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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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잔잔하게 시작됩니다. 일상에서 일어날 일이라 생각하면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일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 소설 <마쉬왕의 딸> 전체를 생각한다면 아주 평범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4살의 소녀를 납치해 13년간 감금한데다가 그 사이에 아이까지 낳게 하여 가족'처럼' 살았던 남자가 체포되어 수감되어있던 중, 교도관을 죽이고 탈옥했다는 게  전부거든요. 스릴러나 미스터리 같은 곳에선 흔한 설정이잖아요. 이 정도는. 그의 딸 헬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아이와 남편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킵니다. 보통의 인간이 아닌 아버지를 잡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합니다. 헬레나는, 나는 '마쉬왕의 딸'이니까요. 크레센도 에다니만도.(crescendo ed animando)

전기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용맹한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어린 소녀 헬레나는 그들의 늪지대가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를 읽고 또 읽으며 막연하게 외부 세계를 그려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세상도 충분히 넓었기에 특별히 탈출을 꿈꾸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다섯 살 생일날 가까스로 재료를 찾아내어 케이크를 구워주려 했던 엄마보다도, 벌로써 우물에 갇혀 죽을 뻔한 그녀를 밤새 품어주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던 엄마보다도 자신을 가둬두고, 가끔은 족쇄도 채우던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가학적이고 폭력적이었음에도 비교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행동이 옳은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를 떠난 후 어른이 된 지금 바른 태도로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가 된 건 스스로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무기력해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없었던 엄마와 폭력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양육의 바른 태도를 배울 수 없었을 텐데도, 어른이 된 헬레나는 자신의 아이를 사랑으로 잘 돌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남편에게서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으로 돌아온 후, 성장과정이 많이 비추어지지 않았지만 조부모의 행동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나타샤 캄푸쉬의 경우도 3096 일 동안 힘들었던 것 이상으로 세상으로 돌아온 후 힘들어했으니까요. 

어머니의 학습된 무기력은 아버지가 2주 동안이나 집을 비웠을 때에도 아이를 데리고 달아나거나 혼자 달아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린 헬레나가 볼 때에는 얼마나 하찮아 보였을까요. 아버지는 헬레나를 데리고 다니며 사냥하는 법, 피를 빼는 법 같은 전사로서의 소양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육체적 보호자(그녀가 보호를 받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지배자였습니다. 완전히 통제된 생활에서 반항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라 하면 자야 했고 먹으라 하면 먹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헬레나는 길들여졌고, 그런 것에 익숙했습니다. 늪지대의 지배자인 위대한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길이었습니다. 폭포 인근에서 우연히 다른 가족을 목격한 후 이매지너리 프랜드가 생기기 전까지는요. 그들은 헬레나가 태어나 처음 본 타인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리고 늑대 사냥에서 돌아온 날,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물 속에서 있었던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나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째, 아버지는 내가 안전한지, 내 마음이 어떤지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것이다. 셋째, 어머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에게 무관심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 세 가지는 아주 큰 깨달음이었다.
-p. 257

과거의 헬레나와 현재의 헬레나가 처음엔 부드럽게, 조용히 움직이더니 이윽고 급하고 강하게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독자인 내 머릿속에서는 열몇 살의 헬레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른 남짓의 헬레나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힘차게 달려나가고 있었습니다. 
후에 마쉬왕이라 불리게 된 남자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했습니다. 잔인하고 나르시시즘으로 뭉쳐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헬레나에겐 애정 어린 행동을 했을까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도 자기 새끼는 아낀다는 글이었는데요. 그건 부성애나 모성애 같은 애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날이 온다면, 가차 없이 내다 버릴 수 있다는 거죠. 마쉬왕도 헬레나를 그렇게 생각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가 헬레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헬레나가 아버지를 떠났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죠. 
직간접의 피해자였던 그녀는 훌륭한 '전사'였고, 그 전사를 길러낸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습니다. 그녀가 아버지를 떠날 준비를 한 건 무리의 알파가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알파는 무리의 유일한 암컷을 지켜야 했습니다. 야생의 본능과 인간의 마음이 뒤섞인 그녀는 본능에 따라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아버지가 실은 납치 강간범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알파는 무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아버지를 사냥하려는 이유입니다.

