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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새겨진 소녀 ㅣ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곧 내 이성이 닫혔다. 창의력이 미친 듯 떠올랐다. 나는 광기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창조할 것이다. 형태를 만들고 완성하는 데 열중할 것이다. 로댕이나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도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때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내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신체 조각도 전체에 녹아든다. 저절로 변형된 것처럼 완성될 것이다. 나는 단지 연장일 뿐이다. 나는 변형하는 작품의 신하일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광기와 고통과 죽음을 선물한다.
-p.84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도움을 청하던 소녀는 노부부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등에는 단테의 신곡중 지옥 편에 나오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요. 담당 검사 멜라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클라라라는 이 아이는 자신의 옛 단짝 친구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죽고 일주일 후 납치된 아이는 지난 일 년 동안 어떤 지옥을 겪었을까요. 반드시 범인을 잡아서 단죄해야 합니다. 제1용의자로 친구의 새 남편이자 클라라의 의부인 브라인슈미트를 지목하고 심도 있는 수사를 펼치지만 뜻밖에 아이와 의부는 무척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이며 클라라에게 어떻게 접근했었을까요. 범인은 클라라에게만 몹쓸 짓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는데요 등의 피부가 벗겨진 상태로 암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녀들의 등에도 지옥이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클라라의 등에 있던 것은 여덟 번째의 그림이었으니까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이 완성되기 전에 어서 범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한편 <지옥이 새겨진 소녀>의 전작,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의 '더벅머리 페터'사건을 해결했던 자비네는 마르틴 S 슈나이더의 추천으로 그토록 원하던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국장은 실력도 없는 사람이 억지로 끼어든 것처럼 말하고, 팀원들은 낙하산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슈나이더도 압니다. 슈나이더 같은 지나치게 깐깐한 사람이 친하다고 아무나 데리고 올 리 없으니까요. 자비네는 아카데미에 도착한 날 자신의 전 남자친구-이지만 아직도 애정이 남아있는- 에릭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카데미 쪽이 먼저입니다. 슈나이더는 아카데미의 수업시간에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는 일명 '지네 사건','바텐 메어 바닷가 사건', '식인 사건','말 가면 사건'을 다룹니다. 각 사건은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일 년 간격으로 벌어졌으나 상호 간의 유사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비네는 사건을 더욱 파고들고 뜻밖의 범인을 만나게 됩니다.
<지옥이 새겨진 소녀>는 두 갈래의 큰 물줄기를 타고 흐릅니다. 열살 소녀의 등에 지옥을 새긴 범인을 찾기 위한 멜라니의 수사 과정과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연쇄 살인(정확한 표현으로는 연속 살인이겠지만)으로 판단하고 진짜 범인을 찾으려는 자비네와 슈나이더의 수사 과정이 결국은 하나로 합쳐져 큰 강물이 됩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개성 있으며 매력이 뚜렷했습니다. 무척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독일식, 오스트리아식.... 네덜란드식 이름도 있군요. 그렇지만 읽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에 있는 누구인가가 전혀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 확실히 제 위치에 있었거든요.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빼고 필요한 부분들만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마르틴 S 슈나이더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설명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작가에게 잔소리 좀 했겠죠. 그러니 작가도 읽기 편하게 글을 잘 쳐낸 모양입니다. 소설은 흥미롭게, 숨 가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진행됩니다.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분량이 길어서 이틀에 걸쳐 읽긴 했지만요. 어쩌면 하나같이 다 이렇게 지독한 사건들 뿐인지. 잔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범인을 알게 된 후에도 요만큼의 동정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제멋대로라지.
제멋대로라고 한다면 이 책에선 슈나이더가 최고죠. 아, 범인들 빼고요. 슈나이더는 명석한 두뇌, 웬만하면 남을 신뢰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마리화나 중독, 범인의 입장이 되어서 사건을 분석해 내는... 어, 영드의 셜록과 비슷한 타입이로군요.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슈나이더는 츤데레 타입인 것 같습니다. 새침 부끄라고 하죠. 뭔가 무지 사람을 무시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신뢰하고 있었다.....라는 캐릭터인데요. 자비네는 슈나이더에게 휘둘리는 듯하다가도 결국 그의 말을 무시하고 씩씩하게 상황을 헤쳐나갑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이죠. 슈나이더와의 콤비 플레이는 콤비인 듯 아닌 듯 굉장한 케미를 이룹니다. 이번 소설에 등장한 멜라니도 보통의 캐릭터는 아닌데요. 강한듯하면서 아름다운 그녀. 무척 멋집니다.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해요.
생동감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지옥이 새겨진 소녀>를 통해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매력을 또 한번 느꼈습니다. 현재 세 번째 슈나이더 시리즈를 집필 중이라고 하네요. 그 작품도 어서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