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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평점 :
장정일 독서일기에서 독후감을 읽고 고른 책.
6장에 걸친 긴 글인 이 작품은 정조 시절 패관소품 유행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대한 연구에
관한 것인데, 저자는 그와 관련한 연구에 강이천이라는 생소한 선비를 비중 있게 다룬다.
반복이 너무 심하고, 질질 끄는 부분이 커서 조금 줄였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됐을 것이란 것말고
다 좋았다.
책이 워낙 뒤죽박죽이라 정리한 종이의 내용을 적다 보니 깔끔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내용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볼지는 알 수 없지만 각 사건이나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내용이해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멋진 글을 쓰자는 생각은 없지만 어찌 됐든 정리해 놓고도 조금 찜찜한 독후감이다.
1장.
<강이천의 유언비어 사건>또는 <해랑적 사건>이라 부르는 강이천 사건과 관련이 깊은
저자의 연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정조,
그는 정조가 당시의 커다란 변화를 감지하고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보수적 개혁을 펼쳤는데,
이는 최소한의 변화를 용납하는 것이었고, 문예에선 정약용을,
그림에선 김홍도를 적극 활용했단다.
강이천 사건을 다루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정감록.
정감록은 최초의 최후심판 기록서인데, 천주교와 정감록의 두 문화가 상호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고, 가설을 깊이 있게 다룰 것이라고 예고한다.
정감록과 천주교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18세기 후반에는 정감록 소문화 집단이 천주교에
호감을 가졌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2장.
2장에서는,
강이천이 뛰어난 선비였음을 여러 시험의 결과를 들어 증명하는데
결국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가 좌시(애꾸)에 다리가 불편해서였다고.
그리고 강이천 사건에 대해 죄인들의 심문현장 기록을 들어 설명하는데,
강이천은 김건순과 김신국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사기를 친 것이라고 진술한다.
저자는 형조가 죄인 강이천과 공모하여 사건의 본질을 흐려 놓았다고 말한다.
3장.
진술에서는 부인했지만,
강이천을 기준으로 그들은 지하에서 암약했다는 혐의가 있었고,
그것도 '서방성인'을 추앙하는 비밀집단으로서
정점에 천주교 신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다.
3장에서 다룬 또 하나의 이야기 '문체 반정'을 왜 했는가?
1) 탕평을 위한 정치적 도구
-> 특정 정파를 억누르기보다 미래의 집권층인 젊은 세대를 상대로 한 문화 투쟁.
2) 나라 망할 징조의 제거
-> 슬픈 아픔을 표현하거나 나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문체와 글의 금지를 위해.
3) 정조의 보수 반동
-> 도를 표현하는 것만이 순정한 문학이라 생각하는 정조의 반응.
문체반정과 천주교 탄압에 대하여.
겉으로 보기에 정조는 천주교의 확산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자신의 성격답게 조용히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은밀히 측근을 보내
천주교도들을 탄압했다고 하는데, 그중에는 박지원의 활약이 컸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 박지원은 그들을 말로써 설득해 눈물까지 흘리고 그만 두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가 보수였건 일자리 때문에 정조의 말을 잘 들었건 상관없이
역시 박지원 멋쟁이~!
4장.
신유박해와 함께 다시 떠오른 강이천 사건
사건을 중간에서 교묘하게 가로막던 정조가 죽자 다시 사건을 재조사하자는 의견이 커졌고,
어린 순조는 이를 받아들인다. 여기서는 정조가 어떻게 강이천 사건을 덮었는지가 나오는데
먼저 김달순과의 사이에 정치적 뒷거래가 있었다고 예고한다.
정리해 보면, 김정국이 사촌 동생 신국에게 강이천의 '요언'을 듣고 그 말을 전하려
궁에 남아 있던 이병모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정조는 김달순에게 먼저 내용을 알아 보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강이천이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방현아의 주장
강이천이 천주교인이었다든가 사건의 주동인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역적이었다는 것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
-> 천주교인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들이 있고, 사건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역모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강경훈의 주장
시파와 벽파의 가혹한 당쟁의 희생물이었다는 주장.
-> 당쟁이 아니라 그의 위험한 생각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강이천 주변인물들의 최후의 진술
272쪽에 나오는 강이천을 처음 고발한 김신국의 취조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도 그는 강이천에게 포섭을 당했다가 곰곰 생각하니 엄청난 일에 끼어든 것 같은 생각에
사촌형 김정국에게 알려 살길을 찾은 것 같다고 추론하고 있다.
286쪽의 이주황의 심문에서는 그동안 나오지 않은 사실이 발견됐다.
이는 조 대장이란 사람(조규진)이 이주황을 불러다 사건을 조사했는데 시기상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후에 이주황을 밀사로 기용해 '해도진인(섬에 사는 어떤 사람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
의 실체를 조사하도록 시켰다는 사실.
5장.
강이천 사건에 속해 있었던 김건순과 천주교를 연결시키기 위해 저자는
'당시의 천주교'에 대해 분석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원인
신자들이 주장하는 말세, 구세주, 재림에 대한 믿음, 더욱이 이방인을 믿음을 벗어난 정신적
지표로 삼는 데 대한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김건순은 어떻게 천주교에 전도되었나
아홉 살, 도교를 배우고 10여 세에 [천당지옥론]을 지었다 하니
종교에 지적으로 몰입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바가 없다.
또한 집안이 본래 넉넉했는데 남에게 재물 나눠 주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먹고 입는 것은 가난한 사람과 같았다고 하니 종교인으로서의 태도도 갖춘 셈이라고 본다.
그러니 그런 명성의 사람을 천주교에서 탐내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것.
천주교 박해가 심할 때 김건순은 체포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양반의 위세가 컸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 김건순도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를 살리기 위한 안동 김씨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록'과 '일성록' 등 역사서에는 한 마디도 없지만 '한국 천주교사'에는 상세하다고 함)
주문모 신부의 " 아, 그대도 소국의 소인임을 보이려 하는구려' 하는 말에 자신의 신앙을
과감히 고백했다고 한다. 여기서 주문모는 강이천 사건의 인물들이 믿고 있던 그 해도진인의
진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서양배와 천주교의 관계
이양선이 출몰할 때 개항과 관련해 이용된 천주교에 관한 것인데,
선교의 자유를 내세워 침략한 배들 덕에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신교의 자유를 얻었다고.
그렇다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실제로 선박을 요청했는가 하는 문제.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기 전엔 없었던 선박 요청이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 후 일어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저자는 정조21년 9월 프로비던스호가 출현해 천주교 신자인 역관 현계흠이 승선할
기회를 얻은 내용을 들어 주문모 신부와 선박을 굳이 묶으려 하는 주장들에 반대하고,
공식은 아니어도 새로운 세상을 위해 개개의 신자들이 요청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말한다.
6장.
뒤죽박죽이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물론 연구노트를 기준으로 그대로 책에 적용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알지만,
마지막에 흐름대로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앞의 내용도 더 체계적으로 다른 방법을 써서
보여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는 과연 편집의 문제일까, 저자의 문제일까.
다 읽고 나서 구입하겠다고 메모한 책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
발견된 오탈자
50쪽 밑에서9줄과 74쪽 6줄, 306쪽 5줄: 짐작컨대 -> 짐작건대
123쪽 1줄: 잘 된 -> 잘된
137쪽 2줄: 잘 하면 -> 잘하면
227쪽 1줄: 김건순의 -> 검건순이
257쪽 3줄: 그리고서 -> 그러고서
265쪽 6줄과 270쪽 7줄, 287쪽 8줄: 그리고는 -> 그러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