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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프로파간다 - 안전신화의 불편한 진실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0
혼마 류 지음, 박제이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10월
평점 :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에도 먼 유럽의 한 나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로만 인식하던 우리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신고리 5,6호기 건설에 이르러 원자력 발전에 대해 뜨거운 관심과 찬반양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학생들까지도 원자력 발전은 과연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할 정도로요. 학교에서 원전 찬반 토론을 한다는 이야기를 중학생인 저희 아이에게 전해 듣고 놀랐습니다. '너희들이 토론 주제로 삼을 만큼 원자력 발전의 원리와 발전소의 구조, 안전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단 말이야?'라고 물었는데요. 그럴 리가요. 아이들은 그냥 인터넷에 흩어져있는 자료를 '조금' 읽어보고 거기서 얻어진 자신의 의견을 조금 보태어서 설전을 하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찬반 어느 쪽에 설 것인가 며칠 고민하던 아이는 찬성 측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국수력원자력 사이트와 한국원자력연구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해 반대 측을 논파할 수 있는가 시험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교내에서는 신고리 5,6호기에 관한 운명이 결정된 다음날 토론회를 진행했는데요. 결과는 글쎄요. 누가 이겼다 졌다 할 수 없는 수준의 토론이었나 봅니다. 아이는 앞서 말한 양 사이트와 지식백과 등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는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 아니다, 잘만 관리하면 이렇게 좋은 연료가 없다, 만일 원전을 가동 중지한다면 블랙아웃이 되고, 산업이 멈추고, 우리나라가 망한다. 그러므로 원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만, 신재생 에너지와 병행하여 그 기수를 더 이상 늘려서는 안되며 안전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기 때문에 요런 부분에서 안정성 확보가 덜 되었고, 이런 차원에서는 관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기사를 읽고, 원전의 구조도를 보고 내용을 살피고 심지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공의 벌>을 읽어보아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것 밖에, 그러니까 막연한 공포심만 있을 뿐인데 그것으로 아이와 대화를 할 수는 없습니다. 적당한 근거도 없이 네가 알아본 자료는 안전을 강조하기 위해 홍보용으로 내놓은 것이고, 정말 위험한 건 대중에게 숨겼을 거라는 둥, 저거 언론도 그렇고 정치하는 사람도 그렇고 지역 유지도 그렇고 분명 뒷돈 받았을 거라며 증거도 없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안전하다는 원자력 발전소를 어째서 환태평양 조산대 위에 쪼르륵 앉혀놓았냐는 것뿐입니다.
포항의 지진이 있었기에 더욱 불안한데, 우리나라보다 더 심각한 건 정말 불의 고리 위에 원전을 얹어 둔 일본이겠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화석 연료가 거의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적은 비용으로 많은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불가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참 대담한 것 같아요.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유일한 나라 일본이, 원자력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칠 것만 같은데, 마치 원자한테 무슨 죄가 있겠니. 아톰(철완 아톰)은 우리 친구잖아?라는 생각인 건지 원자력 발전소를 씩씩하게 많이도 지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광고량이 많을수록 캐치프레이즈(헤드라인 같은 것)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는 거죠.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늘리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광고를 해댄 겁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이와나미 신서 020 <원전 프로파간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프로파간다라고 하면 어떤 정치적 의도를 띄고 찬동을 얻기 위한 일체의 의사 전달 수단을 말합니다. 광고, 선전 등을 말하는 거죠. 대표적인 프로파간다라면 나치의 그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나치를 선전했듯, 일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원전 안전신화를 국민들에게 세뇌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나도 절대 안전하다고 선전하는 원전 광고는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일까요? 다이어트 약 광고가 사기라면 '이런, 거짓말쟁이!', '미안해'로 끝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체르노빌급 사고가 일어나면 일본은 파멸에 이를 테니 '미안하다'라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애초에 그때는 우리 모두가 이미 죽은 후고, 원전 관계자도 죽은 후일 테니 불만을 토로하는 자도 없고 책임을 질 사람도 없습니다. 원전이 안전하다고 단언하는 학자도, 정치가도, 경영자도, 광고 맨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핵폐기물 문제 하나만 봐도 벌써 위험이 가득한 원전을 이제 모두 폐기해야 합니다. 원전을 가진 채 '밝은 내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밝은 내일은 원전에서부터.
-p.102 (광고비평 주재자 야마노 유키치 씨의 경고 :1987년)
<원전 프로파간다> 저자의 약력이 참 독특합니다. 일본 2대 광고 대행사 하쿠호도에서 약 18년간 영업 담당으로 일하다 퇴직 후, 하쿠호도 근무 당시 손금 보전과 관련된 사기 용의로 체포 및 기소되어 복역했습니다. 출소 후 징역에 관한 책을 내었고, 원전에 관한 책 몇 권을 내었습니다. 사기라니. 책을 읽기도 전에 신뢰가 떨어지는 약력인데 어째서 표지에 적어두었을까 의아했는데요. '원전 신화'를 잠재의식 속에 새기는 방법을 고안하고 언론에도 영향을 미친 일본 광고계 양대 산맥 중 한 곳이었던 하쿠호도에 근무했다는 게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하쿠호도라.. 나루호도...
우리나라의 원자력 마피아와 같은 원자력 무라(村)와 계속 연계하며 광고를 끌어나갔던 것은 덴쓰라는 회사였는데요. 도쿄 전력의 원자력 광고를 거의 도맡았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언론과 권력이 한패가 되어 지속적인 프로파간다를 해 온 것이지요. 언론의 입장도 약간은 이해됩니다. 신문이나 방송국이 먹고사는 건 결국 광고 때문인데요. 원전은 광고료로 1970년대부터 2011년 그날까지 2조 4000억을 사용했습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그 광고비는 당연히 전기료에 포함되어 있었겠죠. 이런 어마어마한 고객을 놓치고서 회사가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당연히 눈 가리고 아웅.
1990년대부터는 광고가 무척 체계적입니다. 가이드라인까지 있어요. 이 정도라면 정말 프로파간다가 맞습니다. 계몽인가 세뇌인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지, 믿을 수 있는 건지.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대처할 방법은 모두 확립되어 있고, 시뮬레이션은 거친 것인지. 영화 <판도라> 같은 상황은 정말 일어나지 않는 건지.
후쿠시마의 농수산물이 이젠 안전하다고 말하며 은근슬쩍 수입하는 그들의 말을 믿어도 좋은 것인지. 원자력 발전소 및 원자력 연구원 인근 주민들은 정말로 안전한 것인지. 마음이 불편해 옵니다.
그렇게 안전하고 필요하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심포지엄에 출연하여 고액의 출연료를 번 연예인이나 안전하다고 주장한 논설위원, 혹은 NUMO의 임원들이 '꼭 제가 사는 곳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손을 드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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