건에 대한 오류의 지적은 매우 쓸모 있는 내용이다.

 

280쪽 윷놀이 이야기.


"돼지는 뚱뚱하고 게을러서 한 걸음에 한 밭만 가고, 개는 돼지보다 몸은 작지만 날쌔고
빠르므로 두 밭을 가고, 노새는 개보다 체구도 크고 잘 달리는 고로 세 밭을 간다.
또한 소는 비록 걸음은 느리지만 덩치가 클 뿐 아니라 일도 잘하여 네 밭을 한 번에 갈 수 있다.
그리고 말은 일 잘하고 기운 차고 적토마 천리마로 비호 비룡 견주오니 한꺼번에 다섯 밭을
신나게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윷을 던질 때는 모 나오라고 모야아 소리를 지르잖느냐?
윷 나오고 모 나오면, 어렵고 좋은 것을 얻었대서 헌 번 더 놀 수 있는 게야."


다음은 찾아 본 단어들

 

느껍다[느껍따]
[형용사] 어떤 느낌이 마음에 북받쳐서 벅차다.

 

당그래 [명사] [방언]
'고무래(곡식을 그러모으고 펴거나, 밭의 흙을 고르거나 아궁이의 재를 긁어모으는 데에
쓰는 ‘丁’ 자 모양의 기구)’의 방언(경남, 전남, 충남).

 

황감 (惶感)
[명사] 황송하고 감격스러움.

 

다냥-하다
[형용사]
‘당양하다(當陽―)(햇볕이 잘 들어 밝고 따뜻하다)’의 잘못.

 

하냥
[부사] [방언]
1.‘늘(계속하여 언제나)’의 방언(전북, 충청, 평북).
2.‘함께(한꺼번에 같이)’의 방언(전북, 충청).

 

자욱히
[부사] [북한어]
1.‘자욱이’의 북한어.
2.우뚝우뚝 솟은 것이 가득하게.

 

비웃적대다[비욷쩍때다]
[동사] [같은 말] 비웃적거리다(남을 비웃는 태도로 자꾸 빈정거리다).

 

개개다
[동사]
1.자꾸 맞닿아 마찰이 일어나면서 표면이 닳거나 해어지거나 벗어지거나 하다.
2.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다.

 

마치맞다
[형용사] [방언] ‘마침맞다(어떤 경우나 기회에 꼭 알맞다)’의 방언(경북, 전남).

 

담숙-하다[발음 : 담수카다]
원형 : 담숙
[형용사] 포근하고 폭신하다.

 

발견된 오탈자

 

33쪽 8줄과 34쪽 6줄, 48쪽 밑에서7줄, 50쪽 밑에서8줄, 77쪽 밑에서3줄, 82쪽 4줄,
86쪽 8줄, 121쪽 밑에서8줄, 125쪽 3줄, 141쪽 2줄, 172쪽 10줄, 198쪽 밑에서6줄,
199쪽 7줄, 278쪽 7줄,   : 그리고는 -> 그러고는
57쪽 밑에서6줄: 여보란 듯이 -> 여봐란듯이
106쪽 3줄과 150쪽 밑에서5줄, 191쪽 밑에서6줄: 또 다시 -> 또다시
106쪽 끝줄: 일으키면. -> 일으키면,
113쪽 밑에서9줄: 앙징맞고 -> 앙증맞고
113쪽 밑에서7줄: 다냥한 -> 당양한
117쪽 밑에서2줄: 노랑색 -> 노랑 또는 노란색
125쪽 4줄: 머물어 -> 머물러
152쪽 밑에서7줄: 기나 긴 -> 기나긴
205쪽 6줄: 놋재떨이 같이 -> 놋대떨이같이
208쪽 밑에서8줄: 텐데. -> 텐데,
219쪽 7줄: 휘둥그래 -> 휘둥그레
223쪽 밑에서9줄: 야차들 같이 -> 야차들같이
230쪽 9줄: 아니예요 -> 아니에요
241쪽 1줄: 무동 -> 무등(방언) 또는 목말
311쪽 밑에서5줄: 나랑같이 -> 나랑 같이
319쪽 8줄: 자랑 하느라고 -> 자랑하느라고
319쪽 밑에서2줄: 출도할까 -> 출두할까
320쪽 8줄: 금시계줄 -> 금 시곗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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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혼불7권은 오류골댁이 떠올리는 청암부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물론 그것은 강실이의 인연에 관한 것을 끌어 내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강실이의 인연을 언젠가는 보여줄 것인지,
물에 빠져 죽기 위해 머리를 풀고 있는 강실이를 안서방네가 업고 온다.
그런 안서방네와 강실이를 보고 기응을 채근하기 시작하는 기표.
이와 함께 맞물려서 효원이는 찢어지는 가슴을 진정할 여유커녕,
강실이 일을 막음하려고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다, 순전히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강실이와 몸을 섞고 온 날 밤 효원까지 안고 떠나버린 강모와,
그런 강실에게서 양반 씨를 심겠다고 실오라기보다 약한 그녀 몸 속으로 들어가 버린 춘복이와,
누구의 씨를 받은 건지 아직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강실이를 끌어 안아 주려는 효원.
거기다 하지도 않은 투장을 했다고 누명을 받고 덕석말이를 당하는 춘복이 하며.
이 무슨..

 

계속 조용하던 강모는 청암부인의 소식을 늦게 전해 듣고 온 강호의 입을 통해
매안 사람들의 귀에 드디어 전해진다.
노련하고 대단한 사모님 효원, 당당하게 강호를 불러 강모의 일을 묻는다.
'오유끼도 함께 갔습니까!'
아, 저 여자 효원, 여자라고 부르기 어려운 존재다.

그리고,

투장의 진범이 잡혔지만 추주검이 된 춘복이네로 드디어 대놓고 들어앉는 옹구네.

 

다음은 찾아 본 단어들

 

'거둠거리다'를 찾아 보았으나 없었고,

거둠거둠
[부사] 손으로 여러 번 거두어 쥐는 모양.

 

사특하다 (邪慝--)[사트카다]
[형용사] 요사스럽고 간특하다.

 

또아리
[명사]

1.갈큇발의 다른 끝을 모아 휘감아 잡아맨 부분.
2.‘똬리’의 잘못.
3.[북한어]‘똬리’의 북한어.

 

느껍다[느껍따]
[형용사] 어떤 느낌이 마음에 북받쳐서 벅차다.

 

애먼[애ː먼]
[관형사]

1.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억울하게 느껴지는.
2.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엉뚱하게 느껴지는.

 

수북히
[부사] [옛말] ‘수북이’의 옛말.

 

괴춤[괴ː춤/궤ː춤]
[명사] ‘고의춤(고의나 바지의 허리를 접어서 여민 사이)’의 준말.
유의어 : 허리춤

 

설렁줄[설렁쭐]
[명사] 설렁을 울릴 때 잡아당기는 줄.

 

설렁
[명사] 처마 끝 같은 곳에 달아 놓아 사람을 부를 때 줄을 잡아당기면 소리를 내는 방울.

 

저저끔
[부사] [방언]
1 . 제가끔’의 방언(전남).

 

고누
[명사] <민속> 땅이나 종이 위에 말밭을 그려 놓고 두 편으로 나누어 말을 많이 따거나
말 길을 막는 것을 다투는 놀이. 우물고누, 네밭고누, 육밭고누, 열두밭고누 따위가 있다.

 

옴쏙옴쏙
[부사] 작은 것을 입에 넣고 자꾸 맛있게 씹는 모양.

 

물외1[무뢰/무뤠]
[명사] <식물> ‘참외’에 대하여 ‘오이’를 구별하여 이르는 말.

 

모산지배 (謀算之輩)
[명사] 꾀를 내어 이해타산을 일삼는 무리.

 

무람없다[무라멉따]
[형용사] 예의를 지키지 않으며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다.

 

옹통지다
[형용사] [방언] ‘다부지다’의 방언(전남).

