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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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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엄마가 생겼다, '마야 안젤루'라는.
표지에서 어마어마하게 소개하는 사람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을 만큼의 내 무식에 원통해 하며 머리를 짓찧는다.

책을 받는 순간 '어 되게 얇네, 이걸 읽고 과연 제대로 된 리뷰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난 멀었다.
이 책은 읽는 족족 내 이야기가 태어나는 좋은 책이었으니까.

♠하나♠ 고향
나는 ㅇㅇ에서 태어났고, ㅇㅇ에서 자랐으며...라는 사실.
그렇다. 그것은 실제로 사실에 불과했고 나란 아이의 실상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온전한 어른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내면의 순진무구 고향'이라는 정체를 정확히 밝혀낼 수 없는 그 고향이 없다면 상처에 풍덩 빠진 우리는 무엇에 기댈 것인가!  

♠둘♠ 베푼다는 것은...
이 글이 뻔한 자선사업으로 끝날 것이란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녀는 미소로 베푼다고 했다. 나 역시 친절한 말과 미소로 생을 사는 편인데, 사실 나는 베풀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나를 위한, 내가 먼저 미소짓고 친절하게 굴면 반 이상으로 줄일 수 있는 인간
관계에서의 상처 때문이었다. 내 미소와 친절이 베풂이 될 수 있다니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미소를 이끌어내는 부분은 참 인상깊다.
저런 지혜로운 어머니가 그녀와 같은 딸을 존재케 했음에 틀림없다는 내 결론, 물론 근거는 없다.

♠셋♠ 계시를 받은 날
고등학생인 그녀가 성관계 한 번에 덜컥 아이를 가졌는데까지만 있고, 아버지 없는 아이를 기른 과정은 빠져 있다. 그저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아들을 얻은 행복한 어머니인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은 그녀 인생 최고의 날인 것이다. 

♠넷♠ 아이를 낳는 것에 관하여
아! 아기 고양이와 어미 고양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뒷모습 그림.
숨이 막히게 아름답다.
졸업을 앞두고 임신한 우리 나라 고등학생의 풍경과 매우 다른 분위기. 글쎄, 뭐가 옳은지는 따지기 힘들겠지만 생명은 무조건 축복받을 문제란 것! 그녀는 그녀의 가족이 자랑스러울 만하다.

♠다섯♠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우연히 마크를 만난 것이고, 필연적으로 그녀를 강금,폭행한 마크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이 부분에서 책장을 넘기기 힘들다는 느낌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때 생긴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여섯♠ 솔직한 대답
그녀의 어머니 비비언 백스터는 다른 국적의 사람임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걸 보니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사람 사는 게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잘 지내냐고 묻는, 진짜 궁금해서가 아니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사용하게 되는 거짓 인사들! 하지만 딱히 다른 말을 찾아내기도 어려운 애매한 건네기 인사.
그녀는 진실을 말하자고 하는데 보자마자 " 너 역시 어쩔 수 없는 유행 따라가기쟁이구나, 그 옷은 최근 부아걸이 뮤직비디오에서 입었던 그 촌스러운 복고풍 의상이잖아."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생각해 볼 거리가 없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일곱♠ 천박한 문화
외모나 좋지 않은 성향을 개그소재로 삼는 문화를 천박하다고 표현했다. 나 역시 요즘 우리나라에서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뱉어내는 막말개그를 마뜩치 않게 생각하던 차였다. 충고라는 것은 아주
친근한 사이에서 상대방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방향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경우에만 행해져야 상대방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여덟♠ 폭력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미국에서는 종종 전문가들이 강간을 용인할 수 있고, 심지어 납득할 수 있는 사건으로 간주하기도 하나보다. 그런 말을 내뱉은 것들은 비역 전문 강간범에게 심한 폭력 속에서 제대로 한 번 당하게 한 뒤 혀를 잘라 드려야 한다.  세상에는 '이론' 속에 가둘 수 없는 행동과 사건도 있음을 그것으로써 똑똑히 알 수 있도록.
강간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가 돼서는 안 된다.

♠아홉♠ 어머니의 지혜
보통의 처세책은 '남 얘기'로 치부하기에 바빴는데, 신기하게도
그녀가 엄마 얘기를 하면 난 어느새 내 얘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엄마 나 독후감 대회 3등 했어요.'
'어디서 주최한 것인데?'
'인터넷 서점이요.'
'역시 우리 막내는 대단한 아이야.'

