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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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없음>
글쓰기가 자신의 운명임을 너무 슬프지만 확고하게 말하는 그녀.
외그르라는 그녀의 주변 인물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그녀의 작품 내내 나타나는 죽음에 대한 그 모든 것을 보며 처절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당연스레 그것을(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참 혼란스럽다, 안다는 것 자체가.

<올빼미의 없음>을 기준으로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두 번 아니면 그 이상 읽은 뒤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녀의 이번 작품은 몇년 동안 각자 따로 어딘가에 끼여 발표된 단편의 모음인 것이다.

<양의 첫눈>
한때 온 힘을 다해 사랑했을 게 분명한 미라의 갑작스런 방문 예고 편지. 그리고 언젠가 도서 대출 대리 반납이라는 가벼울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부탁을 들어줬던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를 지닌 커플과의 조우. 그리고 반드시 집주인에게 했던 대출 반납 부탁은 아무 관련이 없는 양에게까지 와야 했다.

짧은 몇 마디의 말로 양의 8년이 모두 설명되는 대단한 단편이다.
절제의 문학이 고급스러울 수밖에 없음이 드러나고야 마는군.
앞에 읽었던 <엄마를 부탁해>는 절제를 모르는 작품이었음 역시 드러나고야 마는군.

<올빼미>
어쩌면 <양의 첫눈>에서 떠난 미라가 <올빼미>에서처럼 잠깐 밖에 나와 선글라스를 쓰고 그녀가 준 책을 소리내 읽고 있는 양을 보지 못하고 오해 속에 그냥 떠나야 했던 자존심 구부러진 미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책을 읽다 보면 그건 순전히 내 생각.

화자가 만나러 간 천번째 작가 얘기를 보면 '작가'라는 존재와 '쓰기'라는 행동을 다시 한번 작정하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미치광이가 되어 오십년 전에 자살했을 것이라는 그의 대답. 이런 사람이 모두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난 어쩐지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쓸 수밖에 없는 이런 작가들의 글만 옹호하게 된다. 

여기서 나오는 괴테의 펜이 되었다는 '방구석의 남자'는 진짜 있던 인물일까? 이게 사실이라면 괴테라는 작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 아닌가?

아무렇게나 사람을 두고 떠나버리는 사람이 정작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갑판 아래로 내려가려는 상대에게는 자신을 홀로 내버려 두고 가면 그걸 영원히 잊지도 않을 것이고 절대 용서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하는데 어쩌면 이것이 세상의 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북역>
온전히 정신으로 쓰여진 글.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그냥 정신으로 표현했다. 아, 어디 더 좋은 단어 없나, 정신 말고! 가슴으로 쓴 글? 아! 젠장.

<무종>
언젠가 다른, 제목이 기억 나지 않는 그녀의 단편에서 -은둔하는 북의 어쩌구였나-나왔던 인물이 또다른 단편의 제목이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무종'이란 자의 이름이 거리의 이름이 되고, 건물 이름이 될 정도로 훌륭한.

이 작품에서 사용된 '우리는 ~하게 되겠지만'으로 시작되어 '아직은 그 어느 사건도 시작되기 이전이었다.'라고 끝나는 방식의 글쓰기는 배수아의 글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물론 이것은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 기억에 그녀는 과거 회상의 글쓰기가 전부인 작품을 거의 하지 않았던 듯싶다는 것이다. 그동안 배수아의 작품에서는 그녀의 짐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쓰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그러니까 작가가 어느 지점부터는 자기 얘기를 쓸 수밖에 없음에 대해 고민하는 글쓰기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는 그녀가 어느 도시로 글을 쓰기 위한 여행을 떠나 살게 되었던 셋방들에 관한 얘기가 있는데 그 도시가 독일일 것은 뻔한 일이고, 화학과를 나와 공무원을 하던 그녀가 문단에 데뷔한 이후 틀어박혀 글만 쓰기 시작했고, 글과 여행은 맞닿아 있을밖에 없음을 알게 된 그녀가 평소 관심 있던 독일 문학 때문에, 또한 작가 때문에 그 여행이 독일로 정해졌겠구나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그녀의 <동물원 킨트>라는 작품을 통해 한때 '이 도시 저 도시의 동물원을 전전했구나'를 알게 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빠리 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언어의 한계, 표현의 한계에 몸서리치고 있다.
그런 원통함과 답답함을 소매잡아뜯기로 나타내고 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 낸 모든 단어에 대한 조롱.

205쪽 6줄에 '사진에 내 서류에'라는 것은 일부러 그녀의 현재를 설명하려고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오탈자인지 궁금하다.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100개의 방에 100가지의 생활하는 사람들이 무대에서 연기 아닌 진짜 그들의 생활을 하는 연극이라. 인생이 연극, 영화, 드라마, 책 등의 문화의 재료이니 당연한 상상이 되겠군.
하지만 기발하다.

<밤이 염세적이다>
언어와 소통, 말하기로 가득찬 단편.
수니가 그를 떠나며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지만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명확히 아는 절망적 소통의 이야기.

그래 내가 영민이를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가닿지 않을 이유 때문에 난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을 절망으로 내몰아야 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극단적으로.
말이 통한다고, 변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저 잠시의 태도였을뿐 진심이 아니었기에 제자리, 나를 지극히 사랑하지 않음의 자리로,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음으로 돌아와야 함을, 그렇게 됐음을 느껴서 난 그와 헤어졌다.
서로 간절함이 없는 관계는 간절함이 많은 쪽이 포기하면 되는 일이니까 내가 그를 놓은 것뿐이다. 갑작스레 내 얘기가 나와서 뭣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난 이제 더 이상 그를 그리워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고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녀, 배수아는 다른 두 성의 교감과 소통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글을 쓰게 된 걸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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