 

발견된 오탈자

 

32쪽 2줄과 65쪽 밑에서9줄, 66쪽 2줄, 67쪽 밑에서11줄, 119쪽 9줄, 161쪽 7줄, 162쪽 밑에서3줄,
183쪽 1줄, 209쪽 밑에서5줄, 212쪽 7줄, 218쪽 1줄, 238쪽 밑에서5줄,  : 그리고는 -> 그러고는


44쪽 6줄: 애기 -> 아기
50쪽 9줄: 앙징스럽던 -> 앙증스럽던
58쪽 5줄: 애민소리 -> 애먼 소리
66쪽 밑에서7줄: 종이 찟듯 -> 종이 찢듯
67쪽 4줄과 123쪽 9줄: 혼자말 -> 혼잣말
70쪽 4줄: 안헌다 -> 안 헌다
118쪽 5줄: 초죽음 -> 초주검
143쪽 밑에서2줄: 산산히 -> 산산이
146쪽 1줄: 앙징스러운 -> 앙증스러운
194쪽 밑에서9줄과 195쪽 7줄과 밑에서7줄: 단오날 -> 단옷날
289쪽 밑에서8줄: 떳떳치 -> 떳떳지
294쪽 10줄: 삼가한 -> 삼간
300쪽 8줄: 밧어른 -> 아버지로 쓰고자 한 것이라면 없는 단어로 나오지만 '밭어른'이 맞다
319쪽 밑에서3줄: 새암 ->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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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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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독서일기에서 독후감을 읽고 고른 책.
6장에 걸친 긴 글인 이 작품은 정조 시절 패관소품 유행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대한 연구에
관한 것인데, 저자는 그와 관련한 연구에 강이천이라는 생소한 선비를 비중 있게 다룬다.
반복이 너무 심하고, 질질 끄는 부분이 커서 조금 줄였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됐을 것이란 것말고
다 좋았다.
책이 워낙 뒤죽박죽이라 정리한 종이의 내용을 적다 보니 깔끔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내용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볼지는 알 수 없지만 각 사건이나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내용이해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멋진 글을 쓰자는 생각은 없지만 어찌 됐든 정리해 놓고도 조금 찜찜한 독후감이다. 

 

1장.

 

<강이천의 유언비어 사건>또는 <해랑적 사건>이라 부르는 강이천 사건과 관련이 깊은
저자의 연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정조,
그는 정조가 당시의 커다란 변화를 감지하고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보수적 개혁을 펼쳤는데,
이는 최소한의 변화를 용납하는 것이었고, 문예에선 정약용을,

그림에선 김홍도를 적극 활용했단다.

강이천 사건을 다루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정감록.
정감록은 최초의 최후심판 기록서인데, 천주교와 정감록의 두 문화가 상호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고, 가설을 깊이 있게 다룰 것이라고 예고한다.
정감록과 천주교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18세기 후반에는 정감록 소문화 집단이 천주교에
호감을 가졌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2장.

 

2장에서는,
강이천이 뛰어난 선비였음을 여러 시험의 결과를 들어 증명하는데
결국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가 좌시(애꾸)에 다리가 불편해서였다고.
그리고 강이천 사건에 대해 죄인들의 심문현장 기록을 들어 설명하는데,
강이천은 김건순과 김신국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사기를 친 것이라고 진술한다.
저자는 형조가 죄인 강이천과 공모하여 사건의 본질을 흐려 놓았다고 말한다.

 

3장.

 

진술에서는 부인했지만,
강이천을 기준으로 그들은 지하에서 암약했다는 혐의가 있었고,
그것도 '서방성인'을 추앙하는 비밀집단으로서
정점에 천주교 신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다.

 

3장에서 다룬 또 하나의 이야기 '문체 반정'을 왜 했는가?

 

1) 탕평을 위한 정치적 도구
-> 특정 정파를 억누르기보다 미래의 집권층인 젊은 세대를 상대로 한 문화 투쟁.
2) 나라 망할 징조의 제거
-> 슬픈 아픔을 표현하거나 나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문체와 글의 금지를 위해.
3) 정조의 보수 반동
-> 도를 표현하는 것만이 순정한 문학이라 생각하는 정조의 반응.

 

문체반정과 천주교 탄압에 대하여.


겉으로 보기에 정조는 천주교의 확산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자신의 성격답게 조용히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은밀히 측근을 보내
천주교도들을 탄압했다고 하는데, 그중에는 박지원의 활약이 컸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 박지원은 그들을 말로써 설득해 눈물까지 흘리고 그만 두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가 보수였건 일자리 때문에 정조의 말을 잘 들었건 상관없이

역시 박지원 멋쟁이~!

 

4장.

 

신유박해와 함께 다시 떠오른 강이천 사건

사건을 중간에서 교묘하게 가로막던 정조가 죽자 다시 사건을 재조사하자는 의견이 커졌고,
어린 순조는 이를 받아들인다. 여기서는 정조가 어떻게 강이천 사건을 덮었는지가 나오는데
먼저 김달순과의 사이에 정치적 뒷거래가 있었다고 예고한다.
정리해 보면, 김정국이 사촌 동생 신국에게 강이천의 '요언'을 듣고 그 말을 전하려
궁에 남아 있던 이병모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정조는 김달순에게 먼저 내용을 알아 보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강이천이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방현아의 주장

 

강이천이 천주교인이었다든가 사건의 주동인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역적이었다는 것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
-> 천주교인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들이 있고, 사건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역모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강경훈의 주장

 

시파와 벽파의 가혹한 당쟁의 희생물이었다는 주장.
-> 당쟁이 아니라 그의 위험한 생각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강이천 주변인물들의 최후의 진술

 

272쪽에 나오는 강이천을 처음 고발한 김신국의 취조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도 그는 강이천에게 포섭을 당했다가 곰곰 생각하니 엄청난 일에 끼어든 것 같은 생각에
사촌형 김정국에게 알려 살길을 찾은 것 같다고 추론하고 있다.

286쪽의 이주황의 심문에서는 그동안 나오지 않은 사실이 발견됐다.
이는 조 대장이란 사람(조규진)이 이주황을 불러다 사건을 조사했는데 시기상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후에 이주황을 밀사로 기용해 '해도진인(섬에 사는 어떤 사람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
의 실체를 조사하도록 시켰다는 사실.

 

5장.

 

강이천 사건에 속해 있었던 김건순과 천주교를 연결시키기 위해 저자는
'당시의 천주교'에 대해 분석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원인

 

신자들이 주장하는 말세, 구세주, 재림에 대한 믿음, 더욱이 이방인을 믿음을 벗어난 정신적
지표로 삼는 데 대한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김건순은 어떻게 천주교에 전도되었나

 

아홉 살, 도교를 배우고 10여 세에 [천당지옥론]을 지었다 하니

종교에 지적으로 몰입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바가 없다.

또한 집안이 본래 넉넉했는데 남에게 재물 나눠 주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먹고 입는 것은 가난한 사람과 같았다고 하니 종교인으로서의 태도도 갖춘 셈이라고 본다.
그러니 그런 명성의 사람을 천주교에서 탐내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것.
천주교 박해가 심할 때 김건순은 체포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양반의 위세가 컸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 김건순도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를 살리기 위한 안동 김씨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록'과 '일성록' 등 역사서에는 한 마디도 없지만 '한국 천주교사'에는 상세하다고 함)
주문모 신부의 " 아, 그대도 소국의 소인임을 보이려 하는구려' 하는 말에 자신의 신앙을
과감히 고백했다고 한다. 여기서 주문모는 강이천 사건의 인물들이 믿고 있던 그 해도진인의
진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서양배와 천주교의 관계

 

이양선이 출몰할 때 개항과 관련해 이용된 천주교에 관한 것인데,
선교의 자유를 내세워 침략한 배들 덕에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신교의 자유를 얻었다고.
그렇다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실제로 선박을 요청했는가 하는 문제.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기 전엔 없었던 선박 요청이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 후 일어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저자는 정조21년 9월 프로비던스호가 출현해 천주교 신자인 역관 현계흠이 승선할
기회를 얻은 내용을 들어 주문모 신부와 선박을 굳이 묶으려 하는 주장들에 반대하고,
공식은 아니어도 새로운 세상을 위해 개개의 신자들이 요청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말한다.

 

6장.

 

뒤죽박죽이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물론 연구노트를 기준으로 그대로 책에 적용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알지만,
마지막에 흐름대로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앞의 내용도 더 체계적으로 다른 방법을 써서
보여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는 과연 편집의 문제일까, 저자의 문제일까.

 

다 읽고 나서 구입하겠다고 메모한 책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

 

발견된 오탈자

 

50쪽 밑에서9줄과 74쪽 6줄, 306쪽 5줄: 짐작컨대 -> 짐작건대
123쪽 1줄: 잘 된 -> 잘된
137쪽 2줄: 잘 하면 -> 잘하면
227쪽 1줄: 김건순의 -> 검건순이
257쪽 3줄: 그리고서 -> 그러고서
265쪽 6줄과 270쪽 7줄, 287쪽 8줄: 그리고는 -> 그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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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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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머리는 장정일 작가님이라 부르라 하지만 

난 장정일 아저씨라 부르며 머리에게 언제나 대항한다.
사실 독서일기인 줄 모르고 그저 언제나처럼 장정일 아저씨의 신작이 나왔다기에

무작정 주문했다.
도착한 그것은 그의 여덟 번째 독서일기를 수록한 책.
이건 사족인데 예전에 무인도에 가져갈 것에 대한 이야기가 흔했던 시절이 있었다.
솔직히 결코 그따위 것은 생각해 본 일 없지만 오늘 갑자기 혹시나 무인도 또는

그 외의 어떤 곳에 혼자만 갇혀 있어야만 한다면

난 장정일 아저씨의 독서일기 전부를 들고 가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말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면 정일 아저씨가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저씨의 그 어떤 책보다도 독서일기 읽는 일이 즐겁다.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그의 비아냥과 통쾌한 말주변을 볼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정일 아저씨가 촛불집회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다는데,
그 와중에 책을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는 고미숙 작가님.
그런 그녀가 불쑥 내밀어 정일 아저씨에게 줬다는 그녀의 책 [이 영화를 보라].
이런 부분들은 그의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값진 재밋거리. 

