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8
박하익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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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무척 좋아합니다.

현실에서라면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혈흔에도 깜짝 놀라는 새가슴이지만, 책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쩐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교대로 활성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마약과도 같은 그 중독에 빠져버린지 수십 년입니다.

이런 장르의 책이라면 단편, 장편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합니다. 일본의 미스터리도 좋아하고, 영국의 정통 추리물도 좋아하고, 미국의 하드보일드도 좋아하지만, 가장 기대하는 건 역시 우리나라의 추리물입니다. 

어떤 분께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나라의 추리소설은 시시해서 읽지 않는다고요. 뻔한 내용이라 별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글을 쓴 작가도 아닌데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 작가들의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물론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들도 있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추리물이 외국보다 못하다 하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합니다. 외국의 소설들 중 재미있거나 좋은 작품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것이지 모든 외국 작가들이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니까요.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에서는 한국적인 미스터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배경도 다양해서 고구려, 조선, 현대, 그리고 근미래까지. 작가들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미 선암여고 탐정단의 연작 단편으로 엮어진 박하익의 '무는 남자'를 시작으로 임대인과 임차인의 서슬 퍼런 갈등을 그린 박지혁의 '잠만 자는 방'. 

지하철에서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들의 무림 세계를 그린 전건우의 '전철 수거왕'. 

역사 미스터리의 강자 정명섭이 고구려를 배경으로 펼쳐놓은 미스터리 '혈의 살인'.

탈레반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테러를 일으키는 걸 저지해야 하는 최혁곤의 '밤의 노동자2'.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기 여가수의 모방인을 찾아야 하는 체이서의 이야기, 문지혁의 '크라이 펫'.

유명 만화가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담당자의 범죄 이야기, 이대환의 '그때 그 만화가는 거기 없었다'.

비만 슈나우저를 동물병원에 맡겨 놓고 살해당한 여인의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송시우의 '좋은 친구'.

스토킹 당하는 여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토커로부터 구해주는 남자 이야기, 한상운의 '당신의 데이트 코치'. 

화성 성역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추리와 액션으로 시원하게 해결하는 한이의 '화성 성역 살인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한 편 한 편이 모두 재미있던, 보기 드문 알찬 단편집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책은 작가의 다른 책을 부르더군요. 

선암여고 탐정단을 읽었기에 '무는 남자'의 고통에서는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만, 최혁곤의 '밤의 노동자1'를 읽고 싶어서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수록되었다는 안내에 따라 작품을 찾아보았지만. 그 코너 자체가 폐지가 되어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읽지 않은 저자의 최근 소설,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이 밤의 노동자를 포함한 연작 단편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맙소사. 이렇게 되면 이 책을 찾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한이의 '화성 성역 살인사건'이라니!! 이야기의 전개도 그렇고 눈앞에 그려지는 액션이 그의 소설 <나는 백동수다>를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백동수다>라는 책은 eBook으로만 나와있는 것 같던데요.  외전에 '화성 성역 살인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작가들의 또 다른 책들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전건우 작가 덕분에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여러 책을 읽으며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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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 그리스 신화로 보는 우리 내면의 은밀한 심리
김상준 지음 / 보아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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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얼마나 적절한지. 


 

저는 어릴 때부터 신화나 우화를 좋아해서 그리스 신화부터 북유럽 신화 심지어 페루 신화까지 읽어보았었죠. 문제는. 비슷한 시기에 읽어대서 뒤죽박죽. 헷갈립니다. 이게 어디 이야기였지? 티티카카 호수의 여신처럼 아예 지명이 붙어 있지 않으면 참 곤란해요. 심지어 아라비안나이트랑도 섞여서 정말 난처합니다. 가장 헷갈리는 건 그리스와 로마 신화죠. 이름이 헷갈려요. 아무렴 어떠랴. 읽으면서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신화끼리만 헷갈리면 다행인데 현실과 신화의 경계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그 벌로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지만 다음날이면 다시 재생되어서 또 쪼아 먹힙니다. 매일 반복되지요. 그런데 실제로 간은 다른 세포들과는 달리 한 번에 두개로 분열하지 않습니다. 서너 개로 분열되지요. 그러니 회복력이 엄청납니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 때문에 간의 회복이 빨라진 걸까요? 아니면 간의 세포분열이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는 걸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면서도 참 열심히 읽습니다. 그러니 <심리학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라는 제목은 저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죠. 다만,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읽다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엄청 재미있는 겁니다. 아주 흥미로워요.


