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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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희미한 빛으로는 저기 서 있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개인가 싶어 마음을 놓았다가는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 뜯겨버릴지도 모릅니다.

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의 산골마을 궁유면의 사람들도 늑대를 개로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지서의 순경이 갑자기 늑대가 되어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고 그 누구가 상상했을까요. 그의 어깨에 걸린 카빈 소총은 무장공비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든든한 무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총부리가 자신들을 향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죠. 그는 56명의 사람을 죽이고 결국 자신도 자폭해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이 마을 사람들을, 심지어 4개의 산골마을을 돌아다니며 마구잡이로 죽였다니 연속 살인도 이런 연속 살인이 없습니다. 사건 종결 후 윗선에 보고도 제대로 이루어졌을까요? 책임 회피를 위해 기록을 조작하고 파기한데다가 당시 신군부의 청와대는 이 사건을 덮으려 언론 통제를 했었습니다. 그러니 사상자의 수가 매체마다 좀 들쭉날쭉합니다. 사건의 경위는 대체로 드러나 있지만 말입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이 우순경 사건을 모티브로 쓰인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황순경이 양 어깨에 카빈 소총 두 정을 메고 수류탄을 두르고 살육을 벌입니다. 그의 총에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56명. 내연녀(혹은 아내)가 파리를 잡으려다 그의 가슴팍을 쳤다는 이유로 꾹꾹 눌러두었던 그의 열등감은 대폭발하고 마을 사람들과 이웃 마을 사람들을 쏘아 죽이고 만다는 점도, 당시 그의 상관들은 온천 나들이를 갔었다는 점도 우순경 사건과 무척 흡사합니다. 아주 끔찍한 일들이, 우순경이 악마가 되었던 그날의 기록이 황순경을 통해 살아납니다. 황순경도 우체국 직원과 전화 교환수를 죽이고, 행인을 죽이고, 초상집에서도 사람들을 죽입니다. 평소에 순경이라는 사람이 결혼식도 안 올리고 동거부터 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양입니다. 사건은 이렇게 우울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무서운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옵니다. 웃으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실소가 터지고 이내 희생자를 보고 웃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이 생깁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책을 읽습니다. 하지만 또 웃고 맙니다. 황순경이 한 명씩 차근차근 죽여나가는 것처럼 등장인물들도 한 명씩 차근차근 등장합니다. 이름만 존재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처음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정말 살아있는 인간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고민, 나름대로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사랑을 꿈꾸는 사람도 있었고, 신부가 되려는 사람도 있었고, 베트남 참전 퇴역 군인도 있었고, 무협지에 푹 빠져서 온 세상이 무림으로 보이는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느닷없이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살아 있었다면 응원해줬을 텐데....


불행 중 다행히 제가 자꾸만 웃고 만 것은 작가의 의도 중에 있었습니다. 이 책은 블랙 코미디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웃는 게 당연하죠.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죽은 피해자들에게 애도하고 몸보신만 하는 경찰, 공무원들에게 욕을 합니다. 희한하죠. 실제 우순경 사건으로부터 30년도 더 지났는데,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잖아요. 앞으로 계속 변함이 없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슬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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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미스터리한 이방인
마크 트웨인 지음, 오경희 옮김 / 책읽는귀족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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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은 풍자소설가로 유명하죠. 풍자에 관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 읽었던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왕자와 거지>같은 소설은 그 흐름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본명이 사무엘 랭그혼 클레멘스인 그는 배가 지나가기 안전한 수심이라는 뜻의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데요. 미시시피강에서 자라나 수로 안내인 일을 했던 경험에서 나온 필명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 이야기의 배경이 미시시피 강 인근인데요. 배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마치 제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가 미시시피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겠죠. 

핼리혜성을 타고 태어난 그가 그 다음번 혜성 주기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작품들을 남겼고 많은 사회 활동을 했었는데요. 말년에는 평안하지 못 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던 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또 다른 딸이 죽습니다. 게다가 시대적 배경까지 그가 염세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인종차별, 물질만능주의, 여성 불평등...


