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망명자 - 2017년 제4회 SF어워드 장편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
김주영 지음 / 인디페이퍼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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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리를 할 때 남들이 듣도 보도 못한, 아니면 이름만 들어보았을 것 같은 그런 재료를 가지고 훌륭한 풍미의 요리를 만들어 내면, 맛있다는 극찬과 그런 재료만 있으면 나도 만들겠다는 식의 비아냥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나 약간의 사전 준비를 하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누구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면 비법이 무엇이냐며 칭찬을 듣게 마련이죠. 이 소설 <시간 망명자>가 그렇습니다. 
일제 시대의 밀정 이야기, 시간 여행, 디스토피아, 연쇄 살인, 빙의 같은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가져다가 정말 맛있게 버무렸습니다. 

일제 시대의 밀정이었던 지한은 죽음을 맞이하던 날, 마중 나온 제에 의해 미래로 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보다 먼 미래인 그곳은 전염병에 의해, 안드로이드에 의해 싹쓸이 되다 남은 인류가 살아남아 세운 미래도시로 갖가지 의학이나 기계적인 부분은 발전했지만 자연적인 종족 번식이 되지 않았기에 세상을 유지시키려면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타임 트래블 기술이 발달한 이 나라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요. 그들을 시간 망명자라 부르고 자신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공적인 부분을 삽입, 그 세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무척 적응을 잘 하는 자도 있고 절대로 적응할 수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이를테면 주인공인 강지한의 경우 1937년 상해에서 끌려온 밀정이었기에 일반인에게는 적이고, 독립운동가에게는 친구이죠. 그러나 '고향의 봄' 작전의 실패로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적이 된 상태이니 이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곧, 적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제까지 원수였는데 오늘부터는 새로운 세상에 왔으니 친하게 지내라는 건 금방 다투고 씩씩거리는 유치원생에게도 안 통할 이야기잖아요.

이 세상은 언뜻 유토피아처럼 보입니다. 통제적이긴 하지만 외모도 취향대로 바꿀 수 있고, 원하면 인공 신체로 바꿀 수도 있으니 관절통으로 고생할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화의 옷을 입은 그들의 속은 시커매서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지요.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그렇습니다. 누가 지한의 편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를 이 세계로 데려오길 간절히 소망한 수향을 만나야 설명을 들을 텐데, 그녀를 만날 길도 없고. 그나마 치엔만이 좀 순수한 사람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사람도, 안드로이드도 쉽게 믿어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이곳의 악당은 적의만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마저 숨깁니다. 조던 필레 감독의 <겟 아웃>을 보셨다면 이해가 쉬울 텐데요. 영화 겟 아웃에서는 수술을 통해서 영혼을 새로운 육체에 담았다면, <시간 망명자>에서는 좀 더 간편한 방법으로 새로운 그릇에 영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VIP에게만 열려있는 비밀스러운 행위였지요. 인공 신체 건 진짜 인간 육신이건 원한다면 갈아탈 수 있는 세상이 정말로 행복한 세상일까요? 약간의 부러움과 의구심을 가지며 책을 읽습니다. 