 

다음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알게 되는 흥미거리.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래된 선입견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작전이었다')
이나, 최근의 시각 변화 ('그렇지 않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에 입은 미군의 피해는 컸다') 는
미국의 흥망이나 미국의 국제 정치 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준 것은, 엠마뉴엘 토드가 쓴 [제국의 몰락]에 나오는 짧은 주석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도덕적으로 떳떳하면서 제국이고자 하지 않았을 때, 
할리우드 영화 속의 로마는 항상 악으로 묘사됐다. <벤허>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미국이 스스로 제국을 자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로마의 이미지는
<글래디에이터>처럼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똑같이 미국의 군사력이 최강이었을 때 헐리우드 영화가 묘사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지상 최대의 작전>이 묘사한 것처럼 웅장하고 애국적이었으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는 '국가'가 '가족'으로 축소되면서 상륙작전의 처절함은 오히려
더 강조된다. 미국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세계 경찰'의 비극을 묘사하는 게, 
제국(미국)에게 도움이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벌써부터 제국이 자신의 막중한 역할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책을 다 읽고 나니 다음과 같은 책들을 주문하겠다고 메모를 해두었더라.

잠자는 미녀 - 가와바타 야스나리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유니스의 비닐 - 루스 렌들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 크레이그 실버
미나 - 김사과
장 주네와 백민석의 어떤 작품이건
이 영화를 보라 - 고미숙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저항의 인문학 - 에드워드 사이드
탐욕의 시대 - 장 지글러
우정 - 니시베 스스무
황천의 개 - 구지와라 신야
마틴 에덴 - 잭 런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 시오노 나나미
소피의 선택 - 윌리엄 스타이젠

그러고 보니 정일 아저씨 옛날보다 야한 책을 덜 보신다.ㅋㅋㅋ

 

다음은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20쪽 밑에서2줄: 스웨덴 같이 -> 스웨덴같이
21쪽 밑에서8줄: 총량이라는 -> 총량이라고
30쪽 3줄: 조금 밖에 -> 조금밖에
37쪽 밑에서8줄: 어느날 -> 어느 날
41쪽 2줄: 들리는 -> 들르는
45쪽 2줄: 재직하고 -> 재직하고 있는 또는 재직하는
53쪽 밑에서4줄: 한 마디로 -> 한마디로
67쪽 6줄: 보잘 것 없는 -> 보잘것없는
70쪽 끝줄: 열악한데다가 -> 열악한 데다가
75쪽 6줄: 한번 씩 -> 한 번씩
77쪽 밑에서8줄: 쓴바 -> 쓴 바

       밑에서4줄: 기색없이 -> 기색 없이

       밑에서2줄: 알고보면 -> 알고 보면
78쪽 1줄: 한 쪽 -> 한쪽
79쪽 7줄: 되풀이 되는 -> 되풀이되는
80쪽 13줄: 방해 하는 -> 방해하는

       14줄: 열설적인 -> 역설적인
81쪽 밑에서6줄: 오래 전에 -> 오래전에
86쪽 끝줄: 잘 해서 -> 잘해서
88쪽 10줄: 조종하기 -> 조종하기 위해, 어느날 -> 어느 날

       11줄: 탄로 낸다 -> 탄로낸다
90쪽 끝줄: 몸범이되었거나 -> 모범이 되었거나
91쪽 4줄: 한번 -> 한 번
93쪽 2줄: 하루종일 -> 하루 종일

       5줄: 매일밤 -> 매일 밤
95쪽 2줄: 어느면에서는 -> 어느 면에서는
96쪽 10줄: 번번히 -> 번번이

       밑에서7줄: 단적이 -> 단적인

       밑에서4줄: 가르켜 -> 가리켜
97쪽 밑에서5줄: 깨우쳐야 -> 깨쳐야
98쪽 9줄: 그 사이 사이에 -> 그사이 사이에
100쪽 3줄: 이 다음엔 -> 이다음엔
101쪽 6줄: 그 동안 -> 그동안
102쪽 2줄: 곧이 곧대로 -> 곧이곧대로

        8줄: 나오게 -> 나오게 된
117쪽 밑에서5줄: 샅샅히 -> 샅샅이
118쪽 밑에서7줄: 바로 잡으려는 -> 바로잡으려는
121쪽 7줄: 수 천 미터 -> 수천 미터
122쪽 10줄: 잘 한 -> 잘한
123쪽 밑에서7줄: 어느날 -> 어느 날
137쪽 11줄: 여러가기 -> 여러 가지
138쪽 5줄: ;왔다갔다하다가 -> 왔다 갔다 하다가
139쪽 밑에서10줄: 시체를 -> 시체
140쪽 11줄: 네시 -> 네 시
142쪽 14줄: 들린 -> 들른
143쪽 밑에서9줄: 한 밤 동안 -> 한밤 동안

        밑에서3줄: 한 몸 -> 한몸
148쪽 밑에서3줄: 조건이다" 이라고까지 -> 조건이다" 라고까지
149쪽 8줄: 들통 난 -> 들통난
157쪽 7줄: 겉잡을 -> 걷잡을
158쪽 1줄: 요약해 해 본 -> 요약해 본
167쪽 3줄: 불러 일으켰다 -> 불러일으켰다
179족 4줄: 연예이야기 -> 연애이야기

        11줄: 대한 -> 대해
182쪽 1줄: 전쟁놀이와 -> 전쟁놀이를
183쪽 밑에서3줄: 안절부절" 하고 -> 안절부절못하고"
185쪽 11줄: 잠궜다 -> 잠갔다
191쪽 밑에서9줄: 사태로 부터 -> 사태로부터
192쪽 1줄: 얽메일 -> 얽매일
194쪽 4줄: 한 눈에 -> 한눈에
195쪽 밑에서10줄: 볼만하다 -> 볼 만하다
207쪽 5줄: 서슴치 -> 서슴지
209쪽 밑에서3줄: 여섯번째 -> 여섯 번째
211쪽 2줄: 나같은 -> 나 같은
213족 6줄: 인도해야 해야 -> 인도해야
217쪽 5줄: 한 몫 -> 한몫

        밑에서4줄: 것인데다가 -> 것인 데다가
218쪽 13줄: 한 마디도 -> 한마디도
220쪽 밑에서4줄: 오래 전 -> 오래전
226쪽 3줄: 밀어 넣는다 -> 밀어넣는다

         5줄: 다음날 -> 다음 날
228쪽 밑에서8줄: 어리숙한 -> 어수룩한
232쪽 1줄: 털어 놓는다 -> 털어놓는다

        4줄: 읽다보면 -> 읽다 보면

        밑에서5줄: 손 내 밀라는 -> 손 내밀라는
233쪽 5줄: 동일시 하였다 -> 동일시하였다
236쪽 밑에서5줄: 물 값 -> 물값
238쪽 12줄: 녹록치 않게 -> 녹록지 않게
244쪽 5줄: 오늘난 -> 오늘날
245쪽 밑에서6줄: 괴변이다 -> 궤변이다
246쪽 4줄: 일어날리 -> 일어날 리

        끝줄: 떠벌이다 -> 떠벌리다
252쪽 밑에서4줄: 이을 테면 -> 이를테면
254쪽 밑에서6줄: 별 다른 -> 별다른
258쪽 5줄: 더 하자면 -> 더하자면
261쪽 7줄: 다음날 -> 다음 날
262쪽 밑에서8줄: 하는데다가 -> 하는 데다가

        밑에서2줄: 읽어 볼만하다 -> 읽어 볼 만하다
263쪽 밑에서6줄: 아닐테다 -> 아닐 테다

        밑에서2줄: 않은데다가 -> 않은 데다가
264쪽 6줄: 온 몸 -> 온몸
267쪽 밑에서6줄과 268쪽7줄: 다음날 -> 다음 날
268쪽 8줄: 한 입으로 비난 -> 한입으로 비난

        9줄: 치켜 올렸다 -> 추켜올렸다 ('치켜올리다'는 북한말, 우리는 주로 북한말은 표준어로 삼지 않음)
269족 2줄: 상트페테르부크 -> 상트페테르부르크