그런 염세적이고 우울한 가운데 쓰인 소설이 바로 이번에 읽은 <미스터리 한 이방인>입니다. 풍자를 넘어선 호된 질책이랄까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온전한 그의 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소설은 네 가지 버전으로 남겨져 있는데 모두 미완성이었습니다. '상테페트르부르크 단장','젊은 사탄의 연대기','학교 언덕','No. 44 미스터리 한 이방인' 이렇게 네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 소설은 초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미스터리 한 이방인>은 그가 남긴 네 가지 버전의 소설들 중 두 번째와 네 번째의 소설이 편집자의 손에서 합쳐져 하나의 소설이 된 작품입니다. 당시 유산관리인에 의해 발표되었다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생각은 담겨있지만 온전히 그의 소설이라고 여겨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맴돕니다. 'No. 44 미스터리 한 이방인'은 <신비한 소년 44호(문학수첩)>으로 출간된 바 있는데, 미완이긴 하지만 편집자의 손을 거치지 않은 그대로의 원고를 완역한 소설이라고 하니 읽고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 한 이방인>은 16세기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에셀도르프에서 철없이 신나게 살아가던 세 소년에게 미스터리 한 이방인이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이방인은 천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요죄 없이 순수한 그 천사의 이름은 '사탄'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사탄이지 사실은 천사라고 생각하려 해도 그의 티 없이 맑은 악함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거금을 건네주어 곤경에 빠지게 하기도 하고, 미래를 보아하니 식물인간으로 살 운명인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당장 죽여버립니다. 비참한 생활을 하며 오래오래 살아갈 사람을 마녀사냥의 희생물로 만들어 얼른 죽게 해주기도 하고요. 

사탄의 행실에 기막혀하면서도 가끔은 그의 말에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같은 거요.



  "아니야. 그것은 인간적인 짓이야. 그런 말로 함부로 짐승을 모욕해서는 안 돼. 짐승들은 그런 모욕을 당할 이유가 없어."

  사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너희 너저분한 종족은 항상 거짓말을 일삼고 지키지도 않는 도덕을 요구해. 너희보다 훨씬 우월한 짐승에게 도덕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도덕은 짐승에게만 있어. 어떤 짐승도 잔인한 짓을 하지 않거든.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나 잔인한 짓을 일삼고 있지. 짐승은 누군가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야. 따라서 그것은 죄가 아니지. 짐승들에게 죄는 존재하지도 않아. 그저 즐기려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짐승을 본 적 있니? 아니, 없어. 오직 인간만이 그런 짓을 해. 대체 왜 그럴까? 그것은 똥개 같은 도덕관념 때문이야."

-p.81~82


사탄은 사탄답게 인간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신에게도 몹쓸 말을 합니다. 



"신은 천사들에게는 영원한 행복을 거저 주면서 자식들에게는 스스로 노력해서 행복한 인생을 얻어내라고 해. 천사들에게는 고통 없는 삶을 주면서, 자식들에게는 지독한 불행과 몸과 마음의 병을 주며 저주해. 신은 세상에 지옥을 만들어 놓고, 정의와 자비를 떠들어대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는 황금률 운운하면서 일흔 번의 일곱 번씩 남을 용서하라고 해. 신은 또 인간들에게 도덕 운운하면서 정작 자기들의 도덕은 만들지 않았어. 신은 인간의 죄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모든 인간에게 죄를 짓게 했지. 신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인간을 창조했어. 그리고 인간의 근본인 신의 위대한 반열에 세우기는커녕,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감으로 질질 끌려다니게 만들었어. 가장 끔찍한 것이 무엇인 줄 알아? 신은 너무나 둔감하여 자기 백성이 이렇게 학대당하는 가엾은 노예인 줄도 모르고 그들에게 자기를 경배하라고 강요한다는 사실이야."

-p.201


사탄의 이런 냉소적인 말들이 소설 중간중간 나타나는데 반박하고 싶은 마음과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마음이 서로 싸웁니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신이 그렇게까지는 아니지 않나, 너무 말이 심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소설이었음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태그를 붙였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면서 결국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인간 다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표지의 말이 딱 들어맞네요.

'주목할 만한 시선, 인간 존재론적 자기반성의 철학적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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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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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마르틴 S 슈나이더(지옥이 새겨진 소녀의 등장인물)의 방식대로 세 문장으로 이야기하자면, 불량 청소년들 때문에 죽어버린 자신의 딸을 애도함과 동시에 인내의 끈이 끊어져버린 교사 20년 차 곤도 아야코가 졸업식 전날 담임인 반 아이들 24명 전원을 교실에 가둬놓고 농성을 벌입니다. 그 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인간쓰레기이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마땅한 처벌도 받지 않고 뻔뻔하게 살고 있었던 놈들이라 죽어 마땅한 이유를 들어 한 명씩 살해합니다. 금세 경찰이 학교를 에워싸지만 다방면으로 계획을 세워둔 아야코를 물리치고 아이들을 구해 낼 수 없습니다.


