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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지음, 서찬석 옮김 / 책갈피 / 2005년 6월
평점 :
![볼셰비키.jpg](http://blogfiles.naver.net/20120426_158/aspasia011_1335369882047HNWJ6_JPEG/%BA%BC%BC%CE%BA%F1%C5%B0.jpg)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은교'보다 더 먼저 읽은 이 책을 이제야 더듬는다.
독후감을 쓰는 시간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는데, 문학작품인 앞의 두 가지를 쓰는 시간보다
꼭 두 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독후감이 될 게 뻔했기 때문.
세계를 뒤흔든 그 열흘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기록한 존 리드.
모든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객관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상황에 대해 전달할 수 없을
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 덩그러니 들어가 귀중한 자료를 책으로까지 내 준 고마운 저자.
사실 길고긴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애써 쓸 필요 없이 그저 저자의 서문 여섯 페이지를 베껴
두는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두는 것이 내게 훨씬 도움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의 저자 서문은 자신이 기록한 책 한 권과 당시의 방대한 열흘을 모두 담고 있다.
고로, 이번 리뷰는 저자 서문을 모두 베껴 써 두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저자 서문
이 책은 내가 직접 본 격렬한 역사의 한 단편이다. 이 책에서 나는 10월 혁명의 과정,
즉 볼셰비키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러시아의 국가 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로 넘긴
과정을 상세히 그려내는 데 만족하려 했다.
이 책의 대부분은 러시아 수도이자 봉기의 중심지인 "붉은 페트로그라드"를 무대로 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일들이 러시아 전역에서, 간격을 두고,
더 강하거나 약하게 되풀이됐음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내가 쓰고 있는 여러 권의 책들 중 최초의 것으로, 직접 관찰하고 경험했거나
또는 신빙성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는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서술했다. 단, 1장과 2장에서는
10월 혁명의 배경과 원인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 두 장은 읽기에 다소 까다로울 수 있지만
이어지는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다.
많은 의문들이 떠오를 것이다. 볼셰비즘은 무엇인가? 볼셰비키가 세운 정부의 구조는 어떠했는가?
10월 혁명 이전에 제헌의회를 옹호했던 볼셰비키는 왜 그것을 무력으로 해산했는가?
볼셰비즘의 위험이 분명해지기 전에 제헌의회를 반대했던 부르주아지는 왜 나중에
그것을 옹호했는가?
이런 질문들, 또 그 외 수많은 질문들을 여기서 답할 수는 없다. 나의 또 다른 책
[코르닐로프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까지](존 리드는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는
러시아 혁명의 과정을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과 함께 추적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혁명 조직들의 기원과 기능, 여론의 변화, 제헌의회의 해산,
소비에트 국가의 구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
볼셰비키의 등장과 관련해 우리는, 러시아의 경제와 군대가 1917년 10월 25일에 갑자기 해체된
것이 아니라, 몇 달 전, 더 길게는 1915년부터 시작된 과정의 논리적 결과로 해체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짜르 왕실을 장악하고 있던 부패한 반동주의자들이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러시아를 고의로 파괴하려고 했다. 1915년 여름의 패배를 불러온 전선의
무기 부족, 군대와 대도시의 식량 부족, 1916년 생산과 운송의 붕괴 등은 반동 세력이 주도한
대규모 방해 행위의 일환이었다. 이 사태는 2월 혁명이 일어나 저지됐다.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던 1억 6천만 명의 사람들이 단번에 2월 혁명을 통해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새 체제는 첫 몇 달 동안 혼돈에 휩싸였다. 그러나 국내 상황과 군사력은 점차 좋아졌다.
하지만 '밀월'은 길지 않았다. 유산 계급은 자신들이 짜르의 권력을 대체하는 형태의
정치 혁명만을 원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프랑스, 미국과 같은 입헌공화국, 혹은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국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은 산업과 농업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윌리엄 잉글리쉬 월링은 1905년 혁명을 다룬 <러시아 통신>에서,
훗날 볼셰비즘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러시아 노동자들의 심리 상태를 매우 잘 묘사했다.
그들(노동자들)은 아무리 자유를 허용하는 정부라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사회 계급의 수중에
놓이면,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폭력적이거나 독단적이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바리케이트를 준비했지만,
동시에 그들(자본가 계급)에 대해 계속 공부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만이 실제 경험에서
그들(자본가 계급)을 배워 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본가 계급에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었고, 또 기꺼이 싸우려 했다. 하지만 다른 계급들의 존재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격렬한 대립에서 어느 쪽에 설 것인지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들(노동자들)은 우리(미국)의 정치 제도가 러시아의 정치 제도보다 낫다는 데 모두 동의했지만
한 독재자를 자본가 계급이라는 또 다른 독재자로 바꾸는 (미국식) 정치 제도를 위해
조바심내지는 않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모스크바, 리가, 오데사에서 수백 명씩 사살되거나 처형되고,
감옥에 수천 명씩 투옥되고 사막이나 북극으로 유배된 것은, 미국 노동자들이 금광이나
크리플 크리크 [미국 콜로라도 주 중부에 있는 도시]에서 누리는 법적 권리, 그 애매모호한
권리 정도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러시아에서는 정치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혁명이 진행됐다. 그리고 이는 볼셰비즘의 승리로 귀결됐다.