마야! 나 역시 우리 엄마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우리 엄마는 다섯 딸을 혼자 힘으로 바르게 키워 주실 만큼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세요, 이 험한 세상에서 말이에요.
내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그래요, 나도 술을 마시고 때때로 욕도 하는 나쁜 습관을 고쳐야겠어요!

♠열♠ 모로코가 준 선물
생각이 몸을 지배하는 무서운 경우를 다룬 내용.
바퀴벌레로 착각한 건포도 네 알과 무슨 일이 있어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할머니의 엄격한 가르침.
그런데 그게 건포도가 아니라 진짜 식용 바퀴벌레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열하나 ♠ 오늘 나는 축복 받은 사람
나 역시 누구보다 '긍정'을 위해 노력하고 행동하려는 사람이다.
내 아이와 남편이 생기면, 지켜야 할 대상이 생기면, '어딘가에 목을 매달 수만 있다면'이 가끔의 습관으로 나올 만큼의 나의 부정한 생각들도 사라질 것이란 막연한 희망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래 계속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오늘을 즐기지 못한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열둘♠ 낯선 사람과 친구되는 법
그녀를 친했던 누군가로 착각한 어느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던 그녀와, 착각한 그녀가 친구가 된 신기한 경험. 우연으로써 만난 그녀가 사실은 마야의 필연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 생이란 놈은 우연을 가장해서 필연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글쓰기를 한다.

♠열셋♠ 빛나는 무대에 서서
'셀리아 크루스' 덕에 그녀는 음악 없이 시를 낭송하는 것만으로도 청중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나는 과연 무대에서 어떤 예술가로 보였을까?
어중이 떠중이 가벼운 단역 배우?
셀리아 크루스가 궁금해서 찾아 음악을 들어보았다.  분명 날로 들으면 더욱 큰 감동을 줄 것만 같은, '마음'을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열넷♠ 시작은 작은 빛에 불과했으나
모든 인간에게 와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준 이민의 나라가 행하는 인종차별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는 정말이지 끝도 없다.
더 말해 무엇할까! 피내 루 해머와 미시시피 자유민주당, 그들이 역사의 어깨를 딛고 서서 미국인 들의 등에 업혀 있던 악마를 끌어내렸다고 말하는 그녀.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 악마를 등에 업고 살고 있나?
아...너무 많구나.

♠열다섯♠ 교양에 관하여
아! 그래, 그녀의 말이 맞다.
교양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겸손한 태도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우리는 교양을 잘못 알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양을 떠올려 볼 일이다.

♠열여섯♠ 불멸의 은막
아무래도 입을 열면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과 여러분의 전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진심이 불쑥 튀어나올까봐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진심'이란 단어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쓴 것일까? 문장이 조금 이상하다.  

이에 대한 답을 출판사 측에서 받았는데 그녀의 진심, 그러니까 모든 것을 가진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워서 한 말이라고 한다, 어쩌면 내가 마야 언니를 너무 비뚤어진 시각으로만 봤기 때문에 '진심'이란 단어를 반어법이나 빈정거림이 아닐까 생각했던 듯싶다. 부끄럽다.

각설하고, 그녀는 색 때문에 겪은 부당함을 진정으로 극복했을까? 그래, 마지막 말처럼 그저 기운을 낼 뿐이겠지.

♠열일곱♠ 나를 사랑한다는 것
너무 후련한 일화다. 물론 드라마 제작 거절 뒤에 참은 다음과 같은 말은,  

" 장담하건대 나 같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싶진 않을 걸요.
나는 위협을 당한다 싶으면 이기겠다는 각오로 싸우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그쪽보다 서른 살이나 많고 다혈질로 유명하다는 건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요. 싸움이 끝나고 내가 그쪽을 무찔렀다 싶으면, 내가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고통과 기쁨과 두려움과 영광을 상대도 못 가리고 까불어댄 여자 하나 이기는데 썼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워질 테고, 나는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겠죠.
반대로 그쪽이 나를 이기면 좌절감에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기 시작할 거고요."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여자인지 알 수 있게 해줌은 물론이다.
 

