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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제자 교육법 - 자투리 종이와 천에 적어 건넨 스승 다산의 맞춤형 가르침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평점 :
<다산의 제자교육법>은 다산 정약용 연구로 유명한 정민 교수의 신간이다. 다산(茶山)이 "제자들에게 증언(贈言) 형식으로 건낸 가르침을 모아 갈래별로 나눠 엮었다."(p.5) 저자는 십 년이 넘게 다산이 남긴 각종 필첩 자료를 찾아 다녔고, 친필첩 절반 이상이 제자들에게 적어준 글이란 점에 착안하여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머리말 참고) <삶을 바꾼 만남>,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어록청상> 같은 책과 다산 연구로 유명한 저자라 믿음이 간다.
다산은 18년 강진 유배 생활 중에 5백여 권의 방대한 학술 업적을 남겼다. 이른바 다산학이다. 제자 육성에도 힘썼는데,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란 구절처럼 다양한 신분과 지위에 있는 이들과 교류하였다. 저자의 전작 <삶을 바꾼 만남>에도 나오는 황상과 혜장 선사, 정수칠과 윤씨 형제들, 우리나라 차 연구로 유명한 초의 선사 등, 제자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일화를 남겼다.
다산은 제자에게 각자 처지와 능력에 맞게 증언(贈言)을 적어주었다. 때로는 더욱 권면하도록 이르고, 때로는 생계의 방침을 일러주고, 때로는 질책도 마다치 않았다.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던 제자에겐 가난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일렀고, 과수원과 특용 작물을 길러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권했다. 부와 생계에만 매달리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 일갈하였다. 과거 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참된 공부 자세를 강조하면서도, 과거 시험 준비생에겐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 선생도 과거를 통해 나아갔으니 힘써 입신하도록 독려했다.
다산은 <대학>에 나오는 성실한 뜻(誠意), 바른 마음(正心)과 효제충신을 근간으로 가르쳤다. 현란하고 통속적인 문장(예컨대, "나관중을 시조로 삼고, 시내암과 김성탄을 그 아랫대의 조상으로 삼아"(p.208))보다 경학과 고문에 뿌리를 두고 도탑게 공부하기를 당부하였다. 실학을 바탕으로 조선을 경장하려 했던 학자로 알려졌지만, 공부에 관해서는 근본을 누차례 강조한 점이 인상적이다. 승려란 직분 때문에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던 초의 선사에게 <논어> 공부를 "마치 임금의 엄한 분부를 받들듯 날을 아껴 급박하게 독책하도록 해라."(p.240)고 지도하였다. 아마도 시류에 휩쓸려 사람의 근본을 도외시한 학문계 현실을 아쉬워하고, 입신양명을 목적으로 과거 시험문만 연습하며 학문적 뿌리를 다지지 않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공부란 배움이 절반이고 가르침이 절반이라고 가르쳤다. 증언은 제자를 위한 조언이자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경문이었다. 신유박해 사건으로 고신을 받고 하루아침에 고관에서 강진 유배객 신세로 떨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형제와 가문이 평지풍파를 맞았다. 매서운 시절, 다산은 좌절하는 대신 마음을 다잡았다. 강진에 처음 도착하여 주막집 주인의 배려로 방을 얻었고, 사의재(四宜齋)라 이름지었다. 사의재란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네 가지를 뜻한다. 공부에 매진하다가 복사뼈가 세 번 뚫렸다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일화를 남겨 제자 황상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증언엔 사물과 자연에서 얻은 감상, 전원 생활에 대한 이치가 담겨 있다. 다산의 감성을 엿볼 수 있다.유배 중 머물던 귤동 뒷산인 '다산(茶山)'을 호로 삼을 만큼, 차를 사랑하고 자연의 정취를 즐길 줄 알았다. 자연에서 텃밭을 가꿔 일용할 양식을 얻었고, 유배 생활의 시름을 달랬으며, 자연 그 자체를 배움터로 여겼다. 그 감상과 이치를 여러 제자에게 적어 주었다. 하나하나 깊이와 품격이 느껴진다. 정약용은 시대를 넘어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비록 직접 사사하진 못하나, 그가 남긴 증언첩을 통해 살아 있는 가르침을 배운다. <다산의 제자 교육법>, 귀한 책을 만나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