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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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많은 SF 명작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명작 중의 명작,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읽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읽었기 때문인지 이미 이 책은 절판되었지만, 다행히 폴라북스에서 2013년 출판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여전히 판매 중입니다. 

저자는 평생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요.  소설들이 영화화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느껴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는 1982년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는데 정작 작가는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세계관은 새롭고 철학적이었는데요. 그 세상을 바탕으로 SF 영화나 소설들이 재생산되다 보니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약간 식상하다 느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장면,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 그만큼 작가가 우리에게 던져놓은 물음과 이야기는 커다랗고, 아직까지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겠죠.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무엇이 올바른 일인가, 어떤 게 진실인가. 사실과 진실을 구별할 수는 있는 것인가. 수없이 생각해야 했고, 긴장과 해소를 반복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의 도덕관과 <토탈 리콜>에서의 진실과 허구의 불확실한 경계가 이 소설에서도 보였습니다. 옳다고 믿는 것이 반드시 진실이고 정의인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생각해 보아야한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저이기에, 주인공인 릭이 살고 있는 - 최후 세계대전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며 생각해 보아도 '스스로의 지능과 판단을 가지고 있는 지적 물체'를 즉결 심판으로 '은퇴' 시켜도 좋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릭 데카드가 사는 세상은 최후 세계대전 이후 낙진으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올빼미가 멸종하고 이내 대부분의 곤충을 포함한 동물들이 멸종하거나 멸종 위기를 맞은, 회색빛의 우울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릭은 경찰서 소속 현상금 사냥꾼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우울감을 가진 데다가 머서 주의라는 종교 같은 것을 믿고 있는 아내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언뜻 보아서는 진짜처럼 보이는 전기 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웃들은 모두 진짜 양으로 알고 있지만요. 릭은 정말 살아있는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합니다. 동물을 키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교하게,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누가 보아도 진짜 같더라도 그 안에서 심장이 뛰고 있지 않다면 그에겐 아무 소용없습니다. 집에서 동물을 키운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가치 지표와 같습니다. 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아마도 현대의 사람들이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가지고 싶은 욕망과 비슷한가 봅니다. 우리는 좋은 무생물을 원하고, 그는 좋은 생물을 원합니다. 살아있다는 건 언젠가 죽기 마련인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금을 들여 동물을 키우길 원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죠.

릭은 안드로이드에게 붙은 현상금을 사냥합니다. 돌려 말해도 나아지는 게 없군요. 직설적으로 말해, 도망자 안드로이드를 찾아내어 '은퇴' 시키는 일을 합니다. 영원히 말이에요. 죽인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죽으려면 먼저 살아있어야 하거든요. 안드로이드는 생명체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드로이드 입장에서는 죽음이죠. 그렇기에 죽지 않기 위해 도망칩니다. 릭은 그들을 찾아내고요.