솔직히 소설의 앞부분은 좀 지루합니다. 그러나 지한이 미래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지한은 그곳에서 가장 적응 못한 무망자 임과 동시에 가장 적응을 잘 한 사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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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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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화창하고 맑을 것만 같은 날이 이어지다가 어제오늘 조금씩 비가 흩뿌리듯 내려와 수분을 가득 머금은 공기가 내 집 안을 장악했습니다. 습한 날씨엔 왼쪽 정강이와 발목뼈가 시큰거리는데, 허리 쪽의 심한 근육통과는 다른, 설마하니 이 나이에 신경통은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이 손가락 관절까지 욱신거리게 만듭니다. 이런 몸 상태인 걸 알면서도 한 달 전 바다 근처로 이사를 하다니 무척 미련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넓은 하늘과 맑고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맞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그리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겠지요. 아직은 젊으니까 말이에요.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잖아요. 이런 것은 부족하지만 이런 것은 풍요롭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긍정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텐데 <소용돌이>의 독수리 오형제에겐 그런 긍정의 힘을 앗아갈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유년기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트라우마라면 누구 못지않지만, 이 친구들 같은 것은 없기에 그래도 나름 밝게 살고 있나 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공포는 그래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혹시 자다가 익사할 것 같은 기분에 잠에서 깨어 쿨럭거려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자주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였던가.... 자다가 갑자기 기도가 막혀 숨을 쉴 수 없어 깨어 나는 겁니다. 죽을뻔했다는 공포와 함께요. 코골이 때문에 무호흡이 온 것은 아니고요.- 물론 코를 골긴 하지만 -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콧물이 생기는데 그게 호흡기를 막아버리는 겁니다. 원인을 알면 무섭지 않아요. 아, 아데노이드 때문이구나. 다시 자자. 하면서요. 그렇지만 이유를 모를 때는 무척 무서웠습니다. 도대체 나를 괴롭히는 '그것'의 정체가 뭘까.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유민의 아버지를 죽인 그것이 정말로 마을 솥뚜껑에 있는 물귀신이 맞는 걸까. 이 두려움과 의혹은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되어 가슴속을 적시고 마음을 음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혼 후 죽음을 찍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생계를 꾸리던 민호는 유민이 죽었다는 길태의 전화를 받고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광선리로 향합니다. 유민은 국민학교 때 함께 놀던 독수리 오형제의 하나였으니까요. 독수리 오형제 민호, 창현, 유민, 명자, 길태에겐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소문의 물귀신을 소환하는 바람에 유민의 아버지가 죽었거든요. 폭력에 시달리던 친구를 구해주고 싶었던 어린이들이 할 수 있던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이 주술이 제대로 발동해 사람들을 죽일 줄은 몰랐을 겁니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 어린 나이엔 내가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더 깊은 법이지 괴롭히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어쨌든 이 물귀신은 수상한 박수무당 남 법사와 꼬마들의 힘으로 어찌어찌 봉인 당합니다. 그게 혹시 풀려나 유민을 죽인 것은 아닌가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렇습니다. 다시 만난 독수리 오형제는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의 그들처럼 세상에 찌들고 혼탁해진 모습이었습니다. 물귀신을 만났던 일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고,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참 희한 한 것이어서 사람을 이리로 저리로 흔들기 마련이니까요.  
오랜만에 돌아간 광선리는 도로를 새로 놓는 일 때문에 주민 간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 싸우고 있어, 이 마을 자체도 하나의 소용돌이 같았지요. 유민의 죽음은 시작일 뿐, 이 마을 속의 소용돌이 안에 물귀신이 숨어들어 사람을 해치기 시작합니다. 물귀신은 어째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누가 왜 결계를 부수고 물귀신을 소환해냈는지 그 미스터리를 찾아가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입니다. 

제가 읽어 본 전건우의 소설은 두 가지의 각기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주로 안개가 낀, 습기 가득한, 눅진눅진한 공기가 흐르며 살의와 공포가 그 안갯속에 콜로이드 상태로 퍼져 있는 아주 무거운 공기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울함과 아련한 슬픔 같은 것 말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의외로 위트가 있다는 점인데요. 앞서 말한 것과는 무척 상반되는 것으로 밝은 템포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이런 소설은 좀 드물게 쓰시지만요. 
이번 장편 소설 <소용돌이>는 이 두 가지의 매력이 롤리팝처럼 휘돌아 나타납니다. 물귀신이 나오는 호러 미스터리이므로 일단 무겁고, 습하고, 우울하다는 것은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양계장에 갇힌 길태가 똘마니들에게 연장을 챙겨오라고 했더니 문을 부술 연장이 아니라 평소 습관처럼 사시미, 야구방망이 같은 걸 챙겨오는 그런 부분이 공포와 긴장으로 책을 읽던 독자를 웃게 합니다. 게다가 독수리 오형제 (갓챠만)의 메카닉 부분을 남 박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광선리의 독수리 오형제는 남 법사가 주술이니 부적 같은 것을 맡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린 시절 투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친구는 이 습한 마을에서 이장을 맡고 있는데, 어찌 아니 적절하겠습니까. 하하.

독수리 오형제는 일본에서 1972년에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에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91년에 국민학교 6학년 아이들이 독수리 오형제를 알고 역할놀이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던 마징가 제트 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에야 유튜브 같은 것으로 과학닌자대 갓챠만을 검색하면 볼 수 있고,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으니(대실망했지만) 오히려 요새 아이들은 알 수도 있겠다 싶고, 혹시 아이들이 비디오를 본 걸까요? 창현이 빼고는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않던데.... 그래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해봤습니다. 바이오맨, 닌자 거북이(명자가 낄 데가 없나요), 수라왕 슈라토... 아, 아무래도 그냥 독수리 오형제가 낫겠습니다. 