각 장마다 처음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이 나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며 자기의 입장을 이야기하지요. 호기심이 동합니다. 이제껏 나는 한쪽으로만 조명된 이야기를 읽어온 것 같다는 생각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살짝 기울여 글을 읽습니다. 정말 그래요.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아야죠. 그러니 주의 깊게 그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간추린 신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 신화 이야기는 제가 알고 있는 바로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짧긴 해도요. 하지만 앞선 호소문을 읽었기 때문일까요?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신화 이야기가 끝난 후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현대인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정말 와 닿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런 의미가 있구나.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신봉하는 남성적인 질서와 이성,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여성이었다. 그 당시 남성들이 생각하기에 여성은 혼돈 그 자체였으며 매우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여성은 매달 피 흘림이라는 월경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배가 불러오면서 출산을 하기도 한다. 그 당시 그리스 남성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불규칙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여성의 출산과 월경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속으로는 이런 창조적인 행위가 신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 만물을 만든 존재도 가이아(Gaea)라는 커다란 어머니 신이 아닌가?

-p.29 팜므파탈의 원조 판도라의 진실 : 우월감

 



진혼굿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한 것이다. 한이 맺혀 죽은 영혼을 달래고 좋은 곳으로 보낸다는 진혼굿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은 이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를 마음속에서 내보내고, 산 자는 하데스의 말대로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갈 수 있도록 하는 배려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온 이유는 희생자 가족들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가슴속의 슬픔을 모두 뽑아내려는 정화의식인 것이다.

-p. 164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의 죽음 : 집착과 상실감

 



그런데 아이게우스는 왜 신발과 칼을 아무나 들지 못하는 커다란 바위 밑에 묻어 두었을까? 테세우스의 어머니인 아이트라에게 맡기고 떠날 수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가 이렇게 힘겨운 과제를 남기고 떠난 것은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게 되는 정신적, 물질적 유산은 쉽게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쉽게 물려받은 유산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되며, 자식에게 제대로 대물림되지 않을 수 있다.

-p.231 테세우스와 반복되는 근친살인 : 영웅심과 권력욕

 



보기만 해도 돌로 변한다는 것은 자식들이 어머니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머니 앞에서 경직되고 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면 돌로 변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쳐다본다는 것은 자식과 어머니가 일대일의 대등한 관계임을 상징하는데, 이런 대등한 관계를 어머니가 허용하지 않으며, 그럴 때는 자식을 돌로 만들어 아무런 생각 없이 복종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감히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복종하는 자식들의 태도에 매우 만족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식들은 어머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복종하고,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

메두사는 부정적인 어머니가 갖고 있는 공포감을 나타낸다.

-p.263 아름다웠던 여신 메두사의 분노와 페르세우스 : 소유욕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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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피리 꽃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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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적초>일때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가 <비둘기 피리꽃>이 되니 읽고 싶어진 소설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작가들 중 하나죠. 저 역시 사랑하는 자들 중 하나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에도 시리즈 - 에서도 추리물과 괴담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 와 현대물 두 가지 다 찾아 읽고 있는데요. 현대물은 사회 문제를 다룬 추리소설과 특수능력자가 나오는 소설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궂이 분류하지 않아도 좋은데, 저는 어째서 분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건 다 몰라도 미미 여사 스타일 초능력자 이야기는 별로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 이 책은 어떤 책인가를 먼저 살피나 봅니다. 

그런 이유에서 <구적초>는 읽지 않았습니다. 초능력자들이 나온다고 해서요.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미미 여사의 초능력자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을 뿐이었죠. 왜냐고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봄을 닮은 색의 표지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비둘기 피리꽃>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정작 비둘기 피리꽃은 -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지만 - 보랏빛의 작은 꽃인데, 표지는 복숭아꽃을 닮은 분홍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저를 끌어당겼으니 기쁘게 읽어야겠지요.


이 책은 초능력을 가진 세 명의 여자의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접점은 없구요. 단편집입니다. 


만일 나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계속 해왔기에 별다른 건 없습니다. 저의 경우 나쁜 일에도 쓰지 않고 좋은 일에도 쓰지 않고 그냥 그런 능력 없는 셈 치겠다는 게 요즘의 생각이지만. 어린 시절엔 변신이 가능한 요술 공주들을 동경했던 걸 보면 좋은 일에 사용하고 싶었던가 봅니다. 

'비둘기 피리꽃'의 투시 능력자 (저는 사이코메트러라고 부르고 싶지만) 다카코 형사는 자신의 능력을 경찰일에 사용하고 싶었지만, 점점 약화되는 체력과 사라져가는 능력 때문에 안타까워합니다. 한편, '번제'의 아오키 준코는 자신을 무기라고 말합니다. 옳은 일에 사용하거나 그렇지 않거나는 무기를 사용하는 자의 손에 달렸겠지요. 아오키 준코는 <크로스 파이어>에 등장하는 파이로키네시스트인데요. <크로스 파이어>에서 자신이 짝사랑하던 동료 가즈키의 여동생 살해범에게 복수하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비둘기 피리꽃>의 '번제'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단편이지요. <크로스 파이어>의 원형입니다. 소설을 읽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검색해 보았더니 확실하더군요. 어쩐지 반가웠습니다. 다다 가즈키가 여동생을 잃은 사연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지만 그 둘을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니 가슴 저리게 반가웠습니다. 그렇네요. 제가 미미 여사 스타일 초능력자 이야기를 싫어하는 건 초능력자라는 이름에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재미보다는 그로 인한 마음 아픔을 감당하기 싫어서였나 봅니다. 