이 책은 호러 서스펜스입니다. 악의 교전(기시 유스케)에서 자신의 치부를 들켜버린데다가 하나씩 수습하기 귀찮아진 하스민 선생이 반 아이들을 게임하듯이 죽여나가는 모습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죽을 죄를 지은 - 자신들 때문에 죽거나 거의 죽음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사이코 집단 같은 반 아이들을 죄목을 이야기해주며 하나씩 죽여 나가는 아야코의 냉정함은 그럴싸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사십 대의 여교사에 불과했던 아야코가 그 간의 특별훈련(죽을 각오로 열심히 했다지만)을 거쳐 불량학생들을 제압하고 처치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비현실성은 그녀에게 잠재되어 있던 킬러 본능이 깨어났다고 치고 계속 읽어 나갈 수 있습니다만, 어쩌면 그 반 아이들 하나같이 그렇게 사악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비현실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책은 술술, 빠르게 읽힙니다.

온통 피보라가 치고, 학생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데 재미있다고 표현해서는 안될 것 같지만 그래도 흥미롭습니다. 


미혼모인 엄마가 혼자서 키우던 딸이 죽은 후 반 아이들을 통해 복수한다는 것은 고백(미나토 가나에)과 유사하지만, <그리고 숙청의 문을>에서의 범인은 이 반에 있지 않습니다. 아야코는 인질로 잡아 둔 학생들의 부모에게 모아오게 만든 몸값을 현상금으로 내놓고 딸을 죽게 만든 범인을 사냥하는 일종의 게임을 제안합니다. 누구든 그놈들을 잡아 오는 사람(혹은 사람들)에게 몸값 3억 6천만 엔을 주겠다고 했지요.


두뇌 플레이와 피가 튀기는 이 소설은 청소년 범죄에 대한 심각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아서 사회파 소설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습니다. 호러 서스펜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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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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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에 서 있던 아서 리엔더가 급성 심장마비로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세상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져 결국엔 문명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 문명의 종말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가 죽던 날 조지아 독감 보균자인 한 명의 인간이 미국 땅을 밟고, 인류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치사율과 전염률이 놀라우리만큼 무서운 조지아 독감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인류를 살해하기 시작했기에 자신들의 문명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아서 리엔더가 죽던 날 함께 공연했던 아역배우 커스틴이 이제는 어른으로 자라나 유랑극단원이 되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만,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은 사라진 문명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아 그들을 통해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전기조차 없는 그들의 삶이었지만, 셰익스피어와 그리고 만화책 스테이션 일레븐은 살아있었습니다. 생뚱맞지만요.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스테이션 일레븐은 커스틴에게 있어서는 과거에 자기가 존재했었다는 하나의 매개체였던 것입니다. 아서 리엔더와 공연했었고, 그에게서 받았던 선물이었으며 상상력을 증폭시킬 원동력이었지요.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소설은 독감 발생 20년 후, 독감 이전 14년, 독감 이후 15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기도 하고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뭔가 정돈되지 않은 것 같은 혼란에 함께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해요.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도 제대로 주시해야 합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습니다. 현재인지, 근미래인지 혹은 조금 과거인지 감이 잘 안 잡히거든요. 아서가 공연하던 시기가 현대라고 중심을 잡아두어야 20년 후나 14년 전으로 갈 때 장면의 혼란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엔, 아서가 공연하던 시기는 현대, 14년 전은 영화 '카사블랑카' 정도의 과거, 20년 후는 매드맥스의 시대 정도로 상상하고 말았거든요. 실제로는 별로 차이가 없는 거의 동시대 비슷한 배경인데도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100페이지가 넘어갈 때까지도 도대체 이 소설이 무얼 말하려 하는 건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독감 이후 문명이 왜 사라졌는지, 전기는 왜 안 들어 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반에 설명이 나오더군요. 그 설명을 읽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죠. 기상이변, 지각변동 같은 자연재해라거나 전쟁으로 인한 파괴라면 모를까 독감으로 문명이 사라지다니... 그리하여 마치 두어 세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생활을 하다니... 자원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뿐이지 그렇게까지 퇴화할까 싶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고개를 끄덕이며 음.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했지만 실은 논리적인 부분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과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과적으로는 납득이 안 간 달까요?


다 읽고 나니 전체적인 그림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책 뒤에 적혀있는 잔잔한 파문 같은 건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구나.... <박물관의 뒤 풍경(케이트 앳킨슨)>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어떤 물건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그런 장치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 했던 것들이 전지적인 눈으로 본다면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중에도 그런 것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물건을 소중히 다루라고 하는 건가 봐요.


SF 판타지인 <스테이션 일레븐>은 국내외 많은 작가들의 추천사와 각종 베스트에 올라있던 소설입니다. 그만큼 대단한 책일 테지요. 하지만, 저는 독서력이 모자라고 작품 볼 줄 아는 혜안이 부족해 이 책의 참맛을 잘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극찬하는 만큼의 맛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러니 저에게는 과분한 책이었습니다. 좀 더 독서력을 기르고 나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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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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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내 이성이 닫혔다. 창의력이 미친 듯 떠올랐다. 나는 광기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창조할 것이다. 형태를 만들고 완성하는 데 열중할 것이다. 로댕이나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도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때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내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신체 조각도 전체에 녹아든다. 저절로 변형된 것처럼 완성될 것이다. 나는 단지 연장일 뿐이다. 나는 변형하는 작품의 신하일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광기와 고통과 죽음을 선물한다.