아무튼 독수리 오형제 문제만 제거하고 생각한다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참 잘 맞물린 호러 미스터리입니다. 미쓰다 신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요. 내면의 공포심을 끌어내는 건 미쓰다 신조가 더 낫지만, 스토리 전개와 구성은 전건우가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 단편이었기에 보여 주지 못했던 - 밤의 이야기꾼들도 단편이 모인 옴니버스처럼 느껴졌기에 - 그의 작품 세계를 이번 <소용돌이>를 통해 제대로 보여 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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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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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소설가 반디가 쓴 <고발>이라는 단편집에는 답답한 이야기가 잔뜩 들어있습니다. 부조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 따를 수밖에 없는데요. 독자 역시 소설 속의 상황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도와주거나 조언할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릅니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온전히 다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일 테지요.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에서도 그런 답답함을 느낍니다. 센다이 시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은 모두 허구이므로 마치 저 먼 곳에서 내려다보듯이, 이를테면 화성 같은 데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흐응 그래? 하며 읽을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화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그들의 치안 유지 방식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기에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고 현실감이 있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 이웃집 아저씨가 한밤중 재미로 북한 방송을 듣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일이 있으니 센다이 시내의 평화 경찰처럼 안기부에서 잡아갔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보다가 아이피 추적 당하던 시절도 아니고, 누군가의 고발로 그리되었을 텐데. 누군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안기부에서 심어 둔 사람이었거나 자발적인 정의감으로 신고한 누군가의 탓이겠지요.

아무리 친하게 지냈던 이웃이라도 국가기관에서나 경찰이 "이 사람은 범죄자요."라고 말하면 대부분 "어머, 그렇게 안 봤는데, 세상에 그럴 수가." 하며 수긍합니다. 사실 우리의 정보력으로는 그의 잘잘못을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련히 알아서 잘 조사했을까 하는, 일종의 신뢰 때문이지요. 그런 신뢰를 먹고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잊고서요. 일본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평화 경찰이 이번엔 센다이에서 활동을 합니다. 정말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도 있었겠지만, 별것 아닌 이유로, 혹은 허위 사실로 체포되어 취조라는 이름의 고문을 당하며, 결국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스테인리스 강으로 된 현대식 기요틴에서 공개 처형됩니다. 평화 경찰은 이들을 공개 처형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경각심과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마치 중세 세대의 마녀사냥 같지 않습니까? 마녀로 고발되거나 마녀라고 의심되는 사람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마녀임을 인정하면 사형, 부정하면 고문 끝에 사망하였으며, 마녀인지 아닌지 테스트를 한답시고 말도 안 되는 시험을 치뤄 - 이를테면 돌을 매달고 물에 집어던져 떠오르면 마녀, 가라앉으면 결백 -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마녀로 지목 당하지 않는 것인데, 그건 본인도 어떻게 해야 지목을 당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센다이 시내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냥 친구랑 주점에서 소소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이발소에서 수다를 떨었을 뿐인데, 내가 저번에 잠깐 일상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불온 분자였을 뿐인데... 체포당하고 고통을 당하다니. 

이렇게 두려운 세상에 어디선가 갑자기 히어로가 나타납니다. 검은색 작업복 같은 라이더 슈트에 고글을 쓴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아니 정확하게는 스쿠터를 타고 처음 보는 구슬 같은 무기와 목도를 가지고 평화 경찰을 물리칩니다. 검은 장갑에 검은 스키 마스크까지 착용하다니 누가 봐도 코난의 범인 코스프레이지만 실은 정의의 편이라는 거죠. 전혀 평화를 책임지지 않는 '평화 경찰'은 그를 '정의의 편'이라고 호칭하며 추적합니다. 그를 정의의 편이라고 하다니, 자신들이 정의의 편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는 걸까요? 

