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잠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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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가노 료이치의 <창백한 잠>을 다 읽은 지 한  정도 되어갑니다. 그러나 바로 리뷰 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책에 흠뻑 빠져들어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책을 읽을 때 어떤 문장이나 장면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멍하니 활자를 눈으로 짚어가는 일 외에도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노트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보기도 하고, 머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굴려가며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선 다시 책으로 들어가지요. 대개 그런 식이니 이 책의 경우에도 그렇게 읽는다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 책의 흐름과 상관없는 부분에 자꾸만 신경을 쓰다 보니 사람들의 이름이나 행동까지 모두 헷갈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 책에 나오는 신공항 건설 찬성파와 반대파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집을 준비 중인 이 책의 주인공 카메라맨 다쓰미 쇼이치는 바닷가 근처의 한마을, 다카하마 호텔의 폐허에서 사진을 찍던 중 한 여성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이 여성은 다에코라는 저널리스트로 다카하마 마을의 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혹시 공항 건설과의 문제 때문에 살해 된 것은 아닌지. 다에코의 전 남편인 지역 신문 기자 안비루는시신의 제1발견자이자 과거에 탐정이었던 다쓰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다쓰미는 현장을 돌아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다카하마 호텔의 과거사를 듣기도 하며 사건을 조사합니다. 그러던 중 다쓰미의 여자친구 후지코가 다카하마 호텔의 폐허에서 추락해 중상을 입고 맙니다. 사고가 아닌 인위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 다쓰미는 조사에 더욱 힘을 쏟는데요. 그 결말은...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어보니, 옛 호텔의 관계자이자 세력가 '이종원'에 대한 것 때문에 집중이 어려웠다는 말씀들이 있었는데요. 저는 오히려 그쪽에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종원'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 캐릭터일 뿐이니까요. 미국 소설에서 중국인이 범인이라거나 영국 소설에서 러시아인이 범인이라거나 하는 상황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처럼 - 혹시 그럴 경우엔 그 해당되는 국가의 사람들이 싫어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 생각을 자꾸 빼앗아버린 건 공항 건설 문제였습니다. 

중요한 부분인 듯 아닌 듯 자꾸만 공항 건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주에 신공항이 들어서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반대파들의 이야기들이 와 닿는 통에 중요한 사건에 몰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의 제주 국제공항 하나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신공항이 들어서야 한다는 말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국내외 관광객들이 무척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도민으로서는 정말 급한 일이 생겨도 갑자기 육지에 나가기 힘듭니다. 심지어 아들이 죽었는데도 비행기 좌석을 구하지 못해 가슴을 치며 울던 어떤 아버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공항이 생겨 교통이 원활해지면 좋겠지요. 하지만, 지금도 환경적인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욱 많은 사람들만 들어오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넘쳐나는 쓰레기들로 현재 매립지가 넘쳐나고 있거든요. 처치 곤란 상태란 말입니다. 청정 제주라니. 더욱이 신공항이 건설된 이후 비행기가 날아다닐 공역은 제가 사랑해마지않는 철새 도래지의 하늘입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데 철새가 올 수 있을까요? 아마도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철새를 쫓아내겠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저를 괴롭힙니다. 


그러니 이 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도 마찬가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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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화학자 - 화학과 요리가 만나는 기발하고 맛있는 과학책
라파엘 오몽.티에리 막스 지음, 김성희 옮김 / 더숲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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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요리라는 단어는 <미스터 맛짱>에서 처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요리만화였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갑자기 만화를 모두 훑어볼 수도 없고, 어쨌든 테라사와의 만화였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분자요리란 만화에서나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잊고 있었죠. 이것 보세요. 무슨 만화에서 보았었는지조차 기억 못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최현석 셰프가 분자요리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어. 정말 있는 거였어? 대중화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분자요리를 시도하고, 선보이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호텔 조리학과에서 분자요리 수업을 하는 대학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쿡가대표 홍콩 편에서는 액체 질소를 이용해서 요리 대결에 분자요리법을 사용하기도 하더군요. 