-p.84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도움을 청하던 소녀는 노부부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등에는 단테의 신곡중 지옥 편에 나오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요. 담당 검사 멜라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클라라라는 이 아이는 자신의 옛 단짝 친구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죽고 일주일 후 납치된 아이는 지난 일 년 동안 어떤 지옥을 겪었을까요. 반드시 범인을 잡아서 단죄해야 합니다. 제1용의자로 친구의 새 남편이자 클라라의 의부인 브라인슈미트를 지목하고 심도 있는 수사를 펼치지만 뜻밖에 아이와 의부는 무척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이며 클라라에게 어떻게 접근했었을까요. 범인은 클라라에게만 몹쓸 짓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는데요 등의 피부가 벗겨진 상태로 암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녀들의 등에도 지옥이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클라라의 등에 있던 것은 여덟 번째의 그림이었으니까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이 완성되기 전에 어서 범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한편 <지옥이 새겨진 소녀>의 전작,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의 '더벅머리 페터'사건을 해결했던 자비네는 마르틴 S 슈나이더의 추천으로 그토록 원하던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국장은 실력도 없는 사람이 억지로 끼어든 것처럼 말하고, 팀원들은 낙하산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슈나이더도 압니다. 슈나이더 같은 지나치게 깐깐한 사람이 친하다고 아무나 데리고 올 리 없으니까요. 자비네는 아카데미에 도착한 날 자신의 전 남자친구-이지만 아직도 애정이 남아있는- 에릭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카데미 쪽이 먼저입니다. 슈나이더는 아카데미의 수업시간에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는 일명 '지네 사건','바텐 메어 바닷가 사건', '식인 사건','말 가면 사건'을 다룹니다. 각 사건은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일 년 간격으로 벌어졌으나 상호 간의 유사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비네는 사건을 더욱 파고들고 뜻밖의 범인을 만나게 됩니다. 


<지옥이 새겨진 소녀>는 두 갈래의 큰 물줄기를 타고 흐릅니다. 열살 소녀의 등에 지옥을 새긴 범인을 찾기 위한 멜라니의 수사 과정과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연쇄 살인(정확한 표현으로는 연속 살인이겠지만)으로 판단하고 진짜 범인을 찾으려는 자비네와 슈나이더의 수사 과정이 결국은 하나로 합쳐져 큰 강물이 됩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개성 있으며 매력이 뚜렷했습니다. 무척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독일식, 오스트리아식.... 네덜란드식 이름도 있군요. 그렇지만 읽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에 있는 누구인가가 전혀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 확실히 제 위치에 있었거든요.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빼고 필요한 부분들만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마르틴 S 슈나이더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설명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작가에게 잔소리 좀 했겠죠. 그러니 작가도 읽기 편하게 글을 잘 쳐낸 모양입니다. 소설은 흥미롭게, 숨 가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진행됩니다.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분량이 길어서 이틀에 걸쳐 읽긴 했지만요. 어쩌면 하나같이 다 이렇게 지독한 사건들 뿐인지. 잔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범인을 알게 된 후에도 요만큼의 동정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제멋대로라지. 


제멋대로라고 한다면 이 책에선 슈나이더가 최고죠. 아, 범인들 빼고요. 슈나이더는 명석한 두뇌, 웬만하면 남을 신뢰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마리화나 중독, 범인의 입장이 되어서 사건을 분석해 내는... 어, 영드의 셜록과 비슷한 타입이로군요.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슈나이더는 츤데레 타입인 것 같습니다. 새침 부끄라고 하죠. 뭔가 무지 사람을 무시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신뢰하고 있었다.....라는 캐릭터인데요. 자비네는 슈나이더에게 휘둘리는 듯하다가도 결국 그의 말을 무시하고 씩씩하게 상황을 헤쳐나갑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이죠. 슈나이더와의 콤비 플레이는 콤비인 듯 아닌 듯 굉장한 케미를 이룹니다. 이번 소설에 등장한 멜라니도 보통의 캐릭터는 아닌데요. 강한듯하면서 아름다운 그녀. 무척 멋집니다.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해요. 


생동감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지옥이 새겨진 소녀>를 통해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매력을 또 한번 느꼈습니다. 현재 세 번째 슈나이더 시리즈를 집필 중이라고 하네요. 그 작품도 어서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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