        4줄: 통털어 -> 통틀어 (통털어도 북한어)

        5줄: 이 때뿐이다 -> 이때뿐이다
270쪽 7줄: 한 마디로 -> 한마디로
272쪽 5줄: 착찹하고 -> 착잡하고
275쪽 8줄과 276쪽 2줄: 어느날 -> 어느 날

        밑에서2줄: 불러 일으켰다 -> 불러일으켰다
276쪽 10줄: 그러다보니 -> 그러다 보니
278쪽 3줄: 기획이 -> 기획의

        4줄: 한 몫 -> 한몫
282쪽 밑에서4줄: 여성이다' 이라는 -> 여성이다' 라는
283쪽 밑에서4줄과 281쪽 제목, 285쪽 밑에서6줄: 궁시렁 -> 구시렁
293쪽 밑에서10줄: 다음날 -> 다음 날

        밑에서5줄: 그 날은 -> 그날은
295쪽 밑에서6줄: 의기투합하면서 부터였다 -> 의기투합하면서부터였다

        끝줄: 두 말할 나위 없이 -> 두말할 나위 없이
300쪽 밑에서6줄: 아니었을런지도-> 아니었을는지도
308쪽 9줄: 열일곱살 -> 열일곱 살
309쪽 2줄: 한계 지워 놓은 -> 한계 지어 놓은
319쪽 밑에서8줄: 번번히 -> 번번이

        끝줄: 몇 십년 -> 몇십 년
322쪽 밑에서11줄: 한 끝이 -> 한끝이
327쪽 7줄: 어이 없이 -> 어이없이
330쪽 11줄: 앞장 선 -> 앞장선
331쪽 밑에서3줄: 미친 개 식은 밥 삼키 듯하다 -> 미친개 식은 밥 삼키듯하다

 

 

위 책에서 목록에 정한 후 구입해서 읽은 책들에 대한 리뷰까지 함께 붙인다.
진정 가치 있는 독서는 다음 책을 정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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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자는 미녀 - 가와바타 야스나리]

 

불알 달린 것들의 상상이란,

끝이 없지.

여자와는 다른 내세울 게 있는 그들의 상상은.

어디든 찌르면 되니까 상상도 끝간 데 없을 수 있는가.

 

좋은 말로 해보자.

남자를 상실한 노인들이 가는 곳.

뭘 먹였는지 어떤 화학약품을 주사했는지 모르는 ,

젊다 못해 어린 것들의 잠든 몸을 곁에 두고 자러 가는 노인들.

 

물론 남성을 상실하지 않은 노인이 우연히 소개 받고 가서

겪은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저물녘에 대해 뭔가를 잘 써냈다고 칭찬인데,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남는 것은 그저 그녀들의 몸태가 어떻게 생겼는가 정도.

그리고 저 불알 달린 것들은 생명을 만들 수 없으면 사고를 만들어 낸다 정도.

 

개인적으로 '설국' 을 읽지 않은 이 작가에게 할 말은,

다음과 같은 초반에 쓴 메모.

 

급하게 읽고 싶지 않은 책이 있다.

이제 겨우 삼십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인데,

좋은 작품을 너무 빨리 읽어 치우는 것은 좋은 차를 음미할 줄 모르고 단숨에 들이키는

무지하고 무감한 행동에 다름아닌 것이다.

천천히 읽으며 한자한자 아로새길 작품이다.

 

다행입니다.

초반에는 좋았다는 것입니다, 작가님.

 

다른 두 단편도 있었지만 와 닿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의 팔을 잘라서 데리고 오면서 대화하는 남자와,

어떻게 해 보고 싶었던 제자 두 명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자신을 찾다 말다

하는 어느 소설가 선생의 이야기.

 

맞춤법이 의심되는 단어가 몇 있지만 다음에.

 

250쪽 밑에서2줄: 삐졌는지도 -> 삐쳤는지도

286쪽 밑에서10줄: 더 없는 행복 -> 더없는 행복

 


2.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공공장소 이를테면 지하철 같은 곳에서 읽으면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흘긋흘긋 쳐다볼 게 뻔한 단어가 있어 시선에 성질을 부릴까 겁나서 나중에 읽은 이 책.

다행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잠자는 미녀' 를 먼저 봤다는 것은,

비슷하다 입에 오를 수도 있을 두 작품 중

개인적으로 더욱 감명 받을 작품을 나중에 보게 됐다는 것이고,

나중에 읽었다면 심각한 욕설과 함께 처음으로 집어 던져짐을 당했을지도 모를 작품을 쓰신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님에게도 죄송할 일이니까.

 

책을 펼치자마자

"고약한 짓은 하나도 할 수 없습니다." 여관 여주인이 노인 에구치에게 경고했다.

"잠자는 여자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도 안 되고, 그와 비슷한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의 집]

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책을 읽고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고 하지만

두 작품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잠자는,,,은 잠자는 여자와 잠만 자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다른 것은 크게 할 수 없는

남성을 상실한 노인들이 가야 할 곳에 남성을 상실하지 않은 에구치가 갔던 것이고,

내 슬픈,,,은 아흔이 됐지만 아직 남성을 상실하지 않은 현직 기자이자 칼럼니스트

노인의 뜻 깊은 생일을 위한 생처녀가 필요해서 이십 년 만에 로사 카바르카스를 찾게 되는 것.

이건 억지일지도 모르지만 에구치는 개인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경험을 우연히 하는 것이고,

아흔 살의 '서글픈 언덕' 은 그저 서글픈 언덕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지만 단지 그 개인만의 이야기로 보기에는 노년을, 비록 아내도 자식도 없지만, 평생을 돈을 주고 창녀에게 안정적이지 않은 사랑을 주고 받은 것뿐이지만 대부분의 노인 남성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표현력과 그림을 선사해 주었다고 나는 감히 생각했다.

마무리 짓자면 에구치는 누구나 비슷비슷하게 지내는,

아이가 장성해 결혼을 하고 이제는 아내와 젊은 시절처럼의 즐거움을 나누지 않게 되는 나이의

노인의 성에 대한 소재 정도라면, 서글픈 언덕은 아내도 자식도 갖지 못한 아흔의 노인이 자신이 아닌 여인 때문에 처음으로 느끼는 사랑에 대한 소재를 넘어서 주제까지도 침범할 수 있는 글이 된다는 것.

아, 뭔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더 이상 생각이 명확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이 생각이

흩어지는 것에 다름아닌 것이란 생각이 들어 여기까지.

 

로사 카바르카스는 줄곧 서글픈 언덕에게 현자양반이라고 칭하지만,

결국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로사 카바르카스거나 나중에 서글픈 언덕의 사랑 얘기를 듣고

누구보다 열띤 응원을 펼쳐주는 창녀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서글픈 억덕의 말대로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한 것" 에 불과하다.

 

지적하기 싫었지만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00쪽 6줄: 깨우치고 -> 깨치고

 

3.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남자들에게]란 제목을 가지고 있어 무슨 지침서 같은 분위기인가 하겠지만

책의 내용은 무척이나 그녀스럽게도 아주 역사적이다.

특히 42쪽에 나오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사는 남성들의 수염이야기가 그런데

너무 우습게도 머릿속에 있는 사상이 수염에까지 나와서 서로를 구별지어야 했던

역사가 우습기까지 하다.

 

* 당시의 좌파, 우파, 중립파 구분법

1. 좌파-일부러 손질하지 않은 구레나룻에 장발.

복장은 청바지에 모자 달린 점퍼 모습으로 지저분한 인상.

2. 우파-속칭 카이저 수염이라 불리는 끝이 올라간 콧수염으로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음.

머리는 짧고 뒷덜미는 깎아올린 듯한 느낌을 준다.

복장은 가죽점퍼에 청바지. 그러나 청결.

3. 중립파-스웨터에 양복바지. 수염 없음. 머리도 보통 길이.

 

우습다고 표현했지만 당시에 이 차이는 꽤 중요한 것으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파의

아지트로 잘못 찾아들어가 몰매를 당하곤 했으니 당시로서는 심각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이분 말을 너무 맛있게 해서 읽어나가며 끝을 맞이하는 게 아까울 정도.

 

122쪽에서는 징을 박지 않으려는 말을 길들이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이들의 교육에도 통하는 이야기다.

 

징을 박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말이 한 마리 있었다.

그 말은 암컷이었기에 나는 M씨가 어떻게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하는지 흥미있게 지켜보았다.

규슈의 카우보이들은 보스의 명령에 따라

그 암말의 고삐를 좌우로 쥔 채 앞다리에 밧줄을 감아 버렸다.

그때까지도 버둥거리던 암말은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앞으로 퍽 하고 쓰러져서는

그 자세로 헉헉댄다.