분자요리라니. 정말 신기합니다. 액체 상태여야 하는 양념장이 무스 타입으로 바뀌기도 하고. 콜로이드 상태로 변하기도 합니다. 기존의 통념을 깨어 다른 차원의 식감과 맛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요리법.... 먹어보지 않았기에 그 기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평소에 요리는 과학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으로서 정말 대놓고 과학적으로 접근해 원재료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내는 기법을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습니다. 예. 먹어보지도 못했지만요.


<부엌의 화학자>라는 책에서는 물리학자 라파엘 오 몽과 분자요리의 대가 티에리 막스가 함께 분자요리의 세계와 그 과학적 원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정말 신기한 세계가 주방 안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들을 해결하며 실험적 요리도 만들고  물리화학적 지식을 이용해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도 아니고 요리사도 아닌 데다가 먹어본 적도 없고 조만간 먹을 일도 없는 저는 그냥 흐응 그렇구나 하며 이 책을 구경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요리를 한다는 것. 식재료를 사용해 조리를 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 원리를 매 끼니마다 작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조리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섭취를 한 후에도 마찬가지인데요. 조리하는 행위는 음식을 섭취하기 좋게 만들고 소화 흡수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바꾼다는 의의가 있을 겁니다. 전통적인 조리법을 사용해도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분자요리법을 도입한다면 식자재의 성분 (영양성분 및 기타 성분)의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어서 가식률도 높아져 몸에는 이롭고 음식물 쓰레기는 줄어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말하자면 분자 단위의 마크로비오틱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크로비오틱이라는 단어의 뜻으로 따져보면 '분자 단위의' 라는 말이 이상해지긴 하지만요.)


<부엌의 화학자>에서는 우리가 시도할 수 없는 전문적인 분자요리법의 원리와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분자요리의 원리를 모두 이야기해 줍니다. 이를테면 달걀의 노른자를 가운데 오게 삶아 네모나게 성형한 후 빵가루를 입혀 튀기는 방법이라거나, 마이야르 반응은 충분히 내면서 발암물질은 적게 만들어 내는 맛있는 스테이크 조리법이라거나 달걀노른자로마요네즈를 제대로 잘 만들 수 있는 방법과 그걸 만들고 남겨둔 달걀 흰자로도 멋진 마요네즈 드레싱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궁금하다면 정말 따라 해 볼 수 있는 것들이지요. 


전문 셰프들의 화려한 분자요리의 원리를 알고 나니 그 요리가 더 신비로워 보입니다. 셰프들이 멋진 과학자이자 예술가로보이고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좀 더 과학적인 지식을 갖추고 더욱 효율적이고 영양 손실 적은 방법으로 조리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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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 스토리콜렉터 40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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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맥이 있는 저는 가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고,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근거리고 나면 높은 확률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곤 했지요. 그러니 맥이 이상하게 뛸 때면 이번엔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이러는 걸까 하며 불안해 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약간의 예지력이 있다고 믿었었나 봅니다.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두근거린 것이 아니라, 부정맥의 두근거림이 불안감과 맥놀이를 하고 있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두근거리더라도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타이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하지만 약간의 불안감은 십이지장 근처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초등학생 히비노 쇼타 역시 두근거림과 불안감을 느끼는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그것은 제 것과는 달라 정말로 심하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사를 하던 중에도 그 불안감이 따라왔습니다. 무언가 무척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 아이의 주변에서 실제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가야 해......

 

저 어두운 숲 속에서 부르고 있어......

 


한밤중 동생에게 나타난 히히노라는 녀석은 유령인지, 집 요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이 집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닌 여섯이나. 쇼타는 누나와 동생과 함께 오른 산에서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괴이함을 경험합니다. 산의 기운도 이상하고, 산 중턱에 지어진 자신들의 집도 이상합니다. 애초에 집을 짓다가 실패한 터와 건물이 세 군데나 존재하는 산이라니. 무언가가 집 짓는 것을 싫어해 방해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가하시 마을은 옛날에  '나가하시 촌'으로 불렸다. 논밭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집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촌락이었다. 나가하시 촌장은 대대로 '타츠미 가' 가 맡아왔고, 대부분의 토지를 그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마을 북쪽에 자리 잡은 '도도 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산에는 옛날부터 무서운 뱀신이 산다고 전해져서, 입산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런 신성한 영산(靈山)을 모시면서 뱀신을 진정시키는 한편 입산객이 있는지 눈을 번뜩이며 감시하는 것도 타츠미 가의 역할이었다.