소비에트 정부에 적대적이었던 러시아 정보부의 미국 지부장 AJ색은 그가 쓴
<러시아 민주주의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볼셰비키는 니콜라이 레닌을 총리로 하고 레온 트로츠키를 외무부 장관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2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리라는 사실을 자명했다.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역사는 지속적인 성장의 역사였다.
외국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무지'를 자주 강조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서구인들 같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 조직의 측면에서 잘 훈련돼 있었다. 1917년에 러시아 소비자 협동조합의
회원은 1천 2백만 명이 넘었다. 또, 소비에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자들의 조직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만큼 사회주의 이론과 적용에 능숙한 사람들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윌리엄 잉글리쉬 월링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러시아가 오랫동안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노동계급 내 몇몇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혁신을 위한 사상을 가지고 노동자들에게
뛰어들었다.
소비에트 정부에 적대감을 나타내는 많은 작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최종 국면이 볼셰비즘의
야만적 공격에 맞선 '고결한' 사람들의 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며
오히려 유산 계급이 대중적 혁명 조직이 성장하자, 조직들을 파괴하고 혁명을 중단하려 한
것이다. 유산 계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케렌스키 내각과 소비에트를
파괴하기 위해 운송을 중단하고 국내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공장위원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공장을 폐쇄하고 연료와 원료를 빼돌렸으며, 전선에 있는 군대위원회를 파괴하기 위해
사형 제도를 부활하고 군사적 패배를 공모했다.
유산 계급의 행동은 오히려 볼셰비키의 횃불이 타오를 수 있는 훌륭한 연료로 작용했다.
볼셰비키는 계급 전쟁을 설파하고, 소비에트의 우수성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에 대항했다.
이러한 양 극단 사이에 '온건' 사회주의자들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그리고
여러 소수당들이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를 진정으로 혹은 마지못해 지지했으며,
유산 계급의 공격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자신들의 이론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러시아에서 정치 혁명만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러시아가 사회 혁명을 하기에 아직 경제적으로 미숙하고, 러시아 대중은 권력을 넘겨
받을 만큼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권력 장악 시도는 결국 반동으로
귀결될 것이고, 몇몇 무자비한 기회주의자들이 구체체를 복구할 것이라고 봤다.
결국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을 넘겨 받더라도 사용하기를 주저할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러시아가 반드시 서구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 단계를 거쳐야 하며, 사회주의는
최종 단계에서,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함께할 때 그 성숙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일단 서구 민주주의를 조금 개선한 형태의 의회주의 국가로 나아가야
하며, 그 때문에 정부 내에서 유산 계급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유산 계급을 지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가
필요했다. 반면, 부르주아지는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사회주의자
장관들은 그들의 전체적인 구상을 부르주아지에게 조금씩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유산 계급은
자신들의 주장을 더 강하게 고집할 수 있었다.
이런 공허한 타협을 볼셰비키가 마침내 뒤엎었을 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유산 계급
편에서 싸우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오늘날에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와 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볼셰비키는 파괴적인 세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건설적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었다. 만약 그들이 정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11월에는 분명 독일 제국의 군대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것이다.
또 러시아는 다시 짜르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됐을 것이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은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선 지 만 1년이 지난 후에도, 볼셰비키의 봉기가
'모험'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고통 받는 민중을 이끌고 역사에
뛰어든, 또 민중의 광범하고 소박한 희망에 목숨을 내건, 인류가 시도한 가장 경이로운
모험 중 하나였다. 대농장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 주는 기구가 설립됐고,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직접 산업을 통제하도록 했다. 또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
소비에트들은 모든 마을, 도시, 주에서 지방 행정업무를 맡을 준비를 했다.
볼셰비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도로,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이었음을,
또 볼셰비키의 등장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현상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가들이 기록을 뒤져서 파리코뮌의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밝혀내려 하는 것처럼,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정신이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지도자들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투쟁의 과정에서 내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중요한 날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꼼꼼한 취재기자의 눈으로 사건들을 보려 했고, 또 진실만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서문을 끝으로 서문에 나온 모든 상황들에 대한 꼼꼼한 사실의 기록들이 이어진다,
아주 길게길게. 물론 사실과 진실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고, 그것은 영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