♠열여덟♠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아직 많은 사람을 보낼 만큼 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녀의 책을 다시 들추어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자신이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되뇌게 되겠지.
내가 그녀처럼 일흔이 넘게 된다면.

♠열아홉♠ 위로의 말
그야말로 위로의 말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스물♠ 내 삶의 닻을 내릴 곳
설명하는 곳이 대한민국의 어느 곳이었다면 '와 정말 좋겠는데?
한 번 꼭 가봐야지.' 할 텐데 참으로 아쉽구나. 

♠스물하나♠ 밝은 내일을 기대하며
그녀는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래! 천박한 문화를 묵인하면 무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의 미래가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미래를 용감하게 직면할 수 있는 현명한 머리와 용기가 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 이 공간에 대해 책임을 지자.
지금 당장.

♠스물둘♠ 다시 남부의 뿌리를 찾아서
워낙 넓은 땅덩어리라 미국을 우리에게 대입하면 안 되겠지만 어쩐지
이 부분을 읽으니 전라도에 대한 오랜 편견이 떠오른다.

남부라고 하면 넉넉하고 푸근한 사람에서부터 잔인하고 격렬한 증오에 이르기까지 이미지가 다양하지만, 어느 누구도 남부를 가리켜 옹졸하거나 무관심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자꾸만,
'남부'라고 쓰고 '전라도'라 읽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스물셋~스물여섯♠
다양한 시로 채워져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 장정일도 시인인데, 신기하게 난 그의 시보다 희곡이나 소설을 더 좋아한다. 그녀도 시를 많이 쓴다고 하는데 시는 너무 빨리 읽히고 여운이 없다.
아마도 내게 문제가 있나보다.

♠스물일곱♠ 진실 안에서 배우는 교훈
하느님을 믿지 않던 한 때의 일화로 시작해서 '언젠가 나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때 부족하다는 판정이 내려지지 않기를 소망한다!'고 끝내고 있다.

그래, 이런 것들을 시작한 누군가가 없다 여기기에 인간사는 너무 신기하고 놀라운 것 투성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정말 있어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스물여덟♠ 믿음을 유지하는 것에 관하여
'스물일곱'에서 내가 적은 것을 그녀의 입을 빌어 '스물여덟'에서 다시 얘기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하게 만드는 건 믿음이다. 나는 그저 그리스도교도가 되기 의해 오늘도, 내일도 노력할 따름이다.'가 되겠는데 믿지 않으면 설명할 도리가 없는 그것들을 그들은 그냥 믿기 위해 사는 것이겠지.
언젠가 나도 그 대열에 끼겠고, 그게 어떤 종교가 됐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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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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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가 꽤 거칠다, 그런데 재미있다.
가벼움을 지닌 거침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거침.
하지만 재미를 깎아내리는 길고 긴 문장들.
단어나 상황을 설명하느라 그것을 괄호 역할과 마찬가지인
줄 속에 가둔 글이 한 페이지에 보통 두 번 이상은 꼭 나온다.
필요 없는 말들이 너무 많아 줄이고 줄이려 노력했다면 한 권으로도 끝낼  수 있었고  더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크다.
결론적으로 이 작가의 글쓰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억울하게 교수직을 접어야 했던 콜먼이 자신의 억울함을 폭로하기
위해 창조를 빌리려는 작업에 2년이나 머리를 싸매놓고는,
'난 전문가들 흉내도 못 내겠어. 나 자신에 대해 글을 쓰면서 창조라는 단계까지 올라설 수가 없더군. 원고 어딜 들춰봐도 여전히 어떻게 손을 대야 좋을지 모르겠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회고록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라고나 할까 뭔가를 설명해낼 가망이 안 보이는 그런 거.' 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것은 자기 얘기를 글로써 해보려다 실패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에 맞지 않게도 서른셋의 여자와 섹스를 하는 콜먼. 잘못된 성욕으로 강간을 하는  남자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물론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미국의 대표 지식인 콜먼이 글을 읽을 줄 모르고 배울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다며 거부의 의사도 확실한 포니아를 만나는 이유는 바로
섹스라고 했다. 마누라를 잃은, 성행위의 기회가 거의 없을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에게 그녀는 비아그라까지 사용하게 하는 중요한 존재 이유를 만들어준 것이다.