이번 그의 임무는 넥서스 - 6 안드로이드의 은퇴입니다. 선배인 데이브가 추격하다가 실패한 녀석들을 찾는데요.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진짜 양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선수금 정도밖에 안되겠지만 열심히 일해서 할부로 사면 되니까. 부지런히 놈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면서 릭은 조금씩 혼란스러워집니다. 뛰어난 인공지능 때문인지 평범한 인간보다 뛰어나고 판단력과 행동력도 좋습니다. 아니 뭐 그런 걸 따지지 않더라도 정말 저 안드로이드에게 생명이 없다고 말해도 좋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릭이 아니라 제가 고민하는 건데요. 릭도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리사 마이어의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에 나오는 이코에게 생명이 없으니 사라져도 좋은 존재라고 말하기 어려운 건 독자와의 유대를 쌓았기 때문이죠. 이 소설에서는 별로 유대관계가 없으므로 제거해도 괜찮을까요? 다른 등장인물들과 다를 바 없이 이야기하고 생활하는데요. 릭은 자신이 제거한 안드로이드가 무기력한 다른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편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좋았던 건 아닐까 회의가 듭니다. 그들의 조직적 움직임에 당할 뻔했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이 던지는 물음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길이가 무척 길어질 겁니다. 가장 신경이 쓰였던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라거나 '생명체'에 관한 기준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모두 이야기하기 힘든 걸요. 더 힘든 건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끄집어 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SF 소설을 읽었지만, 철학자의 물음을 마주한 것만 같아요. 아무 생각하지 않고 SF 액션물로 읽었더라면 고민이 되지 않았을 텐데. 이 책은 그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다시 <매트릭스>를 보고 난 후 , <다크 시티>를 보고 난 후 가졌던 기분, 그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기억은 아닐까... 책장을 덮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도 여전한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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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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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니까 이런 유령이라면 있다는 이야기야. '어쩌면 유령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겁을 집어먹는 사람은 머릿속으로 진짜 유령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거야. 어둠 속에서 본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 창백한 사람의 얼굴로 보이기도 하고,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누군가의 속삭임으로 들리기도 한다는 거지. -p.71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본다고 합니다. 또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도 하지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양한 각도로 사물과 현상을 살피고자 하지만, 어딘가에 맹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소설 속의 명탐정들도 그러한데, 평범한 저 같은 사람이야 늘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판을 봐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획일된 생각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더란 말입니다. 이쯤 되면 사이코패스 집단인지 감응정신병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이비 종교의 일종인지 말도 안 되는 논리와 편견을 가지고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바른 소리인지 - 객관적으로 살펴보아 - 한 번쯤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랫맨>을 읽다 말고 뉴스와 유튜브를 뒤적인 탓에 좀 과하게 나갔습니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닌데도 말이죠. 예를 들어 이 그림에서 랫맨만을 봤다고 쳐. 그때 '이건 쥐야.' 하고 믿어 버리면 의도적으로 견해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이상 몇 번을 봐도 쥐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아. 반대로 '아저씨 얼굴'이라고 믿으면 더 이상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게 돼. 이게 명명 효과야. 쥐라고 해버리면 그냥 쥐야. 아저씨라고 하면 그대로 아저씨고. -p.71 


정치와는 상관없는 <랫맨>은 음악 하는 청년의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어린 시절 누나가 추락사 한 뒤 뇌종양을 앓고 있던 아버지마저 한 달 후 돌아가시면서 누나의 죽음에 대해 내내 의문을 품고 있던 히메카와 료는 현재 아마추어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입니다. 친구들과 결성한지 벌써 14년째, 홍일점인 히카리와 연인 사이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미적지근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사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의 동생 게이에게 마음이 갑니다. 게이도 히메카와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레 알게 된 히카리의 임신, 그들은 중절을 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의문이 듭니다. 내내 피임기구를 사용해왔는데 어째서 임신을 했을까요? 5%라는 - 어떻게 낸 통계인지도 모르겠지만- 확률에 당첨되어 임신이란 걸 한 걸까요? 혹시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 건 아닐까요? 그런 의혹을 해소하기도 전에 히카리가 사망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요. 과연 어떻게 된 걸까요. 히메카와의 누나의 죽음, 그리고 히카리의 죽음엔 어떤 랫맨이 숨어 있을까요.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을 읽을 때 저는, 약간의 기대를 합니다. 스산하거나 촉촉하겠지 하는 기대 말이에요. <술래의 발소리>로 처음 시작했거든요. 말 그대로 종이신문을 읽다가 책 소개 글을 보고 찾아 읽었는데요. 미치오 슈스케란 그런 미스터리 하면서도 호러블한 소설을 쓰는 사람일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잔잔하거나 약간은 아픈 글을 쓰기도 하는 소설가였어요. 이 책 <랫맨>은 어떤가 하면, 잔잔합니다. 반전에 반전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큰 굴곡은 없어요. 파고가 높지 않은 바다에 커다란 돌을 던져 넣은 것 같은 정도에요.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저는 괜찮았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글을 좋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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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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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바로 리뷰를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새벽무렵 잠에서 깨기전에 꿈 속에서도 이 책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HH...또 HH 계속 책 제목과 내용을 곱씹었습니다. 이 책은 거의 완벽한 팩트임에도 불구하고 서술되는 내용을 읽어가면서 머릿속은 대혼란,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미스터리에 스스로 빠져들었습니다. 몇 페이지 읽다가 갸웃, 몇 페이지 읽다가 곰곰... 이런식으로 책을 절룩절룩 읽었습니다.

어째서냐하면....


<HHhH>는 최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상상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전하려고 합니다. 



역사소설에서 제일 억지스러운 것은 과거를 그린 죽은 페이지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직접 수집한 증언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사다. 이것은 활사법과 비슷하다. 묘사가 너무 생생해 마치 눈으로 직접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기법이다. 대화를 재구성하면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가 날 수 있다. 인위적인 기교가 너무나 뻔히 보이고 역사적 인물들의 목소리를 가로채어 되살리려는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많이 들어가게 된다.