그래도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써보다가는 그 뒷발질을 해보기도 한다.

말이란 동물은 잠도 서서 자는 만큼 옆으로 누운 자세는 불안했을 것이다.

서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카우보이들은 필사적으로 밧줄을 당겨 옆으로 눕혀 버린다.

이런 장면을 혹시나 동물애호협회의 아줌마들이 보았다면

시끌벅적하게 엄중한 항의문을 작성했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어린 외아들을 종아리를 때려가며 키운 어미이니 이 정도는 꼼짝도 않는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열 살 되는 아들에게도

"한 번의 잔혹함은 백 번의 방임보다 더 저 말을 위한 길이란다" 하고 설명을 하고는

미쳐 날뛰는 채로 그냥 두어서는 불고기밖에 될 길이 없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M씨는 조금만 더 있으면 말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이고,

그러면 말을 잘 듣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아직도 힘이 넘쳐 날뛰는 말이 제 힘에 머리라도 부딪혀서 상처라도 날까봐

말 옆얼굴과 땅바닥에 담요를 깔아 주었다.

그는 말이 몸을 뒤틀 때마다 담요도 따라 옮겨 주며 눈물을 흘리는지 확인한다.

반항 정신이 너무도 강한 이 암말은 그 누구로부터도 지금까지 채찍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끔 뒷발을 살짝 때린다.

이것은 이제 얌전해질 마음이 생겼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시험해 보는 것이다.

실제로 처음에는 채찍을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금방 뒷발질로 반항한다.

그런데 그 암말은 무척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지

담요 위치를 옮겨 주거나 얼굴을 들여다 보는 M씨를 콧등으로 들이밀어 버린 모양이다.

하필 그때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그 장면을 놓쳐 버렸다.

아무튼 M씨는 허벅지를 세게 받혔는지 절뚝거렸다.

그러나 보고 있던 우리들뿐만 아니라 말도 놀랐는지 얼마 있지 않아 얌전해졌다.

우스웠다.

그후 이전의 말괄량이가 어디로 갔는지

거짓말처럼 얌전한 레이디가 되어 징을 박기 위해 따라갔다.

 

269쪽부터는 머리 좋은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남자' 란 말을

'여자' 로 바꾸어 갈무리 해도 좋을 만큼 맞는 말이다.

이것은 여자와 남자가 아닌 사람에 대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니까.

 

이미 30년 전쯤의 일이다.

스트립쇼를 주로 하는 뮤직홀의 주인으로 있어, 그 때문에 여자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모두들 생각했는지 그런 곳에는 구경도 못 가본 나라도 그 이름은 알고 있는 모씨가 있었다.

그가 어느 때,

[문예춘추] 수필란에 기고한 한 문장이 기묘하게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자란 결국 머리 좋은 것이 최고다."

늘상 정신적인 여성론이나 휘둘러대는 요즘 부지기수로 깔린 자칭 페미니스트가 한 말이 아니라,

나체의 여자라면 부지기수로 보아왔을 모씨 입에서 나온 말이니

그 무게가 단연코 다르게 여겨졌다.

 

여자를 남자로 바꾸면 내가 늘상 생각하고 있는 것과도 같아진다.

그 모씨와 내가 대담회라도 가진다면 당장 동감하게 될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머리 좋다는 것은 수다 떨기 위해서 챙기는 정도가 아니다.

침대 위에서든 어디에서는 모든 행동을 견제하는 이른바 '기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유명대학의 경쟁률 높은 학과를 졸업하여 일류기업이나 관청, 대학에 근무하고 있다고

머리 좋은 남자와 이퀄이 되지 않는 예도 종종 일어난다.

정말고 교육은 있으나 교양이 없는 남자(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지만)란 쓸어내 버릴 만큼 많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머리 좋은 남자'란 무엇이든 제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에 의해 판단하고, 그 때문에 편견을 갖지 않고, 무슨무슨 주의 주장에 파묻힌 사람에 비해

유연성이 있고, 더욱이 예리하고 깊은 통찰력을 가진 남자다.

또한 자기 자신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무슨 어려운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대처하는 '자세' (스타일) 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말이다. 따라서 연령도 관계없고 사회적 교육의 고저도 관계없고,

그저 그것을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옳고 또 옳고 옳은 말이다.

장정일 아저씨는 남자들과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여류작가라고 인정한 그녀의 여느 출판사

편집장의 말에 공감한다고 그의 독서일기에 밝혔는데 여류고 남류고 뭐 따질 것 없이

그냥 그녀는 좋은 작가다.

깊이 있는 독서를 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지는 책.

 

4. [저항의 인문학 - 에드워드 사이드]

 

현재의 저자가 뭘 해 먹고 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이분은 이 책을 내는 이유가 인문주의의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도 아니고,

인문주의의 가능한 의미들을 모두 탐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하이데거의 [인문주의 서간]에서처럼 인문주의가 전존재와 맺는 형이상학적 관계를 철저히

살펴보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밝힌다.

즉, 그가 바라는 것은 쓸모 있는 실천으로서의 인문주의이며, 이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학자로서 무엇에 기여할 수 있는지 알고자 하며 이러한 원칙들을 자신들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세계와 연결하고자 하는 지식인과 학계를 위한 인문주의라 한다.

 

그는 테러리즘에 대한 두 가지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25쪽.

9월 11일 이후, 테러와 테러리즘은 대중의 의식 속을 굉장히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선과 그들의 악이라는 뚜렷한 구분을 강조했지요.

조지 부시에 따르면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아니면 우리 적입니다.

우리는 인도적인 문화를 대변한다. 그들은 폭력과 증오를 대변한다. 우리는 문명화되었다.

그들은 야만인들이다.

이 모두에는 오류에 빠진 두 가지의 가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문명(이슬람)이 우리의 문명(서구)과 완전히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새무얼 헌팅턴의 비통할 정도로 통속적이고 환원적인 문명의 충돌 논제에

애매하게 기초해 있습니다.

둘째, 테러를 규정하려는 노력 속에서 테러의 정치사와 본성을 분석하는 일이 곧

테러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소하고 피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견해들을 살펴보거나 반박하는 데에 시간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들이 끈질기게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위와 같은 대상의 분석이 대상을 정당화 한다는 이상한 견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공격하는 것이 그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해체해버리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32쪽. (너무 길거나 쓸데없는 말을 줄여서 옮긴다)

마찬가지로 저는 몇몇 인문주의 실천가들의 평판을 떨어뜨린 것은 인문주의의 악용이지

인문주의 자체가 신용을 잃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4~5년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책과 글은 반인문주의적인 시도-대부분의 경우

비유럽인, 이민자들과 관계된 정치나 공공정책에서 오용된 인문주의를 향한,

종종 이상적인 비판이었습니다-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이면서 문학의 죽음 또는

인문주의의 실패와 같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울한 사건을 소란스러울 정도로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에 답했습니다. 소란스러운 분석을 시도했던 이들이 노여워하는 전통주의자들이나

미숙한 논객에 불과하다는 사실에도 불과하고 인문학 전반이 대학에서 그 명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마사오 미요시가 이곳저곳에서 친밀하게 논의한 대로,

20세기 후반 미국의 대학은 대기업화되었고 변호, 의학적, 생명 기술적, 기업적 관심사들,

즉 인문학보다는 재정에 도움이 되는 자연과학 프로젝트에 더 몰두하고 있습니다.

미요시는 이어 인문학이-그가 옳게 가정하듯이,

회사 관리의 영역이 아니라 인문학자의 영역이지요-

비현재성과 반중세적인 야단법석으로 전락했다고 덧붙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현재적인 영역으로 새롭게 부상한 탈식민주의, 민족학, 문화 연구 같은 최신유행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인문학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신할 자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내가 속해 있던 어떤 문학 모임에서도, 문학이 죽어가고 있다고 야단법석하던

가라타니 고진의 작품을 두어 권 다루며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죽었다고 떠드는 것 자체가 살리자고 안간힘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는 인문학이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냐는 그 어떤 근거도 댈 수 없는 안일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눴었다.

실제로 그 책은 근대 일본 문학의 역사로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은 당연히

근대 일본 문학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살펴보는 당연한 단계라고 여겼었다.

더 재미 있는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인문주의에 대한 편견인데

이는 모임을 만들려고 써 놓은 글에 있던 조금은 우스운 제안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 모임에 들어오고 싶은 자는 고진, 라캉 어쩌고 저쩌고,,,정도는 아는 사람이어야 하며...'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음이 모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밝혀졌다.

다음의 내용을 모임 대장이 읽어 본 적 있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을까?

 

태도 또는 실천으로서 인문주의는 언제나 선택적 엘리트-그들이 종교적 엘리트든

귀족적 또는 교육적 엘리트이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관계의 한 항이고요.