보통 지적으로 왕성한 남자들이 자신보다 학벌이 터무니없이 낮은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를 꽤 들은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 충분히 존중받는 그들은 왜 자신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그녀들을 택했을까?
이것 역시 내가 늘 떠들고 다니던 '지'를 넘어선 '천박'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언젠가 봤던 태백산맥에서 글도 모르는 농부지만 그들의 몸은 스스로 많은 것을 깨치는 지혜 덩어리라고 말한 부분이 떠오른다. 그게 아니면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크지만 그들에게서 진심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가 집에서만이라도 진정한 존중을 받기를 원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 또 다른 생각도 들지만 뭐, 여기까지.
 

콜먼과는 대조적으로 전립선 제거 수술을 받아 발기가 불가능한, 비아그라도 안 될 만큼 신경까지 죽은 화자.
젊은 시절 반복되는 욕구해소의 허무로 언젠가는 금욕을 단행하겠다는 생각을 실제로 거의 운명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충격은 덜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콜먼 덕에 그의 몸과 마음이 성욕으로 그득하게 될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모든 상황 사건과 관계없이 성욕이란 그런 것이니까,특히나 남자에게 있어서 성욕이란 더욱 더.

베트남전에 참전한 포니아의 전남편.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고, 마치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간 듯 화자는 레스터 팔리를 '그'라 지칭하며 신나게 과거를 들추어낸다.
어느새 그는 그녀를 때리던 파렴치 남편이 아니라 불 속에서 타 죽게 생긴 아이들을 구할 생각도 않고 불이 난 사실조차 모른 채, 차안에서 애인의 물건을 빨아대던 포니아가 나빴다 여기게 만들
만큼 설득력 있게!
그렇다. 끔찍한 일로 인해 미쳐버린 사람에게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콜먼이 생각하는 포니아.
열네 살 이후로 가출 소녀로 지내왔고, 자신의 생애 내내 도대체 설명해낼 길 없는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줄곧 도망쳐오듯 살아온 아이. 남자가 제공해줄 안정과 보호를 찾아, 잠결에 몸만 뒤척여도 죽이려고 달려들어 목을 움켜쥐고 조르는, 전투 때문에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퇴역군인과 결혼한 아이. 불성실한 아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거짓말로 둘러대는 아이. 글을 읽을 줄 알면서 읽을 수 없다고 하는, 글을 못 읽는 척하며, 이러한 심각한 결함을 기꺼이  감당함으로써, 자신이 속해 있지 않으며 속해 있을 필요도 없지만, 온갖 잘못된 이유를 들이대며 자신이 아종(亞種)에 속해 있다는 것을 콜먼이 믿도록 만들고 싶어 하는, 아종의 일원으로 행세하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아이. 자신이 아종에 속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아이. 일곱 살에는 자신의 존재가 환상이었고 열네 살에는 불운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재앙이 되어버렸고, 직업은 웨이트리스, 매춘부,농부, 청소부 어느 것도 아니었지만 호색한인 계부의 영원한 의붓딸이자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어머니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자식인 아이,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을 속여먹으려 한다고 여기지만 어떤 것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며, 어떤 것에도 겁을
집어먹지 않고 버티는 능력은 어마어마하지만 인생에서 얻는 것은 그야말로 하찮은, 불운의 특별한 사랑만 받는 아이.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온갖 고약한 꼴을 다 당하면서도 그런 팔자에 전혀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스티나 이후로 콜먼을 누구보다 흥분시키고 성적으로 자극하는, 도덕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콜먼이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혐오스럽지 않은 인간은 아니지만 그나마 가장 가장 덜 혐오스러운 인간이며, 그토록 오랫동안 정반대 방향을 겨냥해 살아왔기 때문에-끌리게 되었고, 전에는 그를 얽어매는 요소였던 올바름이라는 잠재된 감정이 이제는 정확히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기 때문에 육체적 결합 못지않게 정신적 결합까지도 공유하는, 생각지 않게 그와 가장 허물없는 사이가 된 아이. 그가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차례씩 덮치는 노리개이기는커녕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까운 동지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릴 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직접 책을 보며 칠 만큼 훌륭해서 이 글을 베껴 적은 것은 아니다. 작가처럼 한 사람을 저렇게 길게 중복되지 않는 낱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작가는 중복을 자꾸 한다, 짜증나게.