크레센도 수비토(crescendo sub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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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프로파간다 - 안전신화의 불편한 진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0
혼마 류 지음, 박제이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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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에도 먼 유럽의 한 나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로만 인식하던 우리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신고리 5,6호기 건설에 이르러 원자력 발전에 대해 뜨거운 관심과 찬반양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학생들까지도 원자력 발전은 과연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할 정도로요. 학교에서 원전 찬반 토론을 한다는 이야기를 중학생인 저희 아이에게 전해 듣고 놀랐습니다. '너희들이 토론 주제로 삼을 만큼 원자력 발전의 원리와 발전소의 구조, 안전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단 말이야?'라고 물었는데요. 그럴 리가요. 아이들은 그냥 인터넷에 흩어져있는 자료를 '조금' 읽어보고 거기서 얻어진 자신의 의견을 조금 보태어서 설전을 하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찬반 어느 쪽에 설 것인가 며칠 고민하던 아이는 찬성 측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국수력원자력 사이트와 한국원자력연구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해 반대 측을 논파할 수 있는가 시험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교내에서는 신고리 5,6호기에 관한 운명이 결정된 다음날 토론회를 진행했는데요. 결과는 글쎄요. 누가 이겼다 졌다 할 수 없는 수준의 토론이었나 봅니다. 아이는 앞서 말한 양 사이트와 지식백과 등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는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 아니다, 잘만 관리하면 이렇게 좋은 연료가 없다, 만일 원전을 가동 중지한다면 블랙아웃이 되고, 산업이 멈추고, 우리나라가 망한다. 그러므로 원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만, 신재생 에너지와 병행하여 그 기수를 더 이상 늘려서는 안되며 안전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기 때문에 요런 부분에서 안정성 확보가 덜 되었고, 이런 차원에서는 관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기사를 읽고, 원전의 구조도를 보고 내용을 살피고 심지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공의 벌>을 읽어보아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것 밖에, 그러니까 막연한 공포심만 있을 뿐인데 그것으로 아이와 대화를 할 수는 없습니다. 적당한 근거도 없이 네가 알아본 자료는 안전을 강조하기 위해 홍보용으로 내놓은 것이고, 정말 위험한 건 대중에게 숨겼을 거라는 둥, 저거 언론도 그렇고 정치하는 사람도 그렇고 지역 유지도 그렇고 분명 뒷돈 받았을 거라며 증거도 없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안전하다는 원자력 발전소를 어째서 환태평양 조산대 위에 쪼르륵 앉혀놓았냐는 것뿐입니다.

포항의 지진이 있었기에 더욱 불안한데, 우리나라보다 더 심각한 건 정말 불의 고리 위에 원전을 얹어 둔 일본이겠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화석 연료가 거의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적은 비용으로 많은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불가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참 대담한 것 같아요.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유일한 나라 일본이, 원자력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칠 것만 같은데, 마치 원자한테 무슨 죄가 있겠니. 아톰(철완 아톰)은 우리 친구잖아?라는 생각인 건지 원자력 발전소를 씩씩하게 많이도 지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광고량이 많을수록 캐치프레이즈(헤드라인 같은 것)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는 거죠.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늘리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광고를 해댄 겁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이와나미 신서 020 <원전 프로파간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프로파간다라고 하면 어떤 정치적 의도를 띄고 찬동을 얻기 위한 일체의 의사 전달 수단을 말합니다. 광고, 선전 등을 말하는 거죠. 대표적인 프로파간다라면 나치의 그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나치를 선전했듯, 일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원전 안전신화를 국민들에게 세뇌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나도 절대 안전하다고 선전하는 원전 광고는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일까요? 다이어트 약 광고가 사기라면 '이런, 거짓말쟁이!', '미안해'로 끝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체르노빌급 사고가 일어나면 일본은 파멸에 이를 테니 '미안하다'라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애초에 그때는 우리 모두가 이미 죽은 후고, 원전 관계자도 죽은 후일 테니 불만을 토로하는 자도 없고 책임을 질 사람도 없습니다. 원전이 안전하다고 단언하는 학자도, 정치가도, 경영자도, 광고 맨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핵폐기물 문제 하나만 봐도 벌써 위험이 가득한 원전을 이제 모두 폐기해야 합니다. 원전을 가진 채 '밝은 내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밝은 내일은 원전에서부터.
-p.102 (광고비평 주재자 야마노 유키치 씨의 경고 :1987년)


