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빼미의 없음>
글쓰기가 자신의 운명임을 너무 슬프지만 확고하게 말하는 그녀.
외그르라는 그녀의 주변 인물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그녀의 작품 내내 나타나는 죽음에 대한 그 모든 것을 보며 처절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당연스레 그것을(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참 혼란스럽다, 안다는 것 자체가.

<올빼미의 없음>을 기준으로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두 번 아니면 그 이상 읽은 뒤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녀의 이번 작품은 몇년 동안 각자 따로 어딘가에 끼여 발표된 단편의 모음인 것이다.

<양의 첫눈>
한때 온 힘을 다해 사랑했을 게 분명한 미라의 갑작스런 방문 예고 편지. 그리고 언젠가 도서 대출 대리 반납이라는 가벼울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부탁을 들어줬던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를 지닌 커플과의 조우. 그리고 반드시 집주인에게 했던 대출 반납 부탁은 아무 관련이 없는 양에게까지 와야 했다.

짧은 몇 마디의 말로 양의 8년이 모두 설명되는 대단한 단편이다.
절제의 문학이 고급스러울 수밖에 없음이 드러나고야 마는군.
앞에 읽었던 <엄마를 부탁해>는 절제를 모르는 작품이었음 역시 드러나고야 마는군.

<올빼미>
어쩌면 <양의 첫눈>에서 떠난 미라가 <올빼미>에서처럼 잠깐 밖에 나와 선글라스를 쓰고 그녀가 준 책을 소리내 읽고 있는 양을 보지 못하고 오해 속에 그냥 떠나야 했던 자존심 구부러진 미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책을 읽다 보면 그건 순전히 내 생각.

화자가 만나러 간 천번째 작가 얘기를 보면 '작가'라는 존재와 '쓰기'라는 행동을 다시 한번 작정하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미치광이가 되어 오십년 전에 자살했을 것이라는 그의 대답. 이런 사람이 모두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난 어쩐지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쓸 수밖에 없는 이런 작가들의 글만 옹호하게 된다. 

여기서 나오는 괴테의 펜이 되었다는 '방구석의 남자'는 진짜 있던 인물일까? 이게 사실이라면 괴테라는 작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 아닌가?

아무렇게나 사람을 두고 떠나버리는 사람이 정작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갑판 아래로 내려가려는 상대에게는 자신을 홀로 내버려 두고 가면 그걸 영원히 잊지도 않을 것이고 절대 용서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하는데 어쩌면 이것이 세상의 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북역>
온전히 정신으로 쓰여진 글.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그냥 정신으로 표현했다. 아, 어디 더 좋은 단어 없나, 정신 말고! 가슴으로 쓴 글? 아! 젠장.

<무종>
언젠가 다른, 제목이 기억 나지 않는 그녀의 단편에서 -은둔하는 북의 어쩌구였나-나왔던 인물이 또다른 단편의 제목이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무종'이란 자의 이름이 거리의 이름이 되고, 건물 이름이 될 정도로 훌륭한.

이 작품에서 사용된 '우리는 ~하게 되겠지만'으로 시작되어 '아직은 그 어느 사건도 시작되기 이전이었다.'라고 끝나는 방식의 글쓰기는 배수아의 글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물론 이것은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 기억에 그녀는 과거 회상의 글쓰기가 전부인 작품을 거의 하지 않았던 듯싶다는 것이다. 그동안 배수아의 작품에서는 그녀의 짐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쓰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그러니까 작가가 어느 지점부터는 자기 얘기를 쓸 수밖에 없음에 대해 고민하는 글쓰기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는 그녀가 어느 도시로 글을 쓰기 위한 여행을 떠나 살게 되었던 셋방들에 관한 얘기가 있는데 그 도시가 독일일 것은 뻔한 일이고, 화학과를 나와 공무원을 하던 그녀가 문단에 데뷔한 이후 틀어박혀 글만 쓰기 시작했고, 글과 여행은 맞닿아 있을밖에 없음을 알게 된 그녀가 평소 관심 있던 독일 문학 때문에, 또한 작가 때문에 그 여행이 독일로 정해졌겠구나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그녀의 <동물원 킨트>라는 작품을 통해 한때 '이 도시 저 도시의 동물원을 전전했구나'를 알게 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빠리 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언어의 한계, 표현의 한계에 몸서리치고 있다.
그런 원통함과 답답함을 소매잡아뜯기로 나타내고 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 낸 모든 단어에 대한 조롱.

