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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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무언가 잊은 채 하지 않고 살았던 일,
이를테면 소설쓰기나 수영 같은 것을 당장 시작해야겠다는 충동이 불끈불끈 인다.   

처세책의 형식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듯 모호해 보이는 이 작품은 어느새,  책 속에서 말한 문장을 패러디하자면
'It's only books, but books it is.' 라는 말과 동체(同體)가 된다. 

11쪽.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않으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의 책이라곤 [만연 원년의 풋볼]밖에 안 읽었지만, 줄곧 소설만 쓰던 것으로 알던 이 작가가 불현듯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새로운 형식에 목을 매던 그였기에 더이상의 형식이 나타날 생각을 않자 복잡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을 '진실'에 고개를 돌리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 물론 그 다음 대사에서 힌트를 보란듯 주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소설을 쓰겠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간혹 보이는 진한 글씨들은 매우 눈에 거슬린다.  마치 중학교 교과서에서 강조하기 위해 굵은 글씨로 새겨놓은 것다고나 할까? 무엇이 중요한지 여부는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짙은 내게 이런 식의 강조는 달갑지 않다. 출판사의 의도가 무엇이건간에.

13쪽
서장의 제목과 같은 문장 "What! are you here?"이 있다는 <Little Gidding>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는 고모리 나쓰모와 만나지 않은 30년의 시간을 이 시와 같이
다모쓰의 입을 통해 간략히 설명하며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46쪽.
[만연 원년의 풋볼]이란 제목을 보고 반가워하던 찰나 내가 그 책에 대해 아쉬워 했던 점에 대한 답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더 거창한 사건이 될 수도 있고, 역사와 연결지으려 해도
충분히 가능한 큰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을 텐데 작가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시 독서모임에서는 한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그냥 거대한 사회 또는 세계로까지 해석할 수 있게 하려는 작가의 대단한 의도일 것이다 라고까지 얘기가 나왔었는데 작가는 그 사실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만연 원년의 풋볼]에서 묘사한 농민 봉기 이야기는 내게 지방 전체를 묘사할 역량이 없어서 우리 집안에 전승되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축소해버린 셈이지.' 라고.
이 말과 함께 역시 책을 해석하는 일은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책에 관한 얘기로 본격적으로 빠져보려 한다.
그러려면 우선 몇 가지의 사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
사쿠라가 어린 시절 찍은 애너벨 리 영화와 성인이 되어 기획하는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와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두리. 자칫 애너벨 리와 롤리타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나보코프 책의 초반에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험버트험버트의 어린 시절 사랑 애너벨 리를 꼭 기억해야만 한다. 험버트는 성인의 사랑과 비길 거대한 그녀를 어린 시절 잃은 충격 때문에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 나이의 소녀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거나 성인이더라도 애너벨이란 이름을 가진 롤리의 엄마에게 연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험버트의 정신과 포의 은유와 열정으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낸 미군 데이비드. 그가 버려진 전쟁고아 사쿠라를 이용해 영화를 찍은 이유는 텅 비어 있을뿐, 책의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 많이들 그랬던 것처럼 소녀 포르노를 찍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왜 끝까지 보살피고 결혼까지 했던 걸까?

약을 먹고 잠에 빠져들어 중요한 사건을 모르고 있는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공포스럽지만 알 수 없는 꿈을 꾸며 불안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겉껍질로만 보자면 잘 나가는 여배우로 존재한다.

60쪽.
'사쿠라 씨는 아기 때부터 8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얼굴, 몸매, 자세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살아가다가, 아주 천천히 죽음을 맞아 그런 사실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녀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런 식으로 사쿠라가 읽었다는 저자의 롤리타의 해석처럼(실제로 어떤 글이었는지 알지 못한다)롤리타와 사쿠라를 연결짓고 있는데, 위의 글과 같이 형상화 한 것은 롤리타 증후근을 앓는(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남성이 원하는 성인이 되기 전의 봉긋한 젖가슴과 굴곡 없는 팔다리를 지닌, 변덕이 심하고 새침한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 단계의 아이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사고 후에 자라지 않은 그녀의 성적 정신 같은 그런 것?

책을 중간 정도까지 읽다보면 언젠가 읽었던 '로시니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영화는 전쟁이다'(이하 로시니) 가 자꾸 떠오른다. 구성이 어쩐지 그 작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을 읽든 장정일 또는 배수아와 연결시키는 나의 못된 습관, 로시니를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이번도 마찬가지로, 작품이 영화화가 된 경우가 꽤 있는 장정일이 이와 같은 형식의 (시나리오화 하고 제작자, 감독, 배우 등과의 일을 재미있게 구성)
글을 한 번 쯤은 냈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만큼의 거대한  작품이 나올 수가 없는 만큼 작은 스케일이 될 수밖에 없음은 나도 안다.  아~삼천포로다, 각설하고.