<원전 프로파간다> 저자의 약력이 참 독특합니다. 일본 2대 광고 대행사 하쿠호도에서 약 18년간 영업 담당으로 일하다 퇴직 후, 하쿠호도 근무 당시 손금 보전과 관련된 사기 용의로 체포 및 기소되어 복역했습니다. 출소 후 징역에 관한 책을 내었고, 원전에 관한 책 몇 권을 내었습니다. 사기라니. 책을 읽기도 전에 신뢰가 떨어지는 약력인데 어째서 표지에 적어두었을까 의아했는데요. '원전 신화'를 잠재의식 속에 새기는 방법을 고안하고 언론에도 영향을 미친 일본 광고계 양대 산맥 중 한 곳이었던 하쿠호도에 근무했다는 게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하쿠호도라.. 나루호도... 
우리나라의 원자력 마피아와 같은 원자력 무라(村)와 계속 연계하며 광고를 끌어나갔던 것은 덴쓰라는 회사였는데요. 도쿄 전력의 원자력 광고를 거의 도맡았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언론과 권력이 한패가 되어 지속적인 프로파간다를 해 온 것이지요. 언론의 입장도 약간은 이해됩니다. 신문이나 방송국이 먹고사는 건 결국 광고 때문인데요. 원전은 광고료로 1970년대부터 2011년 그날까지 2조 4000억을 사용했습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그 광고비는 당연히 전기료에 포함되어 있었겠죠. 이런 어마어마한 고객을 놓치고서 회사가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당연히 눈 가리고 아웅. 

1990년대부터는 광고가 무척 체계적입니다. 가이드라인까지 있어요. 이 정도라면 정말 프로파간다가 맞습니다. 계몽인가 세뇌인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지, 믿을 수 있는 건지.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대처할 방법은 모두 확립되어 있고, 시뮬레이션은 거친 것인지. 영화 <판도라> 같은 상황은 정말 일어나지 않는 건지. 
후쿠시마의 농수산물이 이젠 안전하다고 말하며 은근슬쩍 수입하는 그들의 말을 믿어도 좋은 것인지. 원자력 발전소 및 원자력 연구원 인근 주민들은 정말로 안전한 것인지. 마음이 불편해 옵니다.

그렇게 안전하고 필요하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심포지엄에 출연하여 고액의 출연료를 번 연예인이나 안전하다고 주장한 논설위원, 혹은 NUMO의 임원들이 '꼭 제가 사는 곳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손을 드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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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파는 가게 1 밀리언셀러 클럽 149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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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을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던 영화가, 드라마 시리즈가, 소설이 스티븐 킹의 것이었던 걸 몰랐던 시절부터 스티븐 킹을 좋아했습니다. 문화 개방으로 일본 소설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까지 제가 접했던 공포물의 대부분은 그의 것이었을 겁니다.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제 기억력은 그런 것입니다. 어떤 계기로 봉인이 풀리지 않으면 좀처럼 미리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하찮은 것이지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 닫아 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꽉 막히고 답답했던 시절,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라는 섬이 물 위에 떠 있는 감옥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 저는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요술봉을 휘두르며 변신할 수 있는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때로는 파괴적이고 기이하고 기묘한 것, 낯선 것, 이질적인 것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 사이에 스티븐 킹이 존재했습니다. 부모님과 연세가 비슷한 스티븐 킹의 이야기를 먹으며 자라났습니다. 실은, 자신 없습니다. 스티븐 킹의 책이 언제부터 우리나라 서점가에 풀렸는지 모르거든요. 제 공상의 세계에 자리 잡은 그가 스티븐 킹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지만, 환상특급만큼은 기억하고 있으니 그가 아주 중심에 있지 않더라도 분명 어딘가에 서 있긴 할 겁니다. 