-p.33



그런 이유로 작가는 이 소설에 되도록 대화를 많이 넣지 않으려고 합니다. 모든 걸 사실 그대로 서술하겠다는 거죠. 그러니 작가의 글을 따라 읽다보면 계속해서 책상에 앉아 고민하고 글을 쓰고 다시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만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그러다 과거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검은 잡티나 노이즈가 있는 회색빛 화면속에서 그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끔은 산뜻하게 - 말하자면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 같은 정도의 산뜻함이지만 - 재생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금발의 짐승이라고 불렸던 하이드리히는 나치 친위대 내부 정보기관 (SS) 의 책임자로서 나치스의 정치 공작과 비밀 작전을 모두 지휘하는 천재적 역량을 발위한 인물로 유대인 말살 계획인 최종 해결책을 입안하고 추진했습니다. 친위대 사령관은 히믈러였지만 사실상 모든 작전은 하이드리히가 지휘했기 때문에 당시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고 불린다'라는 말이 항간에 떠돌았다고 하는데요(책 날개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히믈러의....'이 부분의 독일어를 줄인 말이 책의 제목인 <HHhH>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하이드리히가 되겠지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미스터리에 빠지고 말았죠. 100 페이지 넘게 읽고 있는데, 도대체 이걸 소설이라고 해도 좋은 것인가. 나치와 하이드리히에 관한 스토리 텔링 형식의 글을 읽고 있는게 아닌가.. 나아가서는 이건 그냥 작가의 나레이션이 들어간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게다가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하이드리히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쓰고 있는 책은 '하이드리히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하이드리히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이 책을 구상하면서 내가 생각한 제목은 '유인원 작전' 하나였다.(중략) 하이드리히는 작전의 표적이지 주체가 아니다. 이 책에서 하이드리히 이야기는 배경을 설명해주는 역할이다.

-p.134



작가는 다른 소설가와는 달리 등장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후손으로서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싶어합니다. 강박증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은 '절대로' 왜곡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이 장면은 앞의 장면과 마찬가지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완전히 허구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변명할 수도 없는 사람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가브치크는 커피만 마시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차를 마신다고 묘사하고 있다. 가브치크는 어쩌면 외투를 한 벌만 입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 마음대로 두 벌을 입히고 있다. 기차를 탔을 수도 있는데 내 마음대로 버스에 태우고 있다. 저녁에 떠났을 수도 있는데 내 마음대로 아침에 떠난 것으로 해 버린다. 나 자신이 부끄럽다.

-p.141



이정도로 사실만을 옮기는 데 집착하다니. 책을 읽다말고 소설가님들께 질문의 글을 올릴 뻔 했습니다. 허구를 가미하지 않고 팩트만을 전하는 방식도 소설에 속하는 것인가. 계속해서 책을 읽어가던 저는 마침내 단서 하나를 획득합니다. 



내가 쓰는 책이 소설이었다면 발치크는 전혀 필요 없는 등장인물이었을 것이다.

-p.279



'내가 쓰는 책이 소설이었다면' 이라는 말은 소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그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로구나!! 깨달음을 얻고 기뻤습니다만, 그 기쁨도 잠시. 만약 지금까지 나온 '나'라는 사람이 작중화자로서 허구의 인물이라면? 그렇다면 이 책의 전체적인 모습은 제가 알고 있는 소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대혼란.

혼란에 빠졌던 건 저 뿐만이 아니었나봅니다. 작가는 후반부에 이르러 깨닫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인프라 소설(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옮긴이)이다.

-p.320



작가의 깨달음과 동시에 무언가가 개운해진 저는 마음 놓고 책을 읽어갔습니다. 작가도 개운해진 모양입니다. 갑자기 소설에 생기가 돕니다. 그게 깨달음 때문인지 하이드리히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하이드리히는 죽어가고 소설은 살아납니다. 회색빛이었던 화면에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분명 엉뚱한 곳에 촛점을 맞추어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형식의 소설을 만나 당황했기 때문이었죠. 악마적인 매력이 있는 하이드리히에게 주어야 할 관심을 작가에게 줘버렸습니다. 작가는 책을 쓰기 위해 2차대전과 하리드리히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읽고, 책을 읽었으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노력이 <HHhH>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구요. 소설 속에서 여러가지 영화나 자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참 특이한 책입니다. 

