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2010년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한껏 불던 그때 할 말 많은 누군가들이 모여 만든 이 책,

'무엇이 정의인가' 가 나왔던 당시에 난,

 마치 [나는 가수다]가 유행하니 '나도 가수다', '나만 가수다' 등 원작에 대한 의미보다는

그저 유행을 등에 업고 가보겠다는 얄미운 심보를 본 듯 기분이 조금 나빴고,

특히 내가 열광해 마지 않는 장정일 아저씨가 그 한켠에 자리잡고 있어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그때는 일부러 책에서 신경을 돌렸다가 최근 갑자기 읽을 거리가 없어

알라딘을 두리번 거리다가 습관적으로 '장정일'로 검색을 했더니 나오는 이 책을 그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가볍게 주문하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나가수가 식은 것처럼 '정의' 운운도 함께 잡을 수 없는 어딘가로 처박힌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정일 아저씨의 글을 대할 수 있다면 그게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는 내가

이 책을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

 

큰 제목 속에 이름들이 나뉘어 있지만 상관없이 그냥 이름을 쓰고 그의 생각을 정리하겠다, 나름.

 

<이택광>

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정의에 대한 갈구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방한한 샌델 역시

똑같이 결론지었다고 하지만, 이택광은 그저 상품화됐던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26쪽, 샌델 책의 한국에서의 의미.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선진국 담론'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보다

무조건 따라 배워야 할 교본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정치집단에 대한 불신이라는 한국사회 특유의 정서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이라기보다,

자기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집단으로 각인되어 있다.

 

31쪽, 정의의 원래의 뜻과 샌델의 정의와 한국에서의 정의

원래 정의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제 자신의 할 일에 마음을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되, 외람되게 남의 일을 대신해 주겠다는 망동을

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면 '책임'이라는 말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사회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샌델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의견을 인정하고, 도덕적 분쟁을 수용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생각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런 정의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정의론을 고민해 보는 것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은 이 현상의 기저에 '정의'라는 기표로 지칭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든

천박한 포퓰리즘에 대한 개탄이든, 동일한 메시지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주의를 끄는 일이다. 언제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의 자리는

실제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정치적 과잉의 자리이다.

 

<장정일>

샌델 책의 의미에 대해 이택광과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역시 표현은 다르다.

 

37쪽, 그가 말하는 샌델 책 열풍.

이 책이 100일 동안 연인원 100만 명을 동원했던 2008년 촛불시위에서 얻은 정의의 경험을

망각하고, 무력증에 빠져 버린 시민들의 자기 위안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열풍을 일으키자, 여기저기서 이 책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봐라, 하버드 대학의 석학이 이렇게 얘기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마이클 샌델의 진의를 헤아려 보려는 노력 없이, 안이하게 자신의 구미에 맞게

왜곡하거나 저자가 가리키고 있는 정치철학의 독소를 외면하고 희석했다.

내가 보기에 그런 식의 인용은 숱한 칼럼리스트들마저 [정의란 무엇인가]를 내용과 상관없이,

기표로만 허비했다는 혐의를 갖게 만든다.

결론 삼아 말하자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제목과 달리 정의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못할 뿐더러,

샌델 역시 정의란 '딜레마'일 뿐,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 것과 연관해서는 지은이를 변호해야 할 대목이 없지 않다.

원래 정의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했다고

지은이를 공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규정이 불가능한 정의의 잠재성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구하지 못하고,  정의를 '법'에 위탁한다는 것이다.

 

42쪽,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앞서 예로 든 도덕적 딜레마뿐 아니라, 경제적 정의에 관한 딜레마,

합의에 관한 딜레마, 평등에 관한 딜레마, 자격과 목적에 관한 딜레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시된다.

이처럼 '사례(딜레마) 신공'을 내뿜었던 이유는 첫째, 공리주의 정의관과 자유주의 정의관을

대조함으로써 두 정의관의 개념을 주지시키기 위한 수업의 목표 때문이다.

샌델은 딜레마를 던져 놓을 뿐, 어느 것이 정의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간혹 어느 쪽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사례를 늘어놓고 어느 쪽이 정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마술 카드를 꺼내듯 숱한 딜레마를 펼친 두 번째 딜레마를 통해

학생들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딜레마에 지치고 넌더리가 난 학생들을

정의가 아닌 법이라는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마지막까지 간수된 것이

동성애와 낙태에 대한 논란이다.

 

샌델이 정의에 관한 여러 딜레마(사례)를 제시함으로써 학생들이 깨닫기를 바랐던 것은,

정의에 관한 딜레마가 정리되지 않을 때 공동체는 분열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는 경고다.