205쪽 6줄에 '사진에 내 서류에'라는 것은 일부러 그녀의 현재를 설명하려고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오탈자인지 궁금하다.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100개의 방에 100가지의 생활하는 사람들이 무대에서 연기 아닌 진짜 그들의 생활을 하는 연극이라. 인생이 연극, 영화, 드라마, 책 등의 문화의 재료이니 당연한 상상이 되겠군.
하지만 기발하다.

<밤이 염세적이다>
언어와 소통, 말하기로 가득찬 단편.
수니가 그를 떠나며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지만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명확히 아는 절망적 소통의 이야기.

그래 내가 영민이를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가닿지 않을 이유 때문에 난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을 절망으로 내몰아야 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극단적으로.
말이 통한다고, 변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저 잠시의 태도였을뿐 진심이 아니었기에 제자리, 나를 지극히 사랑하지 않음의 자리로,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음으로 돌아와야 함을, 그렇게 됐음을 느껴서 난 그와 헤어졌다.
서로 간절함이 없는 관계는 간절함이 많은 쪽이 포기하면 되는 일이니까 내가 그를 놓은 것뿐이다. 갑작스레 내 얘기가 나와서 뭣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난 이제 더 이상 그를 그리워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고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녀, 배수아는 다른 두 성의 교감과 소통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글을 쓰게 된 걸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을거리가 떨어져서 회사 동생에게 빌려 읽은 책.
오랜만에 만난 신경숙은 한 편의 잘 써낸 작품으로, 읽는 도중 울컥울컥 가슴을 게워내게 만들어 주었다.

어떤 것이 되었건 엄마를 사용한 작품은 높이 평가되고 가슴 깊이 와닿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여자들에겐.
물론 책 속 박소녀란 인물은,
다섯 딸이 어릴 적엔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커가기 시작하면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어머니와 딸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것이 모녀의 모습이 아닌 생의 동조자 정도로 보일 수도 있을 형태를 만들어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모든 딸들이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길에 내다 놓은 아이를 걱정하듯 늘 들여다보게 만드신 우리 어머니와 달랐지만,
그 맹목 사랑을 받기만 하며 때로는 귀찮음인 듯 쳐낸 자식들의 모습을 박소녀의 입장에서 보다 보니 야속하고 야속해서 혼자 욕설을 하기도 했지만, 그냥 어머니라는 그 존재만으로 보자면 얼마든지 공감이 가고, 눈시울이 붉어지면 참아보려 책을 덮고 눈가가 가라앉은 뒤 다시 책장을 넘기던 오랜만의 감정은 고맙기만 했다.

철없는 엄마고 언제나 자신이 먼저라는 농담을 가끔 던지곤 하지만 모든 딸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엄마께 잘하려는 것을 보면, 우리 엄만 자식 농사 하난 정말 잘 지어 말년에 많이 좋게 되시는 모양이다 싶기도 하고, 더 행복하지 못하신 것이 맘이 아프기도 하고, 뭐 어머니라는 언젠가는 나 역시 되어야 할 그것에 대해 끝없이 드는 생각을 막을 도리도 표현할 도리도 없음에 그저 한숨만.

필요에 의해 사용했을 2인칭이 어색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딸의 입장에서, 아들의 입장에서, 남편의 입장에서 본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 최선의 선택이었을 그것이겠지만, 그래도 다른 방식으로 쓰여졌다면 조금 더 덜 짜낸 느낌이 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 다른 방식을 따로 고민할 것은 아니고 그냥 열심히 썼을 그녀에게 쓴소리를 하자면 그렇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두 부자(父子)의 연대기.

[가르강튀아]
소크라테스를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겉모습만으로 보아서는 양파 껍질 한 쪽도 주려 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육신은 추하고 우스꽝스러웠다. 뾰족한 코에 눈은 황소눈이고, 미친 사람 같은 얼굴에 행동거지는 어수룩하고, 또 촌스런 옷차림에다 돈하고는 인연이 멀고 여복도 없으며, 국가의 어떤 직무에도 맞지 않았지만, 언제나 웃고 다니면서 누구에게나 옳다고 맞장구치며 같이 술잔을 기울였고, 항상 비웃어댔지만 신과 같은 지혜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상자를 열어보게 되면, 그 안에서 여러분은 인간의 능력 이상의 지혜와 놀라운 덕성, 꺾을 수 없는 용기, 비할 데 없는 절제, 확실한 평정, 완벽한 자신감, 또는 사람들이 그토록 불철주야로 쫓아다니며, 일하고 항해하고, 전투를 벌이면서 얻으려는 것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초연함과 같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천상의 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작가 서문 한번 끝내준다. 내 책에 대해서도 한 거지 같은 놈이 그렇게 말했다. 똥이나 처먹어라. 술 냄새가 기름 냄새보다 얼마나 감미롭고 즐거우며, 간절하고, 신성하고 달콤한 것인가! 라며 자기 글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더니 그리고 너희들, 당나귀 좆 같은 놈들아. 다리에 종양이 생겨 절름발이나 되어버려라! 라고 대놓고 깐다. 무지 후련하다. 