실은, 몇 페이지 읽고서 큰일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뭐지. 나랑 맞지 않잖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아. 원치 않았던.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마음을 다졌습니다. 그래, 이 책을 정복하고 말겠어. 이건 읽는게 아니라 정복하는거야.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까지 전진! 전진하라! 

그런데 희한하게도, 소설이 생기를 띄기 시작한 후(320 페이지 이후) 갑자기 흥미진진해집니다. 하이드리히 암살 당시의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면서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의사'들도 생각나고, 암살 이후의 이야기들도 깊은 한숨으로 다가왔습니다.

책을 다 읽고나니 아쉬워졌습니다. 제가 만일 당시의 역사나 인물관계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요. 수많은 플래그를 붙여가며 읽은 책이었지만,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만족스럽습니다. 끝까지 읽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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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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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첫 책으로 선택한 것이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입니다. 소설의 배경이 여름인 건 그렇다지만 제목부터가 어울리지 않는 계절인 것을. 그렇지만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서로 안 어울리긴 마찬가지거든요. 첩첩산중 와이파이는커녕 데이터도 사용할 수 없는 아홉모랑이 마을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탐정이 운동복 차림 삼수생에, 여든 넘은 할머니, 열다섯 살 꽃돌이라니 그 조합의 삼총사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막장 드라마를 보다가 정말로 뒷목잡고 쓰러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초상을 치르러 산촌의 마을에 모였던 효심 깊은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은 혼자 남은 노모가 걱정이 되어 삼수생이라는 이름의 백수인 무순이에게 할머니를 부탁하고- 라지만 늦잠 자는 사이에 쪽지와 용돈을 두고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잔소리쟁이 할머니를 피해 마실을 나갔던 무순은 할아버지 책장에서 자신이 15년 전이 집에서 살 적에 그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지도를 발견하고, 보물 찾기에 나서는데요. 지도의 장소에서 발견한 것은 '다임개술'이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보물이 아니라 잡동사니뿐이었는데요. 그곳에서 종갓집 종손 꽃돌이와 마주칩니다. 정녕 보물은 꽃돌이였던 것인가! 꽃돌이, 아니 창희는 무순이 발견한 것들에 흥미를 보입니다. 종갓집에 입양된 자신과는 달리, 이 집의 진짜 딸인 유선희가 실종되기 전에 남긴 것 같은 물건을 보았기 때문이죠.


이 마을에는 공개된 미스터리가 하나 있습니다. 백수잔치를 하기 위해 온 동네 어른들이 온천여행을 떠났던 15년 전. 마을에 돌아와보니 네 명의 여자아이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종갓집의 피부 하얀 아가씨 유선희(16세) 뿐만 아니라, 삼거리 공깃돌 줍는 모자란 아이의 누나 황부영(16세), 소문난 날라리 유미숙(18세), 교회 목사님의 막내  조예은(7세) 이렇게 네 명이었는데요. 나이도 그렇고 뭔가 안 어울리는 조합의 네 명의 여자아이들이 한 번에 실종되다니 경찰의 수사도, 무당의 신기도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 했습니다.묻혀버린 사건이지만, 실종된 아이들의 부모님은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목사 사모님은 정신을 놓은 것 같습니다. 예은이를 외계인이 데려갔다며 매일 하늘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이미 세월은 15년이나 지났는데도요. 시간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흐르는 것이지 아이 잃은 엄마에게는 그렇지 않나 봅니다. 


무순이와 꽃돌이가 처음부터 이 미스터리에 뛰어들려고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유선희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자전거와 소년'이라는 목각을 '소년'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찾아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과거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탐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카리스마 간난 여사가 합세해, 이 희한한 탐정단은 마을의 모든 비밀을 들쑤시게 되지요.


처음엔 무지막지한 코믹함으로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아니 이거 뭐야, 미스터리가 이래도 좋은 거냐. 하지만 그 코믹함 속에 들어있는 삶이 보이고, 사람이 보여 마냥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라지만, 다시 웃게 만듭니다. 