이 소설은 챕터마다, 혹은 소단원마다 시점이 이리저리 바뀝니다. 전지적일 때도 있고, 수사관일 때도 있고, 그리고 히어로 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이사카 코타로의 필력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평소 제가 상상했던 문체의 다정함이 없어서 좀 의아했습니다. 이것이 아르테의 이사카 코타로 인가.... 하는 메모를 하고서 읽기를 계속했습니다. 딱 꼬집어서 아르테의 이사카라고 하기도 뭣 한 것이 골든 슬럼버나 마왕 같은 책에선 지금 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기도 하거든요. 읽은 지 오래되어서 좀 가물가물하지만요. 첫 챕터를 읽다가는 어쩐지 호시 신이치를 떠올렸습니다. 그의 쇼트쇼트를 읽을 때 느끼는 기묘한 감각 같은 게 있는데, 뭔가 명치 조금 위쪽의 깊은 부분이 몸 바깥쪽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인데요.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의 초반에서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미래가 아닌 것 같은데 미래이고, 미래인 것 같으면서 현재인 것 같은 그런 묘한 시간적 배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호시 신이치의 그런 시간 배치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SF를 읽더라도 위화감이 일지 않게 하거든요. 그렇다면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역시 50년, 100년 후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하니 그때는 이 소설의 내용이 현실화하지는 않았겠죠? 언제고 독재자가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조금은 긴장됩니다. 




그러고 보니 역시, 복선을 흩뿌리고 회수하는 스킬은 아주 대단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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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망치 - 2005년 일본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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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물 마니아입니다. 그렇지만 추리물에서 별로 내키지 않는 두 분야가 있는데요. 암호와 밀실이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여겨보았던 저자의 이름이 걸린 소설이라면 읽지 않을 수 없지요. 제가 즐기는 분야가 아니더라도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방식이나 얼개를 보면 매료되고 마는 탓입니다.

기시 유스케의 <유리 망치>도 작가의 이름 때문에 읽었습니다.
<검은 집>이나 <악의 교전> 같은 인간 내면의 이그러짐으로 인한 공포를 끌어올리는 소설뿐만 아니라 정교한 밀실 트릭을 보여주는 본격 추리물의 대가이니 그냥 스치듯 지나 보내긴 힘들었습니다. <유리 망치>는 일전에 읽었던 <도깨비불의 집> 보다 전에 출판되었던 본격 미스터리인데요. 우리나라에서도 10여 년 전에 출간되었던 이력이 있지만 출판사와 판형을 달리해 재출판되었습니다. 그래서 리뷰도 별점도 없나 봅니다. 읽을만한 분들은 전에 다 읽으셨을 테니까요. 저는 이번이 첫 만남입니다. 사실 <도깨비불의 집>은 제가 생각했던 기시 유스케 풍이 아니라서 시큰둥 했었는데요. 내심 아오토 준코와 에노모토 케이에게 매력을 느꼈었는지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아니 그들의 첫 만남을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어딘가 허술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데다 자신의 목소리를 확실히 낼 수 있는 매력적인 변호사 아오토 준코와 방범용품 사장에 추리력 최고이지만 도둑의 전력이 있는 에노모토 케이의 조합은 세상의 모든 밀실의 미스터리를 풀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했습니다.

한 간병 회사 사장이 불가능해 보이는 밀실 - 사장실에서 낮잠을 자다가 살해당합니다. 휴일이었기에 회사 내에는 비서 세명, 전무, 부사장만이 출근했는데요. 사장실 입구에서는 세 명의 비서가 근무 중이었고 자리를 비운 것은 불과 초 단위였습니다. 적외선 센서까지 있는 감시 카메라, 방탄 유리창, 암호를 알아야만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까지 식상한 표현으로 개미 한 마리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에게 머리를 맞고 사망한 사장. 경찰은 사장실과 이어져 있는 집무실에서 낮잠을 잤던 히사나가 전무를 체포합니다. 그 외에 범행이 가능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사장을 살해했는가는 밝히지 못하고, 전무는 내내 무죄를 호소합니다. 아오토 준코가 속해있는 로펌에서 이 사건을 맡고, 준코는 선배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방범 컨설턴트 케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에 서서히 접근해 가는데...

초반에 혹시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 하고 콕 찍어 본 사람이 있었는데요. 역시 그 사람이 범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외엔 범행이 가능할 사람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도대체 왜? 어떻게? 하는 것이 내내 궁금해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은 두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첫 번째 장은 사건과 추리 과정의 장이고, 두 번째엔 주인공을 달리해 범인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의 사연은 안타깝습니다만, 그것이 남을 죽여도 좋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짝이는 것에 매료되었으면 그냥 그것만 가질 것이지. 