그래요. 저는 환상특급을 무척 좋아합니다.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 방영되었던 환상특급 말이에요. 글을 쓰면서 다시 불안해졌습니다.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에 호시 신이치가 있다는 건 확실한데, 환상특급에 스티븐 킹이 있는 건 확실한가요? 누군가 답해주시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글을 계속 이어봅니다. 당시 환상특급의 내용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몇 개의 에피소드는 단편적으로 떠오르는데요. 그마저 확실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저는 뭘 기억하는 걸까요. 환상특급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좋아했던 거죠. 직접적으로 무서운 것이 튀어나와 겁을 주는 전설의 고향 타입의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날 리 없는 신기한 이야기, 왜 무서운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성대의 오른쪽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 그런 다양한 것들이 저를 즐겁게 했습니다. 이미 일상이 다른 이들과 다른데, 더 다른 것들과 함께하면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떠나 다른 세상을 꿈꾸며 지금의 세상도 현실이 아니라 믿고 싶었던 것인지.... 맞아요. 저는 괴로울 때면 여섯 살 때 서울발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가는데, 아빠가 아직 깨우지 않아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일들은 꿈이니까, 나중에 아빠가 깨워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도피했었죠. 지금은,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다시 겪는 건 정말 싫거든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살아갈 거라 믿는 사람들이 있나 봐요. 
<악몽을 파는 가게 1>의 '사후 세계'에 등장하는 윌리엄 앤드루스처럼요.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죽어갈 때쯤이나 죽은 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나 봅니다. 반성하는 건 좋은 일이에요. 그 반성을 도와줄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저런 놈은 구원받지 말아야 하는데 싶을 때도 있어요.  만약 '어느 못된 꼬맹이'에 나오는 정말 못된 꼬맹이 같은 놈이 진짜 존재한다면요. 그놈에게 인생 전반에 걸쳐 괴롭힘당한 끝에 악마 같은, 아니 악마라고 생각되는 그놈을 죽인 죄로 사형수가 되어버린 사람이 나라면 나는 그놈의 발목을 잡고 지옥으로 끌고 갈 텐데. 그는 죽어가면서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억울함을 호소한 걸로 치자면 이 사람도 빼놓을 수 없죠. '죽음' 에피소드의 짐 트러스데일 말이에요. 어린 여자애가 죽은 현장에 자기 모자가 있었다고 범인으로 몰리다니. 저는 그의 이름 트러스데일을 트러스트 테일(trust tale)로 읽는 바람에 - 범인으로 지목된 건 흑인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정직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다니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 같으니라고!라며 분개했습니다. 게다가 그가 훔쳐 갔다던 소녀의 은화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 은화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범인은 돈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그가 사형당한 후 발견되긴 하는데... 돈 때문에 비양심적인 일을 한 부부의 이야기도 읽었는데요. '도덕성'이라는 에피소드에서요. 살인교사도 아니고 자살방조도 아니고... 묻지 마 폭행 사주라니. 세상에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죠. 20만 달러라면... 음. 저라면 안 해요. 무언가를 저지르기엔 부족한 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얼마 주면할 수 있겠냐고요? 시간 좀 주실래요? 안된다고요? 그럼 안 할래요. 뭔가를 저지르려면 모름지기 신중해야죠. 저지르고서 백만 년 동안 고통스러워할 거라면 안 할래요. 그러니 시간 좀 주세요. 
나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아요. 절대 하지 않는다고 쓰고 싶은데, 양심이 허락하지 않네요. 선한 사마리아인은 될 수 없더라도 그 정도의 원칙은 세워도 좋지 않을까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건 위험 요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아라 하는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 <악몽을 파는 가게 1>의 맨 처음 에피소드 '130 킬로미터'에서는 그만, 잡아먹히고 말거든요. 문 닫은지 오래된 패스트푸드 가게 옆 주차장에 세워져있는 낡은 스테이션왜건을 보고 도움을 주려고 접근한 게 화근이었죠. 휴대폰 있는 세상이니 경찰에 도움 요청만 해도 좋으련만. 직접 도와주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을 - 그러니까 친절하고 착한 사람을 잡아먹는 못된 자동차라니!!!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님을 우적우적. 어린아이들과 괴물 차의 대치 상황이 긴장감 넘칩니다. 혹시 저 차가 움직여서 아이들에게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되었죠. 자동차에 대한 걱정은 저만 한 게 아니에요. '우르'라는 에피소드에서의 웨슬리도 그랬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크레마 같은 전자책 리더기 킨들을 주문했던 그에게 도착한 핑크색의 기기는  그에게 평행우주의 다른 세계에서 활동했던 유명 작가의 소설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놀라운 경험에 취해있던 그는 미래 신문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거금을 투자 - 했지만 다른 우르의 웨슬리가 지불했겠죠. 본인의 카드에서는 돈이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 하여 근미래의 기사를 읽습니다. 한 만취 운전자에 의해 사랑하는 이와 그녀의 학생들이 다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요. 웨슬리는 어떤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그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악몽을 파는 가게 1>의 매력은 다양한 환상의 세계로 저를 데려다주는 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스티븐 킹 자신이 논평을 달아두었는데, 그게 무척 매력적이에요. 짧은 평을 읽고서 에피소드를 읽고 난 후 다시 평을 읽으면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가를 제대로 알 수 있거든요. 그런 게 참 좋았습니다. 책에는 제가 언급하지 않은 단편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못해서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쏟아붓는다면 글이 너무 길어질까 봐 염려스러웠어요. 게다가 숨겨두는 맛도 있잖아요. 기뻐요. <악몽을 파는 가게 2>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포와 환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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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연설문 - 딕테이션.쉐도잉으로 영어독해.영어듣기 잘하는법
Mike Hwang.장위 지음 / 마이클리시(Miklish)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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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리시 출판사의 신간 <TOP 10 연설문>.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보았어요. 
그새 벌써 입소문이 났는지 영어 명언 다이어리와 더불어서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등장하더군요. 아주 솔직히 말해서 마이클리시 출판사의 기존 책들보다 훨씬 나아진 퀄리티의 교재였어요. 표지부터 내지까지 종이 질이며 편집 방법과 줄 간격까지 불편함이 없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시리즈는 꽉꽉 들이차있는 방식이어서 약간 답답해 보였거든요. 저는 어느 정도의 여유 공간이 있는 책을 좋아합니다. 상부나 하부, 그것도 아니면 줄 간격 같은 공간이라도. 이번 책은 그런 면에서는 일단 합격입니다. 맘에 들어요.