-p.94


우루시바라 유키의 <충사>에서 였던가, 가물가물한 기억 탓에 출처는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산에 있던 어떤 동물 혹은 생각들이 모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산의 주인이 되고 그 산을 지키는 자가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편리에 따라 그 대상을 섬기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산을 지키는 그 존재는 신이기도 하며 동시에 요괴이기도 한 것이지요. '도도 산'의 뱀신도 처음엔 신이었을겁니다. 타츠미 가와 마을 사람들이 모시고 있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요. 그러나 전쟁 이후 몰락하던 타츠미 가의 사람들은 농지 개혁으로 모든 땅을 몰수당하자 영산인 도도 산에 대해 택지 개발을 합니다. 최고 연장자인 센 할멈이 거세게 반대했지만, 공사는 그대로 이어져 산에서 조용히 자고 있던 신령을 깨우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산의 주인은 그들에게 벌을 내렸고,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붉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구역을 침범하는 것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산의 피토케미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한 뱀 신의 치켜든 머리는 어린 쇼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쇼타는 <나츠메 우인장>의 나츠메처럼 기운을 감지하고 이상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협력자인 냥꼬센세 대신 친구 코헤이밖에 없으니 초등학교 남학생 둘이서 헤쳐 나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관장>과 <백사당>에 등장하는 '햐쿠미 가'의 분가인 '타츠미 가'의 어른들도 감당하지 못했던 뱀 신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남은 것은 어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설득해서 이 집을 빠져나가는 일 밖에 없을 겁니다. 과연 어른들이 믿어줄까요? 설계상 불길하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만, 어린 쇼타가 알 게 뭡니까. 그냥 불길한걸. 뱀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도 모자라 남북으로 길게 낸 복도라니. 이래서야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 온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불길하지 않습니까. 원래 귀문은 북동향이지만, 이 책에서는 거의 북쪽에 가까운 듯, 센 할멈의 저택 북쪽 창문들이 덧문으로 막혀있습니다. 적어도 이 할멈은 신이 내려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센 할멈에게서 히비노가가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소녀 이케우치 토코의 일기장을 건네받고 읽던 중 다시 무서운 꼴을 당하게 되는 쇼타. 이 마을 전체가 불안함의 대상입니다. 쇼타가 긴장하니 저도 덩달아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쇼타가 향하는 모든 곳에서의 체험을 함께 하며 점점 공포에 빠져듭니다. 상상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차라리 만화처럼 상상했으면 좋았으련만. 미쓰다 신조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뇌에 바로 영상을 보내와 저를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마지막, 책을 덮을 때까지 그것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스르륵하고 기어서 제게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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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0일생 소설NEW 1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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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하라 이치의 <그랜드 맨션>과 복붙한 것 같은 표지의 <2월 30일생>이라는 소설은 거의 같은 시기에 표지가 같은 두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미뤄두었던 책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표지에 관한 - 하는 의혹은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 이젠 이 책을 읽어도 좋은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희한하게도 요새 고르는 책마다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제는 정치에 대한 무지함은 깨버리고 좀 관심 좀 가지라는 하늘의 뜻인가 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책 <2월 30일생>에서는 주인공인 '나'의 아버지가 공천을 받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시기였기에 정치놀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배경이 깔립니다.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자,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자라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권력을 쥐고 떵떵거려보자는 이유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혹은 이미 맛본 권력의 맛을 잊지 못 해서 그 끈을 꽉 틀어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야 뭐, 정치를 해 본 적도 없고 권력 욕심도 없다 보니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방송국 PD인 주인공 '나'는 가족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 위해 고향인 J시에 내려옵니다. 출마 전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밑밥인 셈이죠. 그런데, 불륜관계에 있다가 얼마 전 헤어진 혜린이와 우연히 마주칩니다. 분명 우연인데, 나는 혜린이가 어떤 목적이 있어 J시에 내려왔다고 오해하고선 돌아가라고 다그칩니다. 심하게 싸우고 술을 먹고 필름이 끊긴 나는 다음날 혜린이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혹시 내가 죽였나? 할아버지의 입김으로 부랑자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용의선상에서는 풀려났지만, 그가 진범이 아니라는 생각에 진범 찾기에 나섭니다. 