3장에서는 섹스를 '등이 둘 달린 짐승놀이를 하며 즐겁게 살덩이를 비빈다' 거나 ' 엉덩이 조이기 놀이'라고 표현한다. 여러 종류의 책을 봤지만 이런 식의 표현은 처음이다.
어릴 적부터 여자 맛을 아는 가르강튀아의 고추를 시녀들은 나의 작은 통 마개, 나의 가시, 나의 산호 가지, 나의 꼭지, 마개, 나사송곳, 피스톤, 드릴, 도래송곳, 느러뜨린 보석, 아래로 세게 지는 딱딱한 막대기, 곧추 선 찬장, 작은 빨간 순대, 성과 없는 작은 불알이라고 불렀단다.  글의 느낌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와 매우 비슷하다. 이를테면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멋진 바지 앞주머니를 열고 그의 물건을 꺼내서 공중에 쳐들고 신나게 오줌을 싸서 여인네와 이이들을 빼고 26만 4백 18명을 익사시켰다는 식.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잔인한 내용이 슬슬 나오는데, 외데몽의 말은 죽어 나자빠져 있는 크고 뚱뚱한 놈의 불룩한 뱃속에 오른발이 무릎 있는 데까지 박혀버려 빠져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르강튀아가 막대기 끝으로 물속에 잠긴 놈의 창자를 쑤시기 전까지는...이런 종류의 잔인함에는 처음보다 온갖 잔혹과 유머가 더욱 많이 가미되어 있는 편이다. 

가르강튀아가 빗으로 머리 손질을 하다가 베드숲 공격 때 머리카락 사이에 남아 있던 대포알들을 한 번 빗을 때마다 일곱 개 이상씩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그랑구지에는 이(머리 피 빨고 사는 벌레)라고 생각했다고! 혼자 읽다가 낄낄거릴 정도의 기발함.
그리고 이 시기 쯤 쓰여진 많은 책들은 이렇게 잔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각 몇 마리까지 구체적으로 적는 것이 유행이라 따른 것처럼 보인다.

가르강튀아는 뭔가 끝난다는 느낌이 없이 수도사의 말로 마무리짓는다. 물론 전쟁이 끝나고 수도사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텔렘 수도원이 그들의 미래가 될 것임을 알리고 그 후의 인생은 수도원의 기초에서 발견된 수수께끼에 대한 중요한 암시임을 은근히 알리는 의미 있는 마무리라 생각해도 되지만.

수도사의 말은 아래와 같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란 시합을 주선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보통 친구사이랍니다. 두 번 서비스를 넣은 다음에는 경기장 안에 있던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게 되지요...경기가 끝난 다음 사람들은 환한 불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속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다음에는 보통 주연을 벌이는데, 승리한 사람들이 더 신나게 마시지요. 그러고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지요.

[팡타그뤼엘]
가르강튀아처럼 작가 서문으로 시작되는데 자기가 하려는 팡타그뤼엘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다고 강력히 말하고 있다. 앞의 것과 재료가 비슷하다 말하면서 소변으로 사람들을 익사시켰다는 등의 이야기로 가득했던 일대기와 비슷한 이것이 과연 정말 거짓이 없는지 두고 볼 일이다. ㅋㅋㅋ 1장부터 말도 안 되는 일만 일어나고 그게 또 재밌다. 가르강튀아와 마찬가지로.

저자가 현학적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팡타그뤼엘이 말한 리모주 출신 학생의 일화를 통해 보여주는데 이는 평소의 내 생각과 일치한다. 즉,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따라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 괜히 있어 보이려고 온갖 어려운 말들을 그러모아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것.

7장에서는 생 빅토르 도서관에 비치돼 있는 도서목록이 장장 9페이지에 걸쳐 쓰여 있는데, 교묘한 제목바꾸기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작가에게 붙여주는 풍자는 기발하기 짝이없다.
귀찮아서 대충 읽고 넘어갈 독자가 많을 수 있겠는데 한 글자도 놓치지 말고 각주와 함께 읽어볼 만한 부분이다.