top 10 연설문이라고 했으니 과연 누구의 명연설이 들어있길래 탑 10으로 뽑았는가 궁금했는데요. 보시다시피,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유명하고 감동적인 연설을 책에 수록했습니다. 목차의 뒤쪽으로는 이 책의 사용법 및, 직독 직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문법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문법 바보인 저는 그냥 넘어갑니다. 책에서도 완전히 익히고 넘어가라고 하지는 않아요. 모름지기 어학은 무조건 부딪혀보고 문제를 찾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이 제 주장이거든요.



맨 처음 만난 건,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었습니다. 어이쿠 난이도가 별 세 개네요. 그렇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재미는 별 하나라니... 윤동주도 아니면서. 게티스버그 연설의 전문을 모르시는 분은 많아도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란 문구는 다들 아실 거예요. 무척 유명하니까요. 저도 전문을 들은 건,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책에서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게 된 이유도 알려주지요.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죽어 남은 자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희망을 주어야 했던 링컨은 과연 어떤 연설을 했기에 사람의 가슴에 남아 지금까지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을 받고 있을까요.
페이지 상단의 큐알 코드를 찍어봅니다. 




이건 그냥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설마 QR코드 찍을 줄 모르는 분이 계실까 싶지만.... 그래도 혹시 계실 수도 있으니 팁으로 알려드리려고요.네이버 기준으로 말하자면, 네이버 앱에 스마트한 기능이 생겼어요. 검색창 우측에 보면 음표랑 카메라 모양이 있는데요. 음표는 현재 들리는 음악을(정식 출시된 음반만) 인식하는 기능이에요. 음표를 누르고 조용히 음악을 들려주면 그 음악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죠. 카메라 모양을 누르고 원하는 것을 카메라에 비추면 이름 모를 식물서부터 각종 유사한 정보까지 다 물어다 줘요. 이미 촬영해 둔 것도 괜찮아요. 이 스마트렌즈에다 QR코드를 비추면 빠르게 인식해서 코드가 지정한 장소로 안내해주죠. 
에이브러햄 링컨의 QR코드를 찍으면 이렇게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휘리릭!




와우. 게티스버그 연설 전문을 직접 들을 수 있군요. 직접 들어보실 분은 아래를 링크를 클릭하시면 돼요. 위의 사진은 제가 어디로 이동하는가를 보여드리기 위해 캡처한 거거든요. 마이클리시 블로그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답니다. 




자... 그럼 이제 두근거리는 시간을 맞아야죠.
게티스버그 연설문을 들으며 즉석에서 받아쓰기를 합니다. 
으아악!



한 번에 쭉 받아썼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요. 
말이 빨라서 글을 쓰고 있는데 진도가 나가요. 학생 때도 그랬잖아요? 선생님 말씀하시는 거 메모 다 못했는데, 그냥 지나가버리시는 거. 그때는 따라잡지 못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어요. 연설문을 되돌려 들으면 돼요. 몇 번이고~
스톱 버튼을 한 열 번은 누른 거 같아요. 되도록 스쳐 지나가는 말을 주우려고 노력했거든요.
난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구에게?)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받아쓰기를 계속해 나갔죠. 
책에서 제시한 받아쓰기 예시에서는 스펠링을 잘 모르면 한글로라도 받아쓰라고 해요. 
'리버리티' 처럼요.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어서 아무튼 마구마구 썼어요.