기시 유스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무척 다양한 분야의 것들을 취재하고 공부했겠다 여겨지는 부분들이 작품 전반에 쫙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트릭이나 추리가 정교했지만, 조금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지적 피로도라고 해야 좋을까요? 

결론. 이 책은 무척 흥미로운 밀실 미스터리 소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준코와 케이의 콤비 플레이를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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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병동 병동 시리즈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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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선 그런 걸 본 적이 없지만 육지의 지하상가 공중 화장실이나 터미널 같은 곳에서 간혹, 장기를 산다는 스티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찜질방 화장실에서도요. 솔직히 살짝 혹한 적도 있는데, 본래 잘 붓는 체질인 저는 신장 같은 거 하나를 누군가와 나눠 봤자 저도 손해, 그도 손해라는 걸 10초 만에 깨닫고 포기했지요. <레드마켓:인체를 팝니다(스콧 카니)>라는 책을 보면 우리 몸의 다양한 부분들이 레드 마켓에서 거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시세도 보통이 아닙니다. 심지어 세계 보건 기구 (WHO)에 따르면 전 세계 장기 이식의 약 10%가 불법 암시장에서 구한 것이라고 하니 암암리에 일어나는 것치고는 무척 큰 시장입니다. 납치나 유인 같은 무서운 방법으로 장기를 도둑맞는 일도 있지만 돈이 필요해서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경우도 있으니 결코 가벼이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인간에게 있는 장기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겁니다. 신장이 한 쌍인 이유도, 일반 체세포와는 달리 복수의 분열을 하는 세포로 되어 있는 간도. 그러니 함부로 거래되어서는 안됩니다. 선의의 도너에게서 자발적으로 제공되는 경우를 제외하고선 말입니다. 얼마 전 <장기농장(하하키기 호세이)>을 읽으며 장기 거래에 대해 다시 한번 묵직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었는데요. 역시 신중히 생각해야 하고, 윤리적으로는 어떤가에 대해 고민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거래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법에도 저촉되는 일이죠. 아무래도 수요와 공급을 마주려면 줄기세포의 연구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치넨 미키토의 <가면 병동>은 앞서 말한 것처럼 무겁게, 심도 있게 접근하는 소설은 아닙니다. 장기 이식이나 밀거래라는 주제가 심겨있긴 하지만요. 작가가 현직 의사이기 때문에 병원의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용어를 잔뜩 써가며 현학의 티를 내거나 젠체하지 않습니다. 많은 지식 속에 간결한 표현이 뇌를 편하게 만들어줍니다. 의학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표현이 독자에게 신뢰를 주었습니다. 

당직 대타로 근무하게 된 하야미즈 슈고는 말도 안 되는 사건에 휘말려버렸습니다. 피에로 가면을 쓴 남자가 편의점을 털다 여자에게 총상을 입혔는데요. 이 친절한 강도는 그녀를 데리고 다코도로 병원에 침입, 모두를 위협하고 점거해버립니다. "당장 이 여자를 치료해!!" 같은 거였죠. 총을 쏘긴 했지만 살인범이 되긴 싫었다나 뭐라나. 감금된 사람은 환자 60여 명과 두 명의 간호사 사사키, 히가시노, 당직의 슈고와 뜻밖에 야근을 하던 다코도로 원장, 그리고 가벼운 총상을 입은 그 여자 미나미였습니다. 원장은 환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라며 저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피에로가 원하는 금품을 제공하는데요. 피에로는 새벽까지 이곳에 머물다 나가기로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는 이상한 점들. 피에로는 돈만을 노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다코도로가 걱정하는 건 환자들의 안위만이 아닌 것 같고요. 이 상황에 미나미와 슈고는 썸을 타고 있으니 젊은 청춘 남녀는 흔들 다리 위에서 사랑을 느낀다죠?
도대체 이 낡은 요양형 병원엔 무슨 비밀이 있길래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수상한 건지.
최신식의 수술실과 나란히 놓인 수술대의 장면에서 이미 장기 이식인가 보다!하고선 뭐야 좀 식상한 거 아니야?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와 메디컬 서스펜스의 만남이라는 것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겁지 않으면서 가독성 좋은 이 소설은 무더위 속에서 한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책이었습니다. 시원하고, 맛있고, 그리고 씁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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