인문주의가 비판적이고 진보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낳는 민주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또는 그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엄격히 반대하는 태도가 다른 항입니다.

다시 말해 인문주의는 매우 제한적이고 까다로운 어떤 것으로 간주됩니다.

마치 엄격한 모임과 같죠. 대부분의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누군가를 모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회원 자격을 확대하거나 제한적인 문턱을 낮추거나 참여하는 것을 편하게 하는

어떠한 것도 허용치 않고 규제하는 모임 말입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현재 인문학의 첫 번째 문제점이다.

 

35쪽.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문주의"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돌아보자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 서서히 대립되는 가운데 꾸준히 확장된 주제와 문제들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지금의 논의를 위해 간단히 가져다 쓰는 정의는

인문학이 세속적 역사와 인간노동의 생산물, 인간의 명확한 표현 능력에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R.S크레인의 말을 빌려 인문학은 "자연적 과정이나 물리학적, 생물학적 일반 법칙의 관점이나

집합적 사회 조건이나 힘의 관점에 입각한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않은...그 모든 것들 안에 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보통 인간의 성취라 부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인문주의에 대해 또 앞으로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중요한 단면들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문제라고 따로 나오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내 생각 대로,

두 번째 문제일 것만 같은 신인문주의자들에 대하여.

 

처음 출간된 1987년 당시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미국 정신의 종결]의 저자

앨런 블룸으로 대표되는 편협한 종류의 교육적 보수주의자 또는 그러한 작업.

이는 60년 전 신인문주의자들이라 불렸던 한 학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학파의 멤버는 어빙 배빗, 폴 엘머 모어였는데 이는 고전으로 전형화되는 고전적 세계관,

산스크리트, 몇몇의 기념비적 문학 작품과 언어들을 폐기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교육과 문화,

학계를 이미 호되게 꾸짖은 바 있었고, 이는 실질적으로 달갑지 않은 비유럽인들이 갑자기

너무나 많이 "우리의" 문 앞에 나타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

뭐 길게 말할 것 없이 문화와 문명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그들의 본질이나 순수성이 아니라,

조합과 다양성, 역행, 다른 문명들과  흡입력 있는 대화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나온다고 믿는

저자와, 공개강연에서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고 다른 주장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블룸

(이분은 앨런 블룸이 아닌 해럴드)이 비교되고 후자는 비판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신기하게도 이 해럴드 블룸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문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뒤인 50쪽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이 책에서 몇 번째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란 뜻.

 

51쪽에서 저자는

'우리의 지적 문화적 세계는 이제 간단하고도 자명한 전문적 담론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이 세계는 해결되지 않은 기록들이 끊임없이 변동하며 빚어내는 불협화음

-끊임없이 분기하며 정교해지는 문화의 명료화를 두고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사용한

명쾌한 단어를 사용하자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은근히 이제 언어에 대해 그리고 당연히 대상을 표현해야만 하는 인문주의에 대해 말할 것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69쪽에서 말한 것을 옮기면 그것으로 흡족한데,

저는 상상력이나 "창작' 모두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문주의적 노력과

성취의 주요한 부분은 언제나 개인적 노력과 독창성에 기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나 음악가, 화가들이 백지상태에서 작업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계는 이미 과거의 작가와 예술가의 작품뿐 아니라 사적인 의식 주변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거대한 정보와 담론에, 사방에서 감각을 치고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자료뭉치들과 사이버공간 속에 강하게 기입되어 있습니다. 이 영향력은 개인적 발화의 본성을 틀 짓거나

변화시킵니다. 도서관과 문서보관소의 지식 보관, 개념의 형성을 총괄하는 규칙,

표현적 언어의 어휘 목록, 보급의 다양한 체계 등에 관여하는 메커니즘은 개개인의 정신으로 진입해, 개인성이 어디서 끝이 나고 공적 영역이 어디서 시작되는가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미적 작품은 물론이고 철학자, 지식인,

공적 인물들이 행한 진술들을 다루면서, 평범하지 않은 것에서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에서 범상한 것을 분리해내는 것이

인문주의적 연구,독해,해석의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라고 예상과 같은 말을 한다.

 

인문주의자를 비판하고 인문주의의 특징을 밝혔으니

이제는 인문학에 대한 올바른 독해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되겠다.

저자는 94쪽에서

'다시 한번 에머슨과 포이리어에 기대어 동시대 인문학자들에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제가 수용과 저항이라고 부른 두 가지의 매우 결정적인 움직임 안에서 독해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용은 지식적으로 텍스트에 접근해 우선 텍스트를 잠정적으로 분리된 대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처음 만나 응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텍스트가 자리잡고 있는

애매하며 보이지 않는 틀을 확장하고 명료하게 함으로써,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들로 나아갑니다.

또한 태도, 감정, 수사와 같은 구조들이 당시의 흐름, 텍스트적 맥락의 역사적, 사회적 형성과 서로

뒤엉키는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위에서 저자는 길고 길게 설명하지만

 '결국 인문학자에게 독해의 행위는 우선 자신을 저자의 입장으로 위치시키는 행위'

이 짧은 문장 하나면 충분하다.

 

99쪽에 보면 정밀한 독해에 관한 스피처의 표현이 나오는데 이곳에 옮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내 안에 축적된 방법의 이론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멍해지는지.

마치 아직 그 마법을 풀지 못한 책장을 앞에 둔 신입생들처럼 말이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작품의 분위기 속으로, 말하자면

점점 스며들려는 노력 속에서 끈질기고 대담하게 읽고, 또 읽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갑자기 어느 단어가, 어느 행이, [또는 단어들과 행의 어떤 조합이] 두드러지고,

우리는 이내 시와 우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윽고 나는 처음의 관찰에 덧붙여지는 다른 관찰들, 끼어들어오는 이전 경험들,

이전에 받은 교육들이 내 앞에 쌓아올린 연상들 [여기에 덧붙이자면, 실제로 우리를 사회의

시민으로, 내부인과 외부인으로 만드는 이전의 실천이나 습관] 로 인해, 특징적인 "번뜩임"이 일어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번뜩임"은 세부사항과 전체가 공통분모를 찾았다는 암시이다.

이것은 글쓰기의 어원을 제시한다.

이 과정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읽었다는 것은 읽었다는 것이며,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했다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110쪽.

누군가는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이러한 것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라크 자체, 이라크의 역사, 이라크의 제도는 물론 우리가 여기에

지난 몇 십 년 동안 광범위하게 행한 짓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기양양하게 전쟁에서

"재건"으로 나아간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저항은 "악의 축"과 같은 짧은 정보의 파편들의 형태나 "이라크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했으며 이것은 미국과 우리의 삶의 방식에 직접적인 위협이다"

같은 문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수고롭게 파헤치고 끄집어내고, 증거자료를 수집하고 반박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미국의 인문학자들

-세계 유일의 열강국가에 사는 그들의 묵인(또는 침묵)은 학식 있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하지요-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인문주의적 숙고는 핵심만을 뽑아 전달하는 짧은 헤드라인식 형태를 거두어들이고, 대신 적절하게 사인들을 짚어내는 , 조금 더 길고도

신중한 숙고, 연구, 탐구적 논의로 향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미국들의 말대로 하자면 '악의 축'을 뽑아 버렸다며 모든 시민이 카메라 앞에서 박수를 치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정의를 실현했다며 떠들석했던 최근,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책을 읽던 그 시기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파렴치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떠들어 댈 때와 너무도 다른, 파리 목숨보다 못해 보이던

한 집단의 우두머리의 생명을 제거하고 정의를 실현했다는 야단법석과 '아이고 무고한 목숨'

수없이 죽인 잡놈 잘 죽였네 하시던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이 '저 방법이 최선이었나'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 같은 일반인도 인문학자의 수준까지 가야만 가능한 것일까?

 

117쪽부터 122쪽까지의 내용은 열심히 읽어서 녹음해야겠다.

 

마지막으로 158쪽에 나온 우리가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을 남기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는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중 부분인데 4장을 할애해 그가 소개한 것.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과거의 것에 관심을 둘 때나

현재의 것에 관심을 둘 때나 똑같다.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면 필연적으로 현재의 상황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따라 바뀐다. 시대와 사회는 무엇이 절대적으로 바람직한가라는 정해진 개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각각의 경우마다 각가의 전제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할 때, 그 전제 중에서 기후나 토양 같은 자연적 요소뿐 아니라 지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사람들이 고려할 때, 다시 말해 역사적 역동과 역사적 현상의 비교 불가능성, 그리고 그 지속적인

내적 움직임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키게 될 때, 개개의 시대의 생명력 있는 통일성을 이해해

그 시대가 자신의 특징을 표명하는 것 속에 반영되는 전체로서 드러나게 될 때,

마지막으로 사건의 의미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인식의 형태 속에서 포착될 수 없다는 것과

이해해야 할 자료들이 사회의 계급이나 주요 정치적 사전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독특하고 내적인 힘에 의해 활기를 띠며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을 포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예술, 경제, 물질적이고 지적인 문화, 평범한 세계의 깊이와 세계 속의 남성과 여성도

포함해야 한다는 확신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러한 직관들이 또한

현재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역시 비교불가능하며 독특한 것으로, 내적인 힘에 의해 활기를 띠며

지속적인 발전의 상태 속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는 역사의 한 조각으로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한 조각은 역사의 일상적 깊이와 전체적인 내적 구조의 기원과 발전하는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죄없는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를 위해 사실 필요 없을지도 모를 살충제 다량을 꽥꽥 소리지르며

소비하고 이렇게나 긴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을 끝낸다.