219쪽에 보면 콜먼이 왜 백인으로서 거짓생을 살았는지 독자에 입장에서 묻기에 충분한 부분을 어머니의 입을 통해 질문하고 있다. 진짜 그는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백인으로 살기 위해 안간힘 했을까?
224쪽에서는 월터는 흑색 그대로, 콜먼은 백색이 돼서 각자의 투쟁 을 한 것이라고 나오는데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찰스 드루 박사 이야기.
혈액을 저장할 수 있도록 응고를 막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인데 그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 사고현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병원에서 흑인환자를 받아주지 않는 바람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고. 이 한 가지 이야기만으로도 두 권의 긴 책을 모두 설명할 만큼 사회,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은 나라를 필립 로스는 그리고 싶었겠지. 그래 필립 로스야, 니네 미국 참 더러운 나라다.

아래는 오탈자.

<1권>
144,10줄/175,밑에서 8줄/247,밑에서 4줄/337,밑에서 6줄
-> 검정색이 아니고 검정 또는 검은색.

317,3줄
-> 안 돼지 => 안 되지
 

<2권>
31,10줄/86,10줄/95,밑에서 9줄/97,밑에서 7줄/99,밑에서 5줄/
102,9줄/258,밑에서 10줄/264,밑에서 12줄
-> 검정색을 모두 검정 또는 검은색.

124,밑에서 6줄
-> 갖지 않다고 => 갖고 있지 않다고 또는 갖지 않았다고

130,밑에서 8줄
-> 사람들이 어울리지 => 사람들과 어울리지

214, 끝줄
-> 바래요 => 바라요 또는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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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묘 2010-03-2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휴먼 스테인> 담당편집자입니다.
궁둥갤러리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우선 독서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오탈자로 지적하신 내용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1. ´검정색´이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데요. 지적하신대로 ´검정´ 또는 ´검은색´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검정색을 굳이 쓸 경우에는 '검정 색'으로 띄어 써야 합니다. ´검은색´으로 통일하겠습니다.

2. ´안 돼지´ 역시 ´안 되지´가 맞는 표기입니다.

3. ´갖지 않다고´ -> 지적하신대로 ´갖지 않았다고´가 맞습니다.

4. ´사람들이 어울리지 못하는´ -> 말씀하신대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이 자연스럽습니다.

5. 대화문에 포함된 ´바래요´의 경우, ´바라요´가 원칙적으로 맞는 표기지만, 입말로 사용할 경우에는 허용할 수 있습니다.

궁둥갤러리님, 소중한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해주신 내용은 <휴먼 스테인> 다음 쇄에 반영해서 수정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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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무언가 잊은 채 하지 않고 살았던 일,
이를테면 소설쓰기나 수영 같은 것을 당장 시작해야겠다는 충동이 불끈불끈 인다.   

처세책의 형식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듯 모호해 보이는 이 작품은 어느새,  책 속에서 말한 문장을 패러디하자면
'It's only books, but books it is.' 라는 말과 동체(同體)가 된다. 

11쪽.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않으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의 책이라곤 [만연 원년의 풋볼]밖에 안 읽었지만, 줄곧 소설만 쓰던 것으로 알던 이 작가가 불현듯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새로운 형식에 목을 매던 그였기에 더이상의 형식이 나타날 생각을 않자 복잡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을 '진실'에 고개를 돌리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 물론 그 다음 대사에서 힌트를 보란듯 주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소설을 쓰겠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간혹 보이는 진한 글씨들은 매우 눈에 거슬린다.  마치 중학교 교과서에서 강조하기 위해 굵은 글씨로 새겨놓은 것다고나 할까? 무엇이 중요한지 여부는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짙은 내게 이런 식의 강조는 달갑지 않다. 출판사의 의도가 무엇이건간에.

