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고 바로 리뷰를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새벽무렵 잠에서 깨기전에 꿈 속에서도 이 책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HH...또 HH 계속 책 제목과 내용을 곱씹었습니다. 이 책은 거의 완벽한 팩트임에도 불구하고 서술되는 내용을 읽어가면서 머릿속은 대혼란,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미스터리에 스스로 빠져들었습니다. 몇 페이지 읽다가 갸웃, 몇 페이지 읽다가 곰곰... 이런식으로 책을 절룩절룩 읽었습니다.

어째서냐하면....


<HHhH>는 최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상상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전하려고 합니다. 



역사소설에서 제일 억지스러운 것은 과거를 그린 죽은 페이지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직접 수집한 증언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사다. 이것은 활사법과 비슷하다. 묘사가 너무 생생해 마치 눈으로 직접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기법이다. 대화를 재구성하면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가 날 수 있다. 인위적인 기교가 너무나 뻔히 보이고 역사적 인물들의 목소리를 가로채어 되살리려는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많이 들어가게 된다.

-p.33



그런 이유로 작가는 이 소설에 되도록 대화를 많이 넣지 않으려고 합니다. 모든 걸 사실 그대로 서술하겠다는 거죠. 그러니 작가의 글을 따라 읽다보면 계속해서 책상에 앉아 고민하고 글을 쓰고 다시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만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그러다 과거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검은 잡티나 노이즈가 있는 회색빛 화면속에서 그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끔은 산뜻하게 - 말하자면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 같은 정도의 산뜻함이지만 - 재생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금발의 짐승이라고 불렸던 하이드리히는 나치 친위대 내부 정보기관 (SS) 의 책임자로서 나치스의 정치 공작과 비밀 작전을 모두 지휘하는 천재적 역량을 발위한 인물로 유대인 말살 계획인 최종 해결책을 입안하고 추진했습니다. 친위대 사령관은 히믈러였지만 사실상 모든 작전은 하이드리히가 지휘했기 때문에 당시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고 불린다'라는 말이 항간에 떠돌았다고 하는데요(책 날개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히믈러의....'이 부분의 독일어를 줄인 말이 책의 제목인 <HHhH>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하이드리히가 되겠지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미스터리에 빠지고 말았죠. 100 페이지 넘게 읽고 있는데, 도대체 이걸 소설이라고 해도 좋은 것인가. 나치와 하이드리히에 관한 스토리 텔링 형식의 글을 읽고 있는게 아닌가.. 나아가서는 이건 그냥 작가의 나레이션이 들어간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게다가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하이드리히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쓰고 있는 책은 '하이드리히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하이드리히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이 책을 구상하면서 내가 생각한 제목은 '유인원 작전' 하나였다.(중략) 하이드리히는 작전의 표적이지 주체가 아니다. 이 책에서 하이드리히 이야기는 배경을 설명해주는 역할이다.

-p.134



작가는 다른 소설가와는 달리 등장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후손으로서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싶어합니다. 강박증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은 '절대로' 왜곡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이 장면은 앞의 장면과 마찬가지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완전히 허구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변명할 수도 없는 사람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가브치크는 커피만 마시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차를 마신다고 묘사하고 있다. 가브치크는 어쩌면 외투를 한 벌만 입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 마음대로 두 벌을 입히고 있다. 기차를 탔을 수도 있는데 내 마음대로 버스에 태우고 있다. 저녁에 떠났을 수도 있는데 내 마음대로 아침에 떠난 것으로 해 버린다. 나 자신이 부끄럽다.

-p.141



이정도로 사실만을 옮기는 데 집착하다니. 책을 읽다말고 소설가님들께 질문의 글을 올릴 뻔 했습니다. 허구를 가미하지 않고 팩트만을 전하는 방식도 소설에 속하는 것인가. 계속해서 책을 읽어가던 저는 마침내 단서 하나를 획득합니다. 



내가 쓰는 책이 소설이었다면 발치크는 전혀 필요 없는 등장인물이었을 것이다.

-p.279



'내가 쓰는 책이 소설이었다면' 이라는 말은 소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그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로구나!! 깨달음을 얻고 기뻤습니다만, 그 기쁨도 잠시. 만약 지금까지 나온 '나'라는 사람이 작중화자로서 허구의 인물이라면? 그렇다면 이 책의 전체적인 모습은 제가 알고 있는 소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대혼란.

혼란에 빠졌던 건 저 뿐만이 아니었나봅니다. 작가는 후반부에 이르러 깨닫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인프라 소설(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옮긴이)이다.

-p.320



작가의 깨달음과 동시에 무언가가 개운해진 저는 마음 놓고 책을 읽어갔습니다. 작가도 개운해진 모양입니다. 갑자기 소설에 생기가 돕니다. 그게 깨달음 때문인지 하이드리히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하이드리히는 죽어가고 소설은 살아납니다. 회색빛이었던 화면에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분명 엉뚱한 곳에 촛점을 맞추어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형식의 소설을 만나 당황했기 때문이었죠. 악마적인 매력이 있는 하이드리히에게 주어야 할 관심을 작가에게 줘버렸습니다. 작가는 책을 쓰기 위해 2차대전과 하리드리히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읽고, 책을 읽었으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노력이 <HHhH>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구요. 소설 속에서 여러가지 영화나 자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참 특이한 책입니다. 

실은, 몇 페이지 읽고서 큰일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뭐지. 나랑 맞지 않잖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아. 원치 않았던.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마음을 다졌습니다. 그래, 이 책을 정복하고 말겠어. 이건 읽는게 아니라 정복하는거야.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까지 전진! 전진하라! 

그런데 희한하게도, 소설이 생기를 띄기 시작한 후(320 페이지 이후) 갑자기 흥미진진해집니다. 하이드리히 암살 당시의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면서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의사'들도 생각나고, 암살 이후의 이야기들도 깊은 한숨으로 다가왔습니다.

책을 다 읽고나니 아쉬워졌습니다. 제가 만일 당시의 역사나 인물관계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요. 수많은 플래그를 붙여가며 읽은 책이었지만,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만족스럽습니다. 끝까지 읽길 잘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