아, 녹음하겠다고 결심한 내용은 몇 번이고 내 소리를 통해 읽어질 것이고 소리파일로 남을 것이다.

 

몇 달 전에 읽어치운 책의 독후감을 이제야 올린다.

후련하다.

 

아래는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40쪽 밑에서3줄: 바로 잡을 -> 바로잡을

49쪽 3줄: 아무 것도 -> 아무것도

60쪽 각주2줄: 깊숙히 -> 깊숙이

65쪽 11줄: 엘리엇가 -> 엘리엇과

76쪽 5줄: 고려할 때그렇게 -> 고려할 때 그렇게

80쪽 밑에서8줄: 단테를 -> 단테는

84쪽 밑에서6줄: 어제쯤 -> 언제쯤

110쪽 3줄: 몇 십 년 -> 몇십 년

160쪽 6줄: 있었을런지도 -> 있었을는지도

 

5. [마틴 에덴 - 잭 런던]

 

배장이 노동자 마틴이 처음 사랑한 그녀 루스에겐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세계 곧 이론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이론에서 찾아보며

일치시키고 때로는 비판적 사고를 가지며 자신의 자아로 되새겨 내는 마틴 에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협소한 세계에 사는 그녀의 환경은 당연히 그녀의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상류층용 예절교본을 쥐고 그대로 따라하는 마틴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어느 순간이 오면 예절교본을 집어치우고 관찰에 의거하여 적절한 행동을 깨쳐나갔다는 것인데

실제로 모든 예절은 '눈치' 라는 관찰을 통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책 중 이 대목은 사소하게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마틴에 대한 올리의 이야기는 그런 마틴을 더 잘 나타내 준다.

 

마틴을 내버려 둬, 루스.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최상인지 잘 알고 있어.

그가 이미 해낸 일을 봐. 가끔 그를 보면 난 창피함을 느껴.

그는 지금 세상과 삶과 인간의 위치,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아서나 노먼이나

나보다도, 아니 그 문제에 관한 한 너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어.

우리가 받은 그 모든 라틴어와 프랑스어와 색슨어와 교양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는 마틴이 지식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 라고 표현되는 것을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얻게 된 것이란 뜻이 되겠지.

 

지금 읽는 책을 통해서 다른 새로운 책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는 올바른 독서를 하는 마틴은

어느덧 자신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팔자임을 깨닫게 되는데 당연스레

편집자에 대한 올바른 견해 또한 갖게 된다, 그건 조금 슬픈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알아야 할 것들.

 

'구십구 페센트의 편집집자들의 주된 자격요건은 실패란 말이오.
그들은 작가로서 실패한 사람들이오.

그들이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지루한 사무를 보고 잡지의 부수 확장에 신경 쓰면서

사장에게 노예처럼 매여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진 마시오.

그들은 글쓰기에 인생을 걸었고 그들은 실패했던 것이오.

바로 그 점이 엄청난 역설이오.

왜냐하면 문학적 성공으로 가는 모든 문을 문학에서 실패한 이 사람들이

맹견처럼 지키고 있으니 말이오.

편집장, 편집차장, 편집부원 대부분과 잡지사와 출판사에 고용되어

원고를 검토하는 사람들 대부분, 거의 대부분이 글을 쓰고 싶었으나 실패한 사람들이오.

그런데도 세상에서 가장 부적격인 이 사람들이

무엇을 싣고 무엇을 싣지 않겠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사람들

-그들 자신이 이미 독창성이 없음을 입증했고 천부적인 재능이 없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던 사람들-

이며, 바로 그 사람들이 독창성과 천재성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단 말이오.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사람들인 서평가들이 있소.

그들 역시 작가의 꿈을 꾸었고 시나 소설을 쓰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오.

그리고 그들 역시 실패한 사람들이오.

대개의 서평이 참기 힘들 정도로 역겹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오.

당신은 서평가와 소위 비평가라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알고 있는 줄 아오.

위대한 비평가들도 있소. 그러나 그들은 가뭄에 콩나듯이 드문 법이오.

그러니까 내가 작가로서 패한다면 그것으로 편집자의 자격을 입증한 셈이오.

어쨌거나 편집자에게는 먹고 사는 것이 보장되어 있소.'

 

이런 그에게 알맞은 여자는 루스같은 꽉 막힌 상류층 멍청이가 아니라

삶을 비웃고 죽음에 조소를 보내고 거리낌 없이 사랑을 하는 그런 대단한 여자이자

걷잡을 수 없이 불 같은 여자라고 책속에서 누군가는 말한다.

옳다.

 

이 책에선 온갖 작품이 난무하는데 다음과 같은 글에 대한 설명은 작품이 아닌 설명으로만 등장한다.

 

그 글은 완벽한 예술이었다.

생각하기조차 힘든 실체의 원자 하나하나가 너무나 완벽한 구조 속에 표현되었기 때문에

마틴의 머리가 기쁨으로 아찔해지고 감격의 눈물이 핑 돌면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한 감정을 승리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글은 형식이 실체에 대해 승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처럼 [마틴 에덴]에는 글의 내용이 아니라

그 글에 대한 감상이 이렇듯 훌륭함을 들쳐업고 종종 나타난다.

하지만 직접 독자가 판단할 수 없는

순전히 작가 속에만 있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하다.

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소리에 대한 극찬과 멋진 표현을

글로만 또는 말로만 듣는 것과 비슷하게 답답하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인 향유로 가득한 이 작품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책의 중간에 살짝 끼워 넣어 두었다.

사실과 언어와 이론의 관계.

그 셋을 잘 파악하고 잘 엮고 상호관계를 잘 버무려 놓으면 좋은 글이 또는

글이 아니어도 훌륭한 창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인데,

난 사실과 언어와 이론을 각각 파악은 했으나 아니 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셋을 조화시키는 작업에 실패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다시는 나의 글을 작품이라고 불러야 하는 그런 창작물을 토해내지 않기로 했다.

이건 중요한 사실이다.

 

마틴은 불특정 다수를 통해서 사랑 곧 루스를 얻으려 했다.

물론 그의 계급상 그런 방법 말고는 대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의 순진무구함은 일찌감치 그 방법이 실패할 것임을 독자에게 까발리고 말았다.

대중을, 출판업계를, 여자를 잘 몰랐기에 매우 중요했던 한 시기의 실패가

대중과 출판업계와 여자를 안 후에도  여전히 그에게 작용해야 했던 것은

어쩌면 그의 고독, 애초부터 가지고 태어난 천성, 천재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으로써 루스는 그저 그의 굳어진 첫사랑에 처박힌 채

더 이상의 생을 영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순전히 그의 입장에서.

 

워낙 오래된 책이라 맞춤법을 굳이 챙겨볼 필요가 없어 마음 편하게 읽은 작품이다.

그래서 더 좋았던 것일까 이 작품이 순수하게 좋았던 것일까.

 

잭 런던, 그는 멋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함께 늘 따라다니는 [강철군화]는 보지 않겠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작가이지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그냥 배수아와 장정일 그것으로 끝.

 

++++++++++++++++++++++++++++++++++++++++++++++++++++++++++++++++++++++++++++++++++++++++

엄청나게 긴 글이 되었다.
이것을 다 꼼꼼히 읽어 볼 사람이 있을까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짓이 평소 내가 하는 그대로의 모습이기에 수고를 무릅쓰고 열심히 모아 봤다.
대회가 열렸을 때 갑작스럽게 해당 책을 사서 고심고심 쓰지 말고
평소 열심히 독후감을 남길 일이다.
책을 읽으며 메모한 내용을 보면서 리뷰를 정리하면 같은 책을 두 번 읽게 되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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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2010년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한껏 불던 그때 할 말 많은 누군가들이 모여 만든 이 책,

'무엇이 정의인가' 가 나왔던 당시에 난,

 마치 [나는 가수다]가 유행하니 '나도 가수다', '나만 가수다' 등 원작에 대한 의미보다는

그저 유행을 등에 업고 가보겠다는 얄미운 심보를 본 듯 기분이 조금 나빴고,

특히 내가 열광해 마지 않는 장정일 아저씨가 그 한켠에 자리잡고 있어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그때는 일부러 책에서 신경을 돌렸다가 최근 갑자기 읽을 거리가 없어

알라딘을 두리번 거리다가 습관적으로 '장정일'로 검색을 했더니 나오는 이 책을 그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가볍게 주문하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나가수가 식은 것처럼 '정의' 운운도 함께 잡을 수 없는 어딘가로 처박힌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정일 아저씨의 글을 대할 수 있다면 그게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는 내가

이 책을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

 

큰 제목 속에 이름들이 나뉘어 있지만 상관없이 그냥 이름을 쓰고 그의 생각을 정리하겠다, 나름.