13쪽
서장의 제목과 같은 문장 "What! are you here?"이 있다는 <Little Gidding>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는 고모리 나쓰모와 만나지 않은 30년의 시간을 이 시와 같이
다모쓰의 입을 통해 간략히 설명하며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46쪽.
[만연 원년의 풋볼]이란 제목을 보고 반가워하던 찰나 내가 그 책에 대해 아쉬워 했던 점에 대한 답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더 거창한 사건이 될 수도 있고, 역사와 연결지으려 해도
충분히 가능한 큰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을 텐데 작가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시 독서모임에서는 한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그냥 거대한 사회 또는 세계로까지 해석할 수 있게 하려는 작가의 대단한 의도일 것이다 라고까지 얘기가 나왔었는데 작가는 그 사실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만연 원년의 풋볼]에서 묘사한 농민 봉기 이야기는 내게 지방 전체를 묘사할 역량이 없어서 우리 집안에 전승되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축소해버린 셈이지.' 라고.
이 말과 함께 역시 책을 해석하는 일은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책에 관한 얘기로 본격적으로 빠져보려 한다.
그러려면 우선 몇 가지의 사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
사쿠라가 어린 시절 찍은 애너벨 리 영화와 성인이 되어 기획하는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와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두리. 자칫 애너벨 리와 롤리타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나보코프 책의 초반에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험버트험버트의 어린 시절 사랑 애너벨 리를 꼭 기억해야만 한다. 험버트는 성인의 사랑과 비길 거대한 그녀를 어린 시절 잃은 충격 때문에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 나이의 소녀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거나 성인이더라도 애너벨이란 이름을 가진 롤리의 엄마에게 연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험버트의 정신과 포의 은유와 열정으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낸 미군 데이비드. 그가 버려진 전쟁고아 사쿠라를 이용해 영화를 찍은 이유는 텅 비어 있을뿐, 책의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 많이들 그랬던 것처럼 소녀 포르노를 찍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왜 끝까지 보살피고 결혼까지 했던 걸까?

약을 먹고 잠에 빠져들어 중요한 사건을 모르고 있는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공포스럽지만 알 수 없는 꿈을 꾸며 불안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겉껍질로만 보자면 잘 나가는 여배우로 존재한다.

60쪽.
'사쿠라 씨는 아기 때부터 8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얼굴, 몸매, 자세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살아가다가, 아주 천천히 죽음을 맞아 그런 사실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녀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런 식으로 사쿠라가 읽었다는 저자의 롤리타의 해석처럼(실제로 어떤 글이었는지 알지 못한다)롤리타와 사쿠라를 연결짓고 있는데, 위의 글과 같이 형상화 한 것은 롤리타 증후근을 앓는(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남성이 원하는 성인이 되기 전의 봉긋한 젖가슴과 굴곡 없는 팔다리를 지닌, 변덕이 심하고 새침한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 단계의 아이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사고 후에 자라지 않은 그녀의 성적 정신 같은 그런 것?

책을 중간 정도까지 읽다보면 언젠가 읽었던 '로시니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영화는 전쟁이다'(이하 로시니) 가 자꾸 떠오른다. 구성이 어쩐지 그 작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을 읽든 장정일 또는 배수아와 연결시키는 나의 못된 습관, 로시니를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이번도 마찬가지로, 작품이 영화화가 된 경우가 꽤 있는 장정일이 이와 같은 형식의 (시나리오화 하고 제작자, 감독, 배우 등과의 일을 재미있게 구성)
글을 한 번 쯤은 냈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만큼의 거대한  작품이 나올 수가 없는 만큼 작은 스케일이 될 수밖에 없음은 나도 안다.  아~삼천포로다, 각설하고.

김지하 시인의 구속 사건 덕인지 때문인지 모를 일로 함께 모여 미하헬 콜하스 200년 축하기념 작품을 만들게 된 세 사람,겐자부로, 고모리, 사쿠라.
클라이스트 원작과 일본에서 일어난 봉기를 조합하여 만들기로 했지만 배우로서의 욕심이 큰 사쿠라의 제의로 인해 영화는 어느덧 겐자부로가 자란 마을의 전설인 메이스케의 이야기를 담는 형식으로 흐르고 주인공도 콜하스의 남자가 아닌 메이스케의 여성으로 바뀌는 분위기에 고모리는 방향을 전환하고 겐자부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대시키기에 이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결론적으로 보자면 어린 사쿠라가 겪은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 소녀 포르노 사건이 개입되어 영화는 그만 엎어지고 만다.