이야기는 현재의 이야기와 과거의 이야기 두 갈래로 진행됩니다. 현재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현재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주인공 '나'의 이름이 현재거든요. 그렇다면 과거의 이야기는 과거가 진행하느냐,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니 과거의 눈으로 본 시점이 맞겠지요. 꼭꼭 감춰두었던 과거의 이야기는 누구의 개입도 없는 사실만을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점에서의 과거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입장에 맞추어 약간씩 변형이 있기에 듣는 사람으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독자 입장에서는 현재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과거의 이야기를 과거가 말하는 사실과 맞추어서 알아들어야겠지요. 

그 와중에 약간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일들이 얽히면서 이 이야기는 누가 했던 이야기인지, 누구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메모를 하면서 읽는 건데... 하며 후회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중반도 채 못 미쳐서 어떻게 된 일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과거의 그건 이렇게 되었겠구나. 그렇다면 혜린이는? 현재는? ... 그렇구나. 막장이로세. 빤한 결과에 반전 같은 건 느낄 수 없어서 좀 섭섭했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숨겨온 과거,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나쁘지만 이해할 수 있다거나, 잘한 건 아니지만 납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작가가 만들어 낸 각 캐릭터가 잘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섭섭하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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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속의 여우
에프라임 키숀 지음, 정범구 옮김 / 삼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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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투표권이라는 걸 처음 손에 쥔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투표권을 행사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 생각을 대신해 줄 사람을 뽑자는 마음으로 투표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어차피 다 비슷한 사람이니 그중에 좀 나은 사람을 뽑아보자는 생각으로 투표를 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너무 여러 번 속고 나니 지금은 누가 뽑혀도 결과는 다 마찬가지라 투표하기 싫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어르신들이 왜 투표를 하지 않고 포기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뭐, 그렇다고 투표하러 안 가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갈 겁니다. 하지만 아이도 슬슬 눈치채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누굴 뽑아도 공약이 흐지부지된다는 사실을요. 그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아예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라는 심보로 나오면 곤란하지요. 거짓말쟁이들 중에 가장 정직한 사람을 골라 투표를 해야 할 텐데. 벌써 걱정이 앞섭니다.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인상을 찌푸리고 마는 제가 이번에 읽은 책은 에프라임 키숀의 <닭장 속의 여우>입니다. 에프라임 키숀은 <개를 위한 스테이크>로 처음 만났었는데요. 무척 유명한 유태인 작가입니다. 192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만 다행히 살아남아 1949년에는 이스라엘로 이주해 금속공으로 잠시 일하다가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그의 작가 생활의 시작이었죠. 신문의 칼럼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 요새는 직설적이지만 - 그 역시 세태를 풍자하는 글을 썼는데요. 관료주의나 정치 풍자를 어찌나 통쾌하게 하는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그런 그의 정치 풍자력으로 쓰여진 책이 <닭장 속의 여우>입니다. 