 

<이택광>

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정의에 대한 갈구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방한한 샌델 역시

똑같이 결론지었다고 하지만, 이택광은 그저 상품화됐던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26쪽, 샌델 책의 한국에서의 의미.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선진국 담론'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보다

무조건 따라 배워야 할 교본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정치집단에 대한 불신이라는 한국사회 특유의 정서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이라기보다,

자기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집단으로 각인되어 있다.

 

31쪽, 정의의 원래의 뜻과 샌델의 정의와 한국에서의 정의

원래 정의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제 자신의 할 일에 마음을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되, 외람되게 남의 일을 대신해 주겠다는 망동을

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면 '책임'이라는 말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사회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샌델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의견을 인정하고, 도덕적 분쟁을 수용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생각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런 정의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정의론을 고민해 보는 것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은 이 현상의 기저에 '정의'라는 기표로 지칭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든

천박한 포퓰리즘에 대한 개탄이든, 동일한 메시지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주의를 끄는 일이다. 언제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의 자리는

실제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정치적 과잉의 자리이다.

 

<장정일>

샌델 책의 의미에 대해 이택광과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역시 표현은 다르다.

 

37쪽, 그가 말하는 샌델 책 열풍.

이 책이 100일 동안 연인원 100만 명을 동원했던 2008년 촛불시위에서 얻은 정의의 경험을

망각하고, 무력증에 빠져 버린 시민들의 자기 위안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열풍을 일으키자, 여기저기서 이 책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봐라, 하버드 대학의 석학이 이렇게 얘기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마이클 샌델의 진의를 헤아려 보려는 노력 없이, 안이하게 자신의 구미에 맞게

왜곡하거나 저자가 가리키고 있는 정치철학의 독소를 외면하고 희석했다.

내가 보기에 그런 식의 인용은 숱한 칼럼리스트들마저 [정의란 무엇인가]를 내용과 상관없이,

기표로만 허비했다는 혐의를 갖게 만든다.

결론 삼아 말하자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제목과 달리 정의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못할 뿐더러,

샌델 역시 정의란 '딜레마'일 뿐,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 것과 연관해서는 지은이를 변호해야 할 대목이 없지 않다.

원래 정의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했다고

지은이를 공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규정이 불가능한 정의의 잠재성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구하지 못하고,  정의를 '법'에 위탁한다는 것이다.

 

42쪽,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앞서 예로 든 도덕적 딜레마뿐 아니라, 경제적 정의에 관한 딜레마,

합의에 관한 딜레마, 평등에 관한 딜레마, 자격과 목적에 관한 딜레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시된다.

이처럼 '사례(딜레마) 신공'을 내뿜었던 이유는 첫째, 공리주의 정의관과 자유주의 정의관을

대조함으로써 두 정의관의 개념을 주지시키기 위한 수업의 목표 때문이다.

샌델은 딜레마를 던져 놓을 뿐, 어느 것이 정의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간혹 어느 쪽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사례를 늘어놓고 어느 쪽이 정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마술 카드를 꺼내듯 숱한 딜레마를 펼친 두 번째 딜레마를 통해

학생들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딜레마에 지치고 넌더리가 난 학생들을

정의가 아닌 법이라는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마지막까지 간수된 것이

동성애와 낙태에 대한 논란이다.

 

샌델이 정의에 관한 여러 딜레마(사례)를 제시함으로써 학생들이 깨닫기를 바랐던 것은,

정의에 관한 딜레마가 정리되지 않을 때 공동체는 분열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는 경고다.

예컨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동성애와 낙태 문제가 미국을 두 동강으로 갈라놓지 않았던가?

이제 진도는 공동체에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하며, '공동선'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향해 나아간다. 이 뛰어난 산파술을 마이클 샌델은 당연히 희랍의 스승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순진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과 공동선이

바로 '정의'일 거라고 환원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에 우리가 속았기 때문이며,

이 역시 똑같은 내용(책)으로 우둔한 제자와 명민한 제자에게 각각 다른 메시지를 가르쳤다고 하는

희랍식 밀의(密意) 탓인지도 모른다.

 

<이현우>

안드레이가 말했던 그 이현우를 드디어 읽다.

앞부분은 어쩐지 페이지를 채우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겠다.

 

<이양수>

지적 유행에만 민감하고, 사회 전반을 흔들 전반적, 체계적 연구는 진행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을 샌델, 룰스 등의 어려운 예를 마음껏 들며 어렵게 얘기하고 있다.

 

<김도균>

그는 샌델의 정의가 롤스에서 왔다고 보고 샌델은 롤스+a를 구상했다고 여긴다.

솔직히 장정일 아저씨 때문에 산 책이고, 지금까지 읽은 내용 중 장정일을 빼고  
마음에 드는 부분이 전혀 없었는데 이것은 다르다.

진정 필요했던 샌델의 주요 내용 분석과 대한민국 현실에서의 적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분의 분량을 다시 한 번 읽어 볼 만하다.

 

그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은 (    )의 텔로스(목표, 본질)를 짚어 보면

정의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샌델의 정의론에서 찾아 보기 어렵지만, 중요한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기초 소득의 보장과 같은 복지의 문제를 거론하는데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중요한 복지의 문제를 공정성의 문제로, 공동선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정의 담론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옳다.

 

<최원>

샌델이 추구하는 그리스식 공동체관은 오히려 그리스식 정의관을 왜곡한다면서

글을 시작하는데, 아리스토 텔레스, 플라톤, 마이클 왈저 등이 말하는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잇고 있다. 그들의 정의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 아리스토 텔레스 - 정의의 문제가 바로 계급투쟁에서 기원하는 문제이며, 이 계급투쟁은

분배의 '기준'을 둘러싸고 벌어지기 때문에 상이한 기준들의 통약가능성을 찾지 못한다면

공동체 전체가 붕괴하게 될 것.

 

* 플라톤 - 경제와 정치 이 두 영역이 서로 섞이는 데에서 공동체의 모든 불행과

모든 부정의가 시작.

 

* 마이클 왈저 - [정의와 다원적 평등]에서 서회의 다양한 영역을 분리해 다원적 평등을

수립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정의.

최원을 읽으면 읽을수록 샌델은 정의가 아닌 '딜레마'에만 매달려 공동체 주의에

열광한 것에 불과할 뿐 진정한 '정의'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난다.

다시 장정일로 돌아가면 시원한 결론이 맺어진다.

 

<박홍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대하여 그가 쓴 글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당시의 정의가 적용 가능한 시민은 여자와 노예를 제외한 사람이었고,

정의는 돈에 좌우된다는 두 가지로 만족된다.

저자는 265쪽부터 나오는 '디오게네스'라는 인물을 꽤나 좋아하는 듯이 보이는데,

굉장히 흥미롭기는 하다. 기회가 되면 파봐도 좋을 인물.

 

<노정태>

282쪽, 정의에 대한 샌델의 눈높이.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진정 '철학적'인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바로 저 '각자의 정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에 따를 때 정의롭다'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떻게 그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서동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하지 않고 말장난만 실컷 하고,

'감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길게 하더니 급히 글을 마무리 짓는다.

 

<박가분>

민주주의가 실체를 알 수 없는 '상상계'라고 말하고 있는데 장황하기만 하고,

뭔가 잡히지 않는 모호한 글이다.

 

<이권우>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현상을 간단히 진단하고 미래를 비춰보며

깔끔히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주문할 책

<정치와 진리> 김선욱, 책세상, 2001
<법의 힘> 자크데리다, 진태원 옮김, 문지 2004
<교양과 무질서> 매슈 아널드, 한길사, 2006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창비, 2010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안병길, 동녘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작가선언6'9, 실천문학사, 2009
<로마사 논고> 마키아벨리, 한길사, 2003

 

발견된 오탈자

 

46쪽 밑에서10줄: 번번히 -> 번번이
92쪽 각주8 2줄: 걸 맞는 -> 걸맞는
287쪽 4줄: 대안을대항 -> 대안을 대항
334쪽 7줄: 사고을 -> 사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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