또 하나의 단편 '스러질 때까지'에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함께 살던 할머니까지 돌아가신 후 자신이 예지력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였다는 걸 알게 되는 도모코가 나옵니다. 


'스러질 때까지', '번제', '비둘기 피리꽃'의 주인공들은 모두 하나씩 안타까운 사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은 순식간에 읽어버리고서, 글을 쓰려니 한 줄도 못쓰겠는 겁니다. 그 이야기들이 안타까워서. 그래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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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선물용 특별판) -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1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루시드 폴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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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일러스트와 함께 오른쪽의 단어를 보고나서 왼쪽의 다정한 글을 한 번 읽습니다.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돌아와 단어의 뜻을 읽어봅니다

실은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기에 먼저 눈에 들어온 일러스트를 인지하고 그 시야의 가장자리에 단어가 걸쳐져 있기에 한 번 쓸고 지나갔을 뿐이라는 걸 알아채고서 다시 단어를 읽어봅니다

작게 소리 내어 몇 번 중얼거려봅니다

음색단어의 빛깔이 주는 맛을 입안에서 굴리며 느낍니다.

 

단어를 외우거나 하지 않아도

비가 내려 쌀쌀한 날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느낄 수 있는 책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입니다.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단어.

풀어 옮길 수밖에 없는 그 나라만의 단어를 느끼면서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봅니다.

꿈결 같은 수면 위 달빛 ,몽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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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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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로도 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없는 책 <채식주의자>를 읽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내가 숨 쉬는 공기까지 모두 찬찬히 들여다보면 온통 우울한 일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늘 블랙코미디나 시트콤 같은 삶을 추구하며 내면의 불안감을 주변에 전염시키기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기에, 이렇게 낮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독백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제 스타일의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스로 숨기고 있는 우울이, 슬픔이 빈틈을 발견하고 뛰쳐나오거든요.


웃으며 육식주의자라고 말하는 제가 읽는 <채식주의자>라니. 처음부터 책을 향해 손을 뻗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 막대들에 매달려 있는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p.18

 


영혜는 꿈을 꾸고 난 후 냉장고의 모든 고기, 육류를 버립니다. 달걀도, 우유도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죽제품들도.

꿈은 매일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남편도 친정 식구들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동물성의 모든 것들을 먹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채식주의자라고 불러서는 안될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세상에 잘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의 고기 거부증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는 사람들이 나의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기'라는 건 그녀의 내면에 있는 동물적인 것에 대한 거부였을 텐데.


이 책은 연작 단편입니다. 처음의 <채식주의자> 단편 이후 2년이 지났습니다 영혜의 형부는 아들의 몽고반점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무심히 흘린 아내의 말, 처제에겐 아직도 조그마한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에 어떤 자극을 받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아티스트의 영감을 자극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형부는 처제의 몸을 통한 예술을 원했습니다. 어떻게 영혜를 설득해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해낼 수 있을까. 그녀의 몸에 아름다운 꽃들을 그려 넣고, 남자 - 자신 혹은 그냥 남자에게도 꽃을 그려 넣고 교합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싶었습니다. 처제는 의외로 쉽게 자신의 몸에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합니다. 아마 그것이 꽃 그림이었기 때문이었을겁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엉덩이를 보았다. 토실토실한 두 개의 둔덕 위로 흔히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는, 옴폭하게 찍힌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01

 


그의 성욕은 처제의 육체가 전해주는 인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고개를 들지 않았고 오롯이 예술적인 감각만 깨어났습니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을 느끼지요. 그가 원했던 것은 에로틱함이 아니라 진정 예술이었구나....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후 아내에게 들키고 난 그의 눈에 비쳤던 공포. 그가 저지른 건 결국 욕망의 핑계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 이상합니다. 야한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전혀 불쾌하거나 야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인간의 고독과 고독이 부딪히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은 동물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식물의 수정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사건 1년 후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가 주인공으로 자신의 괴로움과 고독을 쏟아냅니다. 영혜는 여전히 고기를 거부하고, 이제는 먹을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나무가 될 거라고. 아니, 나무라고. 나무는 광합성을 한다며 물만 있으면 된다고 우겨댑니다. 그러면서 점점 죽음을 향해갑니다.

 



아직 더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 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p. 205

 



내가 언니라면, 자신은 나무라며 링거조차 거부하는 동생이 있다면. 숲으로 나가 보여줄 텐데. 커다란 비료포대도 보여주고, 영양제를 꽂아둔 나무도 보여주고, 나무 의사도 만나게 해주고, 나아가서는 흙 속에 부족한 인(P)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충하기 위해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도 보여주며 이 친구들도 물과 태양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줄 텐데. 관심을 보인다면 나아가서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들도 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가르쳐 줬을 텐데.... 소설 속의 언니는 제가 아닌 탓에 동생의 우울과 자신의 우울을 더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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