너무 원통해서 수치심 때문에 상스럽게 똥을 싸버렸다는 얘길 보니 갑자기 옛날에 우릴 괴롭힌 놈의 집 안방에 가서 똥을 싸놓고 나오자던 미연이의 복수 방법이 떠올랐다. 물론 크게 관련 있는 경우는 아니지만 무언가 너무 억울하고 수치스러울 때 그는 왜 '상스럽게 똥을 싸버렸다'는 표현을 했을까? 아마도 그 마음과 본능적인 행동을 같게 하여 좀 더 그 심정을 극대화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 아니면, 더욱 수치스러운 행동을 통해 마음을 해소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온갖 말장난과 풍자가 가득한 이 책에서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했다. 바로 '현명하게 떨어지는 자는 다리 위를 걷지 않는다'인데, 이것은 '현명하게 걷는 자는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의 위치를 바꾼 말장난으로 재밌는 것은 최근 '비가 오려나, 빨래야 에미 걷어라', '보일러 댁에 아버님 놔드려야겠어요' 와 같은 말장난이 신기하고 해서 자주 사용했던 기억에 한참을 웃었다는 것이다.

참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이 책에서도 역시 술을 마시는 행위가 굉장히 기본적이고 중요한 듯 묘사되었다는 점인데, 심지어 파뉘르주가 살려 놓은 에피스테몽은 3주 동안 목이 쉬고 마른 기침이 생겨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면 잘 낫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솜씨 있게 고쳐졌다는 부분까지 있을 정도로 술이 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마음이 백번 아니 천만 번 이해가 갔다는 애주가의 말씀.ㅋㅋ

책의 모든 부분에서 소르본 신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는데, 죽음을 경험한 에피스테몽이 만난 영웅들은 사후세계에선 수전노, 소몰이꾼, 방앗간 주인, 식충이 등이 되어 있더라는 말을 하며 신학 세계를 제대로 까고 있는 그 또한 수도원 소속이었다. 그 어떤 것을 비판하든 무조건 그것에 대해 잘 알고 나서 해야 함이 절절해지는 부분이다.

와, 이 사람 장난 아니다. 팡타그뤼엘이 혀로 군사들을 비로부터 피신할 수 있게 하는 동안 저자는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몸 속에 신세계가 있더라는구조.(대단하다, 더 이상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몸 속에서 몇 달 간을 살다 나와 드디어 저자와 팡타그뤼엘이 만나는 장면까지 부드럽게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병에 걸린 팡타그뤼엘의 오줌에서 온천이 생겨났더라는 결말.

천박하고(그 의미 그대로의 천박 말고 知를 넘어서다 보면 얻게 되는 솔직함 같은) 놀라운 작품이다. 

 아래는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35쪽 밑에서 3줄, 당했전 -> 당했던  

167쪽 각주 319가 두 개고, 321이 없다. 

171쪽 1줄, 끼워주세요-> 끼어주세요 (물건을 끼워 넣는 거 아닌가?) 

244쪽 각주 444번은 20장 220번을 보라 하는데 관련이 없어 보인다. 

336쪽 밑에서 2줄, 방식이로든 -> 방식으로든 

395쪽 5줄,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또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전자가 더 나을 듯. 

425쪽 밑에서 3줄, 동료들와 -> 동료들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 권 가량이 그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솔직히 시로 더 유명한 그의 시가 난 그냥 그렇다. 그것은 내가 장정일이 시인으로 불려지고자 했을 때도 난 그의 소설과 희곡을 더 좋아한다고 떠들고 나닌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한문을 음도 없이 통째로 싣고 있고 간혹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찾아보기도 물어보기도 어려운 나 같은 한자 무식쟁이에게는 정말이지 불쾌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 나머지는 그의 소설과 기행문, 일기 등으로 꾸며져 있다.

 

[영하의 바람]
작가의 경험을 쓴 단편 같다.
시에서 얼핏 고아원에 있는 현희누나 얘기를 본 듯해서.
단어 선택이 확실히 시를 쓰는 자답다.
그 표현에 다가가기 위해 충분히 고민하고 고르고 고쳐쓴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능력이 안 돼서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는 일은 흔히 있는 모양이다, 버젓이 부모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건 고아도 뭣도 아닌 애매한 상황.

[겨울의 끝]
딱 그 시절 1980년대의 냄새를 질질 흘리는 작품.
정신병, 백혈병, 자살, 죽음이 단골이던 그때의 문학은 곧 우울의 증거들. 그 속에서 한자락 희망을 안고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청춘의 고뇌들이 뚝뚝 흐른다.
오랜만이군~이런 글!

[환상일지]
기차에서 만나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았을 뿐인 남자에게 술 한 잔 하자 권해 보는 화자. 남자들은 참 아무하고나 술 잘 마시고 잘 어울린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길에서 만나 술을 나누며 이야기도 이래저래 참 잘 나눴던 것도 같다. 환상일지라는 제목이 자꾸만 환상여행으로 보인다. 그는 무얼 찾으러 읍에 간 걸까? 약속한 친구는 이미 자살하고 없는데 말이다.