예컨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동성애와 낙태 문제가 미국을 두 동강으로 갈라놓지 않았던가?

이제 진도는 공동체에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하며, '공동선'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향해 나아간다. 이 뛰어난 산파술을 마이클 샌델은 당연히 희랍의 스승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순진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과 공동선이

바로 '정의'일 거라고 환원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에 우리가 속았기 때문이며,

이 역시 똑같은 내용(책)으로 우둔한 제자와 명민한 제자에게 각각 다른 메시지를 가르쳤다고 하는

희랍식 밀의(密意) 탓인지도 모른다.

 

<이현우>

안드레이가 말했던 그 이현우를 드디어 읽다.

앞부분은 어쩐지 페이지를 채우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겠다.

 

<이양수>

지적 유행에만 민감하고, 사회 전반을 흔들 전반적, 체계적 연구는 진행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을 샌델, 룰스 등의 어려운 예를 마음껏 들며 어렵게 얘기하고 있다.

 

<김도균>

그는 샌델의 정의가 롤스에서 왔다고 보고 샌델은 롤스+a를 구상했다고 여긴다.

솔직히 장정일 아저씨 때문에 산 책이고, 지금까지 읽은 내용 중 장정일을 빼고  
마음에 드는 부분이 전혀 없었는데 이것은 다르다.

진정 필요했던 샌델의 주요 내용 분석과 대한민국 현실에서의 적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분의 분량을 다시 한 번 읽어 볼 만하다.

 

그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은 (    )의 텔로스(목표, 본질)를 짚어 보면

정의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샌델의 정의론에서 찾아 보기 어렵지만, 중요한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기초 소득의 보장과 같은 복지의 문제를 거론하는데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중요한 복지의 문제를 공정성의 문제로, 공동선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정의 담론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옳다.

 

<최원>

샌델이 추구하는 그리스식 공동체관은 오히려 그리스식 정의관을 왜곡한다면서

글을 시작하는데, 아리스토 텔레스, 플라톤, 마이클 왈저 등이 말하는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잇고 있다. 그들의 정의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 아리스토 텔레스 - 정의의 문제가 바로 계급투쟁에서 기원하는 문제이며, 이 계급투쟁은

분배의 '기준'을 둘러싸고 벌어지기 때문에 상이한 기준들의 통약가능성을 찾지 못한다면

공동체 전체가 붕괴하게 될 것.

 

* 플라톤 - 경제와 정치 이 두 영역이 서로 섞이는 데에서 공동체의 모든 불행과

모든 부정의가 시작.

 

* 마이클 왈저 - [정의와 다원적 평등]에서 서회의 다양한 영역을 분리해 다원적 평등을

수립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정의.

최원을 읽으면 읽을수록 샌델은 정의가 아닌 '딜레마'에만 매달려 공동체 주의에

열광한 것에 불과할 뿐 진정한 '정의'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난다.

다시 장정일로 돌아가면 시원한 결론이 맺어진다.

 

<박홍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대하여 그가 쓴 글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당시의 정의가 적용 가능한 시민은 여자와 노예를 제외한 사람이었고,

정의는 돈에 좌우된다는 두 가지로 만족된다.

저자는 265쪽부터 나오는 '디오게네스'라는 인물을 꽤나 좋아하는 듯이 보이는데,

굉장히 흥미롭기는 하다. 기회가 되면 파봐도 좋을 인물.

 

<노정태>

282쪽, 정의에 대한 샌델의 눈높이.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진정 '철학적'인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바로 저 '각자의 정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에 따를 때 정의롭다'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떻게 그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서동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하지 않고 말장난만 실컷 하고,

'감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길게 하더니 급히 글을 마무리 짓는다.

 

<박가분>

민주주의가 실체를 알 수 없는 '상상계'라고 말하고 있는데 장황하기만 하고,

뭔가 잡히지 않는 모호한 글이다.

 

<이권우>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현상을 간단히 진단하고 미래를 비춰보며

깔끔히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주문할 책

<정치와 진리> 김선욱, 책세상, 2001
<법의 힘> 자크데리다, 진태원 옮김, 문지 2004
<교양과 무질서> 매슈 아널드, 한길사, 2006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창비, 2010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안병길, 동녘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작가선언6'9, 실천문학사, 2009
<로마사 논고> 마키아벨리, 한길사, 2003

 

발견된 오탈자

 

46쪽 밑에서10줄: 번번히 -> 번번이
92쪽 각주8 2줄: 걸 맞는 -> 걸맞는
287쪽 4줄: 대안을대항 -> 대안을 대항
334쪽 7줄: 사고을 -> 사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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