데이비드와 사쿠라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어린 그녀에게 약을 먹여 집게 손가락을 집어 넣으면서까지 처녀를 파괴해 그것을 영화영상으로 담는 데이비드. 그의 의도에 대해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금의 힌트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 성인들이 하는 삽입섹스를 하지 않고 어린 시절 파괴된 질 상태의 그녀를 유지하게 만든다. 우습지만 그녀는 삽입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처녀인 것이다, 물론 성기의 삽입유무에 따르는 정의로 치자면.
그런 그가 암으로 죽고 자신과 겐자부로의 사이에서 묘한 상황을 만들어내던 고모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그녀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겐자부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의 동의 하에 삽입성교를 치른다. 그러니까 이제 더이상 그녀는 옛날의 그 애너벨 리가 아닌 것.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는 과거의 그 일에 대해 조금의 그림도 알고 있지 못한 채로 영화를 엎게 만든 소녀들의 사진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고모리에 의해 무삭제판 애너벨 리를 보게 된다. '솔직히 나도 비슷한 일로 신경써온 적은 있어요. 오랫동안 그랬는데, 실제로 어떤 필름인지 보고 나서, 그 하얀 관의의 소녀 시절의 나와 행복한 화해를 했어요, 재회가 아니에요, 화해예요. 필립의 아름다운 사진집이 나오게 되면, 어머니들은 안심할 것이고 여자아이는 자신에게도 평생의 추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건강한 여자아이들의 발레복차림의 모습이...설사 그 전의 속옷 차림이었다 해도...찍힌 정도로 그런 소동이 필요한 걸까?'
 

이렇게 말했던 그녀는 영화를 본 후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영화를 보여준 고모리의 행동에 대해 겐자부로는 영화가 엎어지는 현실을 믿지 않고 싶어하는 사쿠라를 단념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여기고 그녀의 오랜 친구인 야나기 부인은 그녀 옆에서 상처 치유에 노력할 가능성 있는 긍정을 고모리에게 본다.
글쎄 정답은 고모리에게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30년.

많은 것이 잊혀질 듯하지만 겐자부로의 여동생 아사와 사쿠라 그리고 고모리는  '마지막 일'을 하자며 그를 찾아온다, 그렇다, 사쿠라에게 그 놀라운 과거는 그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인 것이다. 171과 214쪽에 보면 윤간 후 좋았냐고 질문하는 밀주집 주인 이야기가 나온다. 언젠가 어떤 강간범이, 당하던 여자도 어느 순간부터는 신음을 흘렸으니 그것은 강간이 아니라던 주장을 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보고, 그 미친 좆 달린 것들은 아무 구멍이나 그게 마누라건, 애인이건, 매춘녀건, 핏자건 상관없이 넣고 즐거워할 수 있겠지만, 너무나도 예민한 여자들은 그럴 수 없어 참으로 유감이란 말과 함께 그 강간범의 주둥이를 쫙!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남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니까 이렇게 책에까지 등장하는 거겠지란 생각과 함께 남자란 족속들이 새삼 더욱 역겨워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책의 초반에 히카리의 발작에 대해 구급차를 부르자는 경비회사의 파견 사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5분만 지나면 발작이 진정되니 그대로 두자는 말에 '여기 이렇게 누워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하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경비원. 두 사건이 같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정신(마음)을 빼놓은 상태만을 보고 판단한 매정한 인간의 모습은 두 사건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컴 로리의 소설을 그대로 영화화 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 때문일까? 읽는 내내 이것을 이대로(시나리오 없이') 영화로 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사쿠라와 같은 여배우와 고모리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메이스케 어머니의 진혼곡은 신기하게도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자리잡아 어떤 울림을 읽거나 보면 반드시 떠오르는 스무살 시절 보았던 연극에서의 독창 아니, 독음(讀音)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겠는데, 그것과 비슷할 거란 막연한 예상을 해본다. 내 기억 속의 그것은
단조로운 북장단에 맞춰 울리던 얼굴 없는 어느 여자의 '내 님이 오시네~~~'로 시작하는 바이브레이션이 거의 없는 청아하지만 힘있는 목소리였다
'절망감으로 탈진해 누워 있는 여인에게, 좋았느냐고 묻는 남자가 있었던 거예요...이후로도,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하더라도 여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고난이 이어지는 거지요.'라고 말하는 그녀,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사쿠라의 깊은 응어리는 풀리게 될까? 그녀는 그렇다 치고 혼자 자고 있는 새벽 네시 강간범이 문을 따고 들어와 칼을 들고 덤비는 세상에서도 살아남은 나 같은 여자는 도대체 무엇으로 응어리를 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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