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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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감상평을 읽고 서둘러 구입했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친구가 늘 것이다.

밑줄 친 부분을 옮긴다.

좀 많다.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를 무시하는 거예요.

 

11

시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형식이에요.

 

12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26

시는 말의 춤이에요. 시의 쾌감은 마찰과 낙차에서 생겨요. 무엇보다 에로티시즘이 있어야 해요.

말에도 '넣고, 빼고' 하는 관능이 있어요. 말과 섹스하세요. 말의 경계 너머로 우리가 모르는 말이 태어나도록.

 

36

시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 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37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건 이별하는 순간이듯이, 리듬이 중요하다는 건 리듬이 깨지는 순간에 알게 돼요.

 

47

계단 잘 내려가다가도 '조심해야지' 하면 걸음이 어켜 비틀거려요. 몸 하는 일에 머리가 개입해서 생기는 혼란이지요.

 

50

손을 신뢰하면서 가급적 신속히 쓰세요.

 

71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애기할 것 없어요. 그런 건 내가 안 해도 벌써 다 나와 있어요.

그냥 우리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만 쓰세요.

 

77

시는 감정도 비유도 아니고, 패턴이에요. 패턴은 소급적인 동시에 예시적이에요.

 

85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령

'꽃이 피었다. 새가 울었다' 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새가 죽었다' 가 힘이 있어요.

 

95

'햇빛이 빛난다'는 사구예요. '햇빛이 울고 있다'는 활구에 가까워요.

'헷빛이 울고 있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120

시를 쓸 때는 광이 아니라 피를 모으세요.

 

129

모든 미친 것들에게, 미치지 않으면 안 될 사연 하니씩 찾아주는 게 시예요.

 

151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

 

153

시는 인식이 오기 전의 뒤척임이에요. 가령 그토록 바라던 칭찬을 받았을 때 왜 눈물이 나는지 생각해보세요.

 

154

가령 아빠 장례식 날, 다섯 살짜리 사내애가 제상 위의 촛불을 불면서 노는 모습을 무어라 하겠어요.

 

173

윤리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포르노예요. 에로티시즘으로 하세요.

 

179

아무일 없었던 듯이 시작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끝내세요. 호들갑 떨지 않는 거예요.

 

194

시는 이미지와 메시지 사이에 있어요.

 

211

교황님 말씀이에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남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이보다 뼈아쁜 시가 있을까요.

 

215

시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혼잣말이에요.

최근에 어떤 여자가 남편하고 자다가, 다른 남자 이름을 불러서 목 졸려 죽었어요.

 

219

죽은 청설모가 아무 일 없는 듯이 솔밭 위에 누워 있는 그 느낌이 시예요.

 

234

시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잇어요.

 

235

시는 정말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끝내 안 하는 거예요.

 

277

사랑을 못 받아도, 못 주어도 응어리가 남아요.

그 응어리를 뒤늦게 풀어주려는 게 시예요.

 

282

시는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냥 식당에서 나올 때 뒷사람 구두를 돌려놓아 주는 거예요.

 

368

피상적인 말이 떠오를 때는 입술을 꽉 깨무세요.

 

419

자기 위주로 생각하면 또라이고, 남 위주로 생각하면 속물이에요.

 

448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의 주인이고, 모르는 것의 하인이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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