정치 경력 50년에 빛나는 아미츠 둘니커는 사람들 앞에서 몇 시간씩 연설하는 것이 큰 장기였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연설 도중 연단에서 쓰러집니다. 의사는 그에게 정치계에서 잠시 물러나 요양하길 권하지요. 비서인 체프는 스위스의 조용한 휴양지에서 요양하길 바랐지만 둘니커의 고집으로 조용한 한 마을로 향하게 됩니다. 조용한 마을 킴멜크벨은 마치 스머프 마을 같은 곳이었습니다. 스머프 마을의 스머프들처럼 서로 도와가며 큰 분쟁 없이 사이좋게 잘 살아가고 있었지요. 대체로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화폐 같은 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집은 별개지만 '사실상' 공동생활이나 다름없었거든요. 각자의 역할 분담도 잘 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생활방식은 어쩌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둘니커는 이곳이 못마땅합니다. 전기는커녕 전화도 없어서 마을 외부와 통신할 때는 전서구를 날립니다. 게다가 아무리 소규모라지만 마을을 통솔하는 읍장도 없다니!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정치인으로서 이런 곳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둘니커는 마을 살림을 맡아 하고 있던 이발사를 들쑤셔 '사실상'읍장으로 행세하게 하고, 그 반대 세력으로 구두장이를 내세웁니다. 평화롭던 킴멜크벨은 이발사파와 구두장이파로 나뉘어 싸우게 됩니다. 여기에 '사실상'랍비 역할을 하던 백정 야콥 스파라디까지 나서게 되며 마을은 엉망진창.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한심한 곳이 되어버립니다. 

정치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단란했던 마을은 정치판이 되어버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이 되기는커녕 정치라는 이름의 난장판이 되어버렸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몇 사람이나 산다고 그 조그만 권력을 탐내고 야망을 불태우며 권모술수가 판치는 이곳은 예전의 순진한 사람들이 살 던 곳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걸 다 안다고 여기고, 자기가 아니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겼던 아미츠 둘니커. 그는 정말로 그런 위대한 사람이었던 걸까요? 우리 주변의 정치가들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맞는 걸까요? 마치 자기가 아니면 세상이 안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분란을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작품 배경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였지만, 지금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에 책을 덮으며 씁쓸해졌습니다. 


  "집어치워요. 설마 내가 아직도 당신의 지시와 충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노망든 건 아니겠죠? 정반대입니다! 당신의 그 훌륭한 연설문들을 누가 썼습니까? 대체 누가 머리를 쥐어짜 그 글을 썼죠? 진짜 당신은 누구십니까? 뭘 얼마나 아세요? 당신. 제대로 된 직업 하나라도 가져봤습니까? 둘니커는 70여 개의 기업을 관할한다. 둘니커 여기에, 둘니커저기에, 둘니커 넘어지다, 둘니커 뛰고, 전화하고, 논평하고, 쓰러지고, 일어나고, 매일 열 군데씩 회의나 모임에 참석하고, 최종 심판자이고......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있지만 정작 자기가 뭐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실상을 알고 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죠. 수만 명의 멍청이들이 여러 해 동안 직업을 가지기 위해 교육받고, 평생 동안 그 일을 합니다. 그럼 나중에는 어떤 이름 있는 정치가가 와서 그 모든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가로채요. 그 정치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남들이 이룩한 일에 대해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에 반해 막상 실제로 그 일들을 해낸 전문가들은 대학에서나, 아니면 직업학교에서 그렇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죠.

  네! 바로 그겁니다! 그 분야에선 둘니커, 당신이 전문가죠! 연설하고, 연설하고, 또 연설하고. 마치 끝없이 돌아가는 축음기처럼. 자기가 쏟아낸 물에 잠기고 마는 수도꼭지처럼! 둘니커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쳐 끝까지 싸우지만, 막상 자기 무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사막을 개간하라고 수만 명의 등을 떠밀어 보내지만, 막상 자신은 화분에 물 한 번 줘본 적이 없죠! 정치가! 아미츠 둘니커는 정치가다! 그렇지만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죠. 당신의 혀는 온갖 미사여구로 범벅돼 있지만 그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이런 점이 당신이 그 웃기는 문학상을 수상한다던가, 또는 별별 문화, 예술 관련 행사 개막식에 참석해서 테이프를 끊는다던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행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을 때까지 모든 것은 척척 진행되죠. 당신이 의자에 앉으면 여기저기서 잘 보이려고들 다가와 인사를 올리고.....(하략)"

-p.290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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