[미로]
개인의 상처에 진정한 위로가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상처를 청력이 완전히 망가져서 수술할 필요도 없는 귀로 설정하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표현하고 싶었나보다. 그저 '환부'로만 보고 차갑게 대하거나 서비스용 웃음만 흘리는 병원 사람들. 사실 거짓웃음보다 차가운 태도가 그럴 땐 훨씬 위안이 되는 법이다.

[그날의 물망초]
아주 짧은 단편. 군 시절 연애편지 대필의 경험 정도.
이것 역시 작가의 경험이 들어간 느낌이 크다. 별로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의 분량과 내용. 대필 연애편지 상대인 여자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나타난다는.

[어떤 신춘문예]
20년째 낙방하는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이야기. 사실 글을 쓰면서 튼튼한 직업도 있는 행복한 남자 얘기나 다름없다.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노마네 마을의 개]
미친개 소문을 때려 잡아 죽이다가 결국엔 마을이 미치고 만다.
'미침'을 없애려 그것만을 좇으니 그것만 생각하다가 머리가 이상해지는 인간 또한 미치게 되는 것이다. 참 똑똑한 논리다.

[면허]
반전에 반전이 있네. 정신병자 알아맞히기 게임이라도 하면 재미 있겠군. 짧지만 흥미로운 글이다.

[짧은 여행의 기록]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그래서 대구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장정일이라는 이상한 소년이 살고 있다.' 고! 내가 집착하는 장정일을 이런 곳에서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반갑고 좋다. 기형도는 297쪽에 '장정일은 책은 지문 묻을까봐 손을 씻은 뒤 읽으며, 초판만 읽지 재판은 읽지 않으며, 책에는 볼펜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한번 본 시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한다고 내게 이야기 했다.'고 말하고 있다.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92쪽 밑에서 9줄, 197쪽 6줄 : 길다랗게 -> 기다랗게

204쪽 5줄 : 그리고 나서 -> 그러고 나서

206쪽 10줄 : 붙힌 후에 -> 붙인 후에

222쪽 7줄, 224쪽 3줄 : 이빨 -> 이

236쪽 밑에서 11줄 : 검정색 -> 검정 또는 검은색

330쪽 14줄 : 흑은 -> 혹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몰로이 대산세계문학총서 75
사무엘 베케트 지음, 김경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암호로 쓰여진 듯한 글.
아는 이의 추천으로 읽은 처음 접한 베케트의 소설.
음향과 분노를 읽었을 때보다는 덜 화가 나지만 이렇게 친절하지 않은 글은 별로 반갑지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친절한 글만 읽는다는 뜻은 아니고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뜻이다.
암호를 쓸 것이면 그냥 자신의 일기장에 쓰면 될 일이다.

작가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했다' 식의 말투를 즐겨 썼다.
의도가 뭘까? 어차피 언어는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의미가 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과거 그것과 같은 건가? 아니면 그게 바로 삶의 비밀이라도 된다는 건가.

2부의 256쪽에 화자가 긴 시간 동안 빨 수 없는 셔츠를 더 오래 입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셔츠를 입은 내용을 보니 몰로이가 1부에서 8개의 빠는 돌을 차례대로 공평하게 빨기 위해서 길게길게 나열했던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셔츠도 빨고 돌도 빠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아 언어에 대한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에 베케트는 수학 중에서도 확률이나 통계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었지 싶다.

다음과 같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썼다, 자정이다.
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아니었다, 비가 오고 있지 않았다.

1951년에 출간됐다는 이 책이 그 시기에 앞으로 유망할 책이란 평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겠지만, 놀라운 글들이 범람하는 지금은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그저 놀라우려고 자신만 아는 것들을 읊조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장정일의 희곡이나 시보다 소설을 더 선호하듯 베케트 역시 소설보다는 희곡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전통적인 소설 속의 이야기 전개 대신에, 이야기하는 방식과 글이 쓰여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메타픽션 경향을 띠고, 이런 경향은 1950년대 프랑스 문학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며 누보 로망(새 소설)이라는 독특한 현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그냥 우리가 알면 되는 것이고 이런 문구를 보고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본다면 필시 실망을 안게 될 것이다. 

아래는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19쪽, 밑에서 9줄 : 안 돼지 -> 안 되지  

156쪽, 1줄과 155쪽 끝, 184쪽, 밑에서 2줄 : 이빨 -> 이 

173쪽, 1줄 : 틀린 점 -> 다른 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