김지하 시인의 구속 사건 덕인지 때문인지 모를 일로 함께 모여 미하헬 콜하스 200년 축하기념 작품을 만들게 된 세 사람,겐자부로, 고모리, 사쿠라.
클라이스트 원작과 일본에서 일어난 봉기를 조합하여 만들기로 했지만 배우로서의 욕심이 큰 사쿠라의 제의로 인해 영화는 어느덧 겐자부로가 자란 마을의 전설인 메이스케의 이야기를 담는 형식으로 흐르고 주인공도 콜하스의 남자가 아닌 메이스케의 여성으로 바뀌는 분위기에 고모리는 방향을 전환하고 겐자부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대시키기에 이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결론적으로 보자면 어린 사쿠라가 겪은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 소녀 포르노 사건이 개입되어 영화는 그만 엎어지고 만다.

데이비드와 사쿠라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어린 그녀에게 약을 먹여 집게 손가락을 집어 넣으면서까지 처녀를 파괴해 그것을 영화영상으로 담는 데이비드. 그의 의도에 대해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금의 힌트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 성인들이 하는 삽입섹스를 하지 않고 어린 시절 파괴된 질 상태의 그녀를 유지하게 만든다. 우습지만 그녀는 삽입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처녀인 것이다, 물론 성기의 삽입유무에 따르는 정의로 치자면.
그런 그가 암으로 죽고 자신과 겐자부로의 사이에서 묘한 상황을 만들어내던 고모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그녀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겐자부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의 동의 하에 삽입성교를 치른다. 그러니까 이제 더이상 그녀는 옛날의 그 애너벨 리가 아닌 것.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는 과거의 그 일에 대해 조금의 그림도 알고 있지 못한 채로 영화를 엎게 만든 소녀들의 사진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고모리에 의해 무삭제판 애너벨 리를 보게 된다. '솔직히 나도 비슷한 일로 신경써온 적은 있어요. 오랫동안 그랬는데, 실제로 어떤 필름인지 보고 나서, 그 하얀 관의의 소녀 시절의 나와 행복한 화해를 했어요, 재회가 아니에요, 화해예요. 필립의 아름다운 사진집이 나오게 되면, 어머니들은 안심할 것이고 여자아이는 자신에게도 평생의 추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건강한 여자아이들의 발레복차림의 모습이...설사 그 전의 속옷 차림이었다 해도...찍힌 정도로 그런 소동이 필요한 걸까?'
 

이렇게 말했던 그녀는 영화를 본 후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영화를 보여준 고모리의 행동에 대해 겐자부로는 영화가 엎어지는 현실을 믿지 않고 싶어하는 사쿠라를 단념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여기고 그녀의 오랜 친구인 야나기 부인은 그녀 옆에서 상처 치유에 노력할 가능성 있는 긍정을 고모리에게 본다.
글쎄 정답은 고모리에게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30년.

많은 것이 잊혀질 듯하지만 겐자부로의 여동생 아사와 사쿠라 그리고 고모리는  '마지막 일'을 하자며 그를 찾아온다, 그렇다, 사쿠라에게 그 놀라운 과거는 그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인 것이다. 171과 214쪽에 보면 윤간 후 좋았냐고 질문하는 밀주집 주인 이야기가 나온다. 언젠가 어떤 강간범이, 당하던 여자도 어느 순간부터는 신음을 흘렸으니 그것은 강간이 아니라던 주장을 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보고, 그 미친 좆 달린 것들은 아무 구멍이나 그게 마누라건, 애인이건, 매춘녀건, 핏자건 상관없이 넣고 즐거워할 수 있겠지만, 너무나도 예민한 여자들은 그럴 수 없어 참으로 유감이란 말과 함께 그 강간범의 주둥이를 쫙!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남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니까 이렇게 책에까지 등장하는 거겠지란 생각과 함께 남자란 족속들이 새삼 더욱 역겨워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책의 초반에 히카리의 발작에 대해 구급차를 부르자는 경비회사의 파견 사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5분만 지나면 발작이 진정되니 그대로 두자는 말에 '여기 이렇게 누워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하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경비원. 두 사건이 같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정신(마음)을 빼놓은 상태만을 보고 판단한 매정한 인간의 모습은 두 사건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컴 로리의 소설을 그대로 영화화 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 때문일까? 읽는 내내 이것을 이대로(시나리오 없이') 영화로 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사쿠라와 같은 여배우와 고모리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메이스케 어머니의 진혼곡은 신기하게도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자리잡아 어떤 울림을 읽거나 보면 반드시 떠오르는 스무살 시절 보았던 연극에서의 독창 아니, 독음(讀音)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겠는데, 그것과 비슷할 거란 막연한 예상을 해본다. 내 기억 속의 그것은
단조로운 북장단에 맞춰 울리던 얼굴 없는 어느 여자의 '내 님이 오시네~~~'로 시작하는 바이브레이션이 거의 없는 청아하지만 힘있는 목소리였다
'절망감으로 탈진해 누워 있는 여인에게, 좋았느냐고 묻는 남자가 있었던 거예요...이후로도,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하더라도 여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고난이 이어지는 거지요.'라고 말하는 그녀,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사쿠라의 깊은 응어리는 풀리게 될까? 그녀는 그렇다 치고 혼자 자고 있는 새벽 네시 강간범이 문을 따고 들어와 칼을 들고 덤비는 세상에서도 살아남은 나 같은 여자는 도대체 무엇으로 응어리를 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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