그럼 그렇지....
어쨌거나 칸은 다 채웠는데 부끄럽게도 스펠링이 엉망이었어요.
세상에 farther가 뭐냐고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쓰지 못하다니 내가 홍길동인가.

아이가 옆 페이지에 있는 정답을 보면서 채점 해줬어요. 
전, 제 자신을 속일지도 모르니까요.




채점이 끝난 후 변명도 할 겸 아이에게 게티스버그 연설문 전문을 들려줬거든요?
그랬더니 다행히(?) 놀랐어요.
이걸 알아듣느냐며!!
간신히 체면은 차렸지요. 하하핫.



게티스버그 연설문은 별 세 개의 난이도였기에 조금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만약 책의 내용이 어려우면 쉬운 순서대로 공부할 수 있도록 친절히 안내가 되어있었어요.
저는 왔다 갔다 하는 걸 싫어해서, 아무리 어려워도 진격하리.



실은 단어 공부부터 하고서, 그리고 약간의 문법을 익히고서 받아쓰기를 해야 하는 건데요.
제가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칠 때도 그랬고, 고등학생 때도 이용했던 방법인데,
단어보다는 문장과 먼저 만나요. 가능하다면 듣기를 먼저 하는 방법도 좋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러다가 자신감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던 대로 문장부터 만났어요. 문장을 만나고 듣기를 하면서 받아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전체적인 부분을 느끼는 거예요. 모르는 단어는 모르는 대로 머릿속에서 빈칸으로 두면서 나머지 부분으로 흐름을 잡는 거죠. 아, 대략 이런 내용이겠구나. 
받아쓰기 후, 잘 못된 부분을 고치 고서 처음부터 두 번 정도 연설문을 다시 들었어요. 눈으로는 글을 쫓으면서요. 
그리고선 소리 내어 서너 번 읽어보았어요. 그럼 아까보다 더 가닥이 잘 잡혀요. 그런 다음 단어들을 챙깁니다. 책에서 앞서 소개해주는 단어 외에도 제가 모르는 단어들이 좀 있어요. 그럼 그것도 함께 챙기는 겁니다. 한 번에 다 못 외워요. 외우다가 잊다가 다시 외우다가 잊다가 기억하는 거죠. 연상하며 외우기도 하고, 머리나 꼬리를 떼어서 의미 부여하며 외우기도 해요. 오늘 외웠지만 내일은 잊을 거예요. 어제 외운 거, 오늘 잊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을 필사했어요. 
받아쓰기 한 글씨를 보고서 정말 영어 글씨 못쓴다!!라고 오해하는 걸 풀기 위해 쓴 건 아니에요. 오옷. 정말로.
이렇게 필사한 노트는 책의 중반쯤까지 공부하고선 처음으로 돌아올 때 사용할 거예요. 아무것도 표시 안 되어 있지만, 공부했던 자취만 남아있는 노트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독해를 하려고요. 
저는 직독직해를 선호하는 편이어서 번역가처럼 깔끔한 번역은 못해요. 글을 보면서 흐름대로 이해하는 거거든요. 

처음엔 문장이 너무 어려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일단 부딪히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겼어요.
별 세 개 난이도인 게티스버그 연설문 정도라면 영어 기초가 탄탄한 중학교 3학년부터 영어에 관심이 조금 있는 고등학생 이상이라면 잘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처럼 영어에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려서 혼수상태인 사람에게 제세동하기 안성맞춤인 교재에요. 




유명인의 명연설도 챙기면서 지식도 습득하고, 지혜와 자신감은 덤으로 얻는 거겠죠?

에이브라함 링컨의 연설문을 학습하는 데 약 일주일 정도 걸렸는데요. 집중 학습하는 분들은 더 빨리 익히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이제야 심폐 소생 단계라서.
지금부터 익혀나갈 연설문이 궁금하네요. 찰리 채플린의 연설도, 스티브 잡스 연설도.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서 즐거웠던 건요.
제가 영어 공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 영어 잘하는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앞으로 이 책 <TOP 10 연설문>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영어 명언 다이어리>로 하루 한 문장씩 익혀나가다 보면 새살이 솔솔 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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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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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20년을 복역하고 드디어 사형 집행이 있던 날, 타인의 자백으로 기적적으로 형 집행이 멈춰졌다면 그 걸 행운이라 불러야 할까요. 불운이라 불러야 할까요. <괴물이라 불린 남자>의 괴물 마스가 바로 그 행운과 불운을 모두 가진 남자입니다. 