모처럼 희한한 미스터리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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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범죄자 - 옆집에 살인마가 산다!
웬디 L. 패트릭 지음, 김경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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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살던 집의 바로 담장 너머엔 2층 집이 있었습니다. 1층은 식당이었는데요. 2층엔 일가족이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확실하지 않았던 건 왕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 집의 다른 식구들은 몰라도, 아저씨는 몇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큰 키에 깔끔하게 밀어버린 머리, 험상궂은 얼굴, 검은색 티셔츠나 터틀넥 셔츠를 입고 검은색 양복을 입고 다니시는 분으로, 다른 옷을 입은 건 뵌 적이 없었습니다. 체격도 건장해서 누가 함부로 말을 붙이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저도 물론 말을 붙이거나 인사해본 적도 없었죠. 조직에 계시거나, 경찰 조직에 계시는 분일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강력반.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저씨가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와 1층 식당의 뒤쪽 창문을 기웃대는 걸 보았습니다. 좀 무섭지만 왜 그러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더니 오히려 아저씨가 당황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앞집 건물 주인아저씨였는데요, 식당에서 가스 단속을 잘 안 하고 퇴근하는 바람에 한 번 큰일 날뻔한 적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실례인 줄 알면서 저희 쪽으로 들어와 식당의 열린 창문으로 살핀다고 하시더라고요.그날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졌지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도 몰라서 살짝 두근거렸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저희는 이사를 갔고, 그전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요. 딸과 함께 시내 나들이를 가다가 그 아저씨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조직의 둘째 형님이나 형사일 거라고 짐작했던 그 아저씨가, 사실은 꽃집 아저씨였지 뭡니까. 그렇죠,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분만 꽃집을 하라는 법은 없죠. 꽃을 사랑하고 나무를 사랑하면 꽃집 할 수 있죠. 험상궂고 건장한 체격만 보고서- 게다가 무채색의 의상까지 더해 오해하고 말았습니다. 


외모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오해하고 마는군요. 비단 저만 그렇겠습니까. 세상에는 보이는 것 때문에 속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허점을 노리는 범죄자들도 참 많고요. 외모가 뛰어나거나, 재력이 있어 보이는옷차림과 자동차, 화려한 언변 같은 것에 넘어가 사기도 당하고, 강력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걸요. 

현직 샌디에이고 카운티 검찰청 지방 검사이자 성범죄 스토킹 부서 팀장인 웬디 L. 패트릭은 <친밀한 범죄자>에서 우리 주변에 있는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을 감별하는 방법을 FLAG라는 이니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FLAG는 가면 뒤에 숨은 본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그것들을 잘 관찰하면 내 주변에 숨어 있는 위험한 사람들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F Focus 관심사, 그 사람은 어디에 관심을 보이는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L : Lifestyle 생활방식, 그 사람의 생활방식은 어떠한가? 퇴근 후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취미는 무엇인가.

A : Associations 주변인, 그 사람은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가? 주로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어떤 인간관계를 유지하는가.

G : Goals 목표, 그 사람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며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나중에 돌아보면 분명 허술한 점이 있거나 수상한 점이 있는데, 희한하게도 일이 안되려면 그렇다고, 그들이 가진 미심쩍은 점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애시절엔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도 하죠.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볼 땐 정말 이건 아니다 싶은데 본인을 활활 불타오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증후군이라고,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더 타오르는데요.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가 파국을 맞습니다. 자신이 보지 못 했던 그런 부분 때문에요. 아마도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냉정함이 부족하기 때문일 테죠.- 그렇게까지 냉정하면 그건 그것대로 힘들 것 같습니다만.


저자는 책의 앞쪽에서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서술을 통해 우리에게 FLAG를 파악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그렇기에 저도 책에 Flag를 많이 달아놓았습니다. 한 번에 이해하기엔 좀, 그래요 힘들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만일 저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과연 이대로 실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건 별개의 문제겠지만요. 얼마 안 되는 서문과 Part 1을 지나고 나면 실례와 함께 현실적인 조언을 합니다.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요새 유튜브에서 '용감한 기자들'을 발췌해 놓은 걸 보고 있습니다. 티캐스트를 통해서 제공되고 있는데요. 놀라운 사건이 무척 많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가까운 사람끼리 저럴 수 있나 싶은 그런 기사들인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는 사이에, 친한 사이에 일어나는 범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믿기 싫은 마음에서 나오는 한탄이겠죠.


<친밀한 범죄자>에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부분이 제법 다뤄집니다. 읽다 보면 요새 뉴스에 나오는 누구와 누구, 그리고 누구누구가 생각나기도 하고, 지인 중에 딱 들어맞는 부분도 있었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런 사람들까지 사이코패스였구나 싶어 놀라기도 하며 읽었는데요. 다소 무거운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내용도 무겁지만, 책 자체도 -실제로 - 무겁습니다. 300여 페이지 치고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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