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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평점 :
언제나 화창하고 맑을 것만 같은 날이 이어지다가 어제오늘 조금씩 비가 흩뿌리듯 내려와 수분을 가득 머금은 공기가 내 집 안을 장악했습니다. 습한 날씨엔 왼쪽 정강이와 발목뼈가 시큰거리는데, 허리 쪽의 심한 근육통과는 다른, 설마하니 이 나이에 신경통은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이 손가락 관절까지 욱신거리게 만듭니다. 이런 몸 상태인 걸 알면서도 한 달 전 바다 근처로 이사를 하다니 무척 미련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넓은 하늘과 맑고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맞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그리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겠지요. 아직은 젊으니까 말이에요.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잖아요. 이런 것은 부족하지만 이런 것은 풍요롭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긍정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텐데 <소용돌이>의 독수리 오형제에겐 그런 긍정의 힘을 앗아갈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유년기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트라우마라면 누구 못지않지만, 이 친구들 같은 것은 없기에 그래도 나름 밝게 살고 있나 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공포는 그래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혹시 자다가 익사할 것 같은 기분에 잠에서 깨어 쿨럭거려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자주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였던가.... 자다가 갑자기 기도가 막혀 숨을 쉴 수 없어 깨어 나는 겁니다. 죽을뻔했다는 공포와 함께요. 코골이 때문에 무호흡이 온 것은 아니고요.- 물론 코를 골긴 하지만 -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콧물이 생기는데 그게 호흡기를 막아버리는 겁니다. 원인을 알면 무섭지 않아요. 아, 아데노이드 때문이구나. 다시 자자. 하면서요. 그렇지만 이유를 모를 때는 무척 무서웠습니다. 도대체 나를 괴롭히는 '그것'의 정체가 뭘까.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유민의 아버지를 죽인 그것이 정말로 마을 솥뚜껑에 있는 물귀신이 맞는 걸까. 이 두려움과 의혹은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되어 가슴속을 적시고 마음을 음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혼 후 죽음을 찍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생계를 꾸리던 민호는 유민이 죽었다는 길태의 전화를 받고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광선리로 향합니다. 유민은 국민학교 때 함께 놀던 독수리 오형제의 하나였으니까요. 독수리 오형제 민호, 창현, 유민, 명자, 길태에겐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소문의 물귀신을 소환하는 바람에 유민의 아버지가 죽었거든요. 폭력에 시달리던 친구를 구해주고 싶었던 어린이들이 할 수 있던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이 주술이 제대로 발동해 사람들을 죽일 줄은 몰랐을 겁니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 어린 나이엔 내가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더 깊은 법이지 괴롭히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어쨌든 이 물귀신은 수상한 박수무당 남 법사와 꼬마들의 힘으로 어찌어찌 봉인 당합니다. 그게 혹시 풀려나 유민을 죽인 것은 아닌가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렇습니다. 다시 만난 독수리 오형제는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의 그들처럼 세상에 찌들고 혼탁해진 모습이었습니다. 물귀신을 만났던 일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고,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참 희한 한 것이어서 사람을 이리로 저리로 흔들기 마련이니까요.
오랜만에 돌아간 광선리는 도로를 새로 놓는 일 때문에 주민 간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 싸우고 있어, 이 마을 자체도 하나의 소용돌이 같았지요. 유민의 죽음은 시작일 뿐, 이 마을 속의 소용돌이 안에 물귀신이 숨어들어 사람을 해치기 시작합니다. 물귀신은 어째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누가 왜 결계를 부수고 물귀신을 소환해냈는지 그 미스터리를 찾아가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입니다.
제가 읽어 본 전건우의 소설은 두 가지의 각기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주로 안개가 낀, 습기 가득한, 눅진눅진한 공기가 흐르며 살의와 공포가 그 안갯속에 콜로이드 상태로 퍼져 있는 아주 무거운 공기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울함과 아련한 슬픔 같은 것 말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의외로 위트가 있다는 점인데요. 앞서 말한 것과는 무척 상반되는 것으로 밝은 템포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이런 소설은 좀 드물게 쓰시지만요.
이번 장편 소설 <소용돌이>는 이 두 가지의 매력이 롤리팝처럼 휘돌아 나타납니다. 물귀신이 나오는 호러 미스터리이므로 일단 무겁고, 습하고, 우울하다는 것은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양계장에 갇힌 길태가 똘마니들에게 연장을 챙겨오라고 했더니 문을 부술 연장이 아니라 평소 습관처럼 사시미, 야구방망이 같은 걸 챙겨오는 그런 부분이 공포와 긴장으로 책을 읽던 독자를 웃게 합니다. 게다가 독수리 오형제 (갓챠만)의 메카닉 부분을 남 박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광선리의 독수리 오형제는 남 법사가 주술이니 부적 같은 것을 맡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린 시절 투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친구는 이 습한 마을에서 이장을 맡고 있는데, 어찌 아니 적절하겠습니까. 하하.
독수리 오형제는 일본에서 1972년에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에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91년에 국민학교 6학년 아이들이 독수리 오형제를 알고 역할놀이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던 마징가 제트 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에야 유튜브 같은 것으로 과학닌자대 갓챠만을 검색하면 볼 수 있고,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으니(대실망했지만) 오히려 요새 아이들은 알 수도 있겠다 싶고, 혹시 아이들이 비디오를 본 걸까요? 창현이 빼고는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않던데.... 그래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해봤습니다. 바이오맨, 닌자 거북이(명자가 낄 데가 없나요), 수라왕 슈라토... 아, 아무래도 그냥 독수리 오형제가 낫겠습니다.
아무튼 독수리 오형제 문제만 제거하고 생각한다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참 잘 맞물린 호러 미스터리입니다. 미쓰다 신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요. 내면의 공포심을 끌어내는 건 미쓰다 신조가 더 낫지만, 스토리 전개와 구성은 전건우가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 단편이었기에 보여 주지 못했던 - 밤의 이야기꾼들도 단편이 모인 옴니버스처럼 느껴졌기에 - 그의 작품 세계를 이번 <소용돌이>를 통해 제대로 보여 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