어제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이 종신형으로 복역 중 자연사했습니다. 본디 사형 선고를 받았었으나 사형제 폐지로 종신형을 살게 되었던 것인데요. 어느 누구도 타인을 죽일 권리가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만 가끔은 그냥 세금조차 아까우니 사형을 시켜도 좋지 않은가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찰스 맨슨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어요. 마치 악마 교 교주 같단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할리우드 스타들도 그의 죽음에 안도하며 영화로서 그를 미화하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했을까요. 사형제 폐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 제가 앞서 이야기한 타인을 죽일 권리 같은 - 억울하게 사형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취지도 있습니다. 수전 헤이워드 주연의 영화 <나는 살고 싶다(1958)>를 보면 사형제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죠. 

<괴물이라 불린 남자>의 멜빈 마스는 자신의 부모를 산탄총으로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러 증거인멸을 하려 한 죄로 체포된 후 20년간 사형수로서 복역 중이었습니다. 부모를 죽인 것도 모자라 그가 주장한 알리바이가 맞지 않는데도 계속 범행을 부인하고 반성의 여지가 없으니 판결이 뒤집힐 이유가 없지요. 당시 그는 미식축구의 유망주로서 신체조건과 재능을 모두 갖춘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습니다.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난 그는 외모로서는 어머니 쪽에 가까웠기에 약간의 차별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재능은 그런 것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만일 프로로 전향했더라면 그는 지금쯤 은퇴하여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을 텐데 현실은 이렇습니다. 게다가 교도관도 쓰레기 같은 자라서 멜빈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입니다. 실제로 그의 석방이 결정되자 마지막으로 어찌해보려고 했던 건지, 사형수동에서 일반수동으로 옮기며 죄수들과 짜고 그를 죽이려고, 혹은 반 정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육 만들기를 취미로 삼고 있던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죠. 결국 그는 석방되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과잉기억 증후군이라서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남자 에이머스 데커는 마스의 사건에 관심을 갖습니다. 언뜻 그의 능력이 부러울 수도 있지만, 망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없으면 일단 아이를 하나 이상 낳는 엄마는 무척 드물 거예요. <단 한 번의 시선>의 주인공 그레이스도 슬개골이 부서지는 고통보다는 아이를 낳던 기억이 더 강렬했다는 걸 되새기고 고통을 참아내거든요. 데커의 경우엔 가족이 모두 살해된 현장을 보았다는 거, 그건 정말 파란(blue) 기억입니다. 멜빈 마스의 사건이 어쩐지 남 같지 않아서라고 한다면 납득이 갈지. 데커의 과잉기억 증후군은 미식축구 경기 중 머리를 심하게 다친 사고의 후유증으로 얻어졌거든요. 과거에 한 차례 경기에서 만났던 괴물 같은 선수 마스를 잊지 않고 있던 (당시엔 정상적인 기억력이었음에도) 데커는 석방된 그를 만나러 갑니다. FBI 요원, 동료들과 함께요. 깜빡하고 이야기를 안 했군요. 데커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 본 FBI의 요청으로 그들과 함께하기로 했거든요.

데커와 FBI 요원, 동료는 마스를 만나고 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하고 사형 날짜를 받아 둔 남자의 진술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차피 그는 다른 사건 때문에 사형 당할 처지였는데 죽기 전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는지 마스의 부모를 죽인 것은 자기라고 자백했다지만 데커의 분석에 의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된 걸까요. 결국 남자는 사형 당하지만, 책은 300 페이지가 남았습니다. 아직 뭔가가 잔뜩 남아있다는 말이죠. 데커와 마스는 진실 찾기에 나서면서 여러 가지 위험과 마주합니다.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들, 뜻밖의 이유와 결과.
마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사회파 소설처럼 대놓고 제도의 불합리함을 설파하지 않습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합니다. 사형 제도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제도의 불합리함과 나아가서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생각게 합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듭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비리와 문제에 대해 마스와 데커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던 데이비드 발다치의 다른 소설들도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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