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망명자 - 2017년 제4회 SF어워드 장편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
김주영 지음 / 인디페이퍼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요리를 할 때 남들이 듣도 보도 못한, 아니면 이름만 들어보았을 것 같은 그런 재료를 가지고 훌륭한 풍미의 요리를 만들어 내면, 맛있다는 극찬과 그런 재료만 있으면 나도 만들겠다는 식의 비아냥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나 약간의 사전 준비를 하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누구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면 비법이 무엇이냐며 칭찬을 듣게 마련이죠. 이 소설 <시간 망명자>가 그렇습니다. 
일제 시대의 밀정 이야기, 시간 여행, 디스토피아, 연쇄 살인, 빙의 같은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가져다가 정말 맛있게 버무렸습니다. 

일제 시대의 밀정이었던 지한은 죽음을 맞이하던 날, 마중 나온 제에 의해 미래로 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보다 먼 미래인 그곳은 전염병에 의해, 안드로이드에 의해 싹쓸이 되다 남은 인류가 살아남아 세운 미래도시로 갖가지 의학이나 기계적인 부분은 발전했지만 자연적인 종족 번식이 되지 않았기에 세상을 유지시키려면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타임 트래블 기술이 발달한 이 나라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요. 그들을 시간 망명자라 부르고 자신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공적인 부분을 삽입, 그 세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무척 적응을 잘 하는 자도 있고 절대로 적응할 수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이를테면 주인공인 강지한의 경우 1937년 상해에서 끌려온 밀정이었기에 일반인에게는 적이고, 독립운동가에게는 친구이죠. 그러나 '고향의 봄' 작전의 실패로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적이 된 상태이니 이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곧, 적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제까지 원수였는데 오늘부터는 새로운 세상에 왔으니 친하게 지내라는 건 금방 다투고 씩씩거리는 유치원생에게도 안 통할 이야기잖아요.

이 세상은 언뜻 유토피아처럼 보입니다. 통제적이긴 하지만 외모도 취향대로 바꿀 수 있고, 원하면 인공 신체로 바꿀 수도 있으니 관절통으로 고생할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화의 옷을 입은 그들의 속은 시커매서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지요.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그렇습니다. 누가 지한의 편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를 이 세계로 데려오길 간절히 소망한 수향을 만나야 설명을 들을 텐데, 그녀를 만날 길도 없고. 그나마 치엔만이 좀 순수한 사람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사람도, 안드로이드도 쉽게 믿어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이곳의 악당은 적의만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마저 숨깁니다. 조던 필레 감독의 <겟 아웃>을 보셨다면 이해가 쉬울 텐데요. 영화 겟 아웃에서는 수술을 통해서 영혼을 새로운 육체에 담았다면, <시간 망명자>에서는 좀 더 간편한 방법으로 새로운 그릇에 영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VIP에게만 열려있는 비밀스러운 행위였지요. 인공 신체 건 진짜 인간 육신이건 원한다면 갈아탈 수 있는 세상이 정말로 행복한 세상일까요? 약간의 부러움과 의구심을 가지며 책을 읽습니다. 

솔직히 소설의 앞부분은 좀 지루합니다. 그러나 지한이 미래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지한은 그곳에서 가장 적응 못한 무망자 임과 동시에 가장